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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제, 경제현실, 그리고 경제학 원문보기 글쓴이: 경세지략
출처: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1113448
1.더 바보 이론(The Greater Fool Theory) 6.미시시피 버블(1)-역사적 배경과 존로 이전의 금융상황 6-1.미시시피 버블 (2) - 존로의 시스템과 버블의 형성과정 7.South Sea 버블
8.통화량의 증가와 투기버블 .......
여전히...지루한 글입니다....ㅡ.ㅡ;;; (혹시 읽기 귀찮으신 분들은 밑줄친 부분만 흝어 보셔도 괜찮을것 같습니다.....) ..... c. 토지은행과 영국은행, 그리고 남해주식회사의 탄생. 토지은행은 Dr. Hugh Chamberlain과 John Briscoe가 제안한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토지은행을 이용하면 잉글랜드 은행의 공공대출이 두배까지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고, 대출 이자는 토지자산을 담보로, 3.5%가 되어야 돈 빌려주기가 쉽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만 보아도, 앞선 존로의 미시시피 글을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챔버레인과 브리스코 역시 존로와 똑 같은 함정에 빠지게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종이화폐를 토지가 보증한다는 얘기는 결국, 금이나 은이 화폐로써 가치가 더 나은 것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종이지폐와 토지의 가치가 동등하다는 결론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Andréadès는, 이 둘이 밀어붙인 일종의 사기라고 할 수 있는 자신들의 계획, 왜냐하면 이미 그 결과를 일부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 계획을 시행하기 위해서 정부의 강제적인 조치를 요구했다고 아래 글에서 지적합니다. “…챔버레인과 브리스코는 대중들은 희귀금속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그에 따라서 만일 토지은행이 자신들에게서 빌린 돈을 금으로 지불하도록 강제한다면, 그들은 곧 상환을 중지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이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음(채권)을 정화(금, 또는 은화)와 태환하지 못하게 강제하므로써 어려움을 극복하자는 제안을 했다…” 1696년 봄, 영국 정부는 다른 나라의 정부가 그렇듯, 다시 한번 돈이 필요게 되었고, 그래서 토지은행은 자신들이 발행하는 어음(은행권의 일종)을 수단으로 하여, 4월 27일 국왕의 재가를 받아 설립되게 됩니다. 은행이 설립되자마자 정부에게 지급된 어음의 발행 총액은 2,564,000파운드까지 늘어났는데, 정부는 여기에 들어가게될 대출이자를 소금세를 걷어 충당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토지은행은 급히 서둘러 태어난 만큼 빠르게 고사되어 갔습니다. 정부에서 갚아야 할 돈 가운데 왕이 내놓은 5천파운드까지 포함해서 고작 7,100파운드만이 마련된 것입니다. 영국정부는 순식간에 파산 상태가 되어버렸고, 재무부는 돈을 마련하는 대신 서둘러 재무부 어음을 발행하는 조치를 취합니다. 왕은 왕대로 네덜란드로부터 50만 파운드를 빌려 옵니다. 이처럼 왕이나 정부가 자금을 서둘러 마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애초에 영국은행이 자기자본을 넘어서는 대출을 불가능하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은행에서 발행한 어음은 10%까지 할인율이 떨어졌습니다. 게다가 주식은 토지은행의 설립이 통과되고 난 후 재무부 채권의 유동성마저 더해지자 주당 107파운드에서 83파운드까지 하락했습니다. 토지은행뿐 아니라 어음을 발행하는 사람들 전부가 은행의 경쟁자였던 셈이었습니다. South Sea Bubble의 저자인 John Caswell의 글 입니다. “…재주조든 무역을 확대하는 것이든 종이화폐 없이는 재정을 마련할 수 없었고, 이 돈은 전쟁 기간중에 발행된 것으로 영국은행과 재무부에서 양적으로 늘린 결과이며, 롬바드 스트리트의 돈을 움직이는 수많은 골드스미스들 덕분이었기도 하다…” 잉글랜드 은행이 토지은행으로부터 받은 중요한 데미지 가운데 하나는, 독점권을 가진 정부가 화폐재주조 문제로 은행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경쟁자들에게 도움을 구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즉 영국은행이 발행한 어음과 서로 경쟁하지 않도록 만들었어야 했는데, 오히려 어음의 발행을 늘렸을 뿐 아니라, 영국 은행권에 대한 불신과 신용의 축소까지 야기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래 1697년 입법된 화폐재주조법의 주요 조항은, 잉글랜드 은행에게 화폐발행의 독점적 지위를 준 것 입니다. 그런데 c와 d항에 저촉되는 행위를 한 것이었죠. 아래는 이 당시 제정된 영국은행법의 내용입니다. (a) a. 은행은 자기 자본금에 1,001,171파운드를 앞으로 추가해야함, (b) b.영국은행의 자원은 80%의 재무부 채권과 20%의 은행권으로 이루어 짐 (c) c. (b)항의 자원은 은행에서 통합 관리되어야 함. (d) d. 다른 금융법인은 의회법에 의거 설립될 수 없으며, 1711년 8월 1일 까지 특허기간 동안 독점적 지위를 부여 받게 될 것임. (e) e. 8%의 금리 상환은 비용은 소금세로 보증하였음. (f) f. 자본의 추가를 위한 자원(재무부 채권 및 은행권)을 실행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자본은 각 독점 사업주들에게 100% 지불을 끝내야 함. (g) g. 은행은 요구하는 즉시 지불할 수 있다는 조건하에(요구불예금) 배정된(예약된) 총액을 더한, 원래의 자본 금액(120만 파운드)에서 은행권을 발행할 권리가 있음. (h) h. 은행의 모든 자산에 대해서는 세금이 면제 됨. (i) i .은행권을 위/변조하는 것은 중죄로 다스리게 될 것. 이 법을 시행하고 난 결과, 유통과정에서 은행권 20만 파운드를 포함 총 80만 파운드가 빠져나갔고, 따라서 남아있는 은행권에 대한 할인은 사라지게 되었으며, 정상적인 유통이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까닭에, 영국은행의 입장에서는 토지은행때문에 발생된 손실이 상당히 컸었던 셈입니다. 영국과 프랑스와의 전쟁이 1697년 9월 끝난 뒤, 전쟁 비용의 부담을 정부 재원에서 겨우 지원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보였으나, 1697년 초, 정부가 빌린 단기 자금만 5백만 파운드를 넘어서므로써 왕실을 상당히 어렵게 만듭니다. 이는 그해 4월에 투자하기로 했던 “The Malt Lottery Loan”이 완전히 실패하므로써 곤란을 가중시키고 확대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Malt Lottery는 재무부가 돈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10파운드 짜리 티켓 14만장을 발행한 것으로, 총 140만 파운드라는 금액까지 늘려 놓았지만, 실제 팔린 것은 1,763장이 전부 였습니다. 이 때문에 실추된 정부의 신용은 1년뒤에 가서야 신동인도주식회사의 부동주가 성공적으로 유통되고, 3년간 평화가 유지 된데다가, 여기에 잉글랜드은행의 도움이 더해져 겨우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2백만 파운드의 재무부 국채 갚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형태로 태어난 잉글랜드 은행은, “신용기금”으로써 정부의 부채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안정적인 평화 상태는 오래 가지 않고 끝납니다. 1701년 2월,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스페인령의 네덜란드를 침입, 스페인과의 전쟁이 시작 되었기 때문입니다. 루이14세를 극도로 싫어했던 윌리엄은 유럽연합을 결성하기위해 노력했지만, 그러나 이 ‘윌리엄왕의 전쟁King William’s War’과 그로인해 상업적으로 불안이 계속되는 것을 민중들은 바라지 않았습니다. 3년간의 평화에도 불구하고, 세금과 이자율은 계속 높아졌고, 이전 전쟁으로 인한 빚은 줄어들지 않은채 계속 남아 정부와 국민의 부담을 가중 시키고 있었으며, 거기에다 윌리엄 왕이 죽고 스페인군이 영국해협을 건너자 영국은 다시 한번 극심한 공포에 휩싸이게 됩니다… 민중의 피를 흩뿌리는 전쟁이 장기화되자 돈에 쪼들린 영국은 다시 한번 세금에 손을 댑니다. 잉글랜드 은행은 단기자금은 자체적으로 지원했으나 장기자금의 지원은 96년에서 99년까지, 3년 동안의 연금을 팔아 지원합니다. 1702년 앤여왕으로부터 재무상에 임명된 시드니 고돌핀(Sidney Godolphin)은 “세심한 주의와 기술로 국가재정을 관리”해야 한다는 딕슨(Dikson)의 주장을 신봉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 당시 고돌핀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영국군대의 승리를 빌어 상대적으로 쉽게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의 승리가 영국에대한 투자자들의 신뢰를 강화시켰던 덕이었지요. 하지만, 전쟁비용은 해마다 8억파운드에서 9억파운드로 점점 증가되어 갔습니다. 이처럼 예상치 못했던 전쟁비용 때문에 국가는 세금을 새로이 신설, 국민들의 고통을 배가 시킵니다. 따라서, 이렇게 걷어진 세수는 18세기가 끝날 때 까지 정부의 장기부채를 갚기 위한 담보물로 사용 되고 맙니다. 1704년부터 1710년 동안, 영국정부의 총 장기부채는 1천4십만 파운드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에다 고돌핀은 영국은행에서 재무부 채권과 동인도회사에서 추가로 170만 파운드를 얻습니다. 이 당시, 영국 민중은 전쟁의 장기화와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 즉 민중의 피와 전쟁하느라 빌린 돈때문에 시름이 점점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1708년과 9년의 겨울은 정말 가혹했습니다.곡물의 수확은 사상 최악이었고 따라서 농산물의 가격은 가파르게 치솟았습니다. 인플레이션과 8월달에 열린 헤이그 평화회담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음 달 9월 말프라트전투(battle of Malplaquet)가 벌어지고, 정치적 분위기가 급 반전하자 그 다음해에는 신임 토리당 당수 선출 압박으로까지 이어져 영국의 정치는 불안정한 시기가 계속됩니다. 1720년 8월 8일, South Sea 주식회사의 설립자이자 신임 당수인 로버트 할리(Robert Harley)가 고돌핀을 이기고, 이틀 뒤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 다음해 5월에는 결국 재무상으로 임명 됩니다. 그러는동안, 존 블런트경Sir John Blunt과 그의 파트너들이 Sword Blade Company를 보다 발전된 형태의 금융회사로 차근차근 변신시키고 있었는데, The South Bubble의 저자인 카스웰Carswell은 그의 책에서, 정치와 금융을 하나로 통합하는 거대한 제국이 잉글랜드 은행을 이용하므로써 얻어질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원래 Sword Blade Company가 하던 사업은 정부의 부채 상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주식을 발행하는 과정에서 자산을 획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채권은 군의 경리부에서 발행한 무담보 회사채(Army Debentures)의 일종이었다고 합니다. 군대에서 발행한 채권의 시장가격은 85파운드였고, 이 채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100파운드 상당의 Sword Blade Company의 주식을 제공했습니다. 정부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빚을 오히려 수단으로 삼아 할인된 가격으로 거래를 합니다. 1704년 봄, 잉글랜드 은행은 Sword Blade Company의 활동에 제재를 가하고, 재무성에 블런트와 그의 회사가 1697에 제정된 독점권 조항을 위배하고 있다는 주의를 보냅니다. 블런트는 1697년의 법은 오직 의회법에 의해 지정된 경쟁 기업들에 대해 금지한 것일 뿐이고, Sword Blade Company는 거기에 해당사항이 없다고 주장을 합니다. 1707년 5월, 영국은행은 은행의 우선권을 강화하는 것과 Sword Blade Company대해 조치를 취하겠다는 약속을 재무부로부터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재무부가 보기엔 Sword Blade Company가 잉글랜드 은행의 건강하고 좋은 경쟁자이자 자금줄이긴 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많은 돈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태였기 때문에 잉글랜드은행의 조건을 수용, 은행은 4.5%의 이율로 150만 파운드를 재무부에게 빌려주기로 합니다. 재무부는 대출받은 댓가로, 이어서 1711년이었던 은행의 특허를 1732년으로 연장시켜 주었고, 당시 2,201,171파운드였던 은행의 자기 자본을 두배까지 늘려달라는 요구를 허용합니다. 허가가 되자마자 그날 정오가 되기도 전에 늘어난 자본금은 그 즉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안드레아즈는 그 당시 은행의 자본 상태가 사실상 파괴 되었다고 보았는데, 즉 자기자본을 넘어서는 신용 남발 상태의 단계로 넘어가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래는 그것을 정리한 표입니다. 본래 은행의 자기자본 ………………………………………….2,201,171 파운드 늘어난 자본의 합 ……………………………………………….4,402,343 파운드 당시 진행되었던 대출액 40만파운드까지의 합……………...4,802,343 파운드(3) 기존에 발행되었던 재무부 채권……………………………….1,775,027 파운드(4) ------------------------------------------------------------- 합계(3)+(4) 6,577,370파운드 30센트 처음에는 Sword Blade Company와 동인도회사와 함께 잉글랜드 은행의 활동은 사용할 수 있는 돈이 풍부해짐에 따라 안정적으로 되었습니다. 카스웰의 글에서 처럼, “…전쟁은 종이화폐의 통화승수 효과로 인해 부를 촉진 시키고, 감독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장려하도록 만들었다. 10만 파운드를 만드는 것쯤은 이제 희귀한 일…”이 아닌게 된 것입니다. 잉글랜드 은행의 특허권이었던 은행권의 발행은 오직 자본의 총액에 제한 될 뿐이었습니다. 즉 총액이 늘어나는 한 신용은 무한대로 커질 수 있었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에 H.D. Macleod같은 사람은 이 것이 곧 국가 주도의 사기나 다름없는 것이라며 신랄한 비판을 거두지 않았다고 안드레아즈는 말합니다. “이제, 어느정도는, 이 계획이 나쁜 결과를 가져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계획은 그 자체가 원칙적으로 완전히 부도덕한 것이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이는 존로가 저질렀던 화폐이론의 경우처럼 야만적이며 불합리한 사기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토지에 기대어 종이화폐를 근간으로 한 그의 사기는 불합리성과 비교할 때 분별력은 오히려 냉정했다. 만일 정부의 모든 부채를 똑 같은 양의 지폐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야 물론, 여기 있는 우리는 그 즉시 ‘철학자의 돌”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게 될 것이다. 이제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그 많은 사람들이 엘도라도라는 황금의 땅을 찾아내야할 필요가 더 이상 없게 된 것이며.…사람들은 황금덩어리 조차도 가볍게 집어들 수 있게 되길 바랬던 것이다....” 비판도 비판이지만 맥클레오드가 한 말은 희귀재, 혹은 자본재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얘기일겁니다. 화폐로써의 본질적인 속성 중 하나인 휴대성은, 그래서 무한히 많은 다양한 종류의 재질과 방법으로 파생시키고 더해지게 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테지요. 따라서 현대적 관점의 금융이론가들의 입장에 본다면, 돈이란 반드시 화폐의 형태로 존재할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어쨌든, 새로운 재무부 장관이 된 로버트 할리(Robert Harley)는 고돌핀으로부터 막대한 빚을 그대로 물려 받았기 때문에 특히, 해군을 증강하는데 필요한 돈을 빌려준 채권자들을 어떤 식으로든 안심 시켜야 할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정부로부터 돈을 받을 수 있을런지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할리 재무부장관은 이 무렵, Sword Blade컴퍼니의 조지 카스웰과 존 블러트, 그리고 해군과 큰 계약을 맺고 있던 앰브로스 크롤리 경(sir Ambrose Crowley)으로부터 하나의 제안서를 받게 됩니다. 블런트와 카스웰이 제안한 계획의 핵심은 해군과 채권자들이 모여 회사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부채를 주식으로 바꾸자는 것이었지요. 할리장관으로써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부채는 줄어들 기미가 없는데다 갚을 돈은 없고, 또 이들의 제안을 대체할 만한 다른 수단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1711년 6월 12일…이들의 제안은 왕의 재가를 받게 됩니다. 정부의 단기채권중 거의 9백만 파운드를 갖고 있었던 채권자들은 “정부관리와 영국 무역 상인 주식회사”라는 왕실의 옥새가 찍힌 회사를 설립합니다. 표면상의 설립 목적은 영국의 남해(South Sea)와 미국의 일부 해안에서 어장을 적극 장려하기 위한다는 것이 었습니다. ..........
9.오스트리아학파의 과오투자 이론(Malinvestment Theory)
10.과도기....그리고 대안없는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