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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주인공
오아볼로 씨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백여 통의 편지를 씁니다. 세상과 담을 쌓은 재소자, 삶을 비관하는 장애인, 방황하는 청소년 등 얼굴은 모르지만 힘들고 고단해하는 사람들에게 한 통, 한 통 정성을 다해 글을 씁니다. 간신히 움직일 수 있는 오른손으로 15년 동안 해 온 일입니다.
교통사고로 하반신 불구가 된 사람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기 전까지는, 그 자신도 죽기보다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태어난 지 3일만에 그의 고통은 시작되었습니다. 18세까지 온몸의 뼈가 부러지는 병명도 알 수 없는 희귀한 병에 시달렸습니다. 한번 뼈가 부러지면 삼사 개월씩 병원 신세를 지다보니 키도 1미터밖에 자라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혼자서는 휠체어조차 탈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이지만 ‘당신은 목발로라도 움직일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남을 위해 살아 보라.’라는 그 사람의 편지를 받아 본 순간 그는 처음으로 삶의 희망을 느꼈습니다. ‘나를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는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 후, 자신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그도 편지를 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어깨의 통증을 참아가며 정성껏 편지를 써서 보내면 많은 사람들이 또 정성껏 답장을 보내옵니다. 하루 평균 30여 통씩 전해오는 답장에는 ‘세상이 미웠는데 이제 새 사람이 되겠다.’는 재소자의 반성과 ‘동생을 바른 길로 인도해 달라.’는 어느 누이의 애원, ‘자살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는데 힘을 얻었다.’는 고교생의 다짐 등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답장을 대할 때마다 그는 힘을 얻습니다. 또한 8년 전 그의 큰사랑에 감동해 결혼을 한 그의 아내 윤선자 씨는 그가 편지를 계속 쓸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불편한 몸으로 백여 통이 넘는 편지를 매일매일 쓰냐고 묻는 말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세상의 주인공입니다. 하루를 살아도 주인공으로 살아야죠.”
의로운 죽음
‘인간에게는 누구나 요구해야 할 최소한의 것이 있다’고 외치던 사람, 이 사회가 인간의 존엄한 권리를 내팽개치고 있음을 괴로워 한 사람, 다른 이들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몸으로 싸우다 사라져 간 사람, 그가 바로 전태일 열사입니다.
전태일은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이 땅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평생을 가난 속에서 살아야 했으며, 한 번도 주린 배를 만족하게 채운 적이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에 중퇴하고 구두 닦기, 신문팔이, 손수레 뒤밀이, 아이스케이크 장수, 우산 장수 등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온갖 고생을 다했습니다.
그러다가 태일은 평화시장에서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2년 동안 열심히 일하여 마침내 재단사가 된 그는 그런 대로 생활의 시름을 잊을만했습니다. 그러던 중 태일은 19세의 미싱사 처녀가 폐병으로 시뻘건 피를 토해 내고, 그리고 병자라는 이유로 그녀가 해고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태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인간다운 세상의 건설을 위해 헌신할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재단사 친구들을 모아 바보회를 조직하고 밤에는 한자투성이의 근로기준법과 씨름을 해 나갔습니다. 그는 근로기준법이 8시간 근무, 미성년․여성 노동자에 대한 보호 등의 규정이 있음을 알아내고 뛸 듯이 기뻤습니다. 이제 평화시장 여공들의 비참한 생활을 알리기만 하면 모든 비인간적인 조건들이 개선될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서류를 들고 관할 구청과 언론에 호소했을 때 세상은 꿈적도 하지 않았습니다. 현실의 냉혹한 벽은 너무나 두터웠습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을 던져 세상을 일깨우기로 결심했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고 외치며 전태일의 몸은 불덩어리로 변했습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숯덩이가 되면서도 그는 힘주어 외쳤습니다. 그의 분신으로 얼어붙었던 이 땅의 노동 운동은 새롭게 출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스피린 한 병
이탈리아의 한 시골에 열세 살 먹은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어느 날 슈바이처 박사의 의료 선교에 대한 책을 읽고 크게 감동하여 그의 일을 돕기 위해 무엇인가 조그만 일이라도 하나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생각 끝에 그 소년은 공군 사령관에게 아스피린 한 병을 보내면서, 부대의 비행기가 슈바이처 박사의 정글 병원을 지나가게 될 때 그것을 낙하산으로 투하할 수 있는 지를 물었습니다. 사령관은 소년의 아름다운 마음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이 편지를 방송국으로 보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이탈리아의 많은 국민들이 다투어 의약품을 보내 와서 무려 40만 달러 어치의 의료용품이 모였습니다.
한 소년의 착한 마음씨가 큰 일을 해 낸 것입니다.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의사들만의 몫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아무리 작아도 이내 더 큰 사랑을 불러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남보다 먼저 사랑하기는 어려워하지만, 누군가 사랑의 불을 지피면 곧 함께 타오를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을 생각하고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거창한 일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물질적인 어떤 것이어야 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 소년의 경우와 같이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는 인간애가 오늘의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큰일과 작은 일
숲 속의 동물들이 곰을 우두머리로 하는 쪽과 사자를 우두머리로 하는 쪽으로 갈라졌습니다. 곰이 우두머리인 쪽은 늑대와 여우가 대장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싸움이 일어날 때마다 승리를 거두는 데 언제나 큰 공을 세웠습니다.
어느 새 곰은 나이가 들어 후계자를 뽑아야 했습니다. 제일 유력한 후계자는 당연히 늑대와 여우였습니다. 여우는 왕의 자리에 오르려고 경쟁자인 늑대를 끊임없이 비난하며 다녔습니다.
“나는 우리가 적에게서 승리를 거두는 데에 큰 몫을 해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일을 할 것이다. 하지만 늑대는 말주변으로만 왕의 환심을 사려는 간사한 놈이다.”
어느 날 늑대는 부하인 원숭이와 길을 가다가 여우가 오는 것을 보고 급히 나무 뒤로 숨었습니다. 이를 본 원숭이는 늑대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늑대님께서는 저 여우보다 힘이 세고 더 똑똑하신데 어찌 그를 두려워 피하십니까?”
그러자 늑대는 원숭이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못났다 하더라도 여우를 왜 피하겠느냐. 적들이 함부로 우리를 공격하지 못하는 것은 여우와 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둘이 싸워서 서로 해를 입는다면 우리들을 지켜 줄 이가 누가 있겠느냐? 내가 여우를 피하는 것은 사적인 감정보다 공적인 일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오랜 옛날 서양에 철학자가 한 명 살고 있었습니다. 그 철학자는 아주 먼 나라에까지 이름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으러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찾아와서 “선생님, ‘사람’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 철학자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습니다.
“사람이란 두 발로 걸어다니는 동물이다.”
그 말을 듣고 젊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젊은이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는 닭을 한 마리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이놈도 두 발로 걸어다니는데, 그러면 이 닭도 사람입니까?”
철학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습니다. “사람이란 두 발로 걸어다니면서 날개가 없는 동물이다!” 그 말을 듣고 젊은이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습니다. 다음 날, 젊은이는 고릴라를 데려왔습니다.
“선생님, 이 놈은 두 발로 걸어다니면서 날개도 없는데, 그러면 고릴라도 사람입니까?” 철학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습니다. “사람이란 두 발로 걸어다니면서 날개가 없으며, 또 털도 없는 동물이다!” 그 말을 듣고 젊은이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습니다.
다음 날 젊은이는 고릴라의 털을 면도칼로 빡빡 밀어 가지고 다시 왔습니다.
“선생님, 이 놈은 두 발로 걸어다니면서, 날개가 없으며, 또 털도 없습니다. 이 놈은 사람입니까?” 철학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자네는 참 영리한 친구로구먼 이제 내가 사람이란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해 주지. 사람이란 바로 자네처럼 생각하는 동물이라네.”
내일은 없습니다
어느 이발소에 “내일은 공짜로 이발을 해 드립니다.”라는 글이 씌어져 있었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공짜 이발을 하려고 벼르고 있다가 다음 날 가서 이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발을 하고 ‘공짜로 이발해 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후, 막 나오려고 하는 손님들을 향해 주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손님들, 왜 돈을 주지 않고 가려고 하십니까?”
깜짝 놀란 손님들은 “아니 이발을 공짜로 해 준다고 해서 들어왔는데요! 왜 돈을 받습니까? 참 이상하네?” 하고 한 마디씩 말하면서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말합니다. “어디에 ‘공짜’라고 되어 있습니까?”
손님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내일은 공짜로 이발을 해 드립니다”라고 씌어져 있는 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습니다. “보세요. 여기 ‘공짜’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또 주인은 “어디에 ‘공짜’라고 되어 있습니까? 내일은 공짜로 해 드린다고 했지요.”
“나는 어제 이 글을 보았단 말이요. 그러니 오늘은 공짜가 아닙니까?”
“그러나 이 글은 오늘도 여전히 내일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언제 오면 공짜입니까?”
“내일 오시면 공짜로 해 드립니다.”
“그러면 영원히 내일은 없는 것 아닙니까?”
“물론입니다.”
작은 시작
여러분은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까? 이 영화는 히틀러의 유태인 말살 정책이 한참 진행 중이던 시대를 배경으로 전개됩니다.
사업가 쉰들러는 유태인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으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수용소내의 유태인들이 무차별 학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 이후로 유태인들을 그의 공장으로 끌어들일 계획을 세웁니다. 명분은 공장의 인부로 고용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들을 보호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마침내 수용소와 협상하여 한 명당 가격을 정하고 1,200명을 인수합니다. 쉰들러는 공장을 운영하며 여러 번 파산 위기를 맞지만 공장의 파산은 곧 유태인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쉰들러는 악착같이 공장의 유지에 노력합니다.
다행히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고 유태인들은 목숨을 보존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지난 일들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의 감정이 폭발한 듯 쉰들러는 소리치며 절규합니다. “나에게 돈이 좀 더 많았더라면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내 차를 팔았더라면 열 명은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내 반지를 팔았더라면 두 명은 더······.”
“한 생명을 구한 자가 온 세계를 구하는 것이다.” 이 말로써 유태인들은 쉰들러에게 감사와 위로의 뜻을 표합니다.
쉰들러가 사업가로서 그렇게 갈망했던 돈을 포기하고 인간을 선택한 것은 휴머니스트의 소신도, 의도된 행동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선의 자연스러운 발현이었습니다. 현재 쉰들러의 후손(유태인)은 6,000여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구하지 못하여 절규한 쉰들러의 인간 정신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소년의 병간호
부슬비가 내리는 날, 한 소년이 나폴리에 있는 자선 병원을 찾아 왔습니다. 일자리를 구하러 떠난 아버지가 나폴리에서 갑자기 병에 걸려 입원했다는 편지를 받고 병간호를 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간호사는 아버지가 닷새 전쯤 외국에서 돌아온 노동자란 말을 듣고 소년을 4호실 환자에게로 안내하였습니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얼굴이 퉁퉁 부은 채 누워 있는 아버지를 본 소년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예전의 아버지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날부터 소년은 자신조차 몰라보는 아버지를 위하여 정성껏 간호를 하였으나 아버지는 안타깝게도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닷새째 되는 날 오후, 소년이 아버지 곁에서 병간호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간호사 아가씨, 그 동안 신세 많이 졌어.”하는 낯익은 목소리에 소년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목소리였기 때문입니다. 그 때 병실 문이 열리면서 “저 분이 바로 당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사람입니다.”라는 간호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병실로 들어서던 아버지는 침대 옆에 않아 있는 아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소년은 그 동안 간호사의 실수로 인해 다른 사람을 간호해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만난 소년은 곁에 있는 환자를 두고 차마 발걸음을 떼 놓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 먼저 집으로 돌아가세요.”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소년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전보다 더욱 열심히 환자를 간호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아버지가 병원을 떠난 지 이틀째 되는 날, 밤새 괴로워하던 그 환자는 마지막 순간 소년을 향해 힘없이 미소짓고는 눈을 감았습니다.
소년은 쓸쓸한 마음으로 창가에 꽂혀 있던 제비꽃 한 다발을 환자의 손에 쥐여 준 뒤 병원을 나섰습니다. 소년의 등뒤로 새벽별들이 마지막 빛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비발디의 선율
우리 속담에 잘되면 내 탓,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목수가 연장 나무란다는 말도 있습니다. 외부 환경보다는 인간의 능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계적인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비발디가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연주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세상에서 최고라고 알려진 바이올린이었기에 콘서트홀은 초만원을 이루었습니다.
이윽고 연주가 시작되었고, 청중들은 비발디의 선율에 빠져들었습니다.
청중들은 ‘역시 악기가 좋으니까, 저렇게 멋진 소리가 나는구나!’ 라고 하며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발디가 연주를 멈추더니 바이올린을 높이 들어 바닥에 내리치는 게 아니겠습니까?
산산이 부서진 바이올린.
청중들은 모두 놀라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때 사회자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저것은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아닙니다. 싸구려 바이올린입니다. 비발디 선생이 바이올린을 깨뜨린 이유는 참된 음악이란 악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걸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두 개의 다른 텔렉스
두 사람의 세일즈맨이 아프리카로 출장을 갔습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신발을 그곳에 수출하기 위해서 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기가 막힌 일이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모두가 신발을 신지 않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발을 수출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고민했습니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두 사람은 다른 나라들을 돌아다녀 보기로 했습니다. 이곳 저곳을 돌아다닌 끝에 두 사람은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한국에 있는 본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텔렉스를 보냈습니다.
한 사람의 텔렉스 내용은 당연히 이렇게 적혀져 있었습니다.
“신발 수출 불가능. 가능성 0%. 전원 맨발임.”
아프리카 사람들은 맨발로 살고 있다. 그들은 신발을 사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신발 수출은 불가능하다고 본 이 사람의 생각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의 텔렉스 내용은 이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황금 시장. 가능성 100%. 전원 맨발임”
정말로 기막힌 시각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일한 근거를 가지고도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오게네스의 침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느끼고 생각한 것을 그대로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그야말로 거지와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디오게네스에 얽힌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만 다음 이야기는 그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어느 날, 그 동네의 벼락부자가 디오게네스의 명성을 듣고,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벼락부자의 집은 졸부답게 입구에서부터 온통 값비싼 대리석으로 번쩍거렸습니다. 벼락부자는 디오게네스에게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집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디오게네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퉤.” 하고 벼락부자의 얼굴에 침을 뱉어버렸습니다. 철학자의 이 어이없는 행동에 놀라 당황해하는 부자에게 디오게네스는 말했습니다.
“그대의 집과 정원은 정말로 훌륭하네. 이렇게 아름답고 깨끗한 집에서 내가 침을 뱉을 곳이란 자네 얼굴밖에 없었네. 거만과 탐욕으로 가득 찬 자네의 얼굴이 곧 쓰레기통이니까.”
두 여인
두 여인이 한 성자를 찾아왔습니다. 한 여인은 울면서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저는 배가 너무 고파 옆집 쌀을 훔쳤어요.”
그러자 다른 여인은
“제가 왜 여기에 왔는지 저 자신도 모르겠어요.”라고 하면서 자신은 단지 친구가 성자를 찾아 뵙기 부끄럽다고 해서 함께 따라왔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고백할 죄가 없다고 했습니다.
성자는 죄를 고백한 여인에게는 큰 돌을 하나 집어 오라고 하고, 죄를 짓지 않았다는 여인에게는 조약돌을 여러 개 집어 오라고 했습니다. 여인들이 시킨 대로 하자, 이번에는 돌을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여인은 큰 돌이 있던 자리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지만, 두 번째 여인은 작은 조약돌들의 위치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성자가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짓는 ‘큰 죄’는 쉽게 알 수 있지만, 생활 속에서 짓는 ‘작은 죄들’은 우리가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법입니다.”
숫자 놀이
옛날 어느 경상도 고을에 숫자로만 말하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만나면 “밥을 몇 그릇 먹었니?”라고 인사하고, 저녁에 만나면 “오늘 돈을 얼마나 벌었니?”라든가, “오늘 만난 사람은 모두 몇 명이니?” 라고 묻곤 했습니다.
친척집에 놀러 온 아이들에게는 “너 몇 살이니?”, “체중은 얼마나 나가니?”, “키는 얼마지?”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숫자와 관련지어 질문하곤 했습니다. 동네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을 때도 사람들은 “이제 이 동네에는 189명이 남았구나.”라는 말만 할 뿐 슬퍼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큰 홍수가 나서 마을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거나 집이 물에 잠기는 큰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 때도 사람들은 ‘몇 명이 죽었느니, 재산 피해가 얼마나 났느니’ 하면서 숫자 계산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신(神)께서는 숫자를 잊어버릴 수 있는 묘약을 내려보내기로 했습니다. 그 묘약은 바로 ‘사랑’이라는 약(藥)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면 눈이 멀어진다고 합니다.
최상의 약
남아프리카의 어느 고아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고아원 어린이들이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고 있었답니다. 유엔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의사들을 선발해서 그 고아원으로 보내게 되었지요.
의사들은 병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을 해 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들은 정신적인 문제가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뚜렷한 원인이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역시 의사들의 생각은 옳았습니다. 그 고아원에서는 아이들을 먹이고 재우고 할 뿐, 우리들의 가정에서 볼 수 있는 사랑이 없었지요. 드디어 의사들의 처방이 내려졌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안아 주고 키스해 주고 귀여워해 줄 것.”
의사들의 처방대로 아이들을 대하자 아이들은 금세 원기를 회복하고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청어잡이
영국의 북해에서 청어잡이를 하는 어부들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북해에서 잡은 청어를 런던까지 산 채로 운반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잡은 청어들은 런던에 도착하는 동안에 거의 다 죽어서 번번이 제 값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어부만은 청어를 죽이지 않고 산 채로 가져와서 큰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동료들은 그 비결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 비결을 물어 보았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 어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비결이랄 게 뭐 있는가. 난 그저 청어가 들어 있는 통에 청어를 잡아먹는 물고기 한 마리를 집어넣었지. 그렇게 하면, 몇 마리는 잡혀 먹히겠지만 다른 수백 마리의 청어는 잡혀 먹히지 않으려고 계속 도망을 다니거든. 아, 그러니 그놈들이 런던에 도착해서도 싱싱하지 않고 배길 수 있나?”
섭씨 13도의 냉동 화차
소련 철도국에 근무하는 한 직원이 실수로 냉동 화차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빠져 나오려고 해도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소리를 질러도, 문을 두드려도 모두 헛일이었습니다. 이제 희망이란 누군가 우연히 그 냉동 화차의 문을 열어 주는 것뿐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사람은 희망을 버리고 자포자기가 되어 갔습니다. 드디어 몸이 저려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죽음이 다가옴을 느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자기의 상태를 벽에다 기록해 나갔습니다.
‘몸이 점점 차가워진다. 춥다. 그러나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몸이 얼어옴을 느낀다. 나는 몽롱해진다. 아마도 이것이 마지막일런지 모른다. 제발 누가 나를 도와주었으면.’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다른 직원이 화차의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이미 싸늘하게 식은 시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냉동 화차는 오래 전부터 고장이 나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냉동 화차의 실내 온도는 섭씨 13도에 불과했으며, 공기도 충분했다고 합니다.
자기만 보이는 거울
가난한 유태인 한 사람이 랍비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랍비님, 제게는 40년 동안이나 가깝게 지낸 죽마고우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대한 유산이 굴러 들어온 후부터 그 친구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길에서 만나도 인사는커녕 나 같은 사람은 전혀 모르는 체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글세,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랍비는 길게 난 수염을 쓰다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이리로 오게. 창 밖을 보게나. 무엇이 보이지?”
유태인 남자가 대답했습니다. “나무가 보입니다. 나무 한 그루가 더 보입니다. 아이들이 놀고 있군요. 남자들이 모여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그러면 이번에는 이 거울 앞에 서서 거울 안을 들여다보게나. 무엇이 보이지?”
“저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것이라네. 사람이 돈을 가지고 있지 않은 동안은 창 밖을 내다보는 것과 같이 무엇이나 잘 보이지만, 웬만큼의 돈을 가지게 되면 유리 뒤에 은을 바른 것과 같이 자기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라네.”
나와 우리
두 사람이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오솔길에서 값비싼 보석이 가득 든 보따리를 주웠습니다. 옆에 있던 친구는 기뻐하며, “우리가 이렇게 귀한 것을 주웠으니 남은 여행은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겠군.”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보따리를 주운 친구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습니다.
“우리라니? 언제 자네가 이 보따리를 주웠나? 자넨 괜히 기분 좋아할 일이 없을 텐데…….”
얼마쯤 더 걸어가고 있을 때, 뒤쪽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돌아보니 많은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그들을 향해 오고 있었습니다.
“도둑이야! 우리 보물을 훔쳐 간 도둑들이 저기 간다. 빨리 저놈을 잡아서 혼내 주자.”
두 사람이 보석을 훔친 것은 아니었지만 붙잡히면 도둑으로 몰려 혼이 날 것 같아 있는 힘을 다해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강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도망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보따리를 주운 사람이 말했습니다.
“아, 이제 우리는 끝장이야. 우린 이제 꼼짝없이 저들에게 잡혀 혼이 날거야.”
그러자 이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사람이 말했습니다.
“우리라니? 자네가 끝장이지. 보따리를 주운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자네 아닌가?”
판사 라과디어
뉴욕에 가면 ‘헨리 라과디어’라고 하는 시장의 이름을 따서 지은 공항이 있다고 합니다. 다음 얘기는 라과이어라는 사람이 시장이 되기 전, 그러니까 뉴욕시의 야간 판사로 있을 때의 일화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 밤, 남의 물건을 훔친 죄로 한 노인이 라과디어 판사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판사는 의례적으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무엇을 훔쳤습니까?”
“빵 한 덩어리를 훔쳤습니다.”
“왜 훔쳤습니까?”
“배는 고픈데 수중에 돈 한 푼도 없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말을 끝마친 노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에게는 집도 없고 자식도 없고, 그리고 며칠 째 굶주렸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것 등을 상세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잠시 후 라과디어 판사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할아버지, 법은 법입니다. 제겐 법 그대로 시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할아버지께 10불의 벌금형을 내리겠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든 저를 비롯해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벌금형을 내리겠습니다. 따라서 저는 10불, 그리고 이 재판정에 참석한 여러분은 모두 5불씩 내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무게
나무 아래에서 석가모니가 바르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아귀(餓鬼-늘 배고픈 귀신)에게 쫓기던 비둘기 한 마리가 그의 품안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석가모니는 비둘기를 감싸안고 내놓지 않았다.
“난 배가 고파서 미치겠오. 내 먹이를 빨리 내놓으시오.”
아귀는 텅 빈 배를 가리키며 울부짖었다. 석가모니는 고개를 저었다.
“이 가련한 비둘기의 생명을 내팽개칠 수 없다. 차라리 비둘기 무게만큼 내 살점을 베어가라.”
아귀는 양쪽에서 무게를 달 수 있는 천칭저울을 가져왔다. 석가모니는 넓적다리 살점을 베어 올려놓았다. 한쪽엔 비둘기가 한쪽엔 살점이 올라간 저울은 비둘기 쪽으로 기울었다.
석가모니는 피를 흘리면서도 살점을 더 베어냈다. 그래도 비둘기 쪽이 더 무거웠다. 분명 비둘기 무게 이상의 살을 떼어냈음에도 저울은 비둘기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석가모니는 벌떡 일어나 저울 위에 ( )을 올려놓았다. 그때서야 저울은 평형을 이루었다. 홀연 아귀는 그 자취를 감추었고,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리며 꽃이 휘날렸다. 석가모니는 진리를 깨친 것이다.
하버드대 행복학 강의 해피어 - 탈 벤 샤하르
지속적인 행복을 얻으려면 원하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여행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행복은 산의 정상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고 산 주위를 목적 없이 배회하는 것도 아니다. 행복이란 산의 정상을 올라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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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샤하르 교수의 행복 6계명
1. 인간적인 감정을 허락하라
두려움, 슬픔, 불안 등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극복하기가 쉬워진다.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면 좌절과 불행으로 이어진다.
2. 행복은 즐거움과 의미가 만나는 곳에 있다
직장과 가정에서 삶에 의미를 주면서 즐거움도 느낄 수 있는 활동을 하라.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행복촉진제’를 만들어 실천에 옮겨보라.
3. 행복은 사회적 지위나 통장잔고가 아닌 마음먹기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말라
행복은 우리가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실패를 재앙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배움의 기회로 생각할 수도 있다.
4. 단순하게 살라
우리는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데 일은 점점 더 많이 하려고 욕심을 부리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고 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일을 하다 보면 행복을 놓칠 수 있다.
5. 몸과 마음이 하나라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가 몸으로 하는 것, 또는 하지 않는 것은 마음에도 영향을 준다.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충분히 자고 건강한 식습관을 유지하면 몸도 마음도 건강해진다.
6.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감사를 표현하라
우리는 종종 우리의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사람에서 음식까지, 자연에서 미소까지, 우리 인생의 좋은 것들을 음미하고 감사하는 법을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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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질 높은 삶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삶의 조건들을 충족시켜 나가는 그 과정과 결과로 인한 만족감이 내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를 결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삶의 조건들의 충족은 인간의 욕구와 욕망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의 욕구와 욕망은 무엇일까요?
늙은 항해사
한 젊은 교수가 뱃길로 먼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많은 공부를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경험은 적었다. 그와 함께 간 승무원 가운데는 글을 읽지 못하는 노인이 있었다. 이 늙은 항해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매일 저녁 젊은 교수의 방을 찾아가곤 했다. 노인은 젊은 교수의 학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어느 날 저녁, 대화가 끝나고 돌아갈 때 교수는 물었다.
“당신은 지리학을 공부했습니까?”
“그것이 무엇인데요?”
“지구에 관한 학문입니다.”
“아니오, 나는 학교나 대학에 다녀 본 적도 없고 무엇을 공부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인생의 4분의 1을 놓쳤군요.”
항해사는 우울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처럼 많이 배운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틀림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인생의 4분의 1을 낭비했다.’
다음 날 저녁 다시 젊은 교수는 항해사에게 물었다.
“당신은 해양학을 공부했습니까?”
“그것이 무엇인데요?”
“바다에 관한 학문이지요.”
“아니오, 공부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당신은 인생의 반을 낭비했습니다.”
항해사는 더욱 우울해져 돌아갔다. ‘나는 인생의 반을 낭비했다.’
그 다음날도 이 젊은 교수는 다시 물었다.
“당신은 기상학을 공부했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들어 본 적도 없어요.”
“왜 있잖아요. 바람, 비, 날씨 등을 연구하는 학문 말입니다.”
“아니오. 내가 당신에게 말한 것처럼 나는 학교를 다녀 본 적이 없어요. 나는 그 무엇을 공부해 본 적이 없어요.”
“당신은 지구에 살면서 지라학을 공부하지 않았고, 당신 삶의 터전인 바다에 관해 공부하지 않았으며, 매일 접하는 날씨에 대하여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인생의 4분의 3을 낭비했습니다.”
늙은 항해사는 매우 슬펐다. ‘이 학자는 내가 인생의 4분의 3을 낭비했다고 말한다. 정말 나는 인생의 4분의 3을 낭비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다음 날은 항해사가 질문을 했다. 그는 젊은 교수의 방에 달려가서 외쳤다.
“교수님 당신은 수영법을 공부했습니까?”
“수영법, 무슨 말입니까?”
“헤엄을 칠 수 있냐고요.”
“아니오, 나는 수영하는 법을 모릅니다.”
“교수님, 당신은 인생의 전부를 낭비했어요! 배가 암초에 부딪혀 가라앉으면 헤엄칠 수 있는 사람은 가까운 해안으로 헤엄쳐 갈 수 있으나 헤엄치지 못하는 사람은 익사해 버립니다. 미안하지만 교수님은 인생의 전부를 낭비했습니다.”
누구나 세계의 모든 학문을 공부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헤엄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그 공부는 쓸모가 없다. 우리는 수영에 관하여 논쟁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 속에 직접 뛰어들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수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생각함을 멈추지 말자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은 상황이나 타인의 영향을 받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결정과 판단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각함이 중요한 이유는 바르고 현명한 선택을 위한 출발이기 때문일 것이다.
Who am I
‘지금은 공부해야 한다’는 면죄부
우리나라 학생들 대부분의 하루 일과는 새벽에서 새벽까지입니다. 꼭두새벽 0교시 수업으로 시작해서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학원 수업과 자율 학습, 아마 학습량으로 따진다면 공부벌레로 유명한 하버드 대학생들보다 많을 겁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까스로 일어나 지각하지 않으려고 헐레벌떡 뛰면서 시작하는 하루, 수업 시간 내내 졸다가 정신 차릴 만하면 시작되는 학원 수업…….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낙이라곤 컴퓨터 게임과 채팅 정도일 뿐.
지칠 대로 지치고 너무도 비능률적인 일과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습니다. 경쟁에서 뒤질까 무섭고, 부모님의 안타까운 눈빛도 두렵습니다.
그러다 가끔은 철학자 같은 질문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왜 공부를 해야 하는 걸까?”
“내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지만 질문도 잠깐, 곧 잊어버리고는 급한 대로 흘러가는 일상의 흐름에 몸을 맡깁니다. 부모님 말씀대로 다 잘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라고, 그런 질문은 대학 가서 하고 지금은 공부해야 할 때라고 스스로에게 답을 던지며 위안 삼습니다. 어찌 보면 이 땅의 청소년들은 참 속 편합니다. 심각한 고민은 모두 ‘나중에’해도 되니까요. ‘지금은 공부해야 한다’는 진리는 어떤 고민에도 통하는 면죄부인 셈입니다.
레밍 이야기
북유럽에는 ‘레밍’이라는 들쥐들이 삽니다. 이 쥐들은 일 년에 한 차례식 ‘죽음의 질주’를 벌입니다. 무리지어 하루 종일 뛰어다니다가 절벽까지 이르러선 멈추지 못하고 떨어져 대부분 죽고 말지요.
왜 이렇게 뛸까요?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어느 날 무리 앞쪽의 쥐들이 우연히 뛰기 시작합니다. 쥐는 본디 떼를 지어 사는 동물입니다. 앞의 쥐들이 뛰면 뒤의 쥐들도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따라 뛰지요. 이런 식으로, 무리가 수천 마리 정도 될 때는 앞의 쥐들이 왜 뛰는지도 모르면서 다른 쥐들도 덩달아 뜁니다. 거꾸로 앞의 놈들은 다른 쥐들이 너무도 맹렬히 달려오니까 두려워서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그럴수록 뒷놈들은 따라붙으려 더 결사적으로 속도를 내고……. 결국 이 황당한 질주는 절벽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장소에 이르러서야 끝을 맺습니다. 돌아오는 결과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허무와 죽음이구요. 참 바보 같지요?
‘~카더라’에 끌려다니는 인생
이 이야기를 들으며 별 생각 없이 웃는 친구가 있다면 한 번쯤 심각하게 고민해 보십시오. 사실 이것은 학자들이 ‘레밍의 딜레마(Lemming's Dilemma)'라 일컫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경쟁 자체에 몰두한 나머지, 정작 왜 이겨야 하는지는 잊어버린 경우를 비꼬는 말이지요.
실제로 레밍은 바로 내 모습일 수 있습니다. 공부를 왜 하는지에 대한 의문없이 남들도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입니다. 의대, 법대가 왜 좋은지에 대한 생각 없이, 돈 잘 버는 듯싶고 어른들도 원하니까 가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루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있어도 될까 말까 한 지경인데, 그냥 ‘~카더라’식의 막연한 기대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삶의 목표를 정해 버린 꼴입니다. 이러니 치열하게 사는 것 같아도 그 속은 늘 비어 있을 수밖에요.
‘나는 왜 공부를 해야 할까?’, ‘내가 원하는 인생은 어떤 것일까?’와 같은 의문은 나중에 대학 가서 해도 되는 물음이 아닙니다. 또 의미없이 뜬구름 잡는 질문도 아닙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자기 나름의 확답이 없다면 모든 노력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원하는 것이 확실하지 않다면 열심히 노력할 이유도 없습니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떠밀고, 정작 인생의 주인인 자신은 떠밀려 가는 괴로운 삶은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또한 진정 원하는 것을 잘 모르면서도 안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번 시험 몇 등 상승’을 목표로 10여 년을 열심히 살아왔지만 정작 인생의 주인인 자신은 떠밀려 가는 괴로운 삶은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또한 진정 원하는 것을 잘 모르면서도 안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번 시험 몇 등 상승’을 목표로 10여 년을 열심히 살아왔지만 정작 대학 입학 원서를 쓰는 순간에는 무슨 과를 가야 할지 전혀 모르는 경우, 그래서 남들이 좋다는 과를 별 생각 없이 지원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제 우리가 ‘나는 누구인가?(Who am I ?)’를 물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해졌습니다. 이 질문은 결코 ‘대학 가서’, ‘나중에’ 해도 되는 질문이 아닙니다. 내 소중한 삶이 ‘모래 위에 성 쌓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주변에 치이지 않고 정말 스스로 치열하게 공부에 매달리기 위해서는, 내가 사는 이유와 내가 원하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물학교 우화
동물들이 모여 학교를 만들었다. 1교시 나무타기, 2교시 땅파기, 3교시 달리기, 4교시 날기였다. “1번 사슴 학생 나무타기 시작!”
그러나 사슴은 나무를 탈 수 없었다. 몇 번 나무에서 떨어지다 결국 뒷다리에 이상이 생겼다. 그는 10점을 받았다. 2변은 참새였다. 참새는 몸이 가볍기 때문에 사슴보다는 쉽게 나무를 탔다. 그러나 그는 속으로 ‘날갯짓으로 나무를 오르면 더 쉬운데...’하고 생각했다. 이번엔 두더지였다. 그는 눈이 어두워 다리를 헛디뎌 떨어져 심하게 다쳤다. 곰은 쉽게 타서 100점을 받았다.
2교시는 땅파기였다. 사슴은 땅을 파느라고 약한 앞발이 부러질 정도였다. 참새는 날개가 부러졌다. 곰은 못 하겠다가고 반항을 하다가 혼만 났다. 두더지는 100점을 받았다.
3교시는 달리기였다. 사슴은 잘 달렸으나 다쳤기 때문에 곰에게 뒤졌다. 곰은 60점, 두더지는 20점, 참새도 20점을 받았다.
이번에는 날기였다. 선생님은 제일 높은 절벽으로 모두 데려갔다. 참새를 제외한 모두는 벌벌 떨었다. 두렵긴 했지만 혹시 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곤 한꺼번에 뛰어내렸다. 불행히도 그들 모두는 날지 못했다. 제일 무거운 곰은 땅을 그대로 들이받아 머리가 깨졌다. 사슴은 뿔과 네 다리가 모두 부러졌다. 두더지는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땅에 처박혀 허리가 절단이 났다. 참새는 땅파기 때 날개가 부러졌기 때문에 얼마 날지 못하고 땅으로 내리 꽂혔다.
동물들은 모여, 학교는 만들 것이 못 된다는 의견을 내놓는 등 갑론을박하다 교육 목표와 방법을 재조정하자는 의견으로 모아졌다. 교육 목표는 각 동물들에게 숨겨진 재능을 최대로 발휘하도록 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또한 교육 방법도 획일적이거나 기계적인 방법을 피하고 그들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후로 동물 학교는 점점 필요한 곳이 되어 갔다. 참새는 나는 방법을, 곰은 나무를 쉽게 타는 방법을, 사슴은 달리는 방법을 연구해서 더 잘 하게 되었다.
나다운 게 가장 좋아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장점보다는 단점에 주목하곤 합니다.
“너는 수학은 최고인데, 사람 사귀는 능력은 형편없어.”
“그림만 잘 그리면 뭐해? 국영수 성적은 엉망인걸!”
부족한 점을 메우는 데 온 힘을 쏟느라, 정작 자신의 장점에는 소홀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본디 잘하던 일에도 소질을 잃어버리고, 장점도 없고 단점도 없는 ‘그저 그런 아이’로 학교 문을 나서기 일쑤입니다.
어떤 분야에서 최고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골프 천재 타이거 우즈를 예로 들어 볼까요? 타이거 우즈는 공을 멀리 보내는 데는 세계 최고입니다. 그러나 벙커에 빠진 공을 빼내는 기술은 어지간한 선수들보다도 못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즈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부족한 점을 보완하려 하기보다 자신의 장기인 공 멀리 보내기를 더 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자신의 장점은 묻어 버리고 단점만 열심히 찾아 내려하고 있지는 않나요? 성공하는 삶을 위해서는 부족한 점을 메우는 것보다 잘 하는 능력을 더욱 개발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지 않을까요?
‘있는 그래로’의 나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나만의 장점을 먼저 찾아봅시다. 내게는 과연 어떤 뛰어난 점이 있나요? 누군가가 나를 미래의 주역으로 키우려 한다면 나의 어떤 모습에 주목해야 할까요?
단점 같은 장점, 장점 같은 단점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한 아인슈타인은 학창 시절에 덜 떨어진 학생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심지어 고등학교 때 어떤 선생님은 “이렇게 우둔한 학생은 처음본다.”고 넌덜머리를 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뻔한 내용도 이해를 못해서 수십 번씩 물어 보는데다가 흥미 있는 일이 있으면 다른 일은 다 제쳐놓고 그것에만 몰두했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은 결국 학교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그렇지만 이런 그의 ‘단점’은 사실 ‘장점’이었습니다. 남들은 당연한 사실로 보아 지나치는 것을 뒤집어 보아 새로운 의문을 제기하는 능력, 한 주제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집요함 때문에, 학교에서는 열등생이었던 그가 인류 최고의 물리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자! 그러면 이제 나의 단점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봅시다. 내게는 아인슈타인처럼 ‘단점 같은 장점’이 없을까요? 거꾸로, 그동안 주변 사람들이 나의 장점이라고 칭찬했지만 사실은 단점일 뿐인 것은 없나요?
내 인생의 나침반
‘왕쪼잔 맨’에서 ‘친절 대범 맨’으로
훌륭한 타자는 상대 투수한테 집중 견제를 받기 마련입니다. 투수들은 이들에게 좀처럼 좋은 공을 던져 주지 않습니다. 때로는 빈볼(몸에 맞는 공)로 위협하기도 하고, 일부러 공을 던지지 않고 질질 시간을 끌어서 감정을 상하게도 합니다.
그러나 훌륭한 타자는 좀처럼 이러한 견제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타석에 들어선 목적은 ‘공을 잘쳐서 살아 나가는 것’입니다. 투수와 벌이는 기 싸움, 관중의 외침 같은 것에 흔들리면 안 되지요.
반면, 성적이 좋지 않거나 훈련을 많이 하지 않은 선수는 쉽게 흥분해서 ‘공을 잘 쳐서 살아 나가는 것’이라는 타자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상대 선수에게 주먹질을 하거나, 관중에게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곤 합니다. 그 결과, 심리전에 말려들거나 경고를 받아 공을 잘 치지 못하고 맙니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사소한 일에 흔들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목표가 없거나 흐리멍텅한 사람은 일상의 자잘한 사건에 크게 흔들리는 삶을 삽니다.
왕쪼잔 맨이냐 친절 대범 맨이냐
삶의 목표가 없는 사람은 이렇습니다.
첫째, 사소한 일에 쉽게 화를 내고 좌절합니다.
컴퓨터 게임이나 동네 축구 같은 작은 일에도 목숨을 걸곤 하지요. 그래서 정작 꼭 해야 할 일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쓸데없이 바쁘게 허둥거려요.
둘째, 늘 허전하고 의존적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지나치게 신경 쓰고, 친구들이 외면하면 불안해하고 어쩔 줄을 모릅니다.
셋째, ‘~ 때문에 못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자기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꼭 하고 싶은 일도 없습니다. 장애물이 있으면 넘기는 커녕, 자신이 왜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는가를 설명하는 데만 정신을 쏟습니다. 언제나 자신이 이룰 수 있는 일보다 이룰 수 없는 일을 바라고 이를 부러워하면서 좌절합니다.
“쟤처럼 머리가 좋았다면 나도 일등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부모님이 너무 완고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이들이 바로 ‘왕쪼잔 맨’입니다.
반면, 목표가 분명한 사람의 삶은 어떨까요?
첫째,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고 대범합니다.
자신이 이루어야 할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에 사소한 일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며, 지금의 일이 그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늘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독립적이며 친절합니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이 확고하게 정해져 있으므로 언제나 독립적이며 다른 사람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늘 자신감을 지니고 쓸데없는 열등감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따뜻하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합니다.
셋째, 주도적인 삶을 삽니다.
‘~때문에 못한다’는 말을 좀처럼 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는 부분 때문에 좌절하기보다는 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합니다. 머리가 나쁘다고 좌절하기보다는 성실함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여 그 쪽에 집중하고, 형편이 어렵다고 포기하기보다는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어디 있는지를 찾아봅니다.
인생 목표 정하기
우주 비행 5회에 체류 시간 223일. 우주 정거장 미르에서 188일간 체류. 미국의 여성 우주 비행사 섀넌 루시드박사의 기록입니다. 이러한 업적은 매우 대단한 것이어서, 그녀는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게 최고 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루시드가 중학교 2학년 때 일입니다. 선생님이 장래 희망을 글로 쓰는 숙제를 냈답니다. 그녀는 로켓 기술자가 되어 우주 비행을 하는 것이 꿈이라고 썼습니다. 그 당시 우주 비행은 공상과학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대요. 거기다 여성 우주 비행사는 더더욱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테지요. 그래서 어린 루시드의 글을 장난이라고 생각한 선생님은 크게 화를 내며 그녀을 야단쳤답니다.
그러나 루시드의 결심은 진지하고 확고했습니다. 성인이 되고 대학에 들어간 뒤에도 그녀는 결코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79년, 루시드 박사는 마침내 우주 비행사가 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여성 우주 비행사로서 인류 역사에 기록될 만한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처럼 삶을 이끌어 갈 확고한 목표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꿈을 이루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내 삶을 의미 있고 명예롭게 만들기 위해서 내가 가져야 할 목표는 무엇일까요?
목표 중에는 추상적인 것도 있습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프랑스를 상징하는 여신 마리안느가 총을 들고 힘차게 앞장서고 있는 유명한 그림입니다. 인류에게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일깨운 프랑스 대혁명의 의의를 피가 끓을 정도로 잘 표현한 작품이지요.
혁명은 그 뒤 대혼란으로 이어졌지만, 사람들은 그 끝이 ‘자유, 평등, 박애’의 실현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신념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이상은 현실을 이끄는 강력한 힘입니다.
- 나는 앞으로 어떤 목표를 가지고 생활할 것입니까?
- 구체적으로 나에게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집중력과 버림의 미덕
가슴 뛰는 삶 / 강헌구 지음
“나는 스스로를 위대한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위대해지고자 노력하는 동안만큼은 위대한 시간을 보냈다.” - 미국 제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그냥 미치면 바보가 되지만, 꿈에 미치면 신화가 된다.
한 청년이 현자로 소문난 왕을 찾아가서 성공의 비결을 물었다.
“저에게 성공의 비결을 알려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까?”
왕은 대답 대신 포도주를 한 잔 가득 부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 포도주 잔을 들고 시장통을 한 바퀴 돌아오면 비결을 가르쳐주겠다. 단 포도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이 칼로 네 목을 벨 것이다.”
바짝 긴장한 청년은 땀을 뻘뻘 흘리며 복잡한 저잣거리를 한 바퀴 돌았고, 다행히 포도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청년에게 왕이 물었다.
“시장을 돌며 무엇을 보았느냐. 거리의 거지와 장사꾼들을 보았느냐. 술집에서 새어나오는 노랫소리는 들었느냐?”
청년이 대답했다.
“포도주 잔에 신경 쓰느라 아무것도 보고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바로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확고부동한 목표를 세우고 거기에만 집중하면 목표 이외에 온갖 잡동사니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가슴 뛰는 삶을 살며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선 무엇보다 집중력이 필요하다. 집중력은 하나를 열로 부풀린다. 레이저는 그 자체로는 몇 와트 안 되는 약한 에너지원이지만, 가늘게 집중시켜 지속적으로 쏘면 다이아몬드에 구멍을 내거나 암세포를 깨끗이 없앨 수도 있다.
한 가지에 집중한다는 것은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버린다는 뜻이다. 그러니 제대로 집중하기 위해선 버려야 한다. 성공의 비결을 물었던 청년은 포도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리는 날엔 목숨이 날아간다는 생각으로 몸과 마음과 정신을 온통 포도주 잔에만 집중했다. 그러느라 그 시끄럽고 복잡한 시장통을 뚫고 지나가면서도 아무것도 보고 듣지 못했다. 한 가지 목표를 이룰 수 있다면 나머지는 모두 버려도 좋다는 마음가짐, 그게 바로 집중력이다. 이야기 속의 청년처럼 목숨이 달린 중요한 한 가지가 있다면 당연히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안 보인다. 거기엔 버릴 수 있는 용기와 끝까지 놓지 않고 단 하나의 목표에만 집중하겠다는 집요함과 끈기가 필요하다.
반대로 엉뚱한 것에 집중, 아니 집착하다가 인생을 망치는 경우도 있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유리병 하나만 가지고도 손쉽게 원숭이를 잡는다고 한다. 일단 야생 원숭이가 많이 다니는 곳에, 입구가 가늘고 몸통이 큰 유리병을 가져다 놓고 안에는 땅콩을 넣어둔다. 그러면 원숭이들이 지나가다 병 속에 들어 있는 땅콩을 보고 손을 집어넣어 한 주먹 가득 쥔다. 그때 숨어 있던 원주민 사냥꾼들은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와 원숭이를 향해 달려간다. 그러면 원숭이는 땅콩으로 불룩해진 주먹을 빼지 못하고 유리병을 질질 끌며 도망가고, 결국 잡히고 만다.
땅콩 한 줌을 버리지 못해 잡혀온 원숭이들, 이 원숭이들은 서커스단에 팔려가거나 사람 대신 야자열매 따기에 동원된다. 사람들이 쫓아올 때 손에 움켜쥔 땅콩을 놓기만 했어도 쉽게 도망갈 수 있었을 것이다. 원숭이는 총명한 동물이기 때문에 땅콩 한 줌과 평생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다만 결정적인 순간에 본능에 굴복해버려 그 사실을 잊었을 뿐이다. 버리는 법을 모르면 우리도 어는 순간 잡혀온 원숭이 신세가 될지 모른다.
‘삼망(三忘)’이라는 말이 있다.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는 가정을 잊고, 부모를 잊고, 자신을 잊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장에서는 각자의 개인사정을 버리고 모든 병사가 오직 전투에만 집중해야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도 너무 많은 것이 가득 들어차 있으면 속도가 점차 느려지다가 결국 시스템 전체가 멈춰버린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오만가지 잡동사니 정보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과거의 기억이나 감정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우리의 몸과 마음, 정신과 영혼을 꽉 채워버린다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공황상태에 빠져버리고 만다. 섬뜩하지 않은가? 그러면 정작 중요한 것에는 집중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데 신경 쓰느라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 뒤죽박죽 산만한 생활, 구심점이 없는 방만한 날들로 허송세월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가득 찬 쓰레기통은 얼른 비우고 정신을 정화할 시간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말이다.
버리는 것은 곧 새로운 출발이다. 위대한 성인이나 세상을 구한 영웅들도 처음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유혹에 흔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목적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위대한 일을 해내도록 만들었다. 자선사업을 하라거나 무조건적인 희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목표 이외의 것들은 저절로 버려진다는 말이다.
계획을 세울 때 필요한 열 가지
마음 알기, 자기 알기 / 이남희
1. 중요한 기본적 욕구가 다 충족되는 계획이면 좋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계획이어야 합니다. 가능하면 그 계획을 실천할 때 그 안에서 다섯 가지 기본적인 욕구(생존, 사랑과 소속, 힘, 자유, 즐거움)가 다 채워진다면 이상적입니다.
2. 단순한 계획이어야 한다.
계획이 거창하면 부담스러워서 실천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핑계를 대고 자꾸 미루게 되지요.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을 되새겨봅시다. 처음에는 시시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쉽고 간단한 일부터 실천하도록 계획을 세우고 실천 수준을 차츰 높여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하면 성취했다는 자신감도 생겨 뒷받침을 해주기 때문에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습니다.
3. 현실적이고 실현가능한 계획이어야 한다.
목표를 너무 높이 세우면 쉽게 좌절하게 되고, 좌절이 자꾸 반복되면 자신을 멸시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자신을 멸시하는 사람은 자신감을 잃어 어떤 일을 하겠다는 의욕이 없어지지요. 좋지 못한 악순환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현 가능한 계획을 세워서 조금씩 실천해 내는 것이 자신감을 쌓게 해줍니다. 그러니 목표를 단번에 너무 높이 세우면 안 됩니다.
4. 어떤 행동을 중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권장하는 계획이어야 한다.
새해가 되면 금주․금연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지요. 그래서 담배 판매량을 보면 매년 1월에는 조금 낮아졌다가 그 다음 달부터는 조금씩 늘어 3월이 되면 다시 평균치의 판매량으로 되돌아온다고 합니다.
그처럼, 무슨 일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면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것보다는 무엇을 하겠다고 결심하는 쪽이 훨씬 하기 쉽고 용기도 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계획을 세운다면 무엇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할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세요.
저녁 때 집에만 오면 아무것도 안하고 인터넷 게임만 하고 있다고 합시다. 그래서 ‘인터넷 게임을 하지 않겠다’라고 계획을 세우기 쉬운데, 그러면 대개 실패하고 맙니다. 그 대신 ‘8시부터 9시까지 농구를 하겠다.’, ‘9시부터 11시까지는 공부를 하겠다.’라고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빈 시간을 만들지 않고 그 시간에 무엇을 하겠다고 세우는 것입니다. ‘~를 않겠다’가 아니라 ‘~를 하겠다’라는 계획인 셈입니다. ‘어머니에게 화내지 않겠다’라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현관에서 배웅할 때 미소로 대답하겠다’라고 계획을 세우는 편이 실천하기 쉽습니다.
5. 구체적인 계획이어야 한다.
계획은 조그맣게 세우는 대신 세부적인 것까지 생각해 두어야 합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 되겠다’라는 목표를 세워놓으면 어느 정도의 공부를 해야 공부 잘하는 학생인지가 막연하지요. 이런 정도 공부를 했는데, 이것이 ‘공부 잘하는 학생’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것인지 아닌지 애매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이럴 때에는 차라리 ‘영어 점수 몇 점’이라든지, ‘참고서 몇 페이지를 공부하겠다’는 식으로 계획을 세우는 편이 좋습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친구와 잘 지내야겠다’라고 계획을 세우지 말고, 구체적으로 ‘누구와 이야기할 때 상냥하게 말하겠다’든지 하는 식으로 구체적으로 행동 하나하나를 지정해 계획을 세워야 실천하기가 좋습니다.
6. 측정 가능하고 반복해서 행동하는 계획이어야 한다.
늘 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합니다. ‘인간을 지탱해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습관’이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로 습관의 힘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막연하지 않은 행동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다 보면, 그 행동이 습관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면 애쓰지 않고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실천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무슨 일인가를 이루고 싶다면, 작은 시간이라도 매일 반복해서 실천하세요. 그러면 언젠가 이룰 수 있습니다.
습관이 몸에 붙는 것은 보통 한 달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 달 정도만 신경 써서 습관이 자리잡히도록 한다면, 그 다음에는 조금은 쉽게 해나가게 됩니다.
7. 즉각적인 계획이어야 한다.
모든 일은 오늘 당장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계획을 세우도록 합시다. ‘다음주부터 아침 5시에 일어나야지’하고 계획을 세운다고 다음주부터 실천하게 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이런저런 핑계가 생겨 ‘그 다음 주부터 해야지’하고 미루게 되지요. 그러니 내일부터 하겠다. 다음부터 하겠다.라는 것은 하지 않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당장, 지금부터, 계획을 세우고 하고 싶다고 마음이 내킨 ‘지금부터’ 시작할 수 있게 합시다.
8. 현실적인 계획이어야 한다.
지저분한 시장 거리에 살고 있어서 평상시에도 그 거리를 걷는 일이 싫다고 느껴지는데, 아침마다 그 거리에서 조깅을 하겠다고 계획을 세운다면 억지로 실천하려고 해도 얼마 못 가서 그만두게 됩니다. 계획은, 하기 좋아야 합니다. 마음이 내키도록 해야지요. 자신을 극복한다는 말을 많이 쓰는데, 자기를 극복하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싫은 일을 하게 되면, 처음 얼마 동안은 자신을 극복한다면서 이를 악물고 해나가지만, 스트레스가 자꾸 쌓이다보면 얼마 못 가 그만두고 맙니다. 그러니 자신을 잘 돌보도록 계획을 세우세요. 자신의 취향과 느낌, 환경, 욕구 등을 고려하여 현실적인 작은 계획부터 차근차근 하도록 하는 것이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9. 진행 중심적인 계획이어야 한다.
목표만 생각하고 있으면 실천하는 일이 매우 힘들어집니다. 쉽게 지쳐버리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목표에 다가가는 그 과정을 어느 정도까지는 즐겁게 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울 때 자신을 배려해 주어야 실천하기가 쉽습니다. 목표에만 정신을 집중하면 자신이 ‘어느 정도 달성했는가’하는 정도의 문제만 따지기 때문에 과정을 즐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그 과정 자체에서 의의를 느끼지 못하지요. 그러니 목표에 다가가는 과정도 고려해서 계획을 세우도록 합시다.
10. 단호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아주 쉽고, 간단하고, 실천하기가 어렵지 않고 즐거운 계획을 세워 조금씩 해나가는 대신 단호해야 합니다. 반드시 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세상 일은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문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중요한 문제란 대부분 이런저런 사연들이 마구 뒤엉켜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을 글로 써서 꼼꼼히 살펴보면, 자신에게 어떤 욕구가 있는데, 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욕구를 채우려고 그동안 내가 해온 행동을 점검하고 평가해 보면, 앞으로 내가 어떤 행동을 해야 만족스럽게 살 수 있는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은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작은 고민이 생겼을 때도 쓸모가 있습니다. 자신이 놓치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부정적인 감정, 분노(Anger)
상처입은 감정의 치유 / 마르틴 파도바니 지음 ∙ 분도출판사
아마도 우리가 전혀 이해하고 다루도록 배운 적이 없는 하나의 감정이 있다면 분노일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분노는 종종 우리의 발전을 저해시킬 수 있습니다. 분노는 우리를 조종하거나 불안에 싸이게 하고 불건전한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노를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는 경향이 있으며 결과적으로 어떻게 해서라도 피하거나 막아보려고 노력합니다. 이렇게 하는 한, 우리는 정서적으로 성숙되지 못하고, 우리의 성장을 저해하며, 우리 자신에게 불필요한 문제들을 야기시킵니다. 우리가 분노를 처리할 수 없는 한 우리는 결코 전인적인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분노는 인간적 성숙과 건전한 인간관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가 적절하게 다루고 표출할 수만 있다면 분노는 하나의 덕목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또한 당연히 간주되어야 합니다.
분노는 올바르게 이해되거나 사용되지 않아서 종종 대다수의 정서적・ 정신적・육체적・ 인간적 관계의 문제들을 유발시키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다음은 불건전한 형태의 분노의 몇 가지 예입니다.
*교양있는 남성인 A는 최근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 특히 직장동료들에게 무척 분노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분노를 어떻게 처리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우울증에 걸리게 되어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 B는 갑자가 죽은 남편에 대한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러한 상실감을 이해할 수 없으며 자신이 특히 하느님에게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 S시의 집단 살인자는 맥도널드 식당에서 22명에게 치명적인 총상을 입혔습니다. 그는 엄청난 분노를 품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열두 살인 D는 어머니에게 무척 화가 나 있어 온갖 두통과 위장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D가 그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있으므로 그녀의 어머니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불안과 가슴 통증을 호소하고 있는 E는 그의 아내, 아들 그리고 직장 상사에게 매우 화가 나 있는 상태이지만 자신의 분노를 어떻게 처리할 줄 몰라 숨기고 있으며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줄곧 과민하고 불쾌한 감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게 되는 분노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기르는 것이 중요하며, 무엇보다도 우리의 분노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분노를 인식한다면 동시에 타인이 가지고 있는 분노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다른 감정들처럼 분노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분노도 인간성의 또 다른 한 면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분노를 느끼고, 다루고, 드러내어야 합니다. 우리는 분노를 의식하고 편한 마음으로 표출하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대해 내가 화가 나 있는가?” “내가 누구에게 화가 나 있는가?”라고 자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치에 맞는 분노”와 “이치에 맞지 않는 분노”, 즉 “합당한 분노”와 “합당치 않은 분노”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나의 이 분노감이 비례적인가 비례적이지 않는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분노를 다스리려고 한다면, 우리는 이 분노를 건강한 방식으로 적절하게게 드러내야 합니다. 즉 절적한 때와 장소에서 적절한 방법으로 표출해야 합니다. 우리는 화가 나 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분노를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화가 났거나 분노를 느끼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 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분노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가지는 부정적인 감정에 대하여, 결코 자책하거나 숨기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그 부정적인 감정을 바라보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용한다는 것은 ‘옳은 것이니 계속 가지고 있어도 된다.’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니라. ‘아... 이러한 대상(사람, 상황 등)에 대해서 내가 이런 분노의 감정을 느끼구나, 답답하구나, 괴롭구나, 싫구나... 나는 화가 났어. 그래... 화가 난 거야...’라고 내 감정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주는 것입니다. ‘아냐... 난 화를 내서는 안돼. 내가 화를 내다니... 부모에게... 친구에게... 배우자에게.. 자식에게... 그러면 난 나쁜 사람이지... 그렇게 해서는 결코 안돼...’라고 자신의 감정을 감추려고 하면 곤란하다는 뜻입니다. 그 감추는 이면에 얼굴표정과 온 몸으로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이미 상대방은 다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도피’는 심리학적으로 보면 아주 위험한 정신병리의 기초가 되며, 영적으로 보면 가장 ‘존중받아야 할 자기와 타인’을 도피하여 자기기만 혹은 거짓 속으로 빠지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신체적으로 보면 ‘온 몸을 아프게 하는 주요원인’으로 작용되기도 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수용하는 길 만이, 내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첫 번째 관문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이 나를 싫어하거나 미워할까 두려워 나의 분노를 표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불안감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또는 우정을 깨뜨릴까봐 두려워 나의 분노를 표출하지 않습니다. 이런 관계 속에 무슨 우정이 있습니까? 우리가 화가 난 자신의 감정을 친구에게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친구가 없는 데서 이야기하거나 그 친구에게 냉담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정도까지 이르게 되는 관계라면 처음부터 좋은 관계가 아닙니다.
아마 우리가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곧바로 되돌아올지도 모르는 공격적인 분노를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분노를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상대방에 의해 위협을 당하거나 조종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건전한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신의 아이들의 분노를 두려워할지도 모릅니다. 혹은 배우자가 상대방의 성난 반응을 두려워하여 침묵을 유지하거나 상대방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분노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런 부부는 정상적인 남편과 아내의 관계라기보다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반영한 부부입니다. 만약 자신의 분노에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분노에도 그다지 마음이 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자신의 분노에 대한 불편함이 웃음으로 부적절하게 표출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당연히 화를 내어야 할 때 대신 웃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들은 그 상황이 불편해서 어떻게 그 상황을 처리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경증적으로 웃어넘기며 그 자리를 뜹니다.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화가 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를 모른다고 웃어버립니까? 우리가 자신의 분노에 친숙하지 않은 것은 우리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결과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우리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분오에 대한 두려움으로 조종되는 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갈등을 초래할까봐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갈등을 원하지 않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갈등은 필요하며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볼 수 있는 건강한 양상입니다.
오늘날 더 많은 부부관계와 가정이 폭력보다는 침묵 때문에 파괴되고 있습니다. 침묵, 억제된 분노, 표출되지 않은 적의, 냉정함,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이 서로 보복하려 하는 건강치 못하고 정도에서 벗어난 방법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고함을 지르거나 비명을 지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항상 하던 일을 바꿀 좋은 기회입니다. 가끔 나는 사무실 중앙에 서야 하고 교통순경처럼 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가정은 일단, 화해신호의 첫 출발에 들어갔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적어도 다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며 느끼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분노는 자주 갈등이나 폭력으로 혼동되지만 그것들은 유사어가 아닙니다. 분노는 폭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분노는 분노일 뿐입니다. 폭력은 통제되지 못한 분노입니다. 오늘날 세계의 매스컴이 종종 가정 내의 폭력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 초점은 심리치료자들이 말하려는 것, 즉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중요하며, 건강하며 우리는 어떻게 분노를 다룰지를 배워야 한다는 것과 역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스컴에서는 적절한 설명을 하지 않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분노를 삭혀야 한다고 생각하도록 유도합니다. 나는 매스컴이 이 분야의 행동을 다루려면 그들을 더 심층적으로 다루어야 하며 분노와 폭력을 혼동함으로써, 또한 폭력에 대해 경고하려고 할 때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때때로 적절한 분노도 갈등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당한 갈등은 건강한 인간관계 속에서 불가피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분노를 상대방에게 드러낼 때 갈등이나 문제는 종종 풀립니다. 사람들은 “내가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것은 소용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진정 도움이 안됩니다. 당장 문제의 해결이 안 될는지 모르지만 종종 분노를 드러냄으로 또 다른 해결이 이루어집니다. 각자의 위치가 분명해지고 서로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지를 알게 되며 서로의 메시지가 전해져 사람들은 서로에게 더 민감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아들에 “쓰레기를 버려”라고 말합니다. 삼십분 후에 또다시 말합니다. 한 시간 후에 “야, 이 녀석아, 쓰레기를 갖다 버리지 않겠어!”라고 말합니다. 아들은 벌떡 일어나 쓰레기를 갖다 버리면서 “알았어요. 알았단 말이에요. 그렇게 큰 소리치실 필요 없잖아요”라고 말합니다. 아들은 아마도 처음 두 번은 듣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말 속에서 감정이 있다는 것, 즉 말속에 어떤 분노가 숨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결과가 반드시 잇달아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친밀한 관계에서 자신의 분노를 서로 드러낼 때 우리는 서로에게 민감하게 됩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며 무엇이 상처를 주는지를 알게 됩니다. 당신이 분노를 표출할 때, 나는 당신이 상처 입었음을 알게 됩니다. 당신에게는 중요하여 쉽게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은 진정으로 드러냅니다. 그러면 나는 나의 말과 행동을 재고하게 됩니다. 나는 또한 나에게 화를 내고 있을 때 당신이 신경을 쓰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당신은 내가 한 말이나 행동에 대해 화가 났음을 말하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관심을 드러내는 것이며 사랑의 행위입니다.
반대로 나의 분노를 드러내고 싶지 않을 때 “나는 당신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처럼 무관심할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에게 “나는 당신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 화가 났어...”고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긴 연설이 필요없습니다. 아주 짧은 감정에 대한 진술로 충분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서로의 다른 점을 배우게 됩니다. 다른 점을 극복함으로써 우리는 타협하거나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웁니다. 우리가 인간관계를 발달시키는 일은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는 맥락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다른 점을 극복하지 못하면 가족들이 멀어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화가 났을 경우 안정될 때까지 우리 자신과 상대방에게 시간을 줘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서로 다른 안정체계cooling system 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빨리 안정을 찾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상처받고 화가 났을 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지만 우리 자신이 잊어버리거나 치유하거나 안정을 찾을 시간을 춰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감정은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인간관계를 튼튼히 할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인간관계나 부부생활까지 끝맺게 할 수 있는 요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간혹 우리는 어떤 관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분노는 건강한 의사소통을 위해 필요합니다. 화를 내지 않는다면 인간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분노와 갈등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배웠어야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배워야 합니다. 꼭 배워야 합니다. 이것을 배우지 못하였다면, 우리의 과거 가정을 면밀히 진단하여, 잘못된 분노대처방식을 제대로 자각하고, 지금이라도 습득해야 합니다. 피하지 말고 새롭게 그 방법을 익혀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여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심리치료요, 성숙한 삶의 핵심방법입니다.
부모들은 적절한 분노와 부적절한 분노를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하며 분노를 표출하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그들은 결코 자녀들이 분노를 표출하는 것을 비난해서도 안되며 오히려 어떻게 분노를 표출하는지를 보여줘야 합니다. “우리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그런 유형의 언어를 사용하지도 않는다.” 이런 식으로 자녀들은 유익한 분노와 해로운 분노의 차이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이 내가 그 사람에게 반드시 동의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린이들은 화를 낼 권리를 가지고 있고 부모가 내는 화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적절한 방법으로 분노를 처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노는 선이든 악이든 하나의 힘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적・신체적・정서적・영적 건강이나 성숙뿐만 아니라 인간적 관계의 더 건강한 기능과 향상을 위해 유도되고 이용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부부관계의 많은 성기능 장애 저변에는 억압된 분노가 자리잡고 있음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두려움이나 죄책감 없이 분노를 깨닫고 접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격노를 느끼거나 누군가를 꾸짖어 버리고 싶을지라도 이 자체는 감정일 뿐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분노를 체험하도록 허용해야 하며 불편함에 친숙해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내면의 분노를 처리할 수 있어야 하며 그렇게 하는 데 우리의 지성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시간을 내어 자신의 분노에 대해 추론하고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의 분노를 이해하고서 우리는 비논리적인 것에서 논리적인 것으로, 비합리적인 것에서 합리적인 것으로 분노의 모든 요소를 정확히 가려내어야 합니다. 우리는 반응과 과잉반응의 차이를 배워야 합니다. 가능하면 분노에 즉시 반응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상황 때문에 우리는 종종 분노의 반응을 지연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냉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냉정해지고 적절한 방법으로 분노를 표출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때로는 시기와 장소 그리고 기타 여러 조건을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분노에 대해 과잉반응하고 있다면 소리를 치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홀로 있는 차 안이나 산책을 하는 동안 외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친구와 함께 화난 사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아마 과잉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날 아침 분노가 더 적절할 수 있도록 하룻밤 자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를 화나게 했던 사람을 찾아가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불가피한 이혼 상황에서 별거중이며 아버지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가정 상황에 처한 한 소년에게 그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나는 이 상황에 대해 화가 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 소년에게 자신의 분노를 어떻게 처리했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밖으로 나가 축구공을 찼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한 후 어떻게 느꼈느냐고 그 소년에게 묻자 그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해소시키는 방법을 발견했고 그것은 건강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분노와 자신을 통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노의 감정과 죄책감을 결부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책감을 느끼게 될 때 자신의 분노를 감추게 되어 전체 상황을 더 악화시킵니다. 우리는 죄책감 없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양면 감정을 해결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어릴 적에 배우려 합니다만 양면 감정은 종종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모를 사랑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나는 부모를 싫어합니다”라고 말하며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숙한 사랑의 관계를 맺으려 한다면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 양면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화가 났을 경우 특히 과잉반응을 보일 때 듣고자 하고 믿을 만하고 우리를 이해하는 사람과 의논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적절한 방법으로 자신의 분노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타인과의 대화는 자신의 분노를 올바른 견지에서 바라보고 정리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다스릴 때 적당한 방법과 효과적인 언어로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고 표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화를 내는 그 사람이 향상 나의 시도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를 표출하는 목적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으며 우리가 그들에게 어떻게 느끼는지를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우리의 분노에 대하여 무엇을 행하든 그것은 그들의 선태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인간관계는 좀 더 튼튼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더 친밀하고 깊은 인간관계를 이루려는 목적에 도달하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 특히 부모와 선생들은 과잉반응을 보입니다. 우리가 과잉반응을 보일 때, 즉 아이를 꾸짖거나, 뺨을 때리거나, 욕을 하는 등의 행위에 대해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화를 낸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나는 네가 숙제를(혹은 접시 씻는 일이나 옷을 정리하지 않는 일)하지 않았기에 화를 낸다”고만 말합니다. 우리는 결코 자녀에게 책임을 면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에 우리가 화를 내는 현실적 이유가 있습니다. 과잉반응에 대해서는 사과하지만 분노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마십시오. 감정을 사과하면서, 행동이 정당화되게끔 하지 마라는 뜻입니다. 가정안에서 모든 것을 배우기 때문에 사소한 것에 대해서 적절한 반응은 너무 중요합니다. 누가 자신의 가정과 가정 배경과 가족 훈련 이외에서 이런 종류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적절한 분노를 보였을 때 사람들이 상처받기를 예상해야 합니다. 이것은 정상입니다. 정직한 분노에 따를 일상적인 상처입니다. 우리는 안됐다고 느낄 수 있지만 죄책감을 느껴서는 안됩니다.
때때로 분노의 원인은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신호등에서 우리를 방해했다고 해서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그 사람을 추적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단지 우리는 우리자신에게나 차 안에 있는 사람에게 몇 단어를 선택하여 말합니다. 진정 중요한 사람은 삶 속에 있는 ‘함께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향한 분노를 표출하지 않거나 가라앉히게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파괴적인 태도를 발전시킬 수 있고, 분개와 쓰라림은 파괴적인 태도를 발전시킬 수 있고, 분개와 쓰라림은 파괴적인 관계를 심화시킬 수 있습니다. 친밀한 관계는 우리가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기를 요구합니다.
적절한 분노 - 이것을 우리는 자신들이 느끼도록 허용해야 하며, 처리하고,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것은 정서적 성숙입니다. 이것이 바로 분노가 하나의 미덕이 되는 이유입니다. 분노는 우리 삶 속에 진실로 중요한 한 면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와 많은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분노는 우리가 정직하고 참되고 건강하고 활기찬 삶을 살며, 믿고 사랑하며 친밀해지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출처 : 전국도덕교사모임 , 도덕과 자료집 10 - 도덕 수업 관련 자료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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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좋은 예화집입니다. 곳곳에 쓰임이 있을것같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