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아는 사람을 따라 얼떨결에 강의를 들으러 갔었다.
그 때 강사분이 은퇴 후에 관한 얘기를 하면서, 아무리 돈이 있어도 자신의 일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 돈이 많아 매일 골프를 치러 다닌다면 "나이스 샷!"을 외치며 그것이 즐겁기만 하겠냐며, 나중엔 골프 치는 것도 노동으로 느껴질 거라며.
그리고 지금 몸에 심는 칩이 개발 중이라며, 나중엔 내 몸 속의 칩이 나의 몸 상태를 알려줘서 죽고 싶어도 이 칩 때문에 맘대로 죽을 수도 없는 세상이 올거라는 얘기도 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섬뜩했던 기억이 난다.
큰 아들이 돌이 지날 무렵 그러니까 10여 년 전, 교사인 언니가 필리핀에 있는 한인학교로 가게 되어, 남편이 언니 따라가서 영어 공부라도 하고 오라고 해서 1년 정도 필리핀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필리핀은 인건비가 싸고, 또 그 나라 사정을 잘 아는 현지인이 필요하기도 해서, 집에서 메이드와 함께 생활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메이드가 아침 준비를 해 놓는다. 몸만 빠져나와 아침을 먹고 나면 메이드가 설거지를 해 준다. 나는 메이드에게 아이를 맡기고 오전에 어학원을 간다. 집에 돌아오면 집안 청소와 빨래는 메이드가 해 놓는다. 메이드가 해 준 점심을 먹고, 빌리지 안에 있는 수영장에서 아이와 함께 논다. 운 좋게도 우리 집 뒤가 바로 수영장이다. 수영장에는 리조트처럼 폭포도 있고 작지만 재미있는 워터 슬라이드도 있다.수영하러가기 귀찮으면 정원에 있는 스프링클러를 틀어놓고 논다.아니면 놀이터에 가서 논다.그리고 언니가 돌아오면(학교가 마치는 시간) 조카와 동네 아이들과 함께 농구 코트에 가서 놀기도 하고, 가끔은 정원에서 메이드가 구워주는 바베큐를 즐긴다. 또 저녁을 먹고나면 빌리지 안을 운동삼아 산책한다. 빌리지 안은 안전해서 밤에 산책을 해도 위험하지가 않다. 게이트에서는 외부인이나 택시가 들어올 때 신분증을 맡겨야 하고,빌리지 직원들이 출입할 때도 소지품 검사를 한다. 매일 아파트만 보다가 정원이 있는 주택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 트리 장식은 정말 멋지다. 그리고 주말이면 쇼핑몰에 가서, 마사지도 받고 게임장에서 게임도 하고 맛있는 것도 사먹는다. 그리고 조카가 배우는 골프장(골프 연습장이 아닌 잔디가 깔린 골프장)에 따라가서 놀기도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자 이 생활도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던 시절도 아니고, 한국처럼 인터넷이 빠른 것도 아니어서 컴퓨터로 시간을 보내지도 못했다. 다운 받아놓은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정도. 또 외국이다 보니 한국책도 보기 힘들었다.(그렇다고 내가 영어로 된 책을 줄줄 읽을 실력도 없고.ㅠ)책을 마음껏 못 읽는다는 것은 정말 생활을 지루하게 만들었다.
이번에 '멋진 신세계'를 읽으며, 이런 세상도 그리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갈등이 심각하다. 그런데 사회적 갈등이나 계층 간 불화가 없는 세상.
그리고 100세 시대에 노후를 생각하면 깝깝한 생각이 든다. 그런데 노화와 질병이 없는 세상.
또 자녀의 불안정한 미래를 생각하면 걱정이 앞선다.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보면 그 중 하나가 정규직이라고 하니. 그런데 자기가 속한 계급에 따라 자신이 맡은 노동을 하기만 하면 되는 안정된 세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진 신세계'가 멋지게 느껴지진 않는다.
본인의 선택이라고는 처음부터 없었던 인생.
책을 읽고나면 간단하게 한 두 줄 느낌을 적어두는데, 예전에 '멋진 신세계'를 읽고난 후 이렇게 적어놨다.
'아무리 안정되고 고통과 불행이 없는 생활일지라도,인간의 생각과 감정 등이 지배자의 통제 아래 있는 삶이란 아무리 생각해도 끔찍하다.'
첫댓글 책을 마음껏 못읽어서 정말 지루한 생활이었다니! 샘의 책사랑은 정말 놀랍네요.
필리핀 생활을 묘사하는 단락에서 정말 꿈같은 생활이다 싶으면서 읽는 동시에 이미 지루함이 느껴지니. 인간의 행복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정말 복잡미묘한가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