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훈의 두 번째 소설집입니다.
작가의 말
중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 양성학교인 사범학교에 진학한 나는 1학년 때 화가가 되고 싶었다. 대학 진학을 할 수 없었던 터라 교사생활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해 볼 만하다고 여겨져서였다. 그런데도 국어 성적이 가장 나빴던 내가 소설 공부로 방향을 바꾼 것은 경제 사정 때문이었다. 그리기 훈련에 필요한 도구며 재료 마련에 필요한 돈을 당시 형편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
소설 쓰기는 필기구와 종이만 있으면 되니 내 형편에 딱 맞아 보였다. 마침 소설을 즐겨 읽던 때라 쓰고 싶은 욕망도 슬슬 일어 바로 이것이다 싶었다. 공납금 미납으로 교실에서 쫓겨나 등교도 못 할 때 소설 읽기는 나에게 훌륭한 위안이었다.
고3 때 교지에 소설이, 영남일보에 콩트가 실려 용기가 솟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작품을 보내기도 했다. 1963년 대구일보, 1966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작 없는 가작 입상을 했다. 그 무렵 경향신문,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두 번씩 본심에 올랐고, 정기 간행물 사상계, 세대, 문학 신인상에 응모해 본심에 올랐다.
그러나 나의 소설 쓰기는 거기서 일시 중단되었다. 두 동생 6학년 담임을 연거푸 하면서 시간을 낼 수 없어서였다. 칠판의 글씨가 보일 때부터 안 보일 때까지 수업해야 했다. 시골 학교이면서 대구로 진학해야 했고 입시 경쟁이 엄청나게 치열했기 때문이었다.
소설 쓰기는 가능성을 보았으니 잠시 미루어 두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잠시는 잠시로 끝나지 않았다. 과로와 영양실조로 각혈까지 한 폐결핵을 앓아 자가 치료를 해야 했고, 갑자기 원하지 않은 학교로 전근되는 바람에 중등학교 교원자격고시검정 준비에 들어가, 6개월 만에 합격하여 중등학교로 옮기는 바람에 시험 준비 및 교재 연구에 많은 시간을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공모에 응해 젊은 패기와 겨루어 한 사람밖에 뽑지 않는 당선을 하기란 가망이 없어 보여 퇴임 후 시간이 넘칠 때 소설집을 냈다. 책 내라고 권했던 수필가인 지인이 등단하라고 10여 년이나 권했다. 말빚이나 갚자고 월간문학 신인상 모집에 응모해 뜻밖에 당선이 되었다.
등단 이후 발표한 작품이 책 한 권 분량이 되었고, 때맞춰 부산문화재단의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이 책을 내게 된 것은 그 덕이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내는 책이라 책임감을 무겁게 느낀다.
부산문화재단에 고마움을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