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왕과 왕망 - 추모왕은 살해되었나?
일본학자 坂元義種은『고대 동아시아의 일본과 조선』(吉川弘文館)에서 고구려왕 騶(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漢書 왕망전에 의하면 왕망은 새 왕조 新을 수립하자 漢의 印綬를 新의 인수로 대체하기 위하여 五威將 왕기 등을 각국에 파견했다. 그런데 흉노에게 수여한 새 인수에는 ‘璽’ 대신 ‘章’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었다. 이것은 흉노왕을 格下한 것으로써 흉노의 분노를 샀다. 신의 황제 왕망은 서역과 남만, 동이제국의 왕들에게도 ‘王’ 대신 ‘侯’로 格下된 인수를 수여했다. 후일 왕망은 흉노를 치기 위하여 고구려에 出兵을 명했지만 고구려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왕망은 주변정세를 고려, 이를 온건하게 처리하는 게 좋겠다는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끝내 고구려왕 騶를 유인하여 살해했다. 그리고 高句麗를 ‘下句麗’라고 불렀다. 新왕조의 권위를 내외에 과시하려고 한 것이다. 건국4년(AD12)의 일이었다.
한편 井上秀雄은『고대조선』(NHK)에서 이 고구려왕 騶(추)를 鄒牟王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한서』 왕만전에 의하면 AD9년 왕망은 漢을 무너뜨리고 新을 건국하자 사방에 사절을 보냈다. 이때 벌써 고구려는 부여와 더불어 外臣의 印綬를 받고 있었으며 그 독립을 인정받고 있었다. 이어 AD12년 왕망은 흉노를 공격하기 위하여 고구려에 出兵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구려왕 騶(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별명. 鄒牟의 略)는 이 出兵을 거부했으므로 왕망은 고구려를 토벌하고 추를 죽였다. 이때 新의 嚴尤는 왕망의 出兵에 반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구려사람이 法을 어기고 따르지 않습니다. 왕 騶도 異心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니 군현에 명하여 그들을 달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 함부로 반역의 죄를 씌우면 정말로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여의 제 종족들도 이에 동조할 것입니다. 아직 흉노를 정복하지 못한 마당에 부여와 예맥까지 반란을 일으킨다면 매우 어려운 사태가 벌어질 것입니다.’
왕망은 엄우의 말을 따르지 않고 고구려를 치고 騶를 살해했으나 엄우의 말대로 그 지방의 諸族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켰으며 나아가 남방의 이민족까지 반란을 일으켰다.
西嶋定生은『중국의 역사 2』(講談社)에서 고구려의 건국과 고구려왕 추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왕망의 신왕조 성립 당시 중국의 동북방면에는 오환. 고구려가 있었고 이와 나란히 선비. 부여 등이 있었다. 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일 부족으로 松花江 상류지역에 있었지만 부여에서 갈라져 蘇子河와 佟佳江 유역으로 이주하여 요녕성 환인지방의 산악지대에서 국가를 형성했다. 이 고구려가 언제부터 한왕조의 外蕃國이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前漢末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왕망의 즉위와 함께 王에서 侯로 格下 되었음은 前述과 같다. 왕망은 흉노공격을 결의했을 때 고구려에 出兵을 명했다. 외번국에 대하여 중국의 황제는 發兵權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 명령에 따르지 않고 오히려 중국의 동북변경을 침략했으며 그 때문에 요서태수가 전사했다. 왕망은 엄우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했다. 고구려왕 추는 살해되었고 그 목은 長安으로 보내졌다. 왕망은 고구려의 배반을 미워하여 추를 벤 다음 고구려를 하구려로 바꾸어 불렀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 방면의 반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삼국사기는 이 사건을 이렇게 기술했다.
왕망이 엄우의 간언을 듣지 않고 그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한 바 엄우는 고구려장수 延丕를 꾀어 목을 벤 후 長安으로 보냈다 (漢書. 後漢書. 南史. 北史 모두 高句麗侯 騶라고 했다). 왕망은 기뻐하며 고구려왕을 ‘下句麗侯’로 이름을 바꾸고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에게 알리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漢의 변경은 더욱 심하게 침범 당하게 되었다.
한서. 후한서. 남사. 북사에는 모두 왕망에게 살해된 것은 고구려후 騶(추)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삼국사기의 分註는 설명하고 있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鄒=騶이다. 왕망은 고구려가 출병을 거부하자 AD12년 추모왕을 죽이고 그의 이름 鄒(추)를 ‘馬’변의 騶로 바꾸어 표기한 것이다. 이것은 王을 侯로 바꾸고 고구려를 下句麗 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의 모욕이다. 이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모두 모른 척 하고 있다. 의문조차 제기하려 하지 않는다. 백과사전에도 이에 관한 설명은 없고 추모왕에 관해서는 그의 건국과정과 건국신화만을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삼국사기는 왕망에 의하여 살해된 사람이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이 아니라 고구려장수 연비라고 했지만 이것은 조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旧三國史』에 그렇게 기술되어 있던 것을 김부식이 충실하게 옮겨 적은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分註는 김부식이 써넣은 것이다.
첫댓글 추모왕은 왕망 이전에 이미 죽은걸로 삼국사기에 나와있습니다. 님의 주장이 뒷받침되려면 삼국사기의 추모왕 재위기간이 인상되었다는 것부터 증명하셔야 될 것 같은데요? 무조건 중국기록이 옳다 이건 좀 곤란하다고 봅니다.
대개 정통성이 부족하거나, 지배기반이 취약한 권력자는 자신의 치적을 침소봉대하는 경우가 강합니다.
왕망이 남긴 기록이 후세에 전해진후 새로운 권력구조에 위배되지 않는 과장된 치적은 그대로 두는 경우가 있으니,
왕망전에 전하는 기록은 사료비판없이 그대로 취신하는 것은 오류를 낳을수 있습니다.
위에 다물전사님이 지적한것처럼.....
사서에 전하나느 재위기간도 겹치지 않을뿐더러.....중국정권에 죽임을 당한 국왕에 대한....즉 고구려가 이시기에 결정적으로 큰 위기에 봉착하였다는 정황적인 기록조차 없다는 점을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즉, 왕망은 집권후,무리한 정책시도로 내우외환의 시기로, 압록강 중상류지역의 고구려가 시급한 과제가 아니었고, 오히려 흉노가 주된 외환이었다는 점이 왕망전에 기재되어 있음도 판단해보시길 권합니다.
차라리 추모왕은 유리왕에게 죽었을 가능성이 있지요.
왕망이라~!
100년도 버티지 못하고 망한 나라의 왕에게 목이 베어 날아갔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굴욕이 아닐수 없군요.
정말 어이없네요...
김부식도 자신이 갖고있던 사료와 연대가 맞지않아 이 기사를 추모왕 조에 넣지않고 유리왕 조의 말미에 넣었습니다. 결국 삼국사기의 紀年이 맞지 않든지 아니면 왕망전의 기사가 잘못이든지의 문제이지만 삼국사기의 추모왕 조는 대부분 건국신화로 채워져있고 왕의 事蹟은 1페이지도 안 되는 반면 왕망전에서 왕망의 사적은 수십페이지에 달합니다. 왕망이 흉노를 굴복시키려고 무리하게 대군을 보낸 것도 사실이고 이 원정이 결국 실패로 끝났고 이것이 왕망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는 것도 사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나는 삼국사기의 기년이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AD12년에 왕망이 고구려에 出兵을 요구하였든데 고구려왕 騶가 出兵을 거부했으므로 왕망은 고구려를 토벌하고 추를 죽였다는 기록을 의외로 고구려왕(추모왕 혹은 유리왕)의 죽음으로 보는 분들이 많군요.
동일시대의 같은 사건을 기록하였더라도 상호간의 기록에 모순이 있을 때 진실성을 따지는 것이 문헌사학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합니다.
당시에 죽은 고구려왕이 추모왕 혹은 유리왕인가에 따라서 삼국초기 기록이 크게 요동치게 됩니다.
추모왕인 경우에는 백제초기 기년이 흔들리고, 유리왕의 경우라면 무휼이 당시9세인 상황이어서 차기왕권을 누가 승계하였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남당유고에는 삼국사기 기록을 지지하고 있는데, 아마도 전쟁에서 패한 왕망의 신하들이 성주를 죽인 것을 부풀려서 고구려왕을 죽였다고 치장하여 서로간의 승패가 있었다고 무마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혹은 유리명왕이 그때 사망하였는데 서기18년 익사한 해술(무휼의 형)이 대신 섰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다른 사서에 보면 유리명왕과 사이에 대무신왕 사이에 또 다른 왕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남당유고에 보면 본기신편열전에는 유리명왕은 아들 셋을 먼저 보냈다고 합니다.
본기신편열전과 삼국사기에 의하면 도절, 해명, 해술태자라고 되어 있고, 고구려사초(략)에는 도절, 해명, 도조, 해술이라고 되어 있으니 모순이 됩니다.
고구려사초(략)에는 서기28년에 유리명왕이 사망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서기18-28년 사이에 유리명왕의 자녀출생기록이 없고, 동명묘를 세웠다는 기록은 서기18년 사망을 의심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