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국이 망한 후 식민지가 홀로 남는 것이 이상한 일인가
- 서울의 우리 집에서부터 분가한 친척이 부산에 사는데, 우리가 망하면 부산의 친척집도 함께 망하나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배지역이 넓은 나라에서 중앙정부가 망하는 경우, 먼 거리에 있던 식민지가 그냥 그대로 독립해서 살아가는 경우는 매우 흔합니다. 한이 망한 후에 낙랑이 오래도록 살아있었다는 것은 낙랑군이 낙랑국이 아니라는 주장에 어떠한 타당성도 더하지 않습니다.
2. 창해군 하나도 힘든데 군을 세 개나 더 설치하나
- 창해군의 설치와 관련된 사료에 명시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 창해군은 조선에 반기를 든 지역이 스스로 한에 복속을 요청한 결과 군으로 삼기로 결정된 곳입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이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지역에 홀로 떨어진 군을 설치하고 유지하기위해 필요한 보급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도저히 창해군을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아래 지배를 포기한 측면이 크디요. 조선과의 관계가 경색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자국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적국의 코앞에 위치한 곳을 군으로 지배하려면 그 보급로를 열고, 치안 및 방위를 유지하기 위한 병력을 유지하는데 얼마나 힘이 들까요.
반면, 창해군의 해체 이후 조선 그 자체를 멸망시킨 상황에서 군 4개 늘리는 것은 창해군 하나 만드는 것보다 더 쉽거등요.
3. <삼국유사>에는 낙랑군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 이건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계신건지 전혀 이해가 안가는데;
당나라 <배구전(裴矩傳)>에는 이렇게 전한다. “고려(高麗)는 원래 고죽국(孤竹國; 지금의 해주海州)이었다. 주(周)나라에서 기자(箕子)를 봉해 줌으로 해서 조선(朝鮮)이라 했다. 한(漢)나라에서는 세 군(郡)으로 나누어 설치하였으니 이것은 곧 현토(玄免)․낙랑(樂浪)․대방(帶方;북대방北帶方)이다.”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菟-樂浪-帶方(北帶方)"
<삼국유사, 권1, 기이 - 왕검조선>
천자는 이 싸움이 오래 되어도 끝이 나지 않자 옛날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시켜서 치게 하고, 모든 일을 편의에 의해서 처리하게 했다. 공손수는 우선 누선장군을 묶어 놓고 그 군사를 합쳐서 좌장군과 함께 급히 조선을 공격했다. 이때 조선의 상(相) 노인(路人)과 상(相) 한도(韓陶)와 또 이계(尼谿)의 상(相) 삼(參)과 장군(將軍) 왕겹(王唊;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이계尼谿는 지명地名으로 이들은 모두 네 명名이라고 했다)은 서로 의논하여 항복하려 했으나 왕은 이 말을 좇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한도(韓陶; 음陰)와 왕겹(王唊)은 모두 도망해서 한나라에 항복했고 노인은 도중에서 죽었다. 원봉(元封) 3년 여름에 이계(尼谿)의 상(相) 삼(參)은 사람들을 시켜서 왕 우거를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했다. 하지만, 왕검성은 아직도 함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거의 대신(大臣)인 성기(成己)가 또 자기 나라를 배반했다. 좌장군(左將軍)은 우거의 아들 장(長)과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로 하여금 자기들의 백성을 타이르고 성기를 죽이도록 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임둔․낙랑․현토의 네 군(郡)으로 삼았다.
"天子以久不能決 使故濟南太守 公孫遂往征之 有便宜將以從事 遂至 縛樓舡將軍 竝其軍 與左將軍 急擊朝鮮 朝鮮相路人-相韓陶(陰)-尼谿相參-將軍王唊(師古曰 尼谿地名 四人也) 相與謀欲降 王不肯之 陶(陰)唊路人 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夏 尼谿相參 使人殺王右渠 來降 王儉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己又反 左將軍使右渠子長-路人子最 告諭其民 謀殺成己 故遂定朝鮮 爲眞番-臨屯-樂浪-玄菟四郡"
<삼국유사, 권1, 기이 - 위만조선>
전한(前漢) 때 처음으로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다. 응소(應邵)는 말하기를 이것을 “고조선국(古朝鮮國)”이라 했다. <신당서(新唐書)> 주(注)에, “평양성(平壤城)은 옛 한(漢)나라의 낙랑군(樂浪郡)이다”했다.
<국사(國史)>에는 이런 말이 있다. “혁거세(赫居世) 30년에 낙랑(樂浪) 사람들이 신라(新羅)에 항복했다. 또 제3대 노례왕(弩禮王) 4년에 고구려(高句麗)의 제3대 무휼왕(無恤王)이 낙랑(樂浪)을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들은 대방(帶方; 북대방北帶方)과 함께 신라에 투항해 왔다. 또 무휼왕(無恤王) 27년에 광호제(光虎帝)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을 삼으니, 살수(薩水) 이남의 땅은 한(漢)나라에 소속되었다.”
(이상의 여러 글에 의하면 낙랑樂浪이 곧 평양성平壤城이란 것이 마땅하다. 혹은 말하기를, 낙랑樂浪의 중두산中頭山 밑이 말갈靺鞨과의 경계이고, 살수薩水는 지금의 대동강大洞江이라고 한다. 어느 말이 옳은 지 알 수가 없다)
또한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의 말에는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靺鞨)이 있다”고 했다. 이는 아마도 옛날 한(漢)나라 때 낙랑군에 소속되었던 현(縣)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역시 이곳을 낙랑(樂浪)이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 고려(高麗)에서도 또한 여기에 따라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이라 불렀다. 또 태조(太祖)가 그 딸을 김부(金傅)에게 시집보내면서 역시 낙랑공주(樂浪公主)라 불렀다.
"前漢時 始置樂浪郡 應邵曰 故朝鮮國也 新唐書注云 平壤城 古漢之樂浪郡也 國史云 赫居世三十年 樂浪人來投 又弟三弩禮王四年 高麗第三無恤王 伐樂浪滅之 其國人與帶方(北帶方)投于羅 又無恤王二十七年 光虎帝遣使伐樂浪 取其地爲郡縣 薩水以南屬漢(據上諸文 樂浪卽平壤城 宜矣 或云樂浪中頭山下靺鞨之界 薩水今大同江也 未詳孰是) 又百濟溫祚之言 曰東有樂浪 北有靺鞨 則殆古漢時樂浪郡之屬縣之地也 新羅人亦以稱樂浪 故今本朝亦因之 而稱樂浪郡夫人 又太祖降女於金傅 亦曰樂浪公主"
<삼국유사, 권1, 기이 - 낙랑국>
낙랑군에 대한 기록이 없기는 커녕, 조선 망하면서 그 땅에 설치한 것 중 하나가 낙랑군이며, 낙랑국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아주 구체적으로, 옛 한나라의 낙랑군에서 비롯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는데요. 게다가, "여러 낙랑"의 의문을 풀 수 있는 단서 또한 사료 내에 기록되어 있지용. 옛 한의 낙랑국에 소속된 현이 있었던 지역을 백제나 신라에서도 일반적으로 '낙랑'이라고 다 통칭했다고 말이죠.
4. 결정적으로, 리플을 통해 유문기님이 지적한 것처럼 한의 일부로써 낙랑군이 한반도 내에서 통치했음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유물이 발견된 이상, '한사군'이 전부 한반도에 있었는지를 알 수는 없어도 적어도 낙랑군이 한반도 안에 있었으며, 그 낙랑군이 이후 낙랑국으로 연결된다는 것은 이제 가설의 영역을 떠나 정설을 주장할만큼 사료와 유물 양쪽 모두 확실히 교차검증이 되는 내용입니다.
사고실험 한 것으로 "아마 아니었을거임"하고 주장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에요.
첫댓글 크웨사님 낙랑군부정설에 대한 반박자료로 좀 퍼가도 될런지요?
애구애구... 잘 모르겠뜸. 전 그냥 첨에 알던대로 그냥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로 생각할 거심. 이런거 보면 공돌이 된거 후회하면서도 내심 사학보다는 낮지 란 생각을 한다능... 이런건 그냥 심심풀이 땅콩~!
감히 뮨돌인민공화국을 까다니... 우리 공도리 동무 보쿰탄광햏 가보고 싶오?
유물이 하나도 아니죠. 쏟아지는 레벨이니 최소한 낙랑군은 부정하기 극히 힘들듯 싶습니다.
이미 고고학적으로 낙랑군은 한반도에 있음이 너무나 확실해졌습니다 ㅡ.ㅡ;;; 이건 기록 해석 레벨로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그런데 비교적 크기가 작은 유물들이라던데요? 좀 더 자세한 자료 링크 좀;
크기 작고 뭐고도 아니고 중국식 동경이 거의 그쪽에서 대량 발굴되고 중국식 토기양식 중국식 기와 등 뭐 아주 생활 양식이 완전 우리나라 삼한지방과 고구려가 있던 곳과 거의 딴판입니다 ㅡ.ㅡ;;;
물론 변한-진한 지역에도 낙랑지역과 비슷한 류의 와질토기도 등장하고 여러 문화적으로 비슷한 양상을 보이지만 역시 본류인 낙랑지역보다 확연하게 기술적-문화적 차이를 보입니다(와질토기도 결국 중국식 토기 제작법중 환염소성기법과 회전물손질 기법 그리고 타날기법만 받아들이고 더 고차원의 물레성형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참고로 위나라가 중국의 패권을 잡고 있을 때는 위나라 식 동경과 문화양식이 낙랑
상식적으로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고대 한반도 국가들의 지도(1~2세기경)만 봐도 짐작할수 있습니다. 부여, 고구려, 동예, 옥저, 마한등의 위치를 보면 평양과 평안도 지방을 둘러서 그 주변부에 있죠. 그리고 그 평양과 평안도 지방은 비어있는 지역으로 나옵니다. 왜 거기가 비어있을까요. 아시다시피 대동강유역은 상당히 풍요로운 지역인데 말이죠. 그 곳에 낙랑군과 나머지 한사군이 있으니 거기로 진출하지 못한거죠. 다만 국사교과서에는 그걸 직접적으로 언급하기 꺼려서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았던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