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스테를리츠의 태양
간만이구나. 연말이라 이런 저런 자리도 많고 또 숙제가 밀려서 가전사를 12월달에는 거의 올리지 못했다네 오늘도 강남가는 버스 안인데 징하게 막혀서 노트북을 꺼내 이렇게 끄적이게 됐다. 막혀고 너무 막히는구나.
1805년 12월 2일 한 역사적인 전투가 오늘날엔 체코의 영토가 돼 있는 벌판에서 일어났어. 황제가 둘 도 아니고 셋 씩이나 출동한 일대 회전이었으니 그 휘하 군대도 다 합치면 14만 여 인간들이 뒤엉킨 대회전이었어.
한쪽을 지휘하는 건 바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영국 침공을 노리다가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에게 큰코 다친 뒤 대륙의 반프랑스 동맹국을 무찌르기 위해 군대를 내륙 깊숙이 들이민 프랑스의 황제였고 그 상대편에는 나폴레옹에게 수도를 빼앗기고 절치부심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황제와 동방에서 온 “동화의 나라” 러시아 황제가 그 육중한 군대들을 거느리고 있었지. 동화의 나라(?)는 나폴레옹의 표현인데 러시아는 마치 반지의 제왕의 오크 군대나 죽은 자들의 군대처럼 우우 대규모로 몰려왔다가 수틀리면 거짓말같이 머나먼 자기네 땅으로 돌아가는 군대와 땅덩어리를 보유한 나라라는 뜻이었어.
상황은 나폴레옹에게 불리했어. 오스트리아 수도를 점령하긴 했지만 아직 오스트리아의 주력은 살아 있었고 러시아 황제가 직접 나서서 저 동화의 나라 병정들을 이끌고 왔고 중립을 지킨다고는 했지만 프로이센은 여차하면 뒤에서 칼을 빼들 태세가 완연했기에 나폴레옹은 자신의 대군을 그 모든 경우의 수에 맞게 분할 배치해야 했고 보급도 여의치 않았어. 나폴레옹은 속전속결을 해야 했지. 이런 일은 역사에 흔하다. 삼국지의 제갈공명도 꼼짝도 않는 사마의 때문에 얼마나 애를 먹었으며 한니발은 지구전의 대가인 로마의 파비우스 ( fabian의 어원이 되는) 에게 끝내 발목을 잡히지 않았겠니.
나폴레옹은 이 속전속결을 위해 모든 연막을 다 친다. 오스트리아 쪽에 사절을 보내 “우리 안 싸우고 어떻게 안될까요?”하면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우리가 중립을 지키게 하려면 이 정도는 해 주셔야겠어!” 삐딱하게 나오는 프로이센쪽의 사절을 만나서는 무척 고뇌에 빠진 표정으로 ‘나폴레옹 이거 뭔가 약점이 있구나’ 하는 이미지를 심어 주지. 결정적인 건 격전지가 될 곳의 중앙에 솟아 있던 프라첸 고지를 맥없이 러시아군이 점령하도록 돠 둔 일일 거야.
옛날 전장에서 고지의 확보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어. 장기판의 말들은 원래 자기 길만 알지 전체 판세를 보지 못하는 법이고 장기를 두는 사람은 훈수 두는 사람에 비해 항상 시야가 좁은 법이야. 부대를 배치하고 형세를 파악하고 강약을 조절할 수 있는 위치의 확보한 더할 나위 없는 의미를 지니지. 그런데 이 중요한 고지를 나폴레옹은 우물쭈물 확보하지 않았고 러시아 군은 이게 웬 떡이냐 하고 고지를 점거해 버려. “하랏쇼! 나폴레옹 이거 진짜로 별 거 아니다. 기본이 안된 애 아냐 이거.” 그리고 후퇴 작전을 주장하는 러시아 군 원수 쿠투조프는 젊은 황제 알렉산드르에게 면박을 당하게 돼.
나폴레옹은 쾌재를 불렀겠지만 부하 장군들만 해도 분위기가 좋지 않았어. 나폴레옹의 매제이자 용맹한 기병대장이었던 뮈라, 후일 스페인에서 민중봉기를 진압하면서 악명을 떨치게 되는 술트 등 역전의 용장들도 고개를 젓고 있었지. 이들은 후퇴를 건의하기로 하고 나폴레옹과 가장 가까운, 그래서 심지어 서로 ‘너’라고 부룰 수 있는 (우리 말로는 좀 번역이 애매하지만 하여간 ‘폐하’보다는 ‘너’에 가까운 친숙한 표현) 장 란을 뒤에서 부추겨. “이봐 란! 자네가 좀 폐하를 설득해 보지 그러나. 자네 말은 좀 들으시잖아.”
마부의 아들로 원수에까지 오른 용감하고도 단순한 사내 란은 뮈라와 술트에 떠밀려 나폴레옹 앞에 서 후퇴를 주장하게 되지. “이봐요 황제 친구. 철수하자구요.” 나폴레옹은 좀 어이가 없었어. 기껏 자신의 머리를 총동원해 작전을 세우고 발연기를 불사하며 적들을 속이는 상황에 란 같은 사람이 와서 후퇴를 논하다니. 나폴레옹은 이 우직한 사내의 머리에서 후퇴같은 발상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걸 직감했지. “누구냐. 네 머리 속에 후퇴란 말을 심어놓은 자가.” 그런데 여기서 제 발 저린 술트가 말도 안되는 뒤통수를 친다. “폐하. 저의 부대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 몫까지 열심히 싸우겠습니다.”
조선 선조 때 동인 유성룡, 이산해가 서인 정철과 함께 임금 앞에 간 적이 있었지. 왕세자를 세우자는 의견을 드리기 위해서였는데 여기에는 동서가 따로 없었어. 하지만 임금 앞에서 정철은 총대 멘 대로 말을 하지만 유성룡은 입을 씻어 버리지. 그 결과 정철은 한 방에 날아가 버린다고. 딱 란이 그 꼴이 난 거라. 정철은 귀양가서 사미인곡 읊었지만 란은 우직 그 자체의 사나이. 이 여우같은 녀석이! 당장 칼을 빼들고 결투를 신청한다. 술트가 피해서 장군끼리 칼싸움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프랑스 군도 상태는 좋지 않았어.
하지만 병사들은 달랐어. 나폴레옹이 12월 1일과 2일 사이의 밤에 병사들을 둘러볼 때 한 병사가 나폴레옹을 알아보고 외친다. “황제 폐하 만세. 오늘은 폐하 즉위 1주년 기념일입니다. ” 나폴레옹은 감격하고 병사들 역시 열광에 휩싸여서 손에 손에 횃불을 들고 몰려나와 황제 폐하 만세를 부르짖지. 몇 시간 뒤 그 중에 몇 명이 시체가 되어 땅에 뒹굴지 몰랐지만 프랑스군은 황제 만세의 열기에 휩싸인다. 나폴레옹은 그때를 자기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회고할 정도로.
나폴레옹의 전략은 이랬어. 전선의 오른쪽에 얼마 안되는 군대를 배치하고 오스트리아군으로 하여금 그쪽을 치게 만들었지. 왜 오른쪽이냐. 중앙은 이미 러시아군이 방어하기에 유리한 전략적 고지를 점령하고 있잖아. 굳이 그 고지에서 내려가서 중앙 돌파를 시도할 이유가 없었던 거야. 프라첸 고지를 내 준 건 일종의 최면제가 든 미끼였던 거라. “프랑스군이 중앙을 공격할 리 없지만 우리도 굳이 중앙돌파할 필요 없으니 다른 쪽을 노리자.”고 생각하게 만드는.
나폴레옹은 우익 쪽에 약점을 노출시키는 데에도 계산이 서 있었어. 그쪽에는 마을이 있어서 열세인 병력도 효율적인 방어를 할 수 있었거든. 축구로 따지면 오른쪽 측면을 비워 두어 단독 대쉬를 허용하는 듯 보이지만 물 고인 웅덩이를 파 놓고 드리블을 어렵게 만든 격. 사람들은 의외로 단순해서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 거기가 허점 같으면 줄기차게 그쪽만 두드리게 되는 거지. 나폴레옹이 원했던 거고 오스트리아 군은 그렇게 했어. 우측에서 격전이 전개되는 가운데 나폴레옹은 아까의 비겁자 술트를 불러.
“프라첸 고지를 공격한다. 기어오르는 데 얼마 걸리겠나.” 술트는 20분을 얘기했어. 그러자 나폴레옹은 세계 전쟁사에 유명한 말을 남기지. “15분 주겠다. 한 방을 제대로 먹이면 이 전투는 끝난다.” 고지래봐야 산악투성이의 우리 나라같은 고지가 아니라 평원에 솟은 동학 농민 혁명 당시 백산(白山)같은 야트막한 프라첸 고지를 향해 프랑스군은 진격을 개시하지.
나폴레옹이 천재적이라는 건 그 지역의 지형지물과 날씨와 기상을 완전히 파악하고 그를 이용했다는 거야. 그곳은 아침 안개가 유독 자욱히 끼는 지역이었고 고지의 최대 강점 중의 하나인 넓은 시야를 안개가 가리고 있었거든. 그 안개가 가시면서 러시아군은 홀연 나타나서 성큼성큼 다가오는 프랑스 대군에게 기절초풍을 한다. 창백해진 러시아군의 얼굴 위로 아우스테를리츠의 태양은 나폴레옹의 영광으로 빛났지. 술트는 란 앞에서와 달리 용감했고 러시아군을 무찌르고 고지를 장악하면서 반 프랑스 연합군의 허리를 잘라 놓는다. 그리고 양쪽의 연합군을 죄어들어가기 시작하지.
오스트리아 군 러시아 군은 처참하게 무너져. 알렉산드르 황제는 도망가다가 엉엉 울었고 “우리는 거인의 손바닥 안의 장난감같은 존재였다.”고 탄식했다지. 그가 서유기를 읽었다면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라고 했겠지만. 오스트리아는 완전히 두 손을 들었고 이 전투의 소식을 들은 영국 수상 피트는 “유럽 지도를 치워 버려라 10년 내에는 쓸모가 없을 거다.”고 절망했다고도 해.
꼭 전쟁 뿐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경쟁이나 정치적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 그리고 우리 스스로의 힘을 키우고 각오를 다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적이 (상대가) 원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일 거야. 우리가 발견하는 상대의 허점이란 우리가 똑똑해서 보는 것일수도 있지만 상대가 똑똑해서 드러내 주는 페이크인 경우가 더 많잖아. 그래서 중요한 게 역지사지일 것이고 말이야. 그렇게 오스트리아 군을 골탕먹인 나폴레옹이 유리한 고지를 가만히 둔 이유에 대해서 러시아 군은 고려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작은 승리에 도취해서 그 승리의 제단이 자신들의 단두대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았잖아.
내일 통진당 정당 해산 결정이 내려져. 통진당 사람들에 대해서 내가 지나치게 심하게 말한다고 혀를 내두른 바 있지만 어쨌건 나는 적어도 내일은 통진당 사람들 편이다. 아니 통진당 편이 아니라 한 사람들의 정치적 의사의 구현체인 정당을 선거를 통해 심판하지 않고 정부의 고발에 따른 ‘정당 해산’의 수단을 동원하는 데에 반대하는 연합군의 응원단이 되는 거지. 그래서 좀 갑갑해지긴 한다.
사실 지금 필요한 건 결사항전의 용기와 임전무퇴의 화랑정신이 아니라 나폴레옹같은 작전과 지혜인데 이쪽의 ‘약한 고리’이자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나폴레옹의 우익이라 할 통진당은 “적이 원하는 일을 너무나 잘 해 주는” 블랙홀에 가깝고 프라첸 고지를 공격할 술트는 끌고 갈 병력이 없고 지키는 러시아군은 강력하기만 하니까.
나폴레옹의 지혜가 우리와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