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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당 이재신이라는 분이 쓴
기허당이라는 제목의 책을 며칠째 읽고 있습니다.
기허당이라는 이름은 바로 영규대사의 법호로
임진왜란 당시에 서산대사 사명대사등과 더불어
국난을 극복하고자 승병을 일으키고
임진왜란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청주성을 탈환하고
곡창지대인 금산 전투에서 안타깝게도 패배하신 후에
어느 기록에는 금산에서 돌아갔다 하고
어느 기록은 공주 갑사 근처까지 오셔서
돌아가셨다 하는 두어가지 설이 있습니다.
공주에 대사의 묘소가 있는 것으로 보아
후자가 더 정확해 보입니다.
지금 책의 초반부를 읽으며
이재신작가가 써놓은 부분을 보다 보면
기허당의 아버지는 박민이라는 분이고
어머니는 최옥으로 나오는데 소설이기 때문에
그와같은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지
아니면 실제로 역사적인 고증을 통해
대사의 부모님 이름을 밝히셨는지는 아직 모르겠는데
현재 비문에는 밀양박씨라고만 나오고
부모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비록 소설로 재구성 한것이기는 하여도
어린 나이부터 좋은 동무들과 훌륭한 스승을 만나
이십여세가 되도록 여러 가지 분야에서
문무를 겸전한 젊은이로 커나가면서
왜구들과의 관계나 불가와의 인연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실감나게 기록한 것을 보며
이와같은 노력을 통해서 비로소 구국의 승장
한분이 탄생되였구나 하는 수긍을 하게 됩니다.
오늘은 갑사 경내 표충원의 영규대사 비문을
공주 서예학원 김연뢰 선생님으로부터 전해 받고
1994년 공주군과 공주 사암연합회에서
계룡면 유평리 영규대사 묘소를 성역화 할 때
묘소 아래에 순의실적비를 하나 세우게 되었는데
김연뢰선생님이 비문을 지으시고 원효사 일화스님이
비문을 써서 새겨 놓은 비가 아직도 있음을 생각합니다.
갑사 표충원의 비문은 위당 정인보 선생이 지으셨는데
한문으로만 되어 있으므로 해서 알아보기 쉽지 않다가
긍암 김연뢰 선생님이 공주군청으로부터
묘소에 세울 비문을 지어주십사 하는 청을 받고
현토를 해서 알아보기 쉽도록 하신 내용의 복사본이고
묘소의 비문은 한자와 한글을 혼용해서 만든 비문으로
원효사 카페에 실려져 있는 내용입니다.
요즘 불교계에서는 호국의승의 날을 지정하여
숭고한 희생정신과 나라사랑의 정신을 기리자
하는 움직임도 있기도 한 때이므로
공주 불교계는 영규대사에 대한 연구와
현창사업을 지금보다 더 크고 올바르게
해 나가자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가운데
30여년전 갑사에 계시던 광철스님이
영규대사에 대한 보고서와 같은 글을 남기신게 있어서
카페에 실어 두었는데 내용이 너무 길다 싶어
세차례 정도로 나누어 보내드리려 합니다.
오늘 우선 1부를 보내드립니다.
영규대사 그 생애와 임진왜란-사문 광철光徹스님 기록
도서출판 보림사
1.영규대사
2..청주대첩
3.금산대첩
1.영규대사
대사의 성은 밀양박씨, 법명은 영규,호는 기허당이며 서산대사의 수제자로서 사명당의 법형이 된다. 공주군 판치에서 탄생하셨고 용모가 엄장하고 신장이 11척이나 되며 음성은 뢰정이 울리는 듯 했다. 고명한 지감은 천문지리를 통달하였고 장중한 위풍은 대장부의 기상이었으니 일찌기 서산대사의 문하에서 정법안장의 도를 배워 무상보리를 증득하였을 뿐 아니라 유불 양서에 무불통지하였다.
서산대사의 명을 받아 충청도 계룡산 갑사에 주석하며 불도를 강론하고 제자를 양성하며 인재를 구득하여 국난에 대비하고 있었다.
대사는 당시 갑사의 조실로써 일도 승통이며 국중대덕이었다. 이와같은 지위에서 도내 승도를 지도하였고 일찌기 조중봉선생과 더불어 교의지분이 있었으니 중봉선생은 율곡선생의 수제자로써 성리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학자였다.
강직한 성품은 고관대작을 용납치 아니하고 정통한 천문은 국가장래를 염려하는 우국지사였으며 충의지사와 도학군자가 아니면 상종하지 않는 엄정한 위인이었다.
이같이 엄정고결한 인사로써 당시에 천대받던 승려계의 영규대사와 더불어 구구토적하고 생사동거하고자 국은 약속을 신명께 맹서하였으니 가위 대인이라야 능지대인이 아닐소냐.
중봉선생 문집 통론석도문에서 일반승려를 '여'라고 하칭하고 승장 정만억을 '연기승'이라 평칭하면서 오직 영규대사만은 '갑사화상'이라고 존칭한것으로도 미루어 알수 있다.
당시 국법은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항하며 국풍은 승려를 하대하고 학자를 존경하던 시대에 유교학자로부터 존경을 받은 영규대사는 학문지식과 예의덕행을 겸비한 훌륭한 분이었다.
중봉선생의 안중에는 고관대작도 보이지 않커늘 하물며 천인으로 하시하는 불가의 산중 부목으로 노둔무식한 사람을 존경하였다면 이는 어불성설이며 문불성장이다.
대한민국의 오늘의 현상이 전란시대가 아닌 30년 류전상태로 유지하여 오는 바 가령 오늘날의 갑사의 무식한 부목이 충청도 각 사찰의 승려에게 통문을 돌려 국가를 위하여 반일동안 부역할 것이니 갑사에 모여 부목의 명령을 들으라고 한다면 어느 사찰 승려가 갑사 부목의 명령에 따라 부역에 나올것인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만일 오늘날에 갑사 부목이 800여 승려를 명령하여 부역에 종사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거든 시험삼아 800승려가 갑사 부목의 명령에 복종하였다는 증거를 만인앞에 보여준 연후에 영규대사도 갑사 부목의 지위였다고 하면 혹은 인증할 사람이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부역이 아니라 전장에 나가서 싸우다 죽자고 하면 어느 승려가 갑사 부목을 따라 다니며 전쟁하겠느냐?
이것은 하나의 정신병 환자가 하는 말이지 정신 있는 사람의 말은 아닐것이다.
사실이 전부하고 이치에 부당한 망설을 지어 대인군자의 명예를 손상하고 고승대덕의 인격을 멸시하여 만고영웅의 공훈을 횡령하는 자는 천고의 죄인이다.
그런 고로 공자는 사관의 직분이 아니면서도 춘추필법을 감행하여 필즉필 삭즉삭 하였으니 오늘날 대사의 와전된 역사를 정법안장으로 판단하고 춘추필법으로 광정하지 아니하면 대사에 대한 부정 역사는 천추만년을 내려가며 정화할 길이 없을 것이다 . 대사는 망국의 비운에서도 국가민족을 위하여 악마군중을 소탕하고 부정행위를 정화하였거늘 우리는 대사에 대한 부정역사도 정화하지 못하니 이나라 민족이라고 자처할 명분도 서지 않는 것이다.
대사 영전에 부끄럽고 죄송하기 한량없다.
서산문하에 무식하고 노둔한 제자는 없었다.
유불선 삼교를 통하여 박학다문한 제자들이었기에 서산대사는 유불선 삼가구감을 편찬하여 제자들을 교훈하셨던 것이다.
충청도는 그 당시에 전략상 중요한 지역일뿐 아니라 불타의 인연이 맺혀있는 신성한 지역이었다. 우리나라 불법은 천상 용궁 인간의 삼대역사를 이루고 있는 세계에 유일한 국가이다. (이상 5ㅍ)
계룡산 천진보탑은 천하역사를 통하여 불타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고 금강산 유점사는 용궁역사를 통하여 53불을 봉안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신라 2대 남해왕 즉위 원년에 창건된 절이다. 따라서 중국 사찰 기원에 비하여 우리나라는 60년이나 앞서서 건립한 것이다.
지리산 운상원 칠불암은 인간역사를 통하여 장경을 보장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1천 9백년전 가락국 김수로왕 당시에 창건되었고 갑사는 1천 7년전에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되었다.
이와같이 3대 역사를 소장한 우리나라에 서산대사는 먼저 영규대사를 계룡산에 주석케 하였고 다음은 유정대사를 금강산에 주석시켰고 다음은 처영대사를 지리산에, 의암대사를 구월산에, 신영대사를 용문산에 각각 주석케 하고 서산대사 자신은 스스로 묘향산에 주석하시며 장차 국왕을 만나 국가대사를 의론하고 국왕을 보호하고 국난을 평정하시려는 경륜지도를 흉중에 품고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앞날에 국난이 일어나면 국왕은 의주로 파천할 것이고 왜적들이 청주에 대군을 집결시켜 금산의 곡창을 점령할 때 국가의 존망은 바로 이곳에 달렸으므로 이처럼 중대한 난사를 감당할 인물이 문하 제자중 오직 영규대사 한사람뿐이라고 판단하여 영규대사를 특별히 충청도에 주석케 했던 것이다.
영규대사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일본의 악마를 소탕하고 국가의 운명을 만회하기 위하여 상천이 특별히 비상한 인재를 키운 것이다.
청주와 금산대전에서 세운 혁혁한 전공은 육도삼략과 손오병서를 능가하는 선무장법이 아닐 수 없으며 영규대사야말로 지략과 무예를 겸비한 장수였다.
대사는 만고비상지재로서 만고비상지공을 세웠으니 이는 만고비상지사를 이룬 것이라 하겠다. (이상 6ㅍ)
대사는 이와같이 존엄한 존재이언만 불행하게도 갑사 부목이라는 낭설과 우둔무식한 위인이라는 천명을 면치 못하였으니 후인으로서 송구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정종대왕은 임란당시에 망국의 비운에서 구국의 행운으로 경천위지지량과 선건전곤지력을 발휘한 서산대사의 구국원훈에 감탄하시어 전국 6도 지방에 표훈사와 수충사를 세워 서산대사 영상을 봉안하고 에조에 명하여 향사를 올릴 때 유공한 제자들을 좌우에 배향하고 친히 제문을 지어 영전에 낭독케 하였다.
그중에 하나가 충청도 갑사 표충사이며 이 표충사 문 앞에 기허당 영규대사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문은 대사가 입멸한 뒤 350년에 이르러 당대의 문장가였던 정인보선생이 집필한 대사의 행장문이다. 그러나 그 내용과 필자의 견해가 다소 달라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일국의 명문대가로 학계의 신망이 두터운 선생의 문헌을 일조에 번복한다는 것은 사학게에 일대 충격이 아닐 수 없으며 세인의 이목을 집중케 하는 난처한 일이라 선생에 대하여 백배 사죄를 드리는 바이다.
영규대사의 혁혁한 업적을 찬양함에 있어 선생과 필자는 동일한 정성이나 다만 제가문헌을 다방면으로 탐사고증하고 당시의 사정을 판단하여 취사선택함에 잇어서 다소의 견해 차이가 있음을 부득이한 일이다.
필자가 탐사한바로는 오늘 날 대사의 비문과 지난날 감사의 만록을 볼 적에 정금형옥이 진토에 묻혀 빛이 가려져 있어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어 탐사고증하여 금옥광채를 백일하에 빛내고자 하는 것이 필자의 충정이며 염원일 뿐이지 선생의 문장 집필을 상해하려는 야심은 추호도 없음이 솔직한 필자의 심정이다.
따라서 강호제현의 양해를 바라면서 후세 사관을 위하여 선세의 사적을 은위치 아니하고 춘추필법의 사명으로 사실을 필지하고 위허를 삭지하는 바이다.(이상 7ㅍ)
문소만록聞韶漫錄(조선 후기의 문신 윤선각(尹先覺:1543~1611)의 만필집.1책. 필사본. 판본으로 〈대동야승 大東野乘〉 권55, 〈한고관외사 寒皐觀外史〉 권33·34, 〈패림 稗林〉 제6집, 〈광사 廣史〉 제9집 소수본(所收本)이 있다. 지은이 가족들의 일화와 사적, 시정(時政)에 대한 기록 등이 실려 있다. 특히 임진왜란 전후에 대한 기록이 많다.이상 보완)은 실소허다 하며 진위혼잡한 문록이며 여기에 지방의 전설이 흘러 나오고 역사 전문이 상속되었는데 대사의 행장 비문을 지을 적에 이 문헌을 고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일면의 추상을 해보기도 한다.
충청감사 윤선각은 사문만록에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공문 상소에도 기만보고하였던 것 같다.
따라서 조정에서 이러한 기만사실을 뒤늦게 발견하고 삭탈관직한 일도 있다.
조정 인사들중에 감사의 허위보고를 기본으로 삼아 각기 자기 문서에 기록한 것이 후세에 역사자료로 남게 되었음을 역사를 전공하는 후학들은 신중히 고찰하여 진가사정을 판단하고 먼저 올바른 역사관을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본인은 생각하는 바이다.
풍신수길은 일국 병력을 다하여 살생범죄한 악마 괴수적인 요물이며 서산대사와 영규대사는 천지정기를 발휘하여 악마군중을 소탕하고 억조창생을 구제하신 인물이다.
세인은 권모술수와 부귀영화를 능사로 자랑하거니와 서산대사와 영규대사는 도의정신과 자비사상을 평생의 보배로 삼은 도인이시다.
고금 승속간에 서산대사와 영규대사를 살생한 범죄자라 하기도 하고 혹은 명승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권승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이는 서산대사와 영규대사의 본의와 자성세계를 알지 못한데서 나온 말이다.
명승이니 권승이니 하는 말은 구구히 변론할 필요조차 없거니와 살인 살생지설은 후세에도 또한 말 할자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불타 교훈에 제일 불살생은 자비사상에서 나오고 자비사상은 도의정신에서 이룩되고 도의정신은 자성진리에 있는 것이다. 자성진리를 무시하는 자는 도의정신이 없는 자이고 도의정신이 없는 자는 자비정신을 지니지 못한 자이다. 자비사상을 갖지 않은 자는 살생범죄를 자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풍신수길이야말로 자성진리를 무시하고 살생범죄를 감행한 악마 괴수의 요물인 것이다.(이상 8ㅍ)
서산대사와 영규대사가 살생범죄자라면 서산대사와 영규대사는 풍신수길과 동일한 인간일 것이며 풍신수길과 동일 인간이라면 서산대사와 영규대사가 승려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가서 일본을 침범하고 무죄한 일본 약민을 살륙했을 것이 아니겠는가? 어디에 그런 역사적 사실이 있느냐?
오늘날 만국 법정에서 사법판사가 살인범죄자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그렇다면 사법판사와 사법집무자는 매일같이 살인범죄하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이와같이 매일 선고집행하여 살인죄를 다스릴 자는 또한 누구일까? 세상에 판사를 보고 살인 범죄자라고 할 사람이 있겠는가? 인간세상에 살인강도를 처형하지 ㅇ낳고 방치하면 선량한 인간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으며 악마 살인귀가 세상에 판을 치면 세상은 멸망하게 될것이다.
그러므로 서산대사와 영규대사는 자성진리 안에서 도의정신으로 자비심을 발휘하여 악마 살인귀를 지상 천하에서 소탕무제한 연후에 인류평화를 이루고 태편성대의 불국세계를 건설하려 한것이 본래의 이상이었으니 후인들은 착각하지 말기를 바라는 바이다.
서산대사와 영규대사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정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악마군중을 소탕하였으니 이는 천하 후세에 수범이 되는 귀중한 업적을 남긴 분들이다 .
서산대사와 영규대사는 부귀영화나 황금권력을 보배로 삼는 녹록한 무리가 아니라 청허당 서산대사는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이시며 만고의 대성인이요 기허당 영규대사는 무상보리를 증득한 십지보살이시며 만고유일한 영웅이시다.
옛날에 강태공은 백척간두에서 대국천하를 평정한 것이 아니며 제갈량은 적수공권으로 삼분천하 한것이 아니다.(9ㅍ)
만약 영규대사가 삭국시대에 제갈량의 병력을 소지하였다면 불과 반년 안에 중국 천하를 통일하였을 것이며 임란 당시에 일국 병력을 통솔했다면 몇달 안에 국토를 회복했을 것이며 임란 이전에 일국 대장의 지위에 있었다면 왜ㄱ적이 비록 백만대군이었드라도 촌토도 범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영규대사의 하루 전공은 충무공의 백일 전공을 능가하는 공적이다.
연암문집에는 임진왜란 7년 사이에 적군의 성진을 탈환한 자는 오직 영규대사 한사람뿐이라고 하였다. 대사는 산중 승려의 신분으로 백척간두에서 적수공권으로 일어나 십만대군의 인후를 단절하고 곡창을 분쇄하였으니 대사의 전진 병법은 천고영웅이 측량치 못하는 비상한 병법이었다.
임진왜란 7년 사이에 5대전첩이 있었으니 첫째는 청주대첩이요 둘째는 노량대첩이요 세째는 금산대첩이요 네째는 평양대첩이요 다섯째는 한산대첩이다. 그중에 청주대첩과 금산대첩은 영규대사의 독점무대인 양전대첩이었다.
오늘날 통사로는 사학계를 비롯하여 정부인사와 일반국민은 한산 진주 행주의 3대첩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진주 행주는 대첩이 아니라 성중에서 수비만 한 방어전이었으며 적진대군을 공격하고 탈환한 것이 아니다. 적진성지를 탈환하는 것은 어려운 전술이지 성중에서 수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전투가 아니다.
성벽은 병력의 수 10배에 필적한다. 그러므로 같은 병기와 병력으로 성중에 있는 군사가 만명이라면 성밖에 있는 군사는 10만명이라도 성을 빼앗기가 어려운 것이다.
진주 행주는 적군이 와서 빼앗으려다가 빼앗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간 것이지 우리 군사가 빼앗은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0년 전에 서산대사는 산사에서 인재를 양성하여 국난에 대비한 경륜이 이미 흉중일각에 기국과 같이 설계되어 있었다.
세월을 두고 산천형세를 관찰하시며 길흉안위와 흥망성쇠의 운수를 거울같이 판단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영규대사를 충청도에 명하신 뜻은 천진보탑 성역을 보호하는데도 깊은 뜻이 있거니와 국가의 명맥을 회생하는 중대한 관문을 담당할 사람은 3천제자중에 오직 영규대사 한사람뿐이었기에 기허당 영규대사를 명하신 것이다.
이는 서산대사 도량전량에서 반부 도량을 의미하는 것이다.
청정법신비로자나불 십신 명호중에 청정 허공신이 그 하나이다. 그러무로 청허라는 당호는 청정허공신을 의미하는 것이니 즉 청정법신불을 의미하는 것이다.
선조대왕은 대인을 알아보는 지감이 있는 군왕이어서 퇴계율곡과 서산대사를 존경하였다. 임진왜란이 난 수년 뒤에 서산대사를 친견하시고 '고명산두앙이러니 금세여시래' 라 하였다. 이 글 뜻은 '놓은 명성을 태산과 북두같이 우러러 사모하다가 오늘날 만나보니 과연 세상의 여래이십니다' 하는 뜻입니다.
충무공은 왜군의 십만대군이 팔도전역을 점령하고 국왕이 구중궁궐을 떠나 의주변성에서 망국의 한을 품고 앙천통곡할 때에도 서산대사와 영규대사가 진군을 지휘하니 지상에 인물이 없다고 개탄하질 않았다.
대사가 왜적의 인후를 단절하고 곡창을 분쇄한 연후에 서산대사가 국왕대신을 호위하여 서울 장안에 환도하니 왜적이 남하하여 해안변지에 잔재할 뿐 팔도전역이 거의 회복되었으나 7년 장기간에 적성 일진도 탈환하지 못하는 것을 본 충무공은 지상에는 인물이 그다지도 없느냐고 몇번이나 개탄한바 있다.
서산대사와 영규대사가 진중에서 지휘할 적에는 일국강산이 왜국천지가 되었어도 인물이 없다는 우려와 개탄은 하지 아니하였었다. 그러나 서산대사와 영규대사가 진중에 부재할 때는 일국 전역이 거의 회복되었는데도 충무공은 지상에 인물이 없음을 개탄하고 우려하였으니 대인이 대인을 알아보는 안목을 갖는 것으로 시사정세를 판단하는 경륜과 국가장래를 우려하는 선견지명은 부귀영화에 도취한 심상한 무리들이 따르지 못할 높은 경지인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당시 인물은 서산대사와 영규대사 그리고 충무공뿐이었음을 알수 잇다. 서산대사와 영규대사 충무공은 일대의 인물이 아니라 만고에 특출한 인물이었다.
서산대사가 영규대사에게 기허당이라는 법호를 내린 뜻은 벽력이 허공을 움직이며 용마기준과 같이 달리는 위엄과 용맹을 의미하여 기허라고 명한 것이다.
나라에서는 진위장군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니 강화와 시호는 대사의 인격과 기상과 공적을 잘 표현한 것이다.
영규라는 뜻은 영명한 지혜를 뜻하고 금옥같은 보배를 뜻하는 것이다. 서산문중에 제자들의 명호가 대개 항렬자로 지은 제자가 많이 있는 것을 보면 대사의 법명은 규圭가 아니라 珪자가 정명이다. 제자들중에 영주대사 항규대사가 있는 것으로보면 규자로 추측이 되며 갑사 사적비문에 珪자로 되어 있으니 대사의 법명은 영규靈珪임이 분명하다.
감사는 산중승려가 국가에 대공을 세웠는데 일도의 삼권을 장악한 자신의 처지는 팔만대군이 일조에 패산한 처지인지라 감사의 체면으로 세상에 머리를 들 수 없어 자신의 체면을 살리고자 청주대첩을 감사의 명의로 돌린 것이다.
당시 조야에서 영규대사의 공적을 찬양하니 그 명성이 일국에 진동하고 왜적은 간담이 서늘해졌고 중국에 보낸 국왕의 보고로 조선국 재생의 희망을 가지고 대군을 지원한 하나의 동기가 될만한 일이었다.
이와같이 대사의 명성은 삼국천지에 떨치는 위풍이었으니 청주대첩을 감사의 명의로 돌려 대사를 무능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자니 무식과 노둔과 부목등 을 날조하게 되었다. 감사는 대사에 대한 질투와 감정으로 그와같이 한것이 아니었고 자신의 체면과 명분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조야인사들은 감사의 선전문언에 의거하여 각각 기록했기 때문에 이것이 후세 사학의 자료가 된것이다.
조정 비변사 당국에서는 '승 영규는 불유대공이라 기위인재기가 역비상하니 고위선상하고 사지환속이라'하여 장차 크게 등용할 의사를 두고 있었다. 대사는 관작이나 공명은 추호도 바라지 않는 초연한 인간으로서 진속을 초월한 도인이며 위풍이 당당한 대장부이며 천고미발지병법을 자유한 장재이며 청고난성지대공을 성취한 영웅이며 국가대난을 선견한 철인이며 정법안장으로 사불범정의 도력을 방광한 보살이며 일인지명이 삼국천하에 위진한 장군이며 신자뢰음은 산하정기를 발췌한 인물이며 심성덕행은 만세사표의 인물이었다.
의라. 불행으로 경륜포부를 실현하지 못하고 중도 하세하였으니 대사의 불행은 국가의 불행이요 민족의 불행이며 역사의 불행이다.
우리는 대사의 고매한 정신과 장렬한 공적과 존엄한 인격을 본받아 인류평화의 위대한 사업을 성취하는 것이 후인으로서 대사의 유지를 받드는 도리가 되는 것이다.
본인은 대사의 업적을 십분 탐구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금산 보석사 주지 도진화상이 대사를 추모하는 뜻에서 ㅇ2년간 추모행사를 받들어 오던 중 군종법사단장 권오성화상이 대사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여 후세에 수범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황진경 종사의 허락을 받아 총무원 주최가 되고 군종법사단이 주관하여 의승 영규대사및 800의승 추모대제를 금산전적지및 대전지방에서 거국적으로 봉행하기에 이르렀다.
이 뜻깊은 행사를 앞두고 국제불교도협의회 상임이사 이건호 거사의 요청에 따라 대사의 업적을 집필하기에 이르렀다. 박두한 시일에 급주하는 필기와 부족한 사고와 단문한 식견으로 대사의 위용과 대업을 발췌하지 못하는 바를 본인으로서는 죄송하고 유감스럽게 여긴다. 다만 제현 군자와 더불어 성의를 같이 할 따름이다. 뒷날 철인 군자가 다니 나와 대사의 업적을 십분 발명하여 주기를 바라면서 금반 행사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본인은 10년전에 갑사에 안거하면서 영규대사의 업적과 인물을 묵묵히 참상할제 세상에서 말하는 대사의 업적과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당시 갑사 주지 장이두스님과 총무 김일봉스님의 후원을 받아 서울 녹야원에서 기거하면서 2년여의 세월을 두고 매일같이 도서관에 출입하면서 왕조실록을 위시하여 국사야사를 두루 열람하였으나 더 상세한 기록을 발견치 못하였다. 불과 10일 이내면 충분히 고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으나 댓의 역사를 2년이 지나도록 탐사하였으나 미흡한 감이 너무 커 아직도 석연치 못하다
불기 2526년 음 9월 17일
사문 광철 감수 근지
예전에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게 되면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이라는 맹서문을 같이 외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 순간에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라는 문구로 바뀌는 것을 보고 이것은 아닌데 하며
반대의 의견을 내기도 하여 보았지만 울림없는 소수의 의견으로
그치고 만 적이 있습니다.
'조국과 민족의' 라는 단어가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으로
바뀌어 버린 사실에 대하여 국민들은 대체로
바뀐 줄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바뀌었다고 느끼면서도 왜 바뀌었는지 의문도 품지 않으며
누군가 문제 제기를 하면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
하고 오히려 반문을 하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조국과 민족이라는 말은
아마도 최소 오천년 역사를 가진
배달겨레만이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고
심지어 현재 사는 국가를 달리 하고
외국으로 이주해서 사는 사람일지라도
한민족의 후예들이라면 누구나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공동체의 마지막이자 양보할 수 없는 우리의 표상입니다.
그런데 조국과 민족이라는 말이 무슨 큰 잘못이라도 되는 양
한순간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이라고 바뀌고 보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이제 건국한지 채 칠십년도 되지 않는
신생국가에 불과한 모습을 스스로 드러낸 꼴이 되었습니다.
엄밀히 말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이름은
한시적인 나라 이름일 뿐이어서
훗날 나라 이름을 바꾸거나 다시 만들게 되면
당연히 없어질 수 밖에 없는 그런 이름인지라
대한민국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없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왠지 모르게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모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스스로의 힘으로가 아닌
신생 대한민국이 만들어지던 때로 돌아가
건국절이라는 날을 만들자고 주장하는
얼빠진 자들도 생겨나고 있는 시절이니
참으로 한심하고 부끄러운 지경에 다름아닙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조국과 민족의 라는 말을
입에 떠올리는 것과 자유롭고 정의로운 이라는 말을
입에 떠올리는 것과는 그 의미가 주는 가슴 뭉클한 그 무엇이
완전히 반감되고 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정말로 자유롭고 정의로운 나라인가 하는 부분에 가서
그렇다 라는 대답을 이끌어 내기에는 조금 모자라는 까닭입니다.
그런 현대사를 보면서
국란에 대비하여 진충보국하신 스님들과 충신열사들의
숭고한 희생 애국애민 정신은 날이 갈수록 희박해 지고
자라나는 어린 세대들에게 교육하는데 있어서도
조국과 민족이라는 개념은 점점 더 엷어지고 있다 여겨집니다.
기허당 영규대사의 살신성인하고
진충보국하신 숭고한 정신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 우리가 높이 선양하고 기억하며
참다운 나라사랑의 정신으로 승화시켜 나갈 수 있는
위대한 정신으로 삼아야 마땅하다고 생각됩니다.
공주 상왕산 원효사 심우실에서
나무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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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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