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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라게 하심
성경: 고전3:1-9절
걸리버 여행기는 18세기 영국의 풍자적인 문인이었던 조나단 스위프트가 쓴 소인(小人)의 나라와 아주 큰 거인(巨人) 나라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소인국(小人國) 즉 작은 나라에서 자기들끼리 싸움이 붙어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 때문에 서로 그렇게 싸우고. 그렇게 많은 생명이 죽었을까요. 그 전쟁은 삶은 계단을 먹을 때, 계란의 넓은 쪽 끝을 먼저 깨뜨려서 먹느냐. 아니면 좁은 쪽의 끝을 먼저 깨뜨려서 껍질을 까느냐라는 문제 때문에 두 편으로 의견이 갈라져 결국 치열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글은 ‘조나단 스위프트’가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골몰하고, 문제를 삼아서 싸우고 하는 일을 풍자한 것입니다. 소인국 사람은 바로 자라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한 사람을 비유로 표현한 것입니다.
펄 벅 여사는 선교사였던 부모를 따라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에서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대지(The Good Earth)"라는 작품을 써서 여성 최초로 1938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작품 중에 “자라지 않는 아이(The Child Who Never Grew)"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녀는 한국의 고아를 포함해서 국적이 다른 아홉 명의 고아들을 입양해서 키웠습니다. 그렇게 된 것도 바로 자신의 딸이 장애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이 정신지체아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너무 슬퍼서 한 때는 모든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차라리 아이가 죽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뇌에서,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글을 쓰기 시작했고 마침내 소설 ‘대지’를 세상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펄 벅은 장애 가진 딸을 통해 배운 교훈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나는 그 누구에게든 존경과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내 딸이 없었다면 나는 분명히 나보다 못한 사람을 얕보는 오만한 태도를 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능만으로는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없음도 배웠습니다.”
오르티즈 목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교회를 맡았습니다. 열심히 2년 동안 사역을 하고 나니 처음의 200명의 교인이 600명으로 늘어 난 것입니다. 2년 사이에 세배로 성장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 나서 더욱 열심히 성장 시키려고 하는 데 갑자기 성령께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네가 하는 것은 마치 코카콜라 회사에서 판매고를 세배를 올려 그 수익을 자랑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또는 자동차 세일즈맨이 판매고를 2년 전 보다 세배를 올려 즐거워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교회와 일반회사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데 어떻게 그 성장 방법을 같은 식으로 하려는 것인가. 너는 영적으로 성장해야 하고 또 네 교우들을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급선무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르티즈 목사는 성령님의 갑작스런 질문에 대하여 심각하게 받아드리면서, “맞아, 교회와 일반 기업의 회사 운영방법은 같을 순 없지. 아니 근본적으로 회사와 교회는 다른 것인데 어찌 목사님들은 교회의 성장을 일반 회사의 성장과 같이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자신은 교회의 일을 일단 몇 주만 중단하고 기도원으로 들어가 기도를 하고 오겠다고 말 한 뒤 기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처음엔 모든 목회활동을 중단하면 큰일 날줄 알았습니다. 교회가 곧장 곤두박질하여 모두 잘못될 것으로 알고 도저히 엄두를 못 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성령의 감동과 자신이 기도로 나아갔을 때 마음의 평안을 얻어 수 주간을 기도원에 들어가 귀한 시간들을 보내고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기도원에 들어가 있을 때 성령님은 오르티즈 목사에게, “너는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는구나. 너 뿐 아니라, 너의 교회의 모든 교인들도 성장하지 않고 있는 거야. 숫자적으론 세배로 늘었다 해도 그것은 영적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그냥 살이 쪄서 비대해 졌을 뿐이지, 성장한 것은 아니야.” 그래서 목사님은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또 교우들을 성장토록 도와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돌아오면서 다른 교회들을 보아도 모두 성장하는 교회라기보다는 고아원에 모여 있는 고아들처럼 진정한 부모가 아닌 사람들이, 우유를 데워 그저 기계들처럼 고아에게 우유를 데워 먹이는 직원 같은 목회자들로 차 있는 회사와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영원한 갓난아기들처럼 고아원에 모여서 우유만 먹고 있는 성장치 않는, 그냥 살만 쪄서 비대해 지는 그런 기관이 되선 안되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책이 ‘제자입니까’입니다. 그는 자라지 않는 아이들의 특징을 몇 가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① 첫째는, 기도가 천편일률 적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게 되면 말하는 내 용이 변하여 성숙하게 됨으로 어릴 때의 유치함을 버리게 된다. 신앙생활을 어지간히 했는데도 우리의 기도내용이 여전히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와 같다면, 즉 우리의 기도내용이 아직도 우리의 육신의 것만 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자라지 않은 아이와 같다. 기도내용이 성숙해야 한다. 남을 위한 기도,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기도, 자신을 떠나는 기도가 있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한 자리지 못하는 아이이다.
② 두 번째는 주는 것 보다 받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그들은 항상 누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다. 어른들은 줄줄 안다. 주는 것이야 말로 어른이라는 표시이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데도 남에게 줄 줄을 모르면 이는 영원한 어린아이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열매보다는, 은사에 더욱 관심이 많다는 것은 여전히 받는 것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교회에 오면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온다. 아이들일 수록 신기한 구경을 좋아한다. 성숙한 사람들만이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에 관심을 갖는다.
아이들처럼 우리는 무엇이 진짜 귀한 것인지 무엇이, 비싼 것인지 모른다. 만 원짜리 지폐와 과자를 아이에게 주어 보라. 아이들은 모두 과자에 손이 간다. 우리 역시 선택 앞에 놓이면 아이들 같이 영적인 것보다 언제나 근사한 집, 새 차, 두툼한 은행구좌를 선택한다. 하나님조차 물질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삼고자 한다. 하나님까지 설득하여 물질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우리는 아직도 이기적인 어린아이들과 같다.
③ 세 번째 자리지 않는 아이와 같은 신앙인이 모여 있는 교회에는 항상 일꾼들이 없다는 것이다.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일꾼이,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일꾼이 부족하다. 10년 20년을 신앙생활을 한다. 해도 불신자를 예수님께 인도한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고작해야 무슨 행사 때 한두 번 데리고 오는 것이 고작이다. 영혼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며, 그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는 사람들이 성숙한 신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라나야 한다.
화초는 자라야 꽃을 피웁니다. 과목은 자라야 열매를 맺습니다. 나무는 자라야 목재로 집을 짓는데 쓸 수 있습니다. 사람도 성장을 해야 군대도 가고 결혼도 합니다.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구실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씨를 뿌리는 사람, 물을 주는 사람이 있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자라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라게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것이요. 내적인 성장이요. 인간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알아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것을 자라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참고 견디게 하시다.
와타나베 준이치라는 사람이 둔감력이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사람은 민감하고, 애민한 것을 좋은 줄 아는데 그것 이아니라는 것입니다. 모기가 물었는데 애민한 사람은 모기를 쫓는다고 잠을 설치고 또 그 자리를 긁어서 결국 짓물러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좀 둔감한 한 사람은 몸을 몇 번 흔들고 다시 잠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애민하고 신속한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턴으로 담당의에게 계속 야단맞으면서도 예, 예하며 자리를 지켰던 선배와 질책에 애민하게 반응하였던 후배가 종래에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를 예를 듭니다. 둔감한 예. 예의 선배는 결국 명의가 되고 한마디로 출세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민하고 섬세한 견디지 못한 후배는 어디론가 살아졌다는 것입니다.
자극과 평가에 좀 둔감한 사람이 모든 것을 이기고 성과를 나타낸다는 주장입니다. 환경이나, 여러 가지 사건에 상관없이 잘 자는 사람과 무슨 일이 있으면 한두 시간씩 잠을 설치는 사람에 대한 설명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결코 예민하거나 날카로운 것만이 재능이 아니다. 사소한 일에 흔들리지 않는 둔감함이 삶을 유지하는 기본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성품을 좋아하거나 인정하는 것 하고 내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렇게 도무지 변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에게 변화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라나게 한 것입니다. 오늘 그 중에 하나가 참고 견디는 힘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노예로 팔리고, 보디발 아내에게 모함을 받고, 감옥에서 2년이나 썩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냥 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욥을 말하지만 그의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는 그 인내는 이미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내적으로 참고 견디는 것으로 자라게 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그렇고, 바울이 그렇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떻습니까.
취업포털 잡 코리아가 남녀직장인 854명을 대상으로 '한 회사 평균 재직 기간'을 조사한 결과, 전체 직장인 평균이 2년 10개월로 채 3년을 채우지 못하고 옮기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 사람을 알아보는 방법 중에 오래된 친구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오래 동안 참고 계속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직장이든, 인간관계이든, 일을 하든지 오래 동안 꾸준히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 참고 견디는 성품이 필요한데 그것을 누가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참고 견디는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지만 심문을 받고 모욕을 당하시고, 채찍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털 깎는 자 앞에 양처럼 잠잠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실력입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추우면 춥다. 배고프면 배고프다. 아프면 아프다고 다 말합니다. 그리고 억울한 것이나, 괴로운 것을 도무지 참아지지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오래 교회에 다녀도, 또 나이가 많아도 어린 아이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교인들 향해서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유를 먹고, 젖을 먹는 교인들입니다. 아직 밥을 못 먹고 고기를 먹지 못하는 그런 신앙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을 들으면, 무슨 일을 당하면 이들은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을 육에 속한 사람들이라, 어린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조그만 문제도, 작은 일도, 다 탈이 나고 시비가 생겼고, 문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만 되면 참고 견디는 힘이 생깁니다. 너그러운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자라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오늘 참고 견디는 것이 잘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2. 소화력을 주시다.
애기가 4-5살이 되었는데 우유만 먹는다. 밥을 먹지 못하고 먹으면 토한다. 소화를 못시킨다. 이것은 부모에게 큰 근심입니다. 지금 고린도 교인들이 영적으로 그런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 인해서 마음에 부담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복음을 받았으나, 성장하고 자라지 않았던 것입니다. 처음 초 신자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딱딱하거나 질긴 말씀을 받지 못했습니다. 부드러운 젖은 먹을 수 있으나, 밥을 먹지 못하는 것입니다. 소화를 못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이가 태어나서 5개월이 되면 이가 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유치입니다. 그런데 이 유치(乳齒)는 6세부터 빠지기 시작해서 12세까지 다 갈게 되는데 이것을 영구치(永久齒)라고 합니다. 이것으로 평생을 사는데 고기를 찢어 먹고, 단단한 콩을 깨트려 먹을 수 있는 이(齒)입니다. 관리를 잘하면 죽을 때까지 사용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 영구치가 빠지거나, 썩으면 그때는 틀니를 하거나, 임플란트로 턱뼈에 이를 만들어 세웁니다. 음식을 잘 씹어 넘기면 그 사람은 건강한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씹지 못하고, 젖이나, 우유, 혹은 죽을 먹어서는 힘을 쓸 수 없고, 신체가 자랄 수가 없습니다. 자란다는 것은 소화시키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 한마디만 들어도 잠을 못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가 안 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저주하며, 돌로 자신을 치는데도 그들을 위해서 용서의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 앞으로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여러분 소화를 잘 시키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요, 또 성숙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닮습니다. 그러나 화가 나고, 열이 나고, 혈압이 오르고, 잠을 잘 수 없는 사람은 어린 아이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만 아직 자기가 자라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라게 하십니다. 그 사람은 이 사람은 무엇이던 소화 잘 시키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말씀도, 그리고 삶의 아픔과 고통까지도 내 살과 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안 든다. 내 기분에 안 맞다. 어렵다. 힘 든다. 쉽지 않다. 하고 거부하고 소화를 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자리지 않는 아이입니다. 어린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소화력을 주십니다. 이해심을 주십니다. 그것을 자라게 하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이들이 배고프면 누구를 부릅니까. 누구를 쳐다봅니까. 엄마 얼굴입니다. 없으면 어디에다 손 내밉니까. 부모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보아야합니까. 누구를 불러야합니까.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해야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보라. 그리고 받아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던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이것이 소화력입니다.
2. 용서하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
마귀는 이 세상을 어떻게 다 망쳤을까요, 마귀의 무기는 무엇일까요. 마귀의 무기는 하나입니다. 이것 하나를 가지고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가정, 삶, 마음, 국가를 지옥으로 만드는 길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미움입니다. 다툼입니다. 분쟁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싸움을 붙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원수 맺게 하고 미워하게 하며, 시기와 질투를 하게 하지만은 결국 그것이 모두 다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내가 미워서 그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하면 시원한줄 알지만 그것은 다시 내게로 돌아옵니다. 우리 마음에 악한마음, 잔인한 마음, 미움은 마귀가 주는 마음입니다. 파괴하는 것입니다. 남이 안 되는 걸 좋아하는 마음입니다. 아무리 나쁜 사람도 불쌍히 여겨야 됩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면 바람이 부는 것을 압니다. 내 마음에 미움이 있으면 마귀가 지금 역사를 한다고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교인들이 모여서 남의 말 하면 빨리 ‘마귀 역사로.’ 알고 그만 해야 합니다. 물리쳐야 됩니다. 여러분 서로 싸우거나, 미워하면, 마음은 병듭니다. 몸도 병이 듭니다. 열심히 일해도, 돈을 벌어도 쌓이지 않습니다. 자녀들은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집에서는 좋은 인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세월이 가면 남는 것은 상처요. 원망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고린도 교인들이 시기하고 분쟁했다고 3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책망을 받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일 년 반 동안 씨앗을 심었고 떠났습니다, 그 후 아불로가 물을 주는 목회를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어린아이 상태에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도 하나님만 믿으면 되지 인간관계는 무엇이 중요하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고, 교회는 집입니다. 집안에 평화가 없으면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땅에서 풀어야 하늘이 풀립니다. 여기서 풀어야 저기가 풀립니다. 내가 인간관계를 안 풀고 있으니 하나님이 복을 못 주시는 것입니다. 푸시기를 바랍니다. 기독교는 푸는 종교입니다. 걱정, 죄, 원수 맺은 것 모두 다 푸는 것입니다. 모두 다 풀어서 자유 함을 얻기 바랍니다. 다윗에게 사울은 원수입니다. 그런데 손자 므비보셋을 데려다가 평생 같이 밥을 먹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높여 주시니 그 나라가 그렇게 평안합니다. 요셉이 어떻습니까. 자신을 판형들을 다 용서해줍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은 하나같이 마음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하십니다. 묶인 사람은 풀어라! 맺힌 사람은 용서하라.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불쌍하게 여겨라, 사람을 저주하지는 말라, 욕하지 말라! 너희 중에 서로 인사하지 않는 사람이 있느냐? 서로 외면하는 사람이 있느냐? 네가 먼저 손 내밀면, 네가 먼저 인사하면, 고개 숙이면, 네가 먼저 미안하다고, 잘 해보자고 말하면 안 되겠는냐라고 하십니다.
결론
하워드 슐츠의 책 [Onward] 173~174페이지에 나오는 글입니다. “내가 입을 열었다. 비틀스 해체가 언제 시작되었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1965년 여름, 비틀스는 처음으로 뉴욕의 시스타디움에서 공연을 했다. 5만 5,000명의 팬이 열광하고 있었는데, 이는 비틀스 라이브 공연 사상 최대 규모의 관중이었다. 그러나 비틀스는 팬들의 아우성과 혼돈 때문에 자신들이 연주하는 곡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예술이 그들의 인기에 묻혀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비틀즈는 서서히 무너져 갔다,
본질(本質)은 무엇입니까. 나의 흥분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음악입니다. 그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청중들은 너무 떠들고 흥분하고 환호성을 질러 대니까, 음악은 들리지 않고, 함성만 가득 차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영광의 끝입니다.
인간이 이렇습니다. 자신의 죄와 욕망 그리고 현실이 너무 커서 예수님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안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참아 주시겠지, 용서해 주시겠지, 기다려 주시겠지, 차마, 주님이 우리를 버리기야 하겠어,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는데, 그럼, 다 이해하실 것이야, 하면서 주님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주님의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본질은 무엇입니까.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밖에 있습니까. 감정에 있습니까. 숫자를 늘리는 것입니까. 돈을 좀 더 많이 버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지금 달리고 있습니까. 당신이 성숙해지고, 거룩해지고, 예수님을 닮은 것은 가장 중요한 미션입니다. 오늘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빌립보서2장 “3절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조영호목사
첫댓글 마아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