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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김씨왕조는 흉노계인가 - 문무왕비문의 해석
몇 해 전 KBS ‘역사추적’에서 <문무왕비문의 비밀>을 방영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星漢王이 문무왕의 조상이고 그의 出自가 흉노출신의 투후 金日磾(김일제)와 관련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이 문무왕비문을 둘러싼 논쟁은 KBS 방영 이전부터 있었다는 것과, 학계에서는 대체로 이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또 한 번 놀랐다. KBS의 방영 내용으로 보아 신라왕족은 흉노 출신임이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문무왕비문에는 ‘秺侯祭天之胤傳七葉’(5행)이라는 구절이 있고 그 뒤에 판독불가능한 문자가 두 자 있으며, ‘十五代祖星漢王’(6행)이라는 문장으로 연결되어있다. 여기서 祭天之胤이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가문(왕가)의 후손이라는 뜻이지만 구체적으로 휴도왕의 아들 김일제를 가리킨다. 그것은 휴도왕이 祭天의 황금의 상(金人)을 소지한 것에서 나온 문구이기 때문이다. 한편 성한왕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勢漢, 熱漢으로 나오며 신라왕족 김씨의 시조로 되어있다. 이 성한왕을 匈奴 出自라고 보는 사람들은 위의 두 구절이 서로 연결된 것이라고 보고 성한왕이 투후 김일제의 7대손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의 학자들도 일찍부터 이 문무왕비문의 성한왕에 주목하여 여러 설을 내놓고 있지만 그를 투후 김일제와 연관시켜 논한 학자는 한사람도 없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그럼 김일제는 누구인가? 그는 흉노의 장군 휴도왕의 아들이다. 모친은 閼氏(알씨)라고 한다. BC121년, 한나라 武帝는 곽거병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흉노에 대한 대공세를 펼쳤는데 이 전쟁에서 흉노는 대패하였다. 휴도왕은 살해당하고 당시 14세였던 김일제는 모친, 동생과 함께 곽거병에게 투항하여 무제의 마구간지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헌신적인 충성과 희생으로 武帝를 감동시켰다. 무제는 임종에 임하여 그에게 秺侯라는 작위를 내려 列侯에 봉하고 그를 곽거병의 배다른 형제 霍光과 함께 어린 태자(昭帝)를 보필할 3인 後見人 중의 한사람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김일제는 昭帝 즉위 1년 뒤에 죽었으며 昭帝는 그에게 敬侯 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후손들은 諸侯를 세습하며 領地인 산동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 AD9년, 황실의 친척 왕망은 쿠데타로 漢 왕조를 찬탈한 뒤 ‘新’이라는 새 왕조를 세웠지만 AD25년에 멸망하고 왕망은 자살한다. 왕망과 외척관계에 있던 김일제의 후손은 왕망정권의 붕괴와 함께 탄압을 피하여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데 우연인지는 몰라도 이와 비슷한 시기에 수로왕이 김해에 가야를 건국하고 탈해왕이 경주 앞바다에 도착했다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요동지방, 한반도의 서북지역, 영산강유역, 김해, 일본 규슈 등지에서 왕망의 왕조가 발행한 貨泉(동전)이 출토되고 있다고 한다. 김해에서는 유목민족의 동복(청동제 솥)과 뿔잔(角杯)이 출토되었다.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토기에는 말 뒤에 동복이 실려 있다. 흉노를 포함한 유목민들은 늘 이동을 하면서 생활하기 때문에 동복과 뿔잔을 항상 휴대하며, 재산은 간편한 금으로 바꾸어 보관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殷 이래 銀의 문화가 발달되어온 것과 대조적으로 흉노에서는 금의 문화가 발달된 것을 그 까닭이다. 그런데 신라의 왕릉에서는 정교하고 찬란한 황금제품이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그 왕릉은 흉노계의 적석목곽분이다. 한편 신라의 왕실에서는 고구려, 백제와 달리 근친혼이 성행했다. 신라 김씨왕조의 出自가 흉노라고 한다면 그들은 2, 3백년간 중국과 한반도에 살면서도 혼례와 장례만은 조상 전래의 방식을 고수해왔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라왕족 김씨의 흉노 出自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신라에서 특히 금 문화가 발달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 북방 유목민의 동복과 뿔잔, 貨泉의 출토, 적석목곽분의 출현에 대하여 막연하게 북방민족의 영향이라고 얼버무릴 것이 아니라 이들이 어느 시기에 누구에 의해 한반도의 동남부에 전래되었는지 구체적이고도 납득할만한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삼국지>의 秦人渡來說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삼국지> 韓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는 것이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그 古老들이 전하는 전승에 의하면 옛날 秦의 사람들이 삼한으로 피난을 와서 마한은 그 東界의 땅을 떼어 주었다. 그들은 國을 邦, 弓을 弧, 賊을 寇, 皆를 徒라고 하는 등 秦의 말을 썼으며, 燕. 齊의 말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魏略>에서 말하기를 그들은 他地에서 흘러온 사람이기 때문에 마한의 제재를 받는다.
삼한시대의 자료가 거의 없는 실정에서 이것은 매우 귀중한 정보이지만 이 구절이 얼마나 진지하게 검토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백과사전에 보면 이들을 燕 지방에 있던 조선의 流民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것은 그들을 秦人이라고 하고 또 그들은 연. 제의 말을 쓰지 않았다고 하는 <삼국지>의 내용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나는 이 백과사전의 설명을 견강부회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秦은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의 秦帝國이 아니라 춘추전국시대의 秦을 가리킨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중국대륙의 서북지역(지금의 甘肅省)에 위치했던 秦과, 산동. 요동지방에 위치했던 燕, 齊는 서로 언어가 달랐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중국대륙 서북쪽 끝 秦의 사람들이 난을 피하여 직접 한반도로 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즉 <삼국지>에서 말하는 秦의 사람들이란 武帝 시절에 김일제와 함께 漢에 투항한 뒤 山東지방에 옮겨 살던 흉노를 지칭하는 것으로써 그들이 왕망왕조 멸망 시에 난을 피하여 한반도로 온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에 秦의 변경지역에 살고 있던 흉노족은 秦과 늘 접촉하고 있었기 때문에 秦의 말을 할 줄 알았던 것이다. 秦의 侯(왕) 및 백성 자체가 원래 漢族이 아니라 흉노계 유목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漢의 무제에 투항한 후 山東지방(燕. 齊의 故地)에서 100여 년을 살았지만 언어는 山東지방과 다른 甘肅 방면의 방언을 썼던 것이다. 甘肅省 武威에는 지금도 김일제 자손의 동네가 있다고 한다. <史記> 및 <漢書>에 의하면 무제의 흉노 토벌 시 김일제와 함께 곽거병에게 투항한 흉노는 4만 명 정도였다. 투항 후 이들은 감숙성에서 그대로 살았지만 일부는 투후의 영지인 산동지방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산동지방에 정착해 살던 그들은 왕망의 몰락 후 요동방면으로, 한반도 서북지역으로, 한반도 남부로, 또는 규슈로 뿔뿔이 흩어졌다. 위에 인용한 <삼국지> 韓伝은 그들 중 일부가 한반도 서해안에 도착했지만 월지국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자 남쪽으로 항해를 계속하여 영산강, 김해, 경주, 일본의 규슈 등지에 정착하게 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들은 경주의 한 모퉁이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생활했겠지만 선진문물을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數 代를 지내는 동안 차차 세력을 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문무왕비문의 ‘투후의 후손이 7대를 전하여’ 라는 구절을 이들이 중국에 있었던 140년간이라고 보면 이 비문과 <삼국지> 韓伝의 내용, 출토유물들이 서로 잘 符合하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탈해왕에 대한 전설이 실려 있다. 삼국유사 탈해왕 편에 의하면 가락국 바다 한가운데에 배가 하나 나타나자 이를 보고 수로왕이 배를 머물게 하려고 하였으나 배는 급히 달아나 계림의 아진포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 <가락국기>에는 완하국에서 바다를 건너 온 탈해가 수로왕과 왕위를 다투었는데 이 다툼에서 패하자 배를 타고 계림의 땅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전설은 혹시 성한왕 일행이 가야를 거쳐 신라에 도착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구전되어 후세에 이와 같은 민간의 전설로 남게 된 것 아닐까?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는 金閼智가 신라왕실 김씨의 시조로 되어 있다. 그렇지만 알지는 신라의 초대 왕 혁거세의 별칭으로도 되어있다(삼국유사). 이 閼智의 閼은 동물의 알(卵)을 의미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智는 존칭어미). 곡식의 알곡을 의미한다고 하여 원시사회의 農耕儀式과 결부시키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KBS의 역사추적에서는 ‘알지’가 알타이어로 금(gold)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왕실 김씨가 금의 문화 민족인 흉노의 후예이기 때문에 시조를 알지(금)라고 한 것이고 姓도 金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알지는 실재했던 인물이라기보다는 시조를 신비적으로 꾸미기 위하여 만들어낸 상징적 허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반면 알지 다음의 2代祖로 알려진 星漢은 실존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星漢은 삼국사기에는 勢漢, 삼국유사에는 熱漢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것은 熱漢이 맞는 것이며, 熱漢의 熱은 불을 訓借하고 漢은 干을 音借하여 표기한 것으로 보고, 불간 즉 촌장이라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또는 熱을 ‘붉은’의 訓借로 보고 赫居世와 마찬가지로 붉은 왕, 즉 태양왕이라는 뜻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알’은 金閼智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초기 신라의 키 워드로서 알영, 아루, 아로, 알천 등에도 나온다. ‘붉은’도 혁거세를 비롯하여 불거내, 벌휴, 비처 등에도 나온다. 그런데 흉노에서는 선우(=왕)의 妃를 閼氏(알씨) 라고 칭했다고 한다. 김일제의 모친도 알씨이다. 신라에서도 알영, 아루, 아로는 모두 왕비이다. 문제는 이 閼을 전통적인 해석, 즉 알(卵), 또는 낱알로 볼 것인지, 아니면 금으로 볼 것인지 이지만 흉노의 알씨는 알(卵)이라기보다는 금이라고 보아야한다. 또 金閼智의 閼과 흉노 閼氏의 閼이 같은 문자라는 것도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또 알이 卵 또는 알곡을 의미한다면 굳이 閼이라는 어려운 문자를 썼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하여튼 이 둘은 전혀 이질적이어서 도저히 서로 연결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문무왕비문의 5행과 6행을 바로 연결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지만 흉노족의 산동지방 거주, 동복. 뿔잔. 貨泉 등의 출토, <삼국지>의 秦人 도래기사 등은 신라왕족 김씨의 조상이 흉노라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왕족 흉노 출자설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문무왕비문의 5행과 6행을 바로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비록 중간에 不明의 문자가 있긴 하지만 문맥상 성한왕을 투후의 7대손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한편 위키백과사전에 의하면 문무왕비문은 문무왕의 선조 7代의 행적을 투후의 故事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라는 견해, 신라왕실을 비롯한 고대인들은 家系를 신성시하기 위하여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 또는 유명한 위인들을 시조로 조작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 등이 있다고 한다. 과연 문무왕비문에는 투후 김일제 외에 火官之后(순임금), 秦伯(진의 穆公) 등이 나온다. 이들은 신라왕실이 家系를 신성시하기 위하여 끌어들인 인물일까? 그래서 실제로는 성한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
<사기> 흉노열전 및 <후한서> 남흉노전에 의하면 흉노의 시조는 夏의 夏后氏(이름은 淳維) 라고 한다. 춘추전국시대의 흉노는 중국대륙 서북방면에서 활약한다. 또 춘추전국시대의 秦은 흉노계의 제후국이었다. 그러므로 신라의 왕족이 흉노계였다면 그들이 火官之后와 秦伯을 자신들의 선조라고 믿고 있었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들이 문무왕비문에 火官之后 와 秦伯을 기록한 것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말한 것이지 家系를 미화하기 위하여 적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火官之后나 秦伯이 실제로 신라왕실의 조상인가 하는 문제는 별도로 하고 문무왕비문에 그들이 언급된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에는
‘신라인들은 스스로 少昊(=金天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씨라 한다고 하는데 김유신碑에도 역시 軒轅의 후예요, 少昊의 자손이라 했으니 남가야의 시조 수로와 신라의 왕실은 성씨가 같은 셈이다.’
라고 기술되어있다. 신라시대에는 신라와 가야의 왕족 김씨가 같은 뿌리로서 선조가 三皇五帝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인식이 왕족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있었음을 시사한다.
흉노는 누구인가? 흉노는 漢代의 중국에게는 치욕을 안겨준 두려운 적국이었다. 漢의 高祖는 白登山에서 1주일 동안 흉노에 포위되었다가 가까스로 구출되었으며, 흉노의 왕에게 漢의 공주를 시집보내고 매년 술. 비단. 곡물을 바친다는 그야말로 굴욕적인 조약을 맺지 않으면 안 되었다. 흉노는 그렇기 때문에 악당 중의 악당으로 역사서에 기록되어있는 것이다. 家系를 빛낼 목적이었다면 신라왕실은 과연 그런 흉노출신 김일제를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했을까? 흉노족이라고 볼 수도 있는 火官之后와 秦伯이 김일제와 함께 기록되어있는 것을 단지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家系를 미화하고 신성시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왜 하필 흉노와 관련이 있는 인물들만 고른 것일까?
문무왕비문에 ‘투후 祭天之胤(=김일제)이 7代를 전하여’ 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성한왕이 반드시 김일제의 직계후손은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가 김일제의 시대로부터 7세대 뒤의 흉노계 인물임을 말해준다. 이밖에 비문에 적혀있는 다른 말들에 관해서도 인터넷을 통하여 그 뜻을 알아보았다.
派鯨津氏 - 鯨津은 ‘고래나루’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경주앞바다를 가리킨다. 경주앞바다에서는 예로부터 고래가 많이 잡혔다고 한다. '派鯨津氏'는 김씨계의 무리가 경주앞바다로 왔다는 뜻이다.
남으로는 O桂의 O와 이웃하고 - 桂는 계수나무로, 일본이 원산지이다. 따라서 신라가 왜와 이웃한다는 뜻이다.
(북으로는) 황룡을 맞아 주몽을 태우고 - 黃은 易에서 중앙이다. 신라인들이 천하의 중앙에 위치한 고구려를 신라의 영역으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黃龍駕朱蒙'은 주몽이 김씨계의 선조였다는 뜻이 아니고 신라가 고구려를 부리게 되었다는 자랑조의 문구이다.
白武를 이어받아 - 고구려는 北에 있어 玄武라고 하였는데, 백제는 西에 있으므로 白武라고 한 것이다. ‘白武를 이어받아’는 백제를 병합했음을 둘러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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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21년, 漢의 武帝는 흉노에 대한 대공세를 펼쳤으며 흉노는 패하고 흉노의 사령관이었던 휴도왕은 내분으로 살해된다. 그리고 그의 아들 김일제는 4만 명의 흉노병과 함께 곽거병에게 투항했다. 이들은 漢의 수도 長安 근처에 수용되어 살았지만 김일제가 列侯로 봉해지고 산동지방에 영지가 하사되자 그들 중 일부는 김일제의 후손을 따라 산동지방으로 이주하였다. AD8년, 왕망은 쿠데타로 漢 왕조를 무너뜨리고 新이라는 새 왕조를 세웠지만 AD25년에 멸망한다. 왕망의 외척이었던 김일제 일가를 비롯한 산동지방의 흉노족은 탄압을 피하여 뿔뿔이 흩어졌는데, 그들 중 일부가 김해, 경주 등지에 도착했다.
전통적인 농경부족사회에서 외부의 충격 없이는 국가가 발생하지 않는다. 백제가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것은 부여족의 南下에 의한 것이었으며 규슈에 왜국이 탄생하는 것은 韓族의 渡海 南下에 의한 것이었다. 가야와 신라가 부족사회에서 벗어나 고대국가로 발돋움하는 것도 이 지역에 정착한 흉노족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140년간 중국에 거주하는 동안 상당부분 漢化되었지만 적어도 장례문화만은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였다고 본다. 이것이 신라에서 적석목곽분이 출현하는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이들은 김씨왕조의 첫 왕인 미추왕이 262년 즉위하기까지 2백년 간 신라의 땅에서 살면서 신라에 적응하고 신라문화에 동화되었다. 알지라는 말은 원래 흉노의 금(=알지) 및 그와 연관되는 閼氏에서 나왔지만 신라의 시조 난생설화 또는 農耕儀式의 영향을 받아 閼氏의 알이 동물의 알 또는 곡식의 표피를 벗긴 낱알로 그 의미로 바뀌고 김알지라는 시조의 이름이 탄생한 것이라고 본다.
광개토왕릉비가 고구려를 강국으로 만든 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듯이 문무왕릉비도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다. 광개토왕비문이 고구려왕실의 기원부터 서술을 시작했듯이 문무왕비문도 신라왕실의 기원부터 서술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신라왕실의 조상으로 火官之后(순임금)와 秦伯(진의 목공), 秺侯(김일제)를 기록한 것이라고 나는 본다. 흉노족은 비록 漢의 武帝에게 패하였지만 그 흉노족의 一派는 한반도로 건너와 신라를 건국한 뒤 마침내 백제와 고구려를 꺾고, 중국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한반도에 통일국가를 이룩하였다. 문무왕릉비는 흉노의 후예 신라왕족이 그 사실을 의기양양하게 적어놓은 삼국통일의 기념비라고 나는 생각한다.
첫댓글 문무왕릉비의 해당 내용에 대해서 이 사이트에서 다른 분들이 쓴 글이 있다고 기억을 합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 혹시 다른 분들과 좀 더 진지한 의견 교환을 원한다면, 먼저 다른 분들의 의견을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 좀 더 꼼꼼하게 분석한 글이 제법 있는 걸로 기억을 하는데, 최소한 그런 글들을 다 섭렵하고 그런 주장을 뛰어넘는 새로운 주장을 제기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 진지한 토론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모단님과 같은 의견입니다. 이 주제를 생소하게 느끼실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카페에 오래 있는 사람들에게 이 주제는 여러 번 논의가 있었던 내용입니다. '김일제' 라든가 '투후' 등으로 검색해 보시면 많은 글들을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이 글 속의 내용들 중에도 일부는 논파당한 적이 있는 등 검색해 보시면 참고하실 부분들이 꽤 있으리라 봅니다.
저도 김씨왕조가 흉노계라는 게 상당히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씨왕조가 흉노계가 되면 안되는 이유가 있을까? 중화를 외치던 우리의 자존심이 상하는 걸까요?
윗분들께서 신라 김씨의 김일제 후손설에 대해 부정적인 말씀을 하시는 맥락이 '중화를 외치던 자존심'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해야 할 것 같군요. 토론에는 맥락의 파악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왜냐면 불사조님께서 말씀하시는대로라면 '신라 김씨 김일제 후손이 맞다 = 참신한 해석 / 신라 김씨 김일제 후손 아니다 = 중화 자존심'의 구도가 되어버리는데, 이는 김일제 후손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측을 정당하게 비판하는 방법이 되지 않습니다. 김일제의 후손인가 아닌가는 세밀한 고찰을 통해서 따져볼 일이지, 이런 식으로 논할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문무왕릉비를 해석해 보면 빠진 부분이 많아서 신라 김씨가 김일제에서 온 것인가 또는 실제로도 그렇게 써 놓은 것인가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문무왕릉비가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고 하여 신라 김씨가 김일제의 후손인가에 대하여는 중국정사 조선전과 삼국사기의 기록과 비교 검토가 필요하다.
문헌기록을 보면 신라 김씨가 김일제에서 온 것인지 전혀 기록이 없다.
문무왕릉비의 기록이 맞다고 주장은 어디에서 온 것이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중국정사조선전을 읽어보면 진나라사람들이 진시황 영정의 공역을 견디지 못해 도망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즉, 연제노초에 살던 사람들이 도망을 왔으니 대개는 흉노인들이다.
기씨조선(이 사람들이 위만에게 패하여 마한(삼한)을 세웠다)이 이들을 동쪽에 안치하였고, 이들이 곧 신라의 한 부류를 형성하였으니 신라인이 흉노의 후손이라는 말도 타당한 부분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진나라 사람들이 도망온 시기는 진나라때이고, 김일제는 전한시대의 사람이다.
어떻게 선대의 사람들이 후대의 사람의 후손이 되겠는가?
문무왕릉비의 기록은 그저 옛사람들의 기록이고 사실성의 여부는 좀 더 따져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옳다 그르다를 따질 것은 아니고 그저 그런 기록도 있나보다하고 폭넓게 생각하였으면 하는 바랍입니다.
문무왕비문 말고도 적석목곽분과 같이 문화적인 측면에서 검토해 볼만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투후의 후손이라고 선언할 수는 없을 지라도 김씨왕조가 흉노계가 아닐까 하는 것은 충분히 개연성 있는 가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야 이글을 봤네요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김씨왕조의 역사와 선조인식은 제 생각과 같습니다
그리고 선조에 관한 일정 부분은 출토된 금문을 통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컨데 '중화'란 한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철기문명을 장악했던 관칭이었으며, '알'이란 짐승의 알이 아니라 본디 '해'를 뜻하는 말로 '불'이라는 2차적인 뜻을 갖습니다 이것의 의미가 확장되어 둥근 모양을 가진 형상을 '알'로 표현하기에 이른 것이죠
또 진나라 목공의 사당에서 찾아낸 당시의 기록에는 '하족을 정복/지배하라'는 유시가 남겨져 있는 것을 보면 진나라는 하족과는 적대세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문무왕비문에서 흉노족의 후손이라는 우리의 인식은 일정부분 달리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씨의 시작은 하족이 아니었으며 세의 불리에 따라 7대를 한나라에 의탁하였으나 외척인 왕망과 연합하여 한나라를 뒤집은 후 얼마 가지못하고 실패로 끝나자 만주를 거쳐 반도의 동남부에 오게 된 것으로 봅니다
비문에서 흉노(이는 한족의 감정적 표현이라 맘에 안듭니다만)를 거론한 것은 김씨의 출자가 북방기마민족임을 알리는 것이고 최초의 중화는 북방민족의 대륙개척을 의미한다고 판단됩니다
참고로 반표, 반고 부자는 김일제의 외손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