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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9일 월요일
[부활 제5주간 월요일] 보호자, 성령(聖靈) (요한14,21-26)
제1독서<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사도14,5-18)
이코니온에서는 5 다른 민족 사람들과 유다인들이 저희 지도자들과 더불어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괴롭히고 또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
6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일을 알아채고 리카오니아 지방의 도시 리스트라와 데르베와 그 근방으로 피해 갔다.
7 그들은 거기에서도 복음을 전하였다.
8 리스트라에는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앉은뱅이로 태어나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9 그가 바오로의 설교를 듣고 있었는데, 그를 유심히 바라본 바오로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고,
10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11 군중은 바오로가 한 일을 보고 리카오니아 말로 목소리를 높여,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2 그들은 바르나바를 제우스라 부르고 바오로를 헤르메스라 불렀는데, 바오로가 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13 도시 앞에 있는 제우스 신전의 사제는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문으로 가지고 와서, 군중과 함께 제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14 바르나바와 바오로 두 사도는 그 말을 듣고서 자기들의 옷을 찢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15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지난날에는 하느님께서 다른 모든 민족들이 제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17 그러면서도 좋은 일을 해 주셨으니,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곧 하늘에서 비와 열매 맺는 절기를 내려 주시고 여러분을 양식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18 그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군중이 자기들에게 제물을 바치지 못하도록 겨우 말렸다.
<화답송>시편115,1-2.3-4.15-16(◎1ㄱㄴ) ◎ 주님, 저희가 아니라 오직 당신 이름에 영광을 돌리소서.
○ 저희가 아니라, 주님, 저희에게가 아니라, 오직 당신 이름에 영광을 돌리소서. 당신은 자애롭고 진실하시옵니다. “저들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민족들이 이렇게 말해서야 되리이까? ◎
○ 우리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며, 뜻하시는 모든 것 다 이루셨네. 저들의 우상은 은과 금, 사람 손이 만든 것이라네. ◎
○ 너희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다. 하늘은 주님의 하늘, 땅은 사람에게 주셨네. ◎
복음<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요한14,21-26)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22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또는, 가타리나 기념일 독서(1요한 1,5-2,2)와 복음(마태 11,25-30)을 봉독할 수 있다.>
부활 제5주간 월요일 제1독서 (사도14,5~18)
"리스트라에는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앉은뱅이로 태어나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바오로의 설교를 듣고 있었는데, 그를 유심히 바라본 바오로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고,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8~10)
사도행전 14장 6~7절에서는 이코니온에서 리카오니아 지방으로 온 사도 바오로 일행이 계속적으로 복음 전파 활동에 힘썼음을 포괄적으로 기록하였다.
사도행전 14장 8~18절에서는 리스트라에서의 선교 활동 중에 일어난, 나면서 부터 앉은뱅이 된 자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치유 기적과, 그와 관련하여 리스트라인들이 두 사도를 신(神)으로 숭배하려고 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 저자가 리스트라에서 복음을 전파하면서 일어난 하나의 에피소드과 같은 사건을 이처럼 길게 다룬 것은 이 사건이 리스트라에서의 바오로 일행의 복음 전파 활동이 얼마나 역동적이었는가를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심없이 겸손하게 자신을 숨기고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파하였음을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4장 8절에는 리스트라에서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만난 하반신 마비자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여기서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앉은뱅이로 태어나',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라는 이러한 중복적 표현은 본래 직업이 의사였던 사도행전 저자 루카가 전혀 걸을 가능성이 없는 그사람의 상태를 강조하여 표현한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 사람을 '두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라는 말 한 마디로 완치시켜 주는데, 이것은 사도 베드로가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앉아 있는 하반신 마비자를 완치시킨 것(사도3,1~10)과 평행을 이루는 사건이다.
사도행전 저자가 이 사건을 기록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사도 바오로가 사도 베드로와 동일한 기적을 일으킨 사실을 통해 그가 열 두 사도보다 조금도 못할 것이 없는 사도임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사도 바오로의 사도권을 의심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으며, 그의 사도됨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를 유심히 바라본 바오로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고' (9ㄴ)
여기서 '유심히 바라본'으로 번역된 '아테니사스'(atenisas)는 '눈을 고정시켜'라는 의미로서, 아름다운 성전 문 곁에서 앉은뱅이를 바라보았던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에게도 쓰였던 단어이다(사도3,4).
그러나 성전의 아름다운 문에 있던 앉은뱅이는 동전 한 푼 구걸할 수 있을까하여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을 쳐다 보았지만(사도3,5), 리스트라의 앉은뱅이는 사도 바오로가 전하는 선교에 이끌려(9ㄱ) 그를 주목하고 있었으며, 사도 바오로도 그러한 그에게 자신의 시선을 고정시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무엇인가?
첫째, 그 앉은뱅이가 자신의 하반신 장애를 치유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둘째, 그 앉은뱅이에게 있었던 믿음은 자기 영혼의 구원에 관한 것이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구원받을 만한'으로 번역된 '소테나이'(sothenai)의 원형 '소조'(sozo)는 육체의 치유(마르6,56)와 영혼의 구원(마태1,21)에 모두 사용되는 단어이기 때문에 둘 다 해당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리스트라의 선교 현장에서 주변에 많은 사람을 청중으로 두고서 사도 바오로가 어떤 말을 했을까 하는 것을 추측해 보면, 후자(영혼의 구원)가 보다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 앉은뱅이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사함의 용서를 받고 의롭게 된다는 사도 바오로의 복음(사도13,38.39)을 듣고, 자기와 같은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고, 사도 바오로는 바로 그런 생각을 가진 앉은뱅이에게 자기 안에 있는 것과 동일한 성령의 기운을 느끼고, 그에게 다가간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하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10)
그런데 이러한 치유의 순간에 사도 바오로는 의술이나 다른 방법을 쓰지 않았다. 사도 바오로가 다가가 앉은뱅이의 다리를 한 동안 주물렀다거나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부축했다는 묘사가 전혀없다. 오직 '네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라'는 한 마디 말만 사용하였다. 이것은 치유의 근원이 오로지 전능하신 하느님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가 '큰 소리'로 말한 것은 이 기적을 주위 사람들도 보게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가 믿는 하느님의 능력을 인정하게끔 하기 위해서이다. 즉 사도 바오로는 이 일을 복음 전파의 방편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다리가 오그라져 완전히 마비되어 있는 사람에게 사도 바오로는 '똑바로'에 해당하는 '오르토스'(orthos; uprightly; straghtly; 일직선으로 곧게)라는 말과 '일어서라'에 해당하는 '아나스테티'(anastethi'; stand)라고 명령을 하는데, 이것은 그에게 어이가 없어 보이는 명령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즉각 순종하였고, 그 결과 믿겨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가 벌떡 일어날 뿐만 아니라 걷기까지 한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기적은 많은 경우에 믿음과 그에 따른 순종에 의하여 일어난다.
'벌떡 일어나'로 번역된 '할라또'(halato)의 원형 '할로마이'(hallomai)는 '솟아 오르다', '뛰어 오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요한4,14; 사도3,2), 사도 바오로의 명령을 들은 그가 앉은 자리에서 바로 마치 용수철처럼 뛰어 올라 일어섰음을 나타낸다.
'걷기 시작하였다'로 번역된 '페리에파테이'(periepatei)는 계속되는 행동을 묘사하는 미완료 과거 동사인데, 이것은 일어선 그가 감격에 겨워 자기 주변을 이리저리 연신 걸어다녔던 것을 나타내며, 그 치유가 일시적이거나 속임수가 아닌 완전한 것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군중은 바오로가 한 일을 보고 리카오니아 말로 목소리를 높여,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바르나바를 제우스라 부르고, 바오로를 헤르메스라 불렀는데, 바오로가 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도시 앞에 있는 제우스 신전의 사제는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문으로 가지고 나와서 군중과 함께 제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바르나바와 바오로 두 사도는 그 말을 듣고서 자기들의 옷을 찢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11~14)
리카오니아 사람들은 당시 로마 제국의 공용어인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사용할 줄 알았다. 사도 바오로는 다른 선교지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당시 국제적 언어인 그리스어로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곳 사람들이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서 벌어진 엄청난 사건으로 말미암아 제 정신이 아닐 정도로 너무나 놀랐기 때문데 자기도 모르게 출신 지역 사투리로 말했던 것이다. '신들이 사람이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로 번역된 '호모이오텐데스 안드로포이스'(homoiothentes anthropois)에서 '호모이오텐테스'의 원형 '호모이오오'(homoioo)는 '유사하게 하다', '같게 만들다'는 의미이다.
본문에서는 수동태 분사로 쓰였으므로 '유사하게 된'이라는 의미이다. 즉 사람의 외모와 유사한 신(神)들이 내려왔다는 말이다.
말 한마디로 선천적인 앉은뱅이를 완치시키는 일을 보면서 리스트라 사람들은 전설로 그들에게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가 그들 눈앞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알고 이렇게 소리친 것이다.
즉 리스트라 지역에서는 그리스의 주신(主神)인 제우스(Zeus)와 그의 전령신(神)인 헤르메스(Hermes)가 과거에 사람의 모양으로 그곳에 방문하였지만,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자 그들을 홍수로 멸망시켜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 오고 있었다.
그 전설이 자기들의 시대에 자기들의 삶의 현장에서 다시 실현되는 것으로 생각한 리스트라 사람들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제우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신(神)들 중 최고의 신(神)이며, 로마 신화의 쥬피터(Jupiter)에 해당한다.
리스트라 사람들이 바르나바를 '제우스'라고 부른 것은 그의 외모가 사도 바오로보다 훨씬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나이가 사도 바오로에 비해 많고 사도 바오로 뒤에서 말없이 묵묵히 서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리스트라 사람들은 사도 바오로를 '헤르메스'라 불렀는데, 이 신은 제우스의 신탁을 받아 그의 대변인 노릇을 하는 신이었으며 로마 신화의 머큐리(Mercury)에 해당한다.
그들이 사도 바오로를 웅변과 연설의 神이기도 한 헤르메스라고 부른 것은 그가 군중 사이에서 탁월한 말 솜씨로 연설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문으로 가지고 와서'(13)
'황소'로 번역된 '타우루스'(taurus)는 '몇 마리의 소들'을 가리키며 '화환'으로 번역된 '스템마타'(stemmata)는 제사를 드릴 때 희생 제물 위에 놓는 띠로서 꽃으로 만든 화환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문' 즉 '퓔로나스'(pylonas)는 리스트라성(城)의 문을 말한다. 고대 성읍에는 성문 주위에 넓은광장이 있었고 여기서 대중 집회나 교역이 이루어졌다.
리스트라 사람들이 사람의 모습을 한 사도 바르나바와 바오로를 쉽게 神으로 단정한 것은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神들이 모두 사람의 모습이거나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그들이 생각하는 신(神)들은 유다인들이 믿었던 하느님과는 달리 제한된 공간 속에 인간과 동일한 생활 방식으로 살아가는 유한한 신(神)들이었던 것이다.
'옷을 찢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소리를 지르며'(14)
여기서 '옷을 찢었다'는 것은 근심과 슬픔을 표시하는 유대적 관습이며 주로 개인적인 슬픔뿐만 아니라 하느님 대전에 크나큰 죄가 되는 일을 목도했을때 취하는 행동이다(욥1,20; 마태27,65). 사도 바오로나 바르나바는 리스트라 사람들이 자기들을 신(神)으로 취급하는 것에 대한 슬픔과 애통함을 느꼈다.
그 사람들은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로 미신에 깊이 빠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진정한 신(神)이신 하느님 대전에서 신성 모독적인 죄를 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활 제5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오늘 독서를 읽다가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라는 표현에 시선이 멈추었습니다.
도대체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란 어느 정도를 두고 하는 말일까?
바오로 사도가 만난 앉은뱅이에게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바오로는 그에게 치유와 구원의 기적을 베풀 수 없었을까?
가톨릭 교회는 구원의 은총이 인간 편에서의 선행과 공로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자유롭고 자비로운 은총 안에서 허락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와 정반대인 듯 보이는 또 하나의 논리를 곁에 세워 두고 있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베풀어지는 것이지만, 그 구원을 받고자 인간 편에서도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톨릭교회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신학과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 사도의 신학을 동시에 병행시켜 놓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교회는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 편에서의 노력을 긴장 관계 안에 놓아두고, 그 둘 사이에 조화를 이루도록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통한 구원과 행실을 통한 구원,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쌓으려고 애쓰기보다 오히려 구원을 베푸시는 분을 사랑하는 것, 아니 구원 그 자체이신 분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분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 그것이 믿음과 행실을 하나로 만들어 주는 길이 아닐까요?
오늘 하루,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하느님의 현존을 보여 주는 주위의 형제들을 마음 다하여 사랑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부활 제5주간 월요일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계명이 해결돼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요한14,21-27)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 예수님의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신다? 지금까지의 예수님이 아닌, 하늘의 계명과 관련되는 다른 보이심입니다.
22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 세상의 길로는 예수님의 길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계명은 선악의 도덕과 윤리의 그 사람의 의로움을 진리라 하고, 예수님의 계명은 선이신 당신이 악인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는 그 의로움을 진리라 하며, 인간의 의로움을 무색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 세상의 계명, 의로움은 구원의 능력 없음을 인정하는 그 부인으로~ 예수님의 구원의 계명을 받아들이는 것,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느님의 사랑도 받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 계명은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 앞 6절에서 십자가의 길이 진리다. 하신 말입니다.“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 21절에서 ‘계명’이라 하셨는데, 23절에서 다시 ‘말씀’을 지키는 것이 사랑이라 하십니다. 곧 계명이 말씀입니다.
말씀-계명을 지키다(킵- 밖으로 흘리지 않고 마음에 간직하는 것)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 예수님의 말씀을 하늘의 일- 하느님의 말씀으로 깨달아 마음에 간직하는 것-킵(지키는)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계명)인 하늘의 대속, 그 십자가를 진리로 깨달아 간직한다면~ 내가 지키지 못한 계명을 예수님께서 대속으로 지키신 것이고, 그 믿음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일까요?)
(로마8,3)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곧 당신의 친 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 그러나 성령의 이끄심이 있어야 깨닫고 믿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앞 16절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 한시적으로 계셨던 보호자 예수님이 아닌 영원히 함께할 다른 보호자입니다.
18절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 다시 오실 예수님~ 다른 보호자 성령이십니다. 육의 예수님이 아닌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셔서 당신의 모든 말씀, 곧 계명인 하느님의 일을 다시 가르치시고 기억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계속적, 반복적으로요~~
세상은, 사람의 지혜로는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코린2,14) 그러나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 성령을 받아들여 깨닫게 되면 하늘의 자유, 쉼, 평화를 누릴 수 있겠지요.~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아멘.
부활 제5주간 월요일 복음(요한14,21~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26)
요한복음 14장 26절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성령의 역할을 명백히 보여 주시는 중요한 말씀이다.
첫째로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에 해당하는 '판타'(panta; all things)을 가르치실 것이다.
'가르치시고'에 해당하는 '디닥세이'(didaksei; will teach)는 '디다스코'(didasko)의 미래 시제로서, 미래에 성령께서 계속해서 믿는 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실 것을 나타낸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가르치는 교사로 믿는 이들과 함께 하실 것임을 말씀해 주신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진리의 영이시므로, 우리를 언제든지 하느님의 완전한 뜻 가운데로 인도하실 수 있다(1코린2,10).
성령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그 인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들을 많이 내게 되는 이유가 이것이다(갈라5,22,23).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성령의 감화나 감동하심에 민감해야 한다.
그분께서 우리를 일깨워 알게 하시는 것은 물론, 주의와 경고에 대해서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한 필수 요건이다 (1테살5,19).
둘째로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계속 기억시키신다.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에 해당되는 '휘폼네세이'(hypomnesei; will remind)는 '휘포밈네스코'(hypomimnesko)의 미래 시제로서 '계속해서 회상시키실 것이다', '계속해서 깨우치실 것이다'라는 뜻을 전달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지 않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계속 이 땅에 남아 있어 구원의 길을 보여줄 것이며,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일이 바로 성령의 활동임을 보여 준다.
요한 복음사가가 여기서 특히 이 말씀을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실 당시는 자신들이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잘 깨닫지 못했지만, 성령 강림 이후에는 그 말씀의 의미를 밝히 깨달았음을 기억하여, 초대 교회 신도들도 성령의 역사(役事)에 힘입어 말씀의 의미를 밝히 알게 된다는 것을 권고하기 위해서 이다.
[부활 제5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설교하면서 앉은뱅이 하나를 유심히 바라봅니다.
태어나 걸어 본 적이 없던 그가 복음을 들으려고 집을 나서서 복잡한 군중 틈에 끼어들기까지는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였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에게서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을 보았고, 하느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실천하는 이’에게는 반드시 하느님의 현존과 기적이 따르지만, 기적이 꼭 믿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을 본 군중은 사도들을 이교 신들로 오해할 뿐, 복음을 전하여 듣고도 정작 바오로가 돌팔매질을 당할 때 그를 내버려 둡니다(14,19 참조).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많은 이가 이 시대에 믿음을 가지기가 어렵고 모호하다는 핑계를 대지만, 주님께서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당신을 사랑하는 첫걸음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계명과 규정’이 ‘의무와 속박’으로 괴롭게만 느껴지거나 자신이 지킬 계명이 무엇인지 의식 없이 사는 사람은 아직도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의 이중 계명’(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마태 22,36-40 참조])과 ‘새 계명’(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을 주셨고, 당신의 말씀과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시고 아버지와 함께 가시어 그와 더불어 사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앉은뱅이 같은 내가 하느님의 현존과 기적에 닿는 길은 주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는 삶에 있습니다.
지혜가 간절한 순간마다 하느님의 뜻을 일깨워 주시고 나를 이끌어 주시는 협조자 성령께 의탁합시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부활 제5주간 월요일]
말씀 안에 머물고, 되새길 때 성령께서 일하신다.
복음(요한14,18-26)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18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 다른 모습의 보호자로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約束)이시다.
19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세상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끝이라 생각하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씀이시다.
(요한11,25-26)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 믿는 것, 계명(誡命)을 받아 지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 계명(誡命)- ‘새 계명’이다. 우리는 새 계명이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피의 새 계약을 가리킴을 획인 했다.
그 피의 새 계약은 하느님의 뜻, 구원의 계획 이셨기에 그 새 계약의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곧 계명을 지키면(사랑하면) 하느님께서 그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피의 새 계약’으로 십자가(十字架)에서 죽으실 것을 ‘보이는 예수님’ 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말씀하심이다.
22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 세상은 예수님의 죽음이 ‘영원한 생명임을 알아듣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앞에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 아니 못 알아듣는다. 그래서 다시 말씀해 주신다~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믿으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믿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민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 지금까지 모든 말씀을 다른 보호자, 곧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성령’으로 마음에 들어오셔서, 다시 가르치셔서 깨닫고, 믿게 해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유다 처럼, 인간의 지혜로는 절대 못 알아듣기 때문이다. 땅의 지혜로는 깨달을 수도, 믿을 수도 없는 하늘의 말씀이다. *말씀 안에 머무를 때, 말씀을 되새기고, 되새길 때 성령께서 일하신다.
(요한8,31-32)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진리(眞理)의 성령(聖靈)께서 하시는 일~
(1코린2,9-10) 9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 10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로마8,24-26) 24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25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아멘!)
(로마8,9-10) 9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아멘!)
(로마8,1-2)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멘!)
☨은총이신 진리의 성령님!
저희 모두의 마음에, 발길에 함께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하오니 내버려두지 마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2024년 04월 29일 월요일
[부활 제5주간 월요일] (가타리나 축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최후의 만찬을 배경으로 하는 요한 복음서 14장은 ‘제자들의 질문’을 통하여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가르침을 전합니다. 먼저 토마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고(14,5-7 참조), 필립보의 질문과 대답이 이어지며(14,8-21 참조), 마지막으로 유다(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의 질문과 그 대답(14,22-26 참조)이 나옵니다.
오늘 복음은 필립보와의 대화 마지막 부분으로 시작하는데, ‘계명을 지키는 것’이 당신을 ‘사랑하는 길’임을 제시합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유다와의 대화에서도 되풀이됩니다.
다만 계명을 지키는 것이 ‘내 말을 지키는 것’이라는 표현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임을 천명한 필립보와의 대화와, ‘말씀을 지키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임을 천명한 유다와의 대화를 하나의 본문으로 구성함으로써,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말씀을 지키는 것임을 명시합니다.
규범(계명)만 기계적으로 지키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가르침(말씀)을 자발적으로 지키며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감정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지성의 문제이고, 그래서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알아보고 따르며 행동에 옮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사랑 없이 진행되는 삶은 신앙생활이기보다 우상 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앉은뱅이를 걷게 하자, 군중이 “목소리를 높여”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하고 외치며 그들을 신격화하였듯이, 우리의 신앙도 기적과 경이로움만을 사랑하는 우상 숭배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섬세하게 반응하고 내 삶의 절대적 지침으로 삼는 것, 그것이 그분을 사랑하는 길이며 참다운 신앙으로 가는 길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