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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고구려 토론방 추모왕과 왕망 - 추모왕은 살해되었나?
귀거래사 추천 0 조회 727 11.02.05 10:33 댓글 9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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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2.05 15:25

    첫댓글 추모왕은 왕망 이전에 이미 죽은걸로 삼국사기에 나와있습니다. 님의 주장이 뒷받침되려면 삼국사기의 추모왕 재위기간이 인상되었다는 것부터 증명하셔야 될 것 같은데요? 무조건 중국기록이 옳다 이건 좀 곤란하다고 봅니다.

  • 11.02.05 16:52

    대개 정통성이 부족하거나, 지배기반이 취약한 권력자는 자신의 치적을 침소봉대하는 경우가 강합니다.
    왕망이 남긴 기록이 후세에 전해진후 새로운 권력구조에 위배되지 않는 과장된 치적은 그대로 두는 경우가 있으니,
    왕망전에 전하는 기록은 사료비판없이 그대로 취신하는 것은 오류를 낳을수 있습니다.

    위에 다물전사님이 지적한것처럼.....
    사서에 전하나느 재위기간도 겹치지 않을뿐더러.....중국정권에 죽임을 당한 국왕에 대한....즉 고구려가 이시기에 결정적으로 큰 위기에 봉착하였다는 정황적인 기록조차 없다는 점을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 11.02.05 16:54

    즉, 왕망은 집권후,무리한 정책시도로 내우외환의 시기로, 압록강 중상류지역의 고구려가 시급한 과제가 아니었고, 오히려 흉노가 주된 외환이었다는 점이 왕망전에 기재되어 있음도 판단해보시길 권합니다.

  • 11.02.05 21:43

    차라리 추모왕은 유리왕에게 죽었을 가능성이 있지요.

  • 11.02.07 10:40

    왕망이라~!
    100년도 버티지 못하고 망한 나라의 왕에게 목이 베어 날아갔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굴욕이 아닐수 없군요.
    정말 어이없네요...

  • 작성자 11.02.07 11:48

    김부식도 자신이 갖고있던 사료와 연대가 맞지않아 이 기사를 추모왕 조에 넣지않고 유리왕 조의 말미에 넣었습니다. 결국 삼국사기의 紀年이 맞지 않든지 아니면 왕망전의 기사가 잘못이든지의 문제이지만 삼국사기의 추모왕 조는 대부분 건국신화로 채워져있고 왕의 事蹟은 1페이지도 안 되는 반면 왕망전에서 왕망의 사적은 수십페이지에 달합니다. 왕망이 흉노를 굴복시키려고 무리하게 대군을 보낸 것도 사실이고 이 원정이 결국 실패로 끝났고 이것이 왕망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는 것도 사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나는 삼국사기의 기년이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 11.02.07 15:27

    AD12년에 왕망이 고구려에 出兵을 요구하였든데 고구려왕 騶가 出兵을 거부했으므로 왕망은 고구려를 토벌하고 추를 죽였다는 기록을 의외로 고구려왕(추모왕 혹은 유리왕)의 죽음으로 보는 분들이 많군요.
    동일시대의 같은 사건을 기록하였더라도 상호간의 기록에 모순이 있을 때 진실성을 따지는 것이 문헌사학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합니다.
    당시에 죽은 고구려왕이 추모왕 혹은 유리왕인가에 따라서 삼국초기 기록이 크게 요동치게 됩니다.
    추모왕인 경우에는 백제초기 기년이 흔들리고, 유리왕의 경우라면 무휼이 당시9세인 상황이어서 차기왕권을 누가 승계하였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 11.02.07 15:37

    남당유고에는 삼국사기 기록을 지지하고 있는데, 아마도 전쟁에서 패한 왕망의 신하들이 성주를 죽인 것을 부풀려서 고구려왕을 죽였다고 치장하여 서로간의 승패가 있었다고 무마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혹은 유리명왕이 그때 사망하였는데 서기18년 익사한 해술(무휼의 형)이 대신 섰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다른 사서에 보면 유리명왕과 사이에 대무신왕 사이에 또 다른 왕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 11.02.07 17:49

    남당유고에 보면 본기신편열전에는 유리명왕은 아들 셋을 먼저 보냈다고 합니다.
    본기신편열전과 삼국사기에 의하면 도절, 해명, 해술태자라고 되어 있고, 고구려사초(략)에는 도절, 해명, 도조, 해술이라고 되어 있으니 모순이 됩니다.
    고구려사초(략)에는 서기28년에 유리명왕이 사망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서기18-28년 사이에 유리명왕의 자녀출생기록이 없고, 동명묘를 세웠다는 기록은 서기18년 사망을 의심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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