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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뿌리아름역사동아리 원문보기 글쓴이: 麗輝
일단, 한국고고학계에서 '고조선' 혹은 '위만조선'의 실체에 대해 연구를 제대로 진행한 경우는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한국고고학계에서 가장 권위있고, 대표적인 학술지라 할 수 있는 한국고고학회의『한국고고학보』에 '고조선' 혹은 '위만조선'이라는 주제어로 검색되는 논문이 1편도 없습니다. 물론 다른 주제에서 이들 정치체에 대해 부수적으로 다루는 경우는 있겠지만, 정작 이들이 메인이 된 연구는 확인하지 못 했습니다.
또한 그만큼의 권위를 지닌 한국상고사학회의『한국상고사학보』를 보니 다음 논문들이 검색됩니다.
많지가 않은데(『한국상고사학보』는 문헌사학자들의 논문도 실리는 곳으로서 그러한 논문은 제외했습니다), 고고학적으로 고조선(혹은 위만조선)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암튼, 전체적으로 이러한 연구성과는 현재 한국고고학계에서 이들 주제가 갖는 위상을 알 수 있는 지표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대부분 고조선(혹은 위만조선)은 몇 되지 않는 문헌(그 문헌조차도 신빙성에 의심이 가거나, 실체가 모호한 경우가 많죠)에 의존한 연구가 많으며, 그러다보니 연구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기존에 많은 비판을 받은만큼, 많이 읽혔던 윤내현 선생님의『고조선사 연구』(1994)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에는 '2장 2. 단군사화와 고고자료'라는 챕터가 있지만, 정작 그 안에서 건질만한 고고자료는 거의 없습니다(136~139쪽). 고조선이 있던 시기가 청동기시대보다 앞선 석기시대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는데, 북한 연대를 너무 의지하고 있다는 점, 일반적인 청동기문화를 고조선 문화와 동일시여기고 있다는 점 등은 지적해야 할 겁니다. 이는 고조선이 한반도 전체와 만주, 요동 등지를 다 차지하고 있다는 전제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에 동시기 확인된 청동기유적을 다 고조선 것으로 이해한데서 온 오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뒤에도 비파형동검이라든가, 기타 고고유물을 근거로 제시하고 계신데 너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인용된 것들이 확인됩니다). 즉, 고고학자에 의한 고고자료 해석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사실이 계속 계승(?)되는 것이지요.
이후 윤내현 선생님의 제자인 박선희 선생님이『한국 고대 복식』(2002)이라는 책에서 갑옷이라든가, 직물 등을 통해 고조선에 대해 고찰하고 계시죠. 분명 이는 윤내현 선생님의 연구보다 한단계 진전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역시 고고자료를 오역한 부분이 확인됩니다. 즉, 모든 연구가 이미 '고조선은 광역적인 영토를 지닌 영토국가였다'라는 전제조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뜻이죠.
특히 박선희 선생님이나 박선미 선생님은 문헌사학자(제가 볼때는)이지만, 어느 정도 고고자료를 상당히 많이 인용하는 편에 속합니다. 이는 송호정 선생님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몇 번 얘기했듯이, 단순히 고고자료를 종합-해석만 한다고 해서 고고학자 혹은 고고학 전공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고고학적 방법론을 전문적으로 배우고, 유물과 유구(합쳐서 유적)의 출토양상 혹은 생성과정 등에 대한 정확한 인지가 있어야만 고고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발굴 1번 하지 않고 단순히 고고자료만 잘 정리하고(우리나라는 발굴보고서가 무조건 간행되며, 무료 배포되는 나라입니다), 외국 연구성과를 잘 정리한다 하여 고고학 논문이라 볼 수는 없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박선희 선생님의 연구성과는 좋아하는 편입니다. 새로운 시각에서 고고자료를 해석하려고 했기 때문이죠. 단, 윤내현 선생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는 점은 정말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에 반해 박선미 선생님의 연구성과는 신뢰가 크게 가질 않습니다. 고조선사 및 고대화폐사 전공이라고 하는 그 분의 학위논문만 봐도 바로 허점이 나온다는 점이 그 이유지요(이런 부분 때문에 저는 문헌사학자들이 고고자료를 너무 자기 마음대로, 마치 다 안다는 듯이 갖다 쓰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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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에 대해 송호정 선생님이 쓰신 책이 있는데, 전 한 권도 안 읽어봤습니다. 뭐 안 읽으려는게 아니라 어찌 하다보니 구입할 일도 없고, 읽을 기회도 없더군요. 암튼, 한국고대사연구회가 편찬한『고조선과 부여의 제문제』(1997), 노태돈 선생님의 편저『단군과 고조선사』(2004)나 이덕일 · 김병기의『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2006)등 문헌사학자들이 쓴 책에 대해 전 크게 점수를 주지 않습니다. 정형진의『고깔모자를 쓴 단군』(2003),『천년왕국 수시아나에서 온 환웅-한민족의 혈맥을 찾아서-』(2007) 같은 책은 논하지도 않겠습니다(고조선사에 대한 가장 최근에 나온 유사역사학자의 책이 아닐까 싶네요). 고고자료 약간을 인용해서, 문헌 위주로 고조선을 연구하는 것은 더 이상 진전될 것도, 발전될 것도 없다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오직 필요한 것은 새로운 고고자료의 발견! 뿐이죠.
암튼. 이러이러한 상황 때문에 고고학자에 의해 고조선이 연구된 사례는 많이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얘기했던 겁니다(언제 그랬는지 기억은 잘 안 나네요. -.-;). 확실히 새로운 고고자료가 마구 쏟아지는 국내의 상황과 다른 공간적 범위에 위치한 존재이다보니,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는 것에 한계가 있으며, 그러다보니 실체에 대해서도 아주 객관적인 부분부터 언급해야 하므로, 그 실체를 크게 보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거겠죠.
최근에 서영수, 이청규, 하문식, 박선미, 박준형 선생님의 공저『고조선의 역사를 찾아서-국가 · 문화 · 교역-』(2007)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고고학자와 문헌사학자가 같이 쓴 책인데, 각 챕터마다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내용의 일관성을 떠나서 양자가 어떤 식으로 고고자료를 갖고 이야기를 서술해나가는지 비교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밖에 제가 고조선사와 관련하여 자주 보는 책으로는 유 엠 부찐의『고조선-역사 · 고고학적 개요-』 (1990)과 최몽룡 · 김경택 · 홍형우 선생님의『동북아 청동기시대 문화 연구』(2004),이성규 선생님 등이 쓴『동북아시아 선사 및 고대사 연구의 방향』(2004) 등이 있습니다(뒤의 두 책은 전부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몇몇 챕터만 보시면 될듯 합니다). 그와 더불어 우실하 선생님의『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2007)이라는 책도 한번쯤은 읽어볼만 하다고 봅니다. 일단, 홍산문화 등에 대해 주목한 책이기도 하고, 그걸 고조선 등과 연결시킨 최초의 책이니깐요. 하지만, 시도가 좋았다고 하여 결과까지 좋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아직까지 홍산문화 등과 고조선이 직접 연결될 고리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듯 합니다. 이와 더불어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도 활발해지기 시작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 45권인『중국 동북지역 고고학 연구현황과 문제점』(2008)을 참고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신농님 말씀대로 고조선 전기사가 요하문명과 얼마나 관련이 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 더 많은 자료가 나온다면 뭔가 답이 나오겠지요. 그리고 고조선 후기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는데...고조선 시기의 유적이 발견된 사례가 많이 없다는 것은 정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고조선 전기와 달리 후기에는 영토가 동쪽으로 크게 후퇴하면서 한반도 북부가 중심지로 주목되고 있다는 연구성과가 꽤 힘을 얻고 있기 때문에, 북한의 연구성과에 많은 의지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죠(그렇게 따지고 보면 참 죽을 맛입니다. 전기사는 중국의 연구에 큰 의지를 하는데, 동북공정이니 뭐니 난리고...후기사는 북한의 연구에 큰 의지를 해야 하는데 정치적으로 완전 묶인 상태이고...). 여기에 대해서는 동양고고학연구소 대표 이형구 선생님이 엮은 책 중에『단군과 고조선』(1999)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남북한 학자들이 모여 벌인 학술대회의 발표문을 엮은 것인데, 여기에 보면 북한의 고고학적 연구성과가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밖에 사회과학출판사에서 엮은『고조선 력사개관』(2001) 또한 북한의 연구성과를 잘 반영하고 있어 도움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여기에서 고조선의 수도에 대한 북한의 주장을 가볍게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북한은 평양시 강동구의 황대성이 5천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당시 북한은 단군릉을 발견한 이후 1993년 9월부터 1994년 6월까지 황대성을 비롯한 성곽과 500여기의 고인돌, 150여기의 석관묘, 덕천시 남양리의 100여기에 달하는 주거지를 조사하는 괴력(?)을 발휘합니다. 이 정도 기간에 이 정도 유구들을 조사하려면 조사원이 엄청나게 동시 투입되어야 할텐데...그 많은 보고서는??). 그리고 평양 일대의 고인돌 또한 평양이 고조선의 수도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죠. 그러면서 이미 조사가 이뤄졌던 지탑리 토성과 성현리 토성에 대한 재조사를 실시하여 이를 고조선 것으로 판단하기도 했습니다.『조선고고연구』1999-1호를 보면 남일룡의 연구성과(「대동강류역 고대성곽의 성격」)가 이를 잘 반영하고 있죠.
신농님은 북한에서 지금껏 제대로 평양을 발굴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고조선과 관련된 왕성 유적이 없는 것은 뭔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라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단군릉 발굴과 관련된 북한의 발굴이 정치적이라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화된 내용입니다(이에 대해서는 한국역사연구회 북한사학사연구반에서 편찬한『북한의 역사만들기-북한역사학 50년-』(2003) 89~109쪽의 권오영 선생님이 쓰신 부분을 참고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즉, 문제는 발굴이 됐든, 안 됐든 이미 고고학이 어용학문으로서 제 구실을 다 하지 못 한다는 것이죠.
제가 위에서도 간략하게 적었을 겁니다. 1년도 채 안 되는 시기에 수백기의 유구를 조사하고 있는 북한입니다. 즉, 북한이 기본 발굴 작업을 최근까지 충실하게 이행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사례인 겁니다(저 정도 발굴이라면 우리나라에서 몇년을 해도 다 끝나기 힘들 규모입니다. 제가 알기로 성곽 1~2개소와 고인돌 500기, 석관묘 150기, 주거지 100기가 같이 확인된 유적도 우리나라에 없을 뿐더러 저 정도 유적을 1년도 안 되는 시간동안 조사끝냈다는 소리도 못 들었습니다. T.T). 즉, 미발굴된 유적도 많이 있을 것이며, 기존에 조사된 유적에 대한 자료 재정리 또한 앞으로 필수적으로 이뤄져야만 할 것입니다. 이 말은 무엇인고 하면...현재 북한에서 이뤄진 고고학적 연구성과를 갖고 고조선사에 대해 '속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라는 말과 직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마치『환단고기』를 갖고 고조선사를 연구하는 것을 두고『환단고기』가 기존의 다른 사서와 어떻게 다른지, 어떤 내용들을 사용할 수 있는지 비교-검토하는 것에 앞서『환단고기』자체의 기본적인 사료로서의 가치를 재검토하는 것이 선행되어야만 하는 것과 같은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고고학적 자료는 지금도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대로 수용할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한번 걸러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러므로...'고조선 후기의 중심지인 왕검성이 평양 지역에서 확인되지 않는 것은 그 곳에 왕검성이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논지는 지금으로서는 성급한 논리 전개라고 생각합니다.
명치호태왕님 말씀대로 요하 하류의 퇴적층에서 왕검성 유적이 확인될 수도 있겠죠. 발해만 어딘가에 파묻혀 있을 수도 있고, 강이나 바다 속에 수장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예전에 제가 이런 말씀을 명치호태왕님께 드린 적이 있죠). 얼마전 백암성 발굴현장을 갔더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백암성벽 밑으로 퇴적층이 최소한 1m 이상은 더 있더라고요. 강가도 아닌 상 사면부에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퇴적층이 형성된 건지는 모르지만 암튼 신기했습니다. 그렇게 봤을때 왕검성이 어딘가에 파묻혀 있을 가능성은 높습니다. 또한, 북한측이 조사한대로 대동강 유역에 있으며 고구려 성벽 기저부에 남아있을 가능성 또한 높습니다(평양이 고조선의 중심지가 아니라고 하기에 역사 · 지리적으로 평양은 한국사에서 너무나도 오랫동안 중심지로 활약했던 곳입니다).
제가 만약 고고학적으로 고조선사를 연구한다면 다음과 같은 조건들을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 일단 저는 고조선 혹은 위만조선이 '국가' 수준의 '국' 혹은 '연맹왕국'이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치장될 것이 아니라 동시기 존재했던 춘추전국시대의 중원왕조 및 진-한과 같은 중원의 통일왕조와 같은 '국가'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천랑성주님이 박사논문인「한국고대 전쟁양상과 정치체제의 변화-국가형성과 제국체제를 중심으로-」(2011)에서도 밝혔듯이 '군사지평선'이라는 개념에 따라 고조선 단계에 이미 국가 단계에 진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리고 국가 단계에 필요한 고고학적 지표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참고로 이는 박순발 선생님의『한성배제의 탄생』(2002) 39~46쪽의 내용을 참고하였습니다).
이상입니다.
위의 3가지가 반드시 다 확인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조선을 연구하는데 있어 3가지 요소가 다 고려되어야 한다고 전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고고학계에서 이러한 연구가 종합적으로 이뤄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자세히 공부한 바는 적지만, 제가 알기로는 남한학계에서는 동검류를 비롯한 청동기에 의한 연구가 주로 이뤄지고 있고, 북한학계에서는 고조선 시기의 성곽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양측의 연구가 좀 더 진전이 되어야 하겠지만, 청동기시대에 대한 연구는 남-북한의 교류가 거의 미비한지라 추후 얼마든지 변모-발전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참고로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 북부에는 고조선이 있었다고 하는 그 시기에, 남한에는 청동기시대 전기의 가락동 · 역삼동문화 및 후기의 송국리문화가 존재했습니다. 만약 윤내현 선생님의 주장 혹은 북한학계의 주장대로 고조선이 한반도 전체를 통일했다면, 남한에서 확인되는 청동기시대 유적들은 고조선의 지방통치체제의 일환에서 이해해야만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동일한 권역으로 이해하기 힘들다면, 고조선은 한반도 남부까지 차지하지 못 했다~라는 아주 간단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단순히 유적 1~2곳에서 비슷한 유물이 나왔다고 해서 동일한 문화권으로 엮을 수는 없는 겁니다. 북한의 청동기시대에 대한 연구도 진행이 되어 있지만, 어느 정도 시기 설정에 대해 신뢰를 해야 할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즉, 북한 내의 유적에 대해서도 이러한 상세한 고찰이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고조선이 광역적인 국가 통치 시스템을 갖추고, 꼭 중국 동북부에서 한반도에 걸친 넓은 영토를 지닌 국가여야만 대단한 우리 역사,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고조선은 중원 왕조와 대등하게 교류했으며, 전쟁을 치뤄 영토를 뺏고 빼앗기기도 했으며,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했던 나라였습니다. 이후 위만조선 시기에 이르면, 동방의 강대국으로서 주변 국가와 한나라와의 교류를 방해할 정도로 성장했으며, 거대한 한의 군사력과 1년 동안 대립할 정도의 힘을 지녔던 나라이기도 했고요. 그렇기 때문에 보다 객관적으로, 보다 직관력있게 다가서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첫댓글 신농님이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과 고고학에 대해 여쭤본 글이 있어, 그 글에 대한 답변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신농님의 질문이 없어도 전체적인 맥락을 짚을 수 있을 것 같아 이렇게 제 글만 옮깁니다. 참고하세요. ^^
제 생각입니다만 고조선의 가장 큰 고고학적 문제는 도읍지의 유적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게 아닐까요? 심지어 평양에서조차 낙랑유적은 나와도 위만조선의 도읍지를 증명할만한 유적은 안나오는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본문에 제 질문에 대한 글이 없어서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질문이 바로 그거였고, 여휘님께서는 속단할 수 없다는 요지의 답글을 쓰신 겁니다.
제가 어디 학술회의에 가서 들은 이야기지만 평양의 낙랑유적의 바로 밑에 층을 파보면 위만조선의 유적이 나오지 않겠느냐 했는데 북한에서 실제로 이런 시도를 했는지가 궁금하군요. 그런데 밑의 층을 파봐도 아무것도 안나오면 위만조선의 도읍지가 평양이 과연 맞느냐는 의문을 다시 제기할 수 있겠네요. ㅋ
낙랑 유적의 바로 밑에 층이라...낙랑의 어떤 유적인지가 중요할 듯 합니다. 낙랑의 성곽이나 취락유적이 존재한다면 그 아래 문화층이 존재할 가능성은 높습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로 낙랑의 분묘유적이 많이 확인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아래 문화층은 존재하지 않을 확률이 높을 듯 합니다. 그래서인지 북한에서도 낙랑유적의 아래층을 조사한 연구는 없는 걸로 알고 있고, 대신 고구려 유적(주로 성곽)의 아래층을 파는 시도(?)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성곽 아래에 고조선과 후조선(위만조선)의 성곽이 확인되었다는 얘기들을 많이 하더라고요. 즉, 낙랑유적의 밑을 파봐도 딱히 위만조선의 유적이 없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다물전사님이 제기하실 수 있는(응?) 의문은 지금은 갖지 않으셔도 될 듯 합니다. 그러고보니 다물전사님 말씀대로 낙랑유적 밑에 위만조선 유적이 나올만한 성격의 유적이 없긴 없네요. 북한에서 아직까지 낙랑시대 취락이 나왔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습니다. 그렇다고 낙랑시대 토성이나 성곽 등이 뚜렷하게 위만조선과 연계성이 있는 녀석들도 없는 듯 하구요. 흐음. 어제 모 교수님과 얘기를 나눠봤지만, 한군현 시대에도 대부분의 주민은 현지인이기 때문에 고고학적으로 큰 변화 양상이 확인되는 분야는 제한적이라 하시더군요.
북한에서 그럼 오히려 위만조선 유적을 낙랑유적이라 오해할 수도 있겠네요?
흠...일단 분묘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그래도 북측에서 어떻게 해석할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낙랑유적을 위만조선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ㅋㅋ 아마 위만조선 유적이 아니더라도 위만조선 유적이라고 할 녀석들입니다. 그네들은. ㅋㅋ 암튼, 북한에서 얼마나 정확하게 낙랑과 위만조선을 구분하고 있을지는 의문이긴 합니다. ㅋ
여휘님 말씀도 일리가 있지만 고조선이 과연 문헌사학의 비중을 무시하고 고고학으로만 연구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결국 양쪽이 다 결합되는 방식이 바람직한데...문헌사학자들이 고고학적 자료들을 활용하는 것도 서투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고고학자들이 문헌을 이용하는 방식 역시 아마츄어적이기 짝이 없습니다.
이건 적절한 비판이 아닙니다. 고고학자가 문헌을 이용하는 방식이 어설픈 지 여부는 그와 관계된 글에서 따로 논하면 될 일입니다. 고고학자가 문헌을 이용하는 방식이 어설프다고 하더라도, 본문 내용에 대한 반박이 되진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본문 글쓴이와 같은 고고학자 내지는 고고학 전공자가 사학자를 비판할 자격이 있느냐 라는 글쓴이의 자격을 공격하는 글이 되기 쉽습니다.
본문에 대한 적절한 반론은 문헌사학자가 고고학 자료를 '제대로, 잘' 활용하는 예들도 많다는 걸 들어주는 것이겠지요.
제가 위에서 이렇게 얘기한 이유는, 고조선 혹은 위만조선이 문헌만 갖고 얘기하기에는 문헌이 너무 적다는 것에 주안점을 뒀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대사쪽도 문헌이 많지는 않지만, 상고사쪽은 절대적으로 문헌이 부족하죠. 그렇기 때문에 문헌보다는 고고학적 연구성과가 더 많이 필요한 것이다~라고 얘기를 한 것이고, 그러한 고고학적 연구성과가 많지 않다는 얘기도 적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문헌사학자들은 고고학적 성과들을 갖다가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지요. 하지만 정작 왜 고고학계에서는 그런 얘기를 안 하는지도 적었던 것입니다. 고고학자들이 문헌을 이용하는 방식 역시 아마츄어적이기 짝이 없다고 하셨는데, 고조선 혹
은 위만조선에 대해 연구한 고고학자 어느 누가 문헌을 아마츄어적이게 이용했는지 궁금합니다. ^^ 오히려 고고학자들은 공격받을 수 있고, 위험하다시피 하면 상당히 몸을 사리는 편이라 문헌 사용을 많이 자제하는 편입니다. 제 지도교수님도 제가 문헌을 인용하는 것에 있어 늘 너무 과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시곤 하는데, 왜 그러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문헌을 섣불리 건드리면 쉽게 공격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죠. 혹여 고고학자들 중 어설프게 문헌을 활용하는 분이 계시다면 어떤 분인지 저도 궁금합니다. 적어도 고구려 고고학하시는 분, 그리고 고조선 혹은 위만조선을 연구하는 분 중에는 없는 듯 한데요.
혹여나 문헌사학자한테 그런 얘기를 한게 기분 나쁘셨다면 오해하지 말라는 얘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어차피 모든 문헌사학자의 연구성과를 제가 살펴본 것도 아닐 뿐더러, 제가 언급한 것은 위에 언급한 몇몇 분들에 한정된 것이니깐요. ^^ 제가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문헌사학자들은 생각 이상으로 과감하게(!) 고고자료를 갖다 쓰시는데 그 점이 문제라는 얘기를 하려 했던 것입니다. 물론 적당히 갖다 쓰는 분들도 많으시고, 모르면 모른다 하여 아는 부분만, 혹은 문제가 없을 부분까지만 갖다 쓰시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을 일일히 언급하지는 않았을 뿐입니다. 학제간 교류~아주 중요하고 가장 기본적이죠. ^^
제가 문헌사용 여부를 운운한 것은 그냥 가볍게 이야기한 것 뿐이지 여휘님을 공격하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것이 분명한 팩트라는 사실은 말해두고 싶군요. 오해마시기 바랍니다. 고고학자들의 문헌사용이 어설프다는 것은 고조선 문헌 분석을 문헌학자들과 비교하면 금방 드러납니다. 이것은 전반적인 현상이지 어느 특정 학자들을 지목하는게 아닙니다. 설마 고고학자들의 문헌사용이 문헌학자들과 동급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ㅋ 어쨌든 여휘님의 글은 잘 정리가 되어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물론 다물전사님이 저를 두고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신 걸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리고 고고학자들의 문헌 활용이 문헌사학자와 동급이라고 생각치도 않고요. 제가 위에서 적었듯이, 제 지도교수님은 제가 조금씩 활용하는 문헌에 대해 굉장히 우려하고 계실 정도로 이 부분은 고고학자들로는 꺼려지는 부분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제 주변에는 그렇게 문헌을 과감히(?) 쓰는 분들이 안 계시다~고 한 것 뿐이고요. 제가 왜 이런 댓글이 달렸나 생각했는데...제가 고조선 연구는 이제 더 새로운 문헌이 없으니, 고고자료에서 결판내야 한다~는 뉘앙스의 글을 잘 전달 못 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암튼, 제 글이 도움이 되어서 다행임다~^^
다물전사님과 미주가효님의 댓글에 대하여...
저의 생각을 하나만 첨언하고 싶습니다...
문헌사료가 부제하여 알수 없는 부분은 결국,,,,,고고학연구성과로 그 빈공간을 복원할수 밖에 없다는 판단입니다....
아! 그리고 어제 모 교수님과 회식자리에서 간단한 얘기를 나눴는데, 최근 낙랑토기와 위만조선 토기에 대한 분류작업을 하시는 중이랍니다. 이 얘기를 듣고 어찌나 흥분되던지. 기존에는 서북한 지역에서 토기만 나왔다 하면 낙랑토기로 일괄 분류했었는데, 중요한 것은 그런 얘기를 하신 원로분들이 '~카더라' 통신에 낚인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동경대 창고에 쳐박혀있던 낙랑토기들을 다 살펴보고, 최근에 각 유적에서 확인되는 낙랑토기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낙랑토기와 그것과 다른 토기들이 확인되었다는군요. 그러니깐 그동안은 낙랑토기가 정확하게 뭔지도 모르고, 낙랑토기의 영향이다, 낙랑의 영향이다~를 얘기한 것이 가장
제 생각에는 그 '모' 교수님이 정인성 교수님을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저로서는 그분밖에 연상이 안되는지라 ㅋ
ㅋ 맞습니다. 지금 메일을 보냈으니, 자료를 받는대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
큰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최근에 이에 대해 작성한 논고가 있는데 제가 받아보는대로 정리해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약간 힌트를 드리면, '삼각형 점토대토기 단계에서 타날문토기가 확인된다'고 하시더군요(이 얘기 듣고 정말 깜놀했슴. 음...고고학 전공하시지 않으면 잘 모르시겠지만 참고 기다리세요. 제가 나중에 써프라이즈 하겠습니다. ^^). 덧붙여『일본 소재 고구려 유물』1~2권 이후로 3~4권이 완간된다면서 드디어 1차적인 자료 정리가 끝났다고 좋아하시더라고요. 이제는 일본 내의 낙랑 유물을 싹 찾아서 정리할 때라고요. 암튼, 이와 관련된 자료는 추후 소개하기로 하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휘릭~~
정인성선생이 다호리 20주년 심포(09년 고고학지 특집호)에서 발표한 내용에 세죽리-연화보유형을 간략히 설명하면서....점토대토기가 타날문토기를 중심으로하는 전국 연의 회도문화와 접촉한 결과라고 설명하였는데....
이제 거의 만2년여가 흘렀으니...진일보된 견해를 들어볼수 있겠군요....
그리고.. 일본내 낙랑유물뿐만아니라...국박내에 있는 유뮬 사진원판등도 다 정리되어 일반에 알려졌으면 낙랑이나 고조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질것이라는 판단합니다.(오영찬선생의 논고로 많은 내용이 공개되었지만)
그러게요. 오늘 중국에 가셨는데, 돌아오시는대로 자료를 보내주신다니 시간은 좀 걸릴 듯 합니다. 점토대토기에 대해서 기존과 다른 새로운 내용이 들어있지 않을까~해서 지금 기대 중입니다. ^^
세죽리-연화보유형이 가지는 있는 공간 요동에서 청천강이북지역이라는 공간이외에....
한반도 중부나 남부지역까지....점토대토기에 타날문토기를 중심으로한 전국 연의 회도문화의 접합이 보이는가가 중요한 관건이 아닐까 합니다...
정인성선생의 연구가 와질토기 기원이라는 문제에서 출발하여....낙랑과 전국 연의 토기문화를 살피는 것이었고...고조선문화로 간주되는 점토대토기문화에 주목한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인듯합니다....
세죽리-연화보유형의 공간과 한반도 중남부에서 유사한 양상을 보이는지.....아닌지가 결국 편년관에서 부터 문화전달된 경로및 주체까지 해석이 달라질것 같습니다..
정인성선생의 논고가 기대되는
군요.
정인성선생의 편년관과 기존 통설적 입장의 편년관에 대하여 여휘님의 판단은 어떤지도 들어 보고 싶습니다.
ㅋㅋ 너무 크게 기대하지는 마세요. 제가 이쪽에 대해서는 공부한 바가 많지 않아서, 뭐 기존의 통설과 정인성 선생님의 통설과 비교해서 거창하게 쓰지는 못 할 듯 합니다. 그냥 제가 공부하면서 아는 정도만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웬걸요 기대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앗. 갑자기 고맙다니요...-.-;;;;
위글에서...
동양고대사로 학위를 한 윤내현선생의 초기논고는 거의 북한연구성과를 매우 유사하였고...이후 차츰 보완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박선희선생의 논고는....려휘님이 지적한것처럼 자료를 오역한 부분만이 아닌듯합니다......자신의 논리에 배치되는 사료나 고고자료는 배제하고, 논리전개상 필요한 몇몇자료만 부각시키는 그런 논리를 전개하고 있어....
전체 논리전개상에 많은 무리가 있다고 판단합니다..
박선희 선생님은 지도교수님이 윤내현 선생님이셔서 그 영향을 많이 받으신 것 같고...박선미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잘 몰랐는데, 명도전 때문에 알게 됐습니다. 자료 오독 및 필요한 부분만 갖다 쓰는 것이 심하다는 것을 말이죠. 흐음. 그리고 윤내현 선생님의 논고 역시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건 어느 누구나 시간이 지나가면 후학들의 비판을 받기 마련이니 이 정도만 하고 넘어가렵니다. ^^;
고조선을 최소한 라이벌이었던 연과는 비슷한 수준으로 봐야 맞는 거 같습니다. 우리는 고대국가를 고구려, 백제, 신라로 보고 성읍국가로 보는지..
뭐 라이벌과 비슷한 국력으로 봐야겠다는 상대적인 평가도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그보다는 고조선 자체 평가가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할 겁니다.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도움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
고조선의 연구에 대한 생각이 아직 변하지 않으셨는지 궁금하네요. 박물관에 계셔서 바쁘진 않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