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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료 해석의 문제이다.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하는데 있어서 사료는 절대적이다. 이것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서는 아무런 논의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내용을 전적으로 사실로써 인정해야 할까.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록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거이고, 이것을 부정하고자 한다면 그러한 주장을 하는 자가 적극적으로 입증해야할 문제이다. 한편 기록이 전하는 내용은 모두가 사실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앞에서 전제로 삼았던 사실인정의 부분과 모순이 아닌가. 사실 전자의 문제와 후자의 문제는 다른 영역의 문제이다. 즉 전자가 어떠한 기록 자체를 증거능력이 있는 자료로서 인정할 수 있는지 문제라면, 후자는 그 다음 단계에서 해당 기록의 증명력이 어디까지 미치는지의 문제이다. 만약 어떠한 기록에서 증명력이 미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을 부정하는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해명할 이유가 없다.
2. 증명력이 미치는 범위가 문제이다.
증명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유는 다양하다. 이를테면, 송서 백제전이나 한원 고려전의 경우 가장 밀접한 시기에 기록된 사료이기 때문에 신뢰성이 크고, 요사나 원사와 같은 사료는 상당히 짧은 시간에 완성되었기 떄문에 상대적으로 신뢰성이 떨어지며, 진서 등과 같이 특정인의 의도가 투영된 사료의 경우 그 표현과 의미에 주의해야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후반부는 수서나 양당서를 대체적으로 필사한 수준이기 때문에 특별한 가치는 떨어진다. 또한 같은 사건이라도 누구의 시각에서 기록되어 있는지도 중요하며, 같은 사건에 대해 상충되는 기록이나 중요한 금석문이 있다면 어느 하나의 증거능력은 아예 배제될 가능성도 있다. 뿐만 아니라 증거능력을 갖는 기록이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 객관적인 부분을 서술하는 것과 주관적인 부분을 서술하는 것과는 증명력에 있어서 비중이 다를 수밖에 없다.
3. 어떻게 작용하는가.
王亦恐懼, 遣使謝罪, 上表稱<遼東>糞土臣某. 帝於是罷兵, 待之如初. -삼국사기
수문제의 1차 정벌이 재해로 인하여 실패하고 영양왕이 스스로를 분토의 아무개라며 사죄하는 내용이다. 이 기록은 사실일까. 영양왕은 전쟁을 각오하고 수나라를 선제공격하였다. 그런데 수문제의 반격이 기록에 의하면 아무런 전쟁도 없이 실패하였다. 서곽잡록 등에는 강이식과 연광의 활약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전쟁이 있었는지 여부는 차치하고, 전쟁을 각오한 고려가 전쟁이 없어서 피해조차 입지 않은 반면 수나라는 병력을 대부분 잃었는데 영양왕이 무엇때문에 두려워 하겠는가.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영양왕이 수문제에게 표를 보낸 것은 증거능력이 있으므로 사실이지만, 그 내용인 요동분토 운운하는 부분에까지 증명력이 미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수문제의 시각일 뿐이며 아마도 그를 조롱하는 내용의 의미를 글자 그대로 옮긴 것에 불과할 것이다.
<來護兒>至<卑奢城>, 我兵逆戰. <護兒>擊克之, 將趣<平壤>. 王懼, 遣使乞降,送<斛斯政>. -삼국사기
614년 래호아가 비사성에서 승리를 하고 평양으로 진격하려 하자, 전쟁에 지친 영양왕이 항복하며 곡사정을 돌려보냈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은 어떨까. 이것은 삼국사기의 기록이지만 수서를 베껴온 것에 불과하다. 결국 수나라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물론 단순히 수나라 입장에서 기록한 것이라고 하여 배척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다음의 기록이 있다.
高麗遣使貢方物。因以言。隋煬帝興卅萬衆攻我。返之爲我所破。故貢獻俘虜貞公。普通二人。-일본서기
수나라가 오히려 고려에 격파되어 전리품과 포로를 보냈다는 기록이다. 이것은 고구려의 입장이 일본서기에 기록된 사실이다. 고려가 패하여 수나라에 항복하였다는 수서만 믿을 수 있을까. 이것은 생각하기에 따라 수서의 이부분 기록 자체의 증거능력을 배제시킬 수도 있다.
결국 어느 범위까지 증명력이 미치는가는 또다른 문제이다.
3. 이세민은 '사실'을 말한 것일까.
그렇다면 문제의 이세민의 안시성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吾聞, <安市>城險而兵精, 其城主村{材}勇, 莫離支之亂, 城守不服, 莫離支擊之, 不能下, 因而與之. -삼국사기
이 기록은 당연히 증거능력이 있으나 증명력이 미치는 범위는 안시성주가 불복했다는 내용이 아니라 이세민이 이러한 말을 했었다는 사실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말을 했던 이유는 건안성과 관련하여 의미를 갖는다. 즉 안시성주에 대한 내용이 이 기록과의 앞뒤 문맥상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안시성주에만 집착을 하고 있다. 특히 '吾聞'은 무슨 의미인가. '내가 들은 바로는...'이다. 왜 '안시성주가 불복했다'가 아니라 '내가 듣기로는 안시성주가 불복했다'아고 기록하였는가. 이세민이 그런 소문을 들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소문이 사실인지까지는 전혀 알 수도 없고 증명될 수도 없다. 이세민과 장검 등이 정보를 확보하려고 노력했지만 큰 공을 세운 장검조차 요하 근처에 겨우 이르렀을 뿐이다.
기록을 신뢰한다면 吾聞과 같은 글자 하나하나도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풍문이라는 것은 두어 사람만 거쳐도 내용과 의미가 변질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전해 들은 것'은 주변의 다른 학문에서도 쉽게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다. 또한 기록에서 감정과 평가 및 풍문과 같은 것은 주관적인 사정으로서 그 자체는 사실일 수 있으나 그 내용까지 사실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4. 그렇다면 이세민은 왜 안시성주를 언급했나.
일반적으로 안시성이 전략적 요충지로서 매우 중요한 성으로 알려져 있다. 당에 함락된 성 가운데 요동성, 개모성, 백암성, 비사성이 크다고 할 수 있으며 공격받은 성 가운데 신성과 건안성 안시성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개모성과 안시성이 정말 중요한 성일까. 요동성은 그 자체로 가장 크고 중심인 성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신성은 역사에 여러번 등장하는 매우 중요한 성이다. 외부의 침입이 있을 시에 항상 남소성과 신성을 경유해야 한다. 백암성도 돌궐과의 전쟁에서 등장한 바 있다. 백암성은 천산산맥을 통과하는 입구에 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비사성은 2차 고당전쟁 이전까지 해양방어를 위한 중심지역으로서 중요하다. 건안성의 경우 풍홍과 관련하여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등장한 사례는 없다. 다만 당나라가 고대인성에 식량을 모아두고 건안성을 통해 보급하려 했기 때문에 1차 고당전쟁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개모성과 안시성은 무엇때문에 중요할까. 특히 안시성의 경우 마치 안시성을 잃으면 평양까지 곧장 진격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전혀 상관이 없다. 지형적으로 평양직공과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계필하력이 천산산맥 입구에서 고돌발과 싸웠지만 결국 실패했다. 사실 천산산맥에는 수많은 성들이 있어서 안시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세민은 안시성이 크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시간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당군은 신성일대에서 완전히 물러났고 요택의 도하장비도 불태워 식량공급이 끊겼다. 오로지 건안성을 취해야 고대인성에 비축한 보급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세민은 건안성을 빨리 공격하기를 원했고, 장손무기와 이세적도 건안성을 공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장손무기와 이세적은 건안성을 공격하기 위해 그 중간에 있는 안시성을 취해야 안전하다고 한 것이다.
5. 안시성의 의미는?
건안성 공격이 목적이라면 안시성은 수단이었던 것이다. 안시성을 잃었다면 고구려는 건안성을 공격받는 것이 문제이지 존망에 직접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록은 이세민과 장손무기 및 이세적의 발언을 통해 이들의 다음 목표가 건안성임을 밝혀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안시성주가 연개소문에 불복했다는 풍문의 성격을 가진 기록만 집착하며 안시성의 존망과 고구려의 존망을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6. 연개소문 집권에 분란이 있었나.
전혀 증명력이 미치지 않는 안시성주의 불복을 가지고 고연수와의 군사작전까지 분란을 넓히고 있다. 이것은 사실에 근거한 추정이 아니라 추정에 근거한 추정이다. 고연수는 안시성과 반목하여 협조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사나사이의 유인책에 빠져 적을 가볍게 보고 안시성에 이르기 전에 전투를 치룬 것이다. 공명심 내지 자만감이었을 뿐이다.
오히려 반대로 분란이 없었다는 직접적인 근거는 있다. 3차 고당전쟁 당시 가언충은 필승을 예상했다. 1차 전쟁에서 이기지 못했던 것은 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즉 내부적으로 반목이 없이 단결하였기 때문에 이세민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정이나 풍문 감정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기초로 승리를 예상하는 것이다.
과연 추정에 추정을 하는 것이 옳겠는가.
그리고 일반적으로 거론되지 않지만 중요한 기록이 있다. 새로쓰는 연개소문전에 인용된 내용이다.
1차 고당 전쟁에서 패한 이후 교보명이라는 자가 이세민에게 고구려를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진언했다. 자신이 평양에 가서 고구려를 설득하고 그것이 안되면 자객이 되어 연개소문의 목을 베어 그 나라를 항복시키겠다고 했다. 이세민은 칭찬하고 자기 옆에 두었다.
만약 연개소문이 무능하여 고구려가 멸망 직전에 안시성의 승리로 기적적으로 승리한 것이라면, 교보명의 연개소문 암살계획을 들은 이세민은 무엇이라 했을까. 아마도 분위기파악 못한다며 참수하지 않았을까.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연개소문과 고구려의 존망을 동일시 한다는 것이다.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연개소문을 거론하지 안시성주를 거론하지 않는다.
기록에 연개소문의 활동이 보이지 않는다고 연개소문이 평양에 편하게 앉아 있었던 것은 아닌 것이다. 기록은 이세민의 시각을 따라 서술되고 있다. 하지만 기록에서 제외되어 있는 신성싸움은 매우 극렬했고 결국 당은 실패하여 신성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고구려에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는 수백년간 신성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연개소문은 신성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7. 마무리
기록의 해석은 원칙을 고수하는 한편 기록 자체를 인정할지 여부, 인정한다면 어느 범위까지 인정할지 여부를 단계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분명 기존의 안시성주에 대한 해석은 잘못되었으며 집착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증명력이 미치지 않는 부분을 토대로 다른 사실에 대한 사건의 성격을 판단하는 것 또한 매우 위험하다. 오히려 가언충이나 교보명에 대한 기록과 같이 보다 직접적인 정황을 서술하고 있는 기록이 있음에도 애써 무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태도이다.
첫댓글 매우 잘 정리된 글이네요. 솔직히 깊이 공부를 하지 않아서 모르는 것들도 많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