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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스탄, 카자흐스탄]-전체자료
구소련을 구성했던 공화국중의 하나 [우즈베키스탄]
정치적으로 이 지역에 원시적인 개념의 국가가 형성된 것은 기원전 3-4세기 경인데 이때 이미 이 지역은 알렉산더 대왕의 침략을 받았다. 5∼6세기 경에는 봉건국가 형태의 틀을 갖추었지만, 동서 무역로의 중심지라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8세기 무렵엔 아랍인 들이, 13세기 경에는 몽골의 징기스칸이 이 지역을 정복하여 통치하였다. 이처럼 정신없이 외부 인들의 침략에 휘둘리다보니, 이 지역에는 뚜렷한 정치적 정통성도, 민족적 주체성도 확립될 수가 없었다. 1218년에 징기스칸이 우즈베키스탄을 침략하여 약 3년간 우즈벡을 정복하고 다스리기 시작하여 1370년까지 그 후손들이 다스리다가 1370년 우즈벡 장군인 티무르가 징 기스칸 후예를 내쫓고 우즈벡왕국을 시작하면서 싸마르칸드를 수도로 명하고 지무르장군의 후손이 150년간 이 나라를 다스렸다. 이후 우즈벡 땅이 부하라, 희바, 코칸왕국으로 나눠졌다가 이 세왕국의 국력은 약하고 정치, 경제, 문화, 과학의 부분은 발달하지 못하였고 러시아의 식민지 확장 정책에 따른 침략을 받아 1868∼1873년까지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오늘날과 같은 우즈벡의 민족적, 정치적 정통성이 수립된 것은 15세기 말 이후 이 일대에 징기스칸의 후손들이 각지에 한국을 건설, 통치하면서 부터였다. 몽골의 후예이자 투르크계인 이들 한국의 지배자들은 자기들을 따르는 자들을 '우즈벡' 이라고 불렀다. '우즈'란 '자기 자신, 진짜, 핵, 중심'이란 뜻이고, '벡'은 '백부장'이라는 뜻이다. 즉, 우즈벡은 '진짜백부장, 심복, 신하들' 이라는뜻이 된다. 소련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에는 민족자결 원칙에 의해 우즈벡에 대한 간섭을 하지 않았으나, 중앙아시아 일대가 반 혁명세력의 근거지가 되자, 칸의 세력을 붕괴시킨 후 인민 정권을 세웠고, 1922년에는소연방에 가입하게 만들었다. 이래서 우즈베키스탄 외에도 같 은 투르크계인 투르크메니스탄, 키르키즈스탄, 카자흐스탄과 이란계인 타지키스탄 등이 소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스탈린 치하인 1930 사할린의 우리동포들이 이 일대 나라들로 강제 이주 되기도 하였다. 1990년 소연방이 와해되면서 1991년 9월 1일 이들 중앙아시아 나라들은 모두 소연방으로 부터 분리 독립하였다. 그러나 독립 이후에도 우즈베키스탄은 구 소연방에 해당하는 독립 국가 연합의 협조적인 일원으로 지금도 러시아와 경제, 군사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독립 후, 세계 40여개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고, 1992년에는 UN 에 가입했다.
◈ 수 도 : 타슈켄트
◈ 인 구 : 약 2천 390만명
◈ 면 적 : 447,400㎢
◈주요도시 : Tashkent(타슈켄트:211만명),Samarkant(사마르칸트:39만명),Bukhara(부하라:23만명),Fergana(페르가나:20만)
◈ 주요민족 : 우즈벡인(68.7%), 러시아인(10%), 카자흐인(4.0%), 타지크인(3.9%)
◈ 주요언어 : 우즈벡어, 러시아어
◈ 종 교 : 회교(수니파)
◈ 화페단위 : Sum 지리/기후 면적 447,400㎢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 지역의 중심부에 동서로 길게 자리잡고있는 나라이다. 국토는 남북간의 거리가 925Km, 동서간은 1400km이며 면적은 약 447,400㎢ 로 이 면적은 우리나 라 남북한을 합친 면적의 약 두배이다. 위도상으로는 우리나라보다 약간 높아서 만주일대 와 같은 북위40°선에 위치한다. 중앙아시아의 중심부투란분지를 차지한 나라로 국토의 4/5가 평원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강우량의 부족으로 이 평원의 중북부는 구소련에서 두 번재로 큰 키질쿰 사막으로 되어있다. 동쪽 국경 지대 5분의 1은 산악지방으로서 동북부 쪽은 텐샨 산맥의 산자락에, 서남부 쪽은 파미르 고원에 부분적으로 걸쳐있다. 이 산악 고지 대중 높은 곳은 해발 4,000m 가넘는 고지대들인데, 이곳 고지대 산악의 눈 녹은 물과 지하수로 인하여 관개사업이 전개되어 비가 없는 사막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면화 생산국이 되었다. 대륙성기후 우즈베키스탄의 기후는 전형적인 사막형 대륙성 기후로서, 평균 기온이 7월에는 섭씨 영상40∼46°, 1월에는 영하 6°정도이다. 습도가 매우 낮으며, 일교차가 심하여 한 여 름에도 밤에는 서늘하다. 그 대신 연간 일조시간이 2,700∼3,130 시간으로 맑은날이 300일이상 계속된다. 우리나라 서울의 일조 시간이 2,170시간인데 비하면, 엄청난 일사량인 것이다. 비는겨울에 소량 내릴 뿐이므로 우리나라에 비하면 연중 건조한 편이다. 4계절 이 뚜렷하지만 겨울이 아주 짧으며,봄은 긴 편이고, 여름이 뜨겁고, 가을은 온화한 것이 우리나라와의 차이이다. 사회/문화 1994년 통계로 우즈베키스탄의 인구는 3,254만명이다. 우즈베키스탄은 100여개가 넘는 민 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이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이라는 국호가 말해주듯이 우즈베 키스탄은 우즈벡人이 71.4%로서 다수를 차지한다. 그 밖에는 모두가 소수 민족인데, 러시아 人(8%), 타지크인(4%), 칼라칼파크人(2%), 키르키츠, 카자크, 투르크멘人을 합해 5%, 타타르 人(4.1%), 터키人(4.7%), 고려人(1%)등이 있다. 구 소련 시절에는 우즈벡어와 러시아어가 공용어였다. 그러나 1991년 독립 이후, 우즈벡어만 공용어로 인정된다. 하지만 주요 호텔이나 관광서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할 때는 주로 러시아어를쓴다. 회교(수니파).우즈벡은 특정 종교를 국교로 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체 인구중 약 90%가 이슬람 교도이 며 그중 약 70%는수니파, 20%는 시아파 교도이다. 온건한 수니파가 압도적이다보니 터어 키의 세속적 신앙형태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우즈벡 정부는 과격한 시아파 원리주의가 확 산되는 것을 차단하고 있다.
교 육 우즈베키스탄은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전혀 교육비가 들지 않는 무상교육을 실시한다. 유치원을 마친 후 우리나라학교의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교등학교 3년교육에 해당하는 1∼11학년까지를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자기가 원하는 대학을 가게된다. 8학년이나 9학년이 되어서 계속 학업을 원치 않는 학생들은 취업을 중심으로 한 전문대학을 가게 된다. 이렇게 해서 계속수업을 원하는 학생들은 주간 5년제, 야간 6년제인 대학을 가게 된다. 왜 교육기간이 긴가 하면 9월학기가 새학년의 시작이되고 8월중순에 대학시험을 치뤄서 9-11월 까지 세계 제2의 생산품인 목화를 따러 가야하기 때문에 목화를 딴 것으로 등록금을 내지 않고 가 수업기간으로 해서 교육을 받게 된다.
아미르티무르 광장
징기스칸 이후의 세계정복을 꿈꿨던 위대한 아무르티무르(1336-1405)의 동상이 서있는 광장으로 지금은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꾸며져있다. 구소련시절에는 이곳을 붉은광장이라고 불렀으며, 마르크스 엘겔스의 동상이 3만 5천 평방미터에 달하는 공간의 중앙에 서 있었다. 유럽인들은 티무르를 테머레인(Tamerlane)이라고 불렀으며, 명(明)나라를 정벌하러 출정 도중 오트라르에서 병사하였다. 사마르칸트에 있는 구르 아미르에 그의 무덤이 있다. 또한 이 동상을 앞에 두고 많은 커플들이 결혼식을 올리기도 한다. 탸슈켄트 시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어, 여행의 출발 포인트로 손꼽히며 휴일에는 많은 시민들이 한가로이 한때를 보내고 있다. 박물관과 호텔, 상점들이 주변에 많아서 관광객들도 많이 눈에 띄는 곳이다.
우즈베키스탄 민족 역사박물관
나보이극장의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큰 규모의 박물관으로 이전에는 레닌박물관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지금은 선사시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진의 우스베키스탄의 역사가 전시되어있다. 전시실의 설명은 우스베키스탄어로 되어있으며, 입장료는 171소무정도이며, 환율의 차가 있으니 출발전에 확인해야 한다. 우즈베키스탄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있지만 귀중한 소장품은 그지 많지 않다. 중앙아시아의 다른 박물관과 마찬가지고 국보급의 보물은 구 소련연방이 거의 중앙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그러나 우스베키스탄 남부의 아프카니스탄 국경근처에 테르메즈교외에서 발견된 삼위일체는 귀중한 국보로 전시되어있다.
지진기념비
타슈켄트를 갔다온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 사마르칸트나 부하라 같은 주변 지역이 타슈켄트보다 훨씬 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얘기를 한다. 그 이유는 1966년 대지진으로 인해 타슈켄트의 모든 유산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이 지진기념비는 구 소련연방이 남긴 많은 유산들 중 하나로, 인상적인 거대한 조각물 중의 하나이다. 기념비 주변의 화강암 조각은 1966년 지진재해로 완전히 파괴된 타슈켄트를 재건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거대한 석조물은 처음 진동이 왔던 시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리히터 지진계로 7.5를 기록한 지진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당시를 살아있는 지옥으로 증언하였고, 1,000회 이상의 여진이 뒤따랐다. 정확한 사망자는 보고되지도 않았지만, 타슈켄트의 25만명 이상이 가옥이 파손되었다. 구시가는 이로서 최악의 생명과 재산을 잃어버리는 지옥으로 변했다. 지진이 있은 직후 19개의 소련연방은 중앙 아시아의 중심도시 타슈켄트를 재건하는 작업에 바로 뛰어들었다. 이것은 단일 기간으로서는 이곳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한 최대의 이주를 기록한 사건이었다. 이 지진기념비는 그러한 유산을 상징하는 또하나의 건축물이다. 이것은 터키스톤 콘서트 홀(Turkiston Concert Hall)에서 한 블록 떨어진 샤라프 라시도프 프로스펙트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사마르칸트
기원전 2세기 중국 실크 상인들이 서양으로 실크를 판매하려고 이용하던 육로 - 그들로 인해 실크로드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 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던 사마르칸트는 유럽과 동양을 연결하는 바닷길이 열리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주요 무역도시였다. 3,4세기 아프라샤프에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해 마을을 영위하고 생활했을 때부터 이곳은 고대 그리스에 마라칸다라(Marakanda)는 이름으로 알려져 잇었다. 지금도 폐허가 되기는 했지만 그 유적이 아프라샤프 언덕에 남아있다. BC 4세기 초에 알렉산더 대왕이 사마르칸트를 점령했는데, 그로 인해 동서양의 문화가 교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7세기초 아랍인들의 군대가 침입했고, 그들은 사마르칸트를 바그다드와 중국 사이를 오가는 상단의 교역지로 번영했고,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1220년 징기스칸의 침입으로 사마르칸트는 완전히 파괴되어 번영과 영광의 빛을 잃게 되었다. 14세기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던 티무르 왕이 사마르칸트를 티무르 왕조의 수도로 정하면서 다시 한번 찬란한 영광의 빛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티무르 왕이 통치했던 35년 동안 그는 자신이 정복한 도시에서 이름난 건축가들을 사마르칸트로 불러들여 세계 제일의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었고, 그의
후계자들 또한 그런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 지금 우리가 멋진 유적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마르칸트는 15세기까지 티무르 왕조와 함께 번영을 누렸다. 1868년 러시아 군대의 침략으로 러시아의 종속국이 되었고, 1925년부터 1930년 타슈켄트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우즈벡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였다.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해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이 되었다.
레기스탄 광장(Registan Square)
레스스탄 광장은 고대 역사도시 사마르칸트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곳으로 광장의 양옆과 위쪽에 웅장한 세개의 건물들 - Madrassa Ulugbek (1417-1420), Sher Dor (1619-1636), Tilla Kari (1647-1660) - 이 자리잡고 있다. 광장 맨 앞을 차지하고 있는 푸른 돔과 아치형 입구가 인상적인 건물은 Madrassa Ulugbek로 중세시대에 지금의 대학과 같은 역활을 했던 최고 종교 교육기관이었다. 그리고 광장 양쪽에 서 있는 두개의 건물은 그 규모와 호화로운 장식으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시즌에는 저녁마다 레기스탄 광장에서는 음악이 울려퍼진다. 지진과 외부인의 침입으로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거대한 건물들로 둘러싸인 광장에 서 있으면 마치 '신밧드의 모험'에 나오는 신들의 땅에 발을 들인 인간이 된 것 같다. 1960년대 후반 고고학적 견지에서의 측량과 발굴, 탐사, 그리고 고문서 연구 등의 광범위하고 다양한 측면에서의 사전조사와 연구를 기반으로 조심스럽게 복구작업에 들어갔고, 현재는 작업이 완료된 상태이다.
비비하님 모스크(Bibi Khanum Mosque)
1399년에서 1404년 사이에 지어진 비비하님 모스크는 레기스탄 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사마르칸트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로 손꼽히는 건축물이다. 비비하님 모스크를 건축한 티무르왕은 여러 아내를 거느리고 살았는데, 그들 중에서 비비하님을 가장 총애했었다고 한다. 이곳은 티무르 왕이 비비하님에 대한 소중한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건설한 엄청난 규모의 사원으로 이곳에는 그녀가 잠들어 있다. 오랜 시간의 흐름속에서 처음 만들어 졌을 때의 그 화려함이 빛이 바래고, 1897년 지진으로 건물이 부분적으로 파괴되어, 사원 이곳저곳의 복구 작업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상태이지만 그래도 그 아름다움은 퇴색되지 않았다. 15세기 완공되었을 당시에는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돔으로 이름을 떨쳤었다. 비비하님을 둘러보고 있자면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정복했던 티무르 왕의 장대했던 포부가 느껴진다.
세계 9위의 영토를 가지고 있는 [카자흐스탄]
카자흐란 이름은 '유랑자' 또는 '독립인'이라는 말로 이들 민족은 13세기 징키스칸의 후예로 전통적인 유목민족이다. 중앙 아시아에 위치하고 있고, 면적은 272만 4900㎢로 세계에서 9위이며, 남한의 27배에 달한다. 인구는 2001년 1673만여명으로 한국의 수도권 인구와 비슷하다. 정식명칭은 카자흐스탄 공화국(Republic of Kazakhstan)이다.
◈수도 : 아스타나(Astana) * 1998년 12월에 알마티에서 아스타나로 이전
◈인구 : 약 16,731,303(2001년 7월 기준)
◈면적 : 2,724,900㎢ (면적상 세계9위, 남한의 27배)
◈주요도시 : 알마티, 카라간다(61.5만) (췸켄트 40만)
◈주요민족 : 카자흐인 51%, 러시아인 32%, 우크라이나인 4%, 독일인 3%
◈주요언어 : 카자흐어 40%, 러시아어 66%(공식 언어로 널리 사용됨)
◈종교 : 회교(수니파), 러시아정교
1991년 구소련의 소비에트연방에서 독립하여 독립국가연합(CIS)의 하나가 되었다. 현재는 공화제의 형태로 대통령제를 택하고 있고, 90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방한을 한 후 우리 나라와 북한에 각각 92년 1월에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공관이 설치되어 있다. 1998년에는 수도를 알마티에서 아스타나로 옮겼다. 북쪽은 러시아연방에 접해 있고, 동쪽으로 중국과 몽골에 남쪽으로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 투르크메니스탄에 접하고, 서쪽으로 카스피해(海)에 닿아있다. 역사적으로 카자흐는 나라없는 한인들의 한많은 수난의 역사가 쓰여진 중앙 아시아의 나라이다. 1937년 스탈린의 정권하에서 이루어진 강제 이주에 따라 수십만의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이주되었다. 이들은 일본인이 한인을 이용해 간첩으로 쓴다는 우려와 한인수의 증가에 따른 자치요구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 농업(벼농사)기술을 중앙 아시아의 농업 개척에 이용 하기 위한 목적, 소수 민족 분산 지배 정책 등의 정치적 이유로 화물차와 가축 운반철도로 이송되었다. 추운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한달여에 걸친 이동중 추위와 굶주림으로 다수가 사망하였으며, 한인들이 당도한 곳은 인가하나 없는 황량한 반사막 초원지대인 우슈토베란 곳으로, 소련당국은 이 황무지에 수십만의 한인들을 내려 놓고 아무런 대책없이 생활을 하도록 강요했다. 2차 세계대전시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게되자, 한인들이 적성민족이라는 누명을 쓰고, 후방의 노동전선(탄광, 군수공장, 북극권 산림벌체 등)에 동원되어 추위, 기아, 강제 사역으로 고통받았던 것이다. 현재 고려인은 11만명 정도가 있으며, 교민도 10만 5천여명으로 추정된다.
◑ 알마티
1927년부터 1997년까지, 70년 넘게 카자흐스탄의 수도였으며, 카자흐스탄 국민들에겐 황금 요람 으로 불리는 역사와 전통문화의 도시다.
사과를 비롯한 체리, 살구나무에 둘러싸여 있어서 사과의 천국 이란 애칭도 갖고 있다. 대도시답지 않게 자연적인 풍광이 뛰어나며, 여름이면 만년설이 산에서 녹아 내린 시냇물이 알마티 변두리로 흐른다.
거리마다 빼곡한 피라미드형의 포플라 나무와, 알마티에만 서식하는 이샨 전나무 또한 이곳의 명물이자 추억거리로 불린다.
대문호 헤밍웨이 부부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라고 알마티 여행소감을 밝혔었다.
알마티라는 도시명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8C~10C 사이로 추정된다 이미 청동 시대부터 사람들이 정착해온 것으로 짐작되면, 9C경의 농, 목축 생활터도 속속 발견되고 있다. 특히 실크로드를 이용한 국가간 무역이
활발했으며, 일리계곡 을 통과하는 길은 13C까지 가장 번성한 무역로의 하나였다.
교외로 나가면, 빼어난 광천 요양소와 사막과 추원을 만나다. 특히, 초원의 바람이 사막을 지나며 일으키는 현상은 아프리카와 하와이등 몇몇 곳에서만 나타나는 불가사의 중 하나로 불린다.
하루짜리 알마티 종단 여행은 20~30km 거리의 알마티를 두루 거치며 장엄한 만년설산 정상까지 오르는 여정이다. 특히 시내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메데오 스케이트장과 침불락 스키장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천연설의 리조트로 가족여행의 최고로 꼽힌다.
◎ 카자흐스탄의 관광명소
1. 침불락
백과사전에도 나오는 알마티 최대의 관광명소. 2001년 여름에는 한국의 남성듀오 '듀크'가 이곳에서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기도 했다. 겨울에는 유명한 스키장이 되고 여름에도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장소다. 아래에 꽤 시설이 좋은 호텔이 있다.
해발 2,250 2,500m에 위치한, 천연설의 자연 스키장, 최근 패밀리 리조트로 재정비되면서 사계절 휴양지로 거듭났다. 스키장 규모와 자연경관이 중앙 아시아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다. 화장한 날엔 천산산맥과 탈가르 봉우리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2. 메데우
이 지역에서는 지금도 유목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다. 짙푸른 골짜기산등성에는 아직도 말들을 방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이곳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침불락'이라는 산의 정상을 볼수 있는데 만년설이 뒤 덮혀 있는 곳으로 여름에 가도 새하얀 눈을 맘껏 볼 수가 있다고 하는데 실지로 눈 덮인 산을 곳곳에서 볼 수가 있었다. 또 여기에서 우리나라의 배기태 빙상선수가 쇼트트랙에서 금메달을 딴 빙상경기장이 있다.
3. 재래시장(바자르)
우리나라의 재래시장과 비슷한 시장이라 생각하면 틀림없다. 오티타르호텔 앞의 고고리거리를 고리키공원 방향으로 걷다가 두번째 교차점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막다른 곳에 즐비하게 있는데 이곳에서의 쇼핑은 흥정으로 시작 되여 흥정으로 끝난다. 한국산 샴푸도 볼 수 있고 퐁퐁도 몇 개씩 진열되어 있다.
4. 꼭주베
알마티 시내에서 웬만한 곳에서 동쪽으로 보면 이곳이 보인다. 지방에서 철도를 타고 알마티 쪽으로 들어오면, 처음으로 반기는 구조물이 바로 이 꼭주베의 TV 타워이다. 꼭주베는 'green peak'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해발 1,070m에 위치하고 있다. 꼭주베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있어 서쪽으로 알마티 시내와 남쪽으로 천산 산맥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TV 타워는 327m의 높이이며, 5개의 TV 채널과 4개의 라디오 채널을 커버할 수 있다. 그리고 주위 80-190Km의 반경을 커버한다. 전망대는 146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이 타워는 철심이 내부 지반 내에 고정되어 위치하도록 되어 있어, 강도10의 지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5. 판필로바 28인 공원
고골리아와 똘레비사이의 푸쉬키나 거리에 위치한다. 이 공원에는 4가지 볼 것이 있다. 첫째는 이 공원 그 자체이다. 울창한 나무들과 꽃들로 조화된 공원에서 휴식을 취하면 정말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둘째는 공원 중앙에 위치한 젠코브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다.
이 성당은 1904년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건축된 것으로 유명하다. 높이는 50m정도이고 1911년의 리히터 규모 10의 대지진에도 부서지지 않고 견딘 것으로 유명하다. 소비에트 시대에는 예배가 진행되지 않다가, 1995년 러시아 정교회로 반환된 후 1997년부터 다시 예배가 드려진다고 한다. 세번째 볼 것으로는 2차 세계대전 순몰용사를 위한 꺼지지 않는 불꽃과 28인의 청동조각상이다. 결혼식후 신랑 신부가 이 꺼지지 않는 불꽃 앞에 와서 꽃을 헌화하는 장면도 볼 수 있다. 이 28인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1941년 2차 세계대전(여기서는 위대한 애국전쟁이라고 부른다) 당시, 모스크바 근교까지 독일군이 들어 왔을 때 316보병사단의 1075연대소속의 28인의 전사가 독일군 탱크50대에 저항하여 필사로 저항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사단이 알마티 시에서 창설되었고 이반 판필로브 장군이 지휘를 했다고 한다. 네번째 볼 것은 바로 카자흐 민속 악기 박물관이다. 옛 러시아의 건축양식을 한 건물인 민족 악기 박물관은 옛날부터 카자흐에 전해 내려오는 민속 무용과 그 음악에 잘 어울리는 악기류가 전시되어 있다. 이 곳에는 고대 의상을 입고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고 민속춤을 보여주기도 한다
중앙 아시아의 스위스 [키르키즈스탄]
키르기즈스탄은 중앙아시아 내륙의공화국으로 정식명칭은 키르기즈스탄 공화국이다.
소연방국에서 소련이 붕괴되며 1991년 분리독립 하였으며 독립국가연합의 일원이다.
북쪽과 북서쪽으로는 카자흐스탄, 남서쪽으로는 우즈베키스탄, 남쪽으로는 타지키스탄과 접해있다. 남동쪽으로 톈샨산맥[天山山脈]의 일부를이루는 알라타우산맥이 중국과 국경을이루고있다.
키르기즈스탂은국토가대부분 산이여서 앙아시아의 스위스라고 부르기도한다
비쉬켁은 키르기스산맥의 추강 유역 해발 800-900M 에 자리잡고 있는 고원도시로 키르키즈스탄의 수도입니다. 비쉬켁에서 남쪽으로 40KM 떨어진 알라아르챠계곡은 웅장한 설산 자연국립공원이다. 중앙아시아의 스위스라 불리는 알라아르차계곡을 따라 가면 세계 두번째의 산악호수.. 이식쿨호수를 만날 수 있다.
•위치: 중앙아시아, 중국의서쪽에위치
•면적: 199,951 ㎢
•기후: 건조대륙성기후에서 텐샨산맥의 북극기후까지 다양, 남서지방의 아열대기후, 북부구릉지대의 온화함
•수도: 비슈케크(BISHKEK)
•국경: 중국858 km, 카자흐스탄1,051 km, 타지키스탄870 km, 우즈베키스탄1,099 km
•인구: 5,431,747 명(2009.7.추정)
•민족: 키르기즈인64.9%, 우즈베크인13.8%, 러시아인12.5%, 기타8.8% (1999 인구조사)
•종교: 이슬람교75%, 러시아정교20%, 기타5%
•언어: 키르기즈어64.7% (공식어), 우즈베크어13.6%, 러시아어12.5% (공식어), 둒갂어1%, 기타8.2% (1999 인구조사)
◑ 비쉬켁
옛 이름은 Pishpek(~1926), Frunze(1926~92). . 키르기스산맥과 가까운 추강유역 해발750~900m의고지대에 자리잡고있다. 알라르차·알라메딘강이흐르며, 볼쇼이[大] 추이스키 운하가 북쪽을가로지르고있다. 1878년 러시아가 19세기초 현지에세워진 코칸트칸국의 요새를 점령하고 요새부근에 건설도시. 1913년 주민이 1만4,000명 에이르렀다. 이 지역의 행정중심지였지만 본질적으로 엉성하고 불규칙한 모양으로 펼쳐져 먼지투성이 마을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있다가 1924년 새로창설된 키르기스자치주의 주도로 선정되었다. 1926년 키르기스 자치주가 키르기스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이 되면서 피슈페크는 공화국의수도가 되었고 명칭도1885년 이곳에서 태어난, 혁명가이자 적굮(赤軍)의 지도자였던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프룬제의 이름을 따서 프룬제로 바뀌었다. 그 후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 현대적도시로 성장했다. 오늘날 가로수가 늘어서있는넓은도로들이 바둑판처럼 뻗어있으며, 공원과 과수원이곳곳에자리잡고있다. 남쪽으로는 만년설에 덮인 산들이 보인다. 많은 관청건물들과 함께극장, 키르기스과학 아카데미(1954 창립), 키르기스 국립대학교, 농과대학, 의과대학, 과학기술전문대학, 사범대학이있다. 비슈케크의 산업은 2단계로 발전해왔다. 1941년까지는 현지에서나는 원료들을 이용한 식료품산업과 경공업에 중점을 두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서부의 중공업이 이곳으로 철수 한 뒤부터는 기계조립과 금속공업이 널리 이루어졌다. 특히1960년대에 급속히 발전했으며 1959~70년에 인구가 거의2배로 늘어났다. 현재 인구 약 80만명
비쉬켁은 키르기스산맥의 추강 유역 해발 800-900M 에 자리잡고 있는 고원도시로 키르키즈스탄의 수도입니다. 비쉬켁에서 남쪽으로 40KM 떨어진 알라아르챠계곡은 웅장한 설산 자연국립공원이다. 중앙아시아의 스위스라 불리는 알라아르차계곡을 따라 가면 세계 두번째의 산악호수.. 이식쿨호수를 만날 수 있다.
◑ 이식쿨호수
이식쿨호수 이식쿨은"뜨거운호수"라는 의미로겨울에도얼음이 얼지않는데서 온 이름이다. 이식쿨호수는 알라투산지가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공기와 중앙아시아에서 불어오는 뜨거운공기를 막아주기 때문에 겨울에 얼음이얼지않고 덥지도않다. 이식쿨호수는 퀸게이알라타우와 테르스케이 알라타우지역의4000미터(13,120피트)의 봉우리사이에 위치하여 물로가득참 거대한 웅덩이이다. 이식쿨호수는 해발1600미터(5250피트)높이에위치하고 있으며 길이는 170킬로미터(105마일), 너비는 70킬로미터(43마일), 수심688m로 남미의 티티카카호수(Lake Titicaca)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산악호수이다. 오늘날 이식쿨 호수에오는 주된 이유는 호수가의 조용한 분위기에 빠져 온천을 즐기며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훌륭한 하이킹트레일을 탐험하면서 35킬로그램(77파운드)까지 무게가 나간다는 송어를 현지에서 직접 잡으려는데있다. 흰표범을 잡으려고 열심인 생각없는 서방사냥꾼들 덕분에 심각한 밀렵문제가있지만 산악지대의 야생동물로 산고양이, 야생염소, 곰, 야생멧돼지가 있다.
<중앙아시아 3개국 투어 준비물 및 주의 사항>
1. 날씨: 일반적으로 한국 현재와 비슷한 날씨(카자흐스탄은 서울과 비슷)입니다. 한낮의 햇볕이 강해서 일부 지역은 약간 더 덥게 느껴질 수도 있으며, 일교차가 10도 가까이 벌어지기도 하고 건조한 지역이기 때문에 날씨가 흐려지면 체감온도는 더 떨어집니다. 봄/여름옷 + 스웨터 및 얇은 점퍼류 로 준비해주세요. 큰 일교차로 인해 야외 활동시 쌀쌀할 수 있으니 여벌의 옷을 겹쳐 입으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여행 중 비가 내릴 수 있으므로 접는 우산을 가져가시길 바랍니다.
2. 옷차림&신발 – 캐쥬얼한 따듯한 옷차림이 좋습니다. 한낮에는 햇빛이 강하여 다소 덥다 느껴지실 수도 있지만 기본 봄/여름옷에 덧입고 벗을 수 있는 옷을 준비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일교차가 큰편으로 밤에 선선할 경우를 대비하여 입으실 옷도 준비해 주세요(호텔 프론트에 여분의 블랭킷을 요청할 수 있지만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발은 편한 운동화가 좋습니다.
3. 선글래스/양산 & 선크림 : 자외선이 강하여 햇볕 차단용 선글래스는 필수입니다. (한국에서 조깅이나 등산할 때 쓰시는 얼굴 전체를 가리는 마스크는 현지인들에게 불쾌감과 당혹감을 줄 수 있고, 가끔 현지 경찰 검문에 걸리는 경우도 있으니 지양해 주십시요.) 가급적 선글래스나 챙이 넓은 모자 또는 양산 또는 우산을 쓰시길 권장합니다.
4. 간단한 상비약 (평소 드시던 약들, 감기약, 진통제, 지사제, 파스 등…). 현지에도 약국들이 있기 때문에 필요한 약은 구입할 수 있지만, 원하시는 브랜드 제품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5. 중앙아시아 현지식은 빵이 주식이며 야채샐러드+고기 위주의 음식이 나옵니다. 대체적으로 소금간이 센 편이며 가이드가 주문 시 얘기를 하지만 재료 자체에 들어가 있는 경우는 어쩔 수 없기에 향과 맛 그리고 센 간에 대해 미리 양해 부탁 드립니다. 매운 음식이 거의 없기 때문에 고추장이나 매운 양념 간장 등을 준비하시면 좋고, 현지 음식에 민감하신 분들이 있다면 컵라면, 햇반, 김, 봉지김치, 튜브 고추장, 밑반찬 등을 준비해 오시길 바랍니다.
또한, 커피 포트를 룸에 구비해 놓고 있는 호텔들이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행용 미니포트가 있으신 분들을 가져오셔도 좋겠습니다.
6. 전기는 220볼트입니다. 한국과 달리 중앙아시아 지역은 전력 수급이 불안정하여 간혹 예고없이 정전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7. 국경 육로 통과 시, 개인 짐을 전부 각자 들고 도보로 통과해야 하기에 힘이 덜 드는 4바퀴 달린 캐리어를 가져오시면 더욱 편리합니다.
8. 환율 정보: 2015년 (환전은 US$로 준비하시면 됩니다)
우즈베키스탄 1000숨 = 약 450원
키르기즈스탄 10솜 = 약 200원
카자흐스탄 100텡게 = 약560원
9. 여행 상품가에 불포함인 비용(기사/가이드 경비, 매너팁, 기념품 구입, 개인 음료, 매 식사 시 주류, 등…)을 위한 금액은 달러로 가져오시면 됩니다. 고액권보다는 소액권 위주로 준비하시면 되겠습니다. 물론 도심지역에서는 신용카드 사용 가능합니다. 호텔 매너팁이나 포터팁의 경우는 하루/한 짐당 1달러 주셔도 됩니다.
10. 유럽이나 터키와 같이 중앙아시아 지역도 이용하시는 식당들이나 편의점 외에 별도로 들르는 화장실은 대부분 유료입니다.. 이동 중 들르게되는 화장실의 상태도 한국과는 달리 시설이 좋지 않고 화장지가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호텔에서 미리 화장지를 챙겨 놓으시는게 좋습니다)
11. 그 외… 중앙아시아 지역은 아직 한국 수준의 체계화된 사회/관광 시스템이 이뤄져 있질 않고 숙박/식당 시설에서도 일반적인 서비스 마인드가 보편화 되어 있지 않고 일처리가 매우 느려서 불편함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구 소련의 체제가 아직 많이 남아 있어 특히 공항에서 입국 일처리가 매우 늦으며 짐이 늦게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여 불쾌하신 일이 있더라도 미리 양해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