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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방언 흉내만 내었지만 위험했습니다.
최근 동생이 고교 시절에 다니던 교회에 실망을 해서 서른다섯 살이
된 지금까지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둘을 낳은 후 같
은 아파트에서 친하게 지내는 한 집사님의 인도로 교회에 나간 일이 있었
다. 원래 찬양 쪽으로 은사가 있는 동생이었다. 차 안에서 남편과 내가
<오 신실하신 주>라는 찬양을 하는 것에 감동이 되어 그 전부터 같이 교
회 가길 권했던 그 집사님께 말해 교회에 나가게 됐다고 한다.
동생은 두 아이의 엄마인데, 육아를 매우 힘들어했다. 부족할 것 없는
삶이었지만 늘 힘겨워했다. 잠을 못 자서 괴로워했고, 밥을 잘 못 먹어서
엄청 말라갔다. 내가 주님 알기 전에 잠도 못 못자고, 밥만 먹으면 체해서
잘 안 먹어서 엄청 말랐었는데 그 때의 나와 증상이 비슷했다.
몇 달 전 낮에 설핏 잠에 들었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얼른 일어나라고 깨웠다.
두 번을 그랬었다.
흰 옷을 입었는데 돌아가신 할머니 같았다.
“할머니 맞죠?”
“난 네 할머니 아냐. 얼른 일어나!”
눈이 떠지긴 했지만, 약에 취한 듯 다시 잠에 들었다. 그런데 어떤 검은
것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가 나를 데려가려고 한 손으로 나를 잡아끌려는
것이 보였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썩 물러가라!”
이렇게 하면 다시 멈칫하고 못 오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다시 내게
손을 뻗는다. 그러면 다시 그렇게 말하면서 그걸 쫓아냈다. 그 일어서서
있는 폼이 어찌나 엉큼해 보였는지 모른다. 세상 사람들은 저승사자라고
무서워했겠지만, 난 그게 엉큼하고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그
렇게 예수의 이름으로 그걸 쫓는 중이었는데 거실에서,
“예수는 귀찮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난 일어나서 거실로 나갔다. 꿈인지 생시인지는 모
르겠는 요상한 상태였다. 거실에는 동생의 얼굴을 한 여자가 두 조카를 안
고는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여섯 살이고 세 살인 조카들인데, 좀 이상했
던 것이 조카 둘이 한 20 개월 정도밖에 안 된 아가의 모습이었다. 난 귀
신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큰 조카의 얼굴을 한 귀신의 머리채를 휘
어잡았다. 그리고 내 동생의 얼굴을 한 것한테 물었다.
“너 이래도 아무렇지도 않지?”
“그게 뭘?”
만일 진짜 동생이었다면 아무리 친정 언니라도 자기 아이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사람을 두고 가만히 못 있었을 것이다. 그것들이 나를 속이려고
모습은 그럭저럭 가장했지만, 인간의 모정(母情)이라는 것은 몰랐기에 거
기까지 가장하진 못했던 것이다.
난 예수의 이름으로 그것들을 쫓았다.
그랬더니 내 동생의 모습을 한 그것이 하나도 안 무섭다는 표정으로 빈
정거렸다. 순간 스쳤다. 중3 때 내가 가위 눌릴 때 귀신을 같은 방법으로
쫓았지만 예수가 하나도 안 무섭다고 그랬던 그 귀신. 바로 이 놈이었던
것 같았다.
‘그래, 그 땐 속았지만, 지금 한 번 해보자. 너 정말 잘 만났다.’
빈정거리든 말든 계속 쫓는 말을 했다.
당당히 있던 그것이 자꾸 그러니까 스르르 피하는 듯하더니 결국 내 목
을 휘어잡고 조르기 시작했다. 그 손톱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바로 너지? 네가 나를 죽이려고 했던 그 귀신이지? 나한테 붙었다가
지금 동생한테 가서 똑같이 괴롭히다 동생도 교회 가니까 다시 나한테 분
풀이를 하려고! 이것들 떼거지로 몰고 온 거냐? 그래 한 번 결판내보자!
그래 해 보자고!”
그러면서 계속 예수의 이름으로 쫓다가 깨어났다.쫓았을 때 없어졌는데, 그건 하다하다 안 되니까 내 목을 졸라오는 것이
다. 혹시 다시 동생한테 쫓아가면 어쩌나 싶어서 동생한테 말해줬더니, 내
가 그 꿈을 꾼 시간이 자기가 교회에서 새 신자 교육을 받고 있던 시간이
라는 것이다. 아직 믿음이 연약한 동생이다 보니 먼저 무서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난 그제야 의심이 갔다. 1991년도부터 2005년까지 15년간 나와 내 가
족을 괴롭혔던 그 악령이 혹시 그 때 그 사건에 의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방언을 흉내 내도 귀신이 붙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난 얼마 전
본 그 귀신이 어디서 와서 어떻게 나와 내 가족을 괴롭혔는지 가닥을 잡아
갈 수 있었다.
1991년도는 내가 중3이었던 해이다. 난 그때까지 꽤 공부를 잘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1등을 하지 못하는 2등 콤플렉스가 있었다. 당시 반의 정
원이 50명이 넘었던 당시로서는 반 석차 2등 정도만 돼도 꽤나 괜찮은 성
적이었다. 한 학년에 500명가량 있었던 우리 학교도 대전에서 그렇게 쳐
지는 학교가 아니었다. 내 전교 석차는 아무리 못해도 20등 안쪽으로는 늘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만 잘 노력하면, 더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하
지만 2등 콤플렉스가 있던 나로서는 늘 불만족스러웠다.
그랬던 나에게 시험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 학교의 1등은 교회에 다니
지 않았다. 내가 교회에 있는 일요일 오전이 그들에게는 한 주 동안의 학
업을 정리하거나 쉬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나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느
라 일요일 오전 시간을 통째로 보내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은 것이다.
그러는 중에 반 친구가 다니는 교회의 1부 예배가 7시에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 교회의 7시 예배는 학생이나 주일날 시간이 안 되는 직장인을 위한
예배라고 한다. 그래서 중3 동안만이라도 그 교회로 옮겨서 주일을 챙기
고, 다른 친구들과 같은 시간에 도서관에 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잠시
그게 얼마나 독종이었는지 다른 귀신들은 내가 몇 번 예수님 이름으로
출석 교회를 바꾸기로 한 것이다.
그 교회는 내가 그 전까지 다녔던 교회의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베이스 기타 소리가 어찌나 유혹적이었는지 모른다. 원래
음악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전까지 들었던 음악은 클래식이 대부분이었다.
피아노나 오르간으로 찬송가만 불렀던 전의 교회와는 다르게 베이스 기
타, 전자 기타, 신디사이저, 드럼 등이 총 출동하여 처음 듣는 유행가 같은
찬양을 하는 것이 참으로 신선했다.
특히 그 베이스 기타 소리는 계속 귓
전에 윙윙거리고, 공부할 때도 그 선율이 계속 들려서 집중이 되질 않았
다. 그렇게 그 베이스 소리에 이끌려 더 그 교회를 찾았던 것 같다.
그 교회에서 여름방학 때 중고등부 수련회가 있다고 해서 따라가게 되
었다. 7시 예배 설교는 부목사님 몇 분이서 돌아가면서 담당하셨는데, 수
련회 전부터 한 부목사님께서 방언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하셨다. 자신도 신
학생 시절에 방언이 안 터져서 방언 달라 기도하였는데, 어느 날 주기도문
을 열심히 반복해서 했더니 방언이 터지더라는 것이다. 방언의 좋은 점에
대해 열심히 소개를 하셨다.
“방언은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통하는 말이므로 은혜가 있다. 특히 내가
알 수는 없지만 내 답답한 모든 일들을 방언으로 하면 하나님께 바로 전달
이 된다.”
이런 요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번 수련회에서는 꼭 방언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좋은 게 있
다니 한 번 가보자 싶었다. 수련회에서 방언 집회를 하는 모습은 경악(驚
愕) 그 자체였다. 그 좋다는 방언이 왜 저 모양인지, 보고 있는 내 눈이 괴
로울 정도였다. 집단적으로 무슨 무당들 주문 외우듯이 단체로 ‘으다다다’
거리는 그 광경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별로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 나로서도, 제발 저 모습이 나는 아니길 바랄 정도였다.
신비한 은사라는데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왠지 벌 받을 것 같고, 내가 저런
모습은 아니었으면 좋겠고, 그 곳에 있는 내내 이런 마음들로 인한 갈등이
매우 심했다. 마지막 날에 같은 반 친구들을 동그랗게 모아놓고 손을 잡으
라면서 집단 기도를 시켰다. 여기저기서 방언이 터지기 시작했다. 옆에 있
는 친구는 방언이 터졌다고 기뻐 좋아 펄쩍펄쩍 뛰었다.
평소에 얌전하고
공부도 잘하며 예쁘기까지 한 친구가 그러고 있는데, 기도한다고 눈을 감
았으니 망정이지 눈을 떴더라면 다시는 그 친구를 보기 어려울 뻔했다. 이
대로 얼마만 더 버티면 될까 생각하며 기도는 하는 둥 마는 둥, 옆의 사람
들 눈치나 살피며 빨리 끝나고 잠이나 잤으면 싶었다.
그 때였다. 어떤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곁에서 방언이 터지도록 해주
겠다며 나를 잡고 기도를 하는데 미칠 것 같았다. 방언이 터지기 전에는
내 곁에서 그 이상한 소리를 멈출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옆에서 아까 방언 터졌던 그 친구의 소리를 비슷하게 따라했다.
그랬더니 드디어 방언이 터졌다며 내 곁을 떠났다. 난 그게 방언이 아니었
음을 알고 있었다. 기도를 하는데 혀가 제 멋대로 움직여서 기도를 하는
것이 방언이라고, 난 그렇게 들었다. 난 그렇게 했던 것이 아니라 분명 그
냥 옆에 있는 친구가 하던 그대로를 따라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걸 갖고
방언이라니, 저 분도 방언이 뭔지는 제대로 모르는가 보다 싶었다.
수련회 다녀온 후에도 난 그 베이스 기타 소리에 이끌려 그 교회를 계
속 다녔었다. 그런데 그 후로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잠을 잘 때마다
가위눌림이 심하게 되어 고통이 시작됐다.
다른 사람들은 가위 눌릴 때 귀신이 보인다고 하는데, 난 그런 것은 없
었지만 그 전자음악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렸다. 굉장히 여럿이서 주변
에서 떠드는 소리가 났다. 어떤 것은 공중에 떠다니고, 어떤 것은 쿵쾅쿵
쾅 걸어 다니기도 하고…….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것은 그 베이스 소리를
깐 전자음악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린다는 점이다. 테이프가 찍찍거리며 돌
아가는 소리, 세상 소리보다 훨씬 큰 굉음을 가진 고음의 웃음소리 등
등…….
무엇보다도 날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누군가가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
낌이었다. 패트릭 스웨이지와 데미 무어가 주연한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가 당시 최고의 히트 영화였는데, 주된 내용은 죽은 남편의 영혼이 부
인에게서 떠나지 않고 주위를 맴도는 것이었다. 그 영화를 보고 온 후부터
누군가가 계속 내 주변에서 맴도는 것 같은 느낌으로 인해 그 공포가 너무
컸다.
그게 수련회 후 더 심해진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고 먹는 시간 이외에는
늘 책상에 앉아있었던 나였지만, 그 공포 때문에 점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러면 당연히 잠을 자게 되는데, 잠만 자면 가
위가 눌려 그 난리였던 것이다.
그 가위눌림 증세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귀신이 누르는 것이라고 했지
만, 난 그렇게 생각하기 싫었다. 그저 크느라고 생기는 성장통이라고 해야
맘이 편했다. 잠만 자면 귀신이 그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난 그 공포
로 인해 잠도 자기 어려울 것 같았다. 가위눌림의 공포가 너무 커서 혹시
귀신이 그러는 것일까 싶어서,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물러가라!”
고 하면, 누군가가,
“예수? 그게 뭔데? 그거 무서운 건가?”
하는 말을 하는 것이 들렸다.
점점 ‘교회에서 귀신 쫓는 거 알려주는 것 다 거짓말이네’,
‘예수님은 별로 힘이 없구나’,
‘예수님 안 계시는 것 아냐’,
‘예수는 없구나!’ 등……. 점점 생각이 그렇게 가고 말았다.
귀신에 대한 공포증이 있었던 15세 소녀가 잠을 잘 때마다 가위에 눌리
니 생각이 그렇게 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렇게 점점 신앙이 약해져가
고 있었다.
문제는 같은 방을 쓰고 있었던 두 살 아래의 내 동생도 나와 같이 가위
눌림을 경험한다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 동생도 그렇게 귀신을 물
리치면 예수보다 자기가 더 강하다고 누가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잠 잘
때 가위가 눌리면,
‘아, 이제 눌리는구나.’
하며 그 공포에 대한 불감증까지 갔다고 한다. 나도 점차 그렇게 되는
것 같았다. 나나 동생이나 그 당시부터 특별한 병은 없었지만, 늘 기운이
없었다. 잠이 편치 않으니 잠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았고, 늘 육체적으로
약했다.
그 무렵부터 세상의 음악에 빠지기 시작했다. 특히 록음악을 좋아했다.
원래 음악을 좋아했던 나였는데, 그전까지는 주로 클래식을 들었다. 그런
데 그 교회에서 들려주는 베이스 기타 소리가 좋아서, 베이스 기타 연주가
잘 들리는 음악을 찾다보니 록음악 쪽으로 빠지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모은 음반이 500여개가 됐는데, 그 중 대부분은 록음악이었다. 고등학생
이 되었을 때 등장했던 서태지가 어찌나 매력적이던지 서태지와 록음악에
푹 빠져서 고등학교 생활을 했던 것 같다. 물론 고등학교 때도 가위눌림
증상은 심각했다.
록음악에 빠지면서 교회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록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록의 정신’을 이야기 하는데, 그것은 바로 부조리한 권력과 부당한 가치
에 대한 저항의 정신이라고 한다. 그래서 가장 많이 공격당하는 것이 기독
교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 가치라는 것을 조롱하고, 교회의 부조리
함을 풍자하며, 교인들이 저지른 위선을 폭로하여 ‘저항의 정신’이라는 그
들의 표어를 실현시킨다. 베이스 기타 소리 좀 들어보겠다고 찾았던 음악
에 심취하면서 들어온 정신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공부도 물론 뒷전이었다. 그 전까지 공부를 해 놓은 게 약인지 독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까지 공부를 안 해도 성적이 중하위권으로 떨어지진
않아 다행히 지방 국립대 정도는 갈 수 있었다. 대학교 때 국문학을 전공
했는데, 이런 저런 사상들을 읽어야만 작품 비평이 가능했다.
작품을 읽기보다는 그것을 두고 분석하는 여러 사상을 더 읽어내야 하
는 것이 우리 국문학의 현실이었다. 사실 문과 계통 중에 상위권에 있는
경상대나 법대를 갈 수 있을 정도의 수능 성적이긴 했지만, 글을 쓰고 싶
어 찾아간 국문학과였다. 하지만 글 쓰는 법보다는 이런 저런 학자의 이론
들만 가르치고, 교수가 소개하는 서적을 읽고 작품 비평하는 것이 대부분
의 국문학과 과목의 수업 방식이었다. 문제는 그 과제들을 위해 읽어야 할
‘이런 저런 사상들’이었다.
어려운 글을 머리 터지게 읽어봐도 결국은 인권의 중요성이라는 대전제
하에, 인간의 자유라는 명제에 기대어 얼마나 타락한 사상들이 즐비했는
지 모른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지적 허영심 많았던 국문학도로서는 참으
로 심취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인간의 한계 상황을 처절히 인식하고 실질
적으로 존재하는 것만이 진실이라는 실존주의나 ‘최고의 선이란 흐르는
물과 같다(上善若水)’는 도가의 사상을 특히 좋아했다. 정작 그 실체를 들
여다보면 참으로 경악스럽기 짝이 없다.
아름답게 포장한 말이 실존주의지
‘눈에 안 보이는 것은 못 믿는 거야!’라고 유혹하면서,
결국은 ‘얼마나 허무하니? 인간의 한계 상황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거
야. 죽으면 다 끝이야. 그냥 죽어라, 죽어!’라고 속삭이는 마귀의 가르침이
다. 거창하게 말해서 ‘상선약수’이지, ‘절대적 진리라는 것이 어디 있어.
흐르는 물처럼 그냥 그렇게 얘 말도 옳고, 네 말도 옳게 그냥 그렇게 묻어
가는 거야. 절대자라는 거, 너무 편협하지 않아?’라고 속삭이는 마귀의 가
르침이었던 것이다.
이런 나에게 당연히 기독교는 하나의 학문일 수밖에 없었다. 교회란 ‘인
간 예수를 신격화하여 사람들 속여 돈이나 쥐어짜내는 사기꾼들과 이승에
서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천국이나 욕심내면서 자신의 문제에 맞서지 못
하고 현실 도피나 하려는 의지박약아들이 속아서 모이는 곳’이라는 것이
당시의 내가 내린 교회의 정의였다.
사후에도 세계가 있다? 당신들은 또 살라면 또 살고 싶은지, 되묻고 싶
었다. 이승 삶이 불만족스러우니까 자꾸 천국 욕심내는 당신들, 이승에서
도 똑바로 못 살면서 어떻게 그 다음 세상을 넘보느냐고 비아냥거렸다. 록
음악과 세상의 여러 사상과 학문들에 젖어 있던 나는 그토록 주님을 대적
하면서, 마귀의 종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난 항상 허무했다. 외로웠고 늘 고독했다. 하지만 누구에게 외롭
다, 고독하다고 말하기가 창피했다. 내 문제 하나 제대로 확인하지 못해서
누군가에게 기대려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잠을 자면 가위에 눌리는 것
은 기본이었으니, 잠을 편히 자기가 어려웠다.
잠에 드는 것이 공포이기
때문에 며칠 밤을 홀딱 새워 그냥 체력이 바닥나서 기절하듯이 자는 것이
아니고는 잠을 청하기가 곤란했다. 그렇게 잠에 들면 무언가가 쑥 빠져나
와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방안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공중에 떠다니기도
하고, 그러다가 초고속으로 한없이 아래로 아래로 빨려 들어가기도 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그대로 빨려 들어가면 바로 지옥으로 가는 것
이 아니었나 싶다. 그럴 때는 정말 너무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하나님 살려주세요!’를 외치고 있었다.
그러면 마치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듯 심장에 엄청난 고압 전류 같은
것이 흐르면서 눈을 번쩍 뜨면서 깨어나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신앙이 있
어, 그럴 때마다 주님을 찾았던 것이 지금 생각하면 무척 다행스럽게 여겨
진다.
스물아홉 살이 됐던 2005년에 난 정말 문자 그대로 죽을 뻔한 적이 있
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 때서야 비로소 정말로 천당과 지옥이 있을지도
모를 거라 생각이 들었고, 다행히 죽지 않게 되어 교회를 찾았다. 하지만,
이미 세상의 사상에 깊숙이 함몰되어 있던 내게 성경을 제대로 모른 상태
에서 교회에서 하는 말을 받아들이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구주의 십자가 보혈’이라고 하는데, ‘구주’라는 것도 ‘보혈’이라는 것도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리신 어떤 거룩한 손길이
계셨음은 체험으로 알겠는데,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내 구원과 무슨 상관
인지 모르는데, 그것으로 내가 구원받았다고 하니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
운 진리였다.
무엇보다도 아담과 하와가 먹은 선악과인데, 내가 먹지도 않은 걸 갖고
왜 내가 죄인이 되는지도 모르겠고, 나 한 번도 감옥 갈 만한 짓 한 적 없
는데, 자꾸 타락했다고 하고 죄인이라고 하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됐다.
한번 밟아주고 시작하겠다는 건지, 원! 그렇게 나쁜 분은 아닌 것 같은데, 밀
당(밀고 당기기)도 아니고 무슨 진리가 그토록 어려운지, 내 뇌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 진리는 이해불가라고 생각했다. 제일 모르겠는 것이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을 성자 하나님으로 믿고는 싶었다. 하지만 무엇을 근거로 해서
자신을 신이라고 떠드는 그 사이비들과 구분할 수 있는 것인지 가장 수수
께끼였다. 성경을 읽어봐도 다 알레고리인 것 같았고, 그 알레고리를 풀기
위해 세상의 사상을 갖고 오고 하니 제대로 성경을 읽을 리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2007년 에스라 성경강좌에 가서 성경을 제대로 배운 후 올
바른 신앙을 다져나갈 수 있었다. 이후로도 고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잘 이겨갔다. 2007년 1월 성경강좌 중 목사님께서
언젠가 창세기 강의를 하시던 중 뱀의 정체를 설명하시면서, 과거에 귀신
쫓았던 에피소드를 말씀해 주신 적이 있었다.
귀신은 무서운 게 아니고 더러운 것이라는 설명을 논리적으로 해주시는데
어찌나 맘이 안정이 되던지 모르겠다.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썩 물러가라!’ 여
러분도 다 할 수 있지요?”
하시는 그 말씀에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되었던 것 같다. 그냥 편안했다.
이제부터 가위가 눌리면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었구나 싶었다. 목사님께서는 그렇게 귀신을 쫓는 법과 함께 궁극적
으로 귀신이 침범치 못하도록 하는 법을 더 강조하셨다.
“어둠을 몰아내려고 빗자루로 쓸어버린다고 그게 해결이 됩니까? 어둠
을 몰아내는 것은 빛 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바로 알아 진리 안에 있으면
저절로 어둠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결국 나를 살리셨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바로 알고, 그 말씀
안에 거하면 귀신이 틈타지 못하는 것이고, 간혹 틈을 보여 귀신이 들어온
다고 해도 주님의 진리 안에서 그것을 따라가지 않으면 저절로 멀어지는
것인데 그 간단한 것을 몰랐구나 싶은 게 어찌나 통탄스럽던지!
그렇게 살면서 어떤 고난이 와도 잘 이겨가던 나였지만, 최근까지도 해
결이 안 됐던 것이 그 가위눌림이었다. 확실히 목사님의 강의를 통해 신앙
을 되찾으면서 가위눌림의 횟수는 줄어들었다. 설사 가위에 눌린다고 해
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쫓아버리면, 바로는 안 돼도 여러 번 내쫓으면 잘
해결이 됐다.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Lorentz, E.)는 ‘브라질에 있는 나비
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라는 ‘나비효
과’라는 이론을 말했다고 한다. 내가 그때 좀 더 공부하고 싶은 욕심에서
주일 예배를 귀찮아했던 그 마음을 놓치지 않고, 사탄은 나를 그 귀신들의
소굴로 인도했던 것이다.
신앙인이었던 내가 자신도 모르게 흘린 그 작은
바늘구멍 같은 틈이 결국 귀신들을 쓰나미처럼 몰고 오게 되는 문이 된 것
이다. 그 작은 시험의 날갯짓이 결국 내 인생과 영생을 뒤흔든 토네이도가
될 줄 어찌 알았겠느냐 말이다. 그 귀신들에 의해 지옥의 고통처럼 매일
두들겨 맞아 만신창이가 되었던 내 인생의 상당 기간이 그저 통탄스럽지
만 지금이라도 이들의 정체를 알고 대처법을 알게 됐으니 다행이다.
최근 이것들의 특징은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나 주변 지인들의 모습이나
목소리 등으로 가장하여 속이려 한다는 점이다.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처
럼 느껴진다. 하지만 난 이제 더 이상 속지 않는다. ‘어둠을 빗자루로 쓸어
버릴 수 없듯이, 말씀 안에 거하며 주의 진리를 따르는 길만이 빛으로 어
둠을 쫓는 길’이라는 노목사님의 가르침을 난 언제나 새기고 있기 때문이다
첫댓글 방언이 잘못된게 아니라 자세가 잘못되었었네요
귀신이 틈탈수있는 여건....안타깝네요
주위분들의 도움도 없었구요...
방언도 받지않으신것으로 읽었는데 제목은 뭐죠?
제가 잘못 읽었나요? 스토리로는 방언흉내낸것이던데요...헷갈려요ㅠㅠㅠ
성령이 주시는 방언이 있고 마귀가 주는 방언도 있답니다..그래서 영분별이 필요한 것이구요..영을 받고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비춰 보세요..주의 일을 하는지..아니면 성경에서 벗어난 마귀 짓 하는지..그정도는 영적으로 분별하실 줄 알겠죠..
영은 하나님 성령 예수님이 계시듯.. 그 반대로 사탄 귀신이 존재 합니다..둘다 영이나 상대적이죠..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영이 있고 마귀가 주는 영이 있어요..그걸 잘 분별하시고..마귀의 영을 받고 하나님의 은사를 펌회하는 잘못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개는 멍멍멍 돼지는 꿀꿀꿀 아주 간단한 1차원 소리로 서로 간단한 의사 소통 합니다..인간은 말과 언어로 대화를 통해 서로 의사 소통 합니다.. 동물은 1차원의 언어 인간은 2차원의 언어..영의 세계는 말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으로 서로 통하고 읽을수가 있습니다. 3차원의 언어 입니다.. 자 여기서 동물이 인간의 언어를 이해 할수 없고 인간이 신의 언어를 이해 할수 없도 각자 자신의 한개에 갖힌 공간속에서 그 이상을 이해 하지 못한단느 거죠..그래서 인간은 인간이고 동물은 동물이고 신은 신입니다. 우주를 만드시고..흙을 빗어 코에 생기를 넣어 인간을 만든 신의 영역을 과연 인간의 작은 머리로 이해할수 있을 런지..
이방신,잡신도 신입니다. 이방신,잡신이 주는 라랄라 으드드드 방언을 한다는 것은 이방 귀신이 주는 말입니다.
국내에도 외국인들이 많으니 가서 외국어 방언으로 외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그것이 성령이 주시는 은사입니다.
간증자는 방언을 받지도 않고 받은 것처럼 흉내를 내니 당연 마귀가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달려들지요!!
방언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글 올린 사람보다 마귀가 훨신 더 잘알기 때문이고;;;
그리고
간중자는 성경 말씀보다도 음악(베이스소리)가 좋아서 교회에 갔으며
거짓말로 방언을 흉내낸 것!
또한 윗글은 제목부터 거짓말..왜냐
방언 받지도 않은 사람이 방언 때문에 10년을 고통 당했다고?? 제목부터 거짓말!
글 올린 사람~
암튼 성도들에게 방언 은사 받지 못하게 하느라 수고가 많지만
교활한 거짓말은 않통하지요!!
거짓말을 좋아하는 것은 누구?
답 : 마귀!!!
초신자님들 방언은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마귀의 거짓말에 속지 마십시요!
한가지 더 초신자님들에게 조심하라고 부탁드립니다.
이중 아이디 사용하는 자들을 조심하세요..
이런 사람들은 여러 아이디로 자기 주장을 합리화 시키며
말씀에 연약한 초신자들을 꾀어내어 자기를 따르게 하는 자들입니다.
거짓되고 사기적인 혼탁한 양심을 가진 자들입니다
초신자님들은 이런 자들도 유의하시고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반짜반짝님과 파수꾼님 보지 마시라고 했는데 보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시네요. 성령의 은사라고 하면서 외국어 방언은 한마디도 못하시는 분들은 가짜와 진짜를 혼동하고 계시지요.
전 보지말라는 요구에 따라 댓글만 보고 있습니다.
눈을 아무리 크게 뜨고 살펴도 생화와 조화를 구별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꽃에 다가오는 곤충에 의해 쉽게 생화와 조화가 구별되어 집니다.
진짜 꽃에는 벌과 나비가 찾아오고... 가짜 꽃에는 화공약품 냄새도 아랑곳 하지를 않는 저급한 파리들이 찾아옵니다.
피어있는 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찾아 오는 손님이 누구냐에 따라 구분이 됩니다.
붕붕 거리며 점쟎은 소리를 내는 벌인지... 아니면 왱왱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내는 파리인지...
간증글이 방언으로 가위눌림은 아니고 자매의 중심이 온전히 주님을 영접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에 미혹되어 있으니 마음이 혼탁하여 가위눌림이 있고 온전한 구원으로 말씀에 중심이 없이 틈을 주면 귀신들이 밀까부르듯이 하는건 당연하구요~방언이 도대체 뭔지 나도 체험해보고 느낌을 말해주고 싶지만 내게는 이상하게만 보이는 행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거라 신뢰가 안가니 저는 말씀만이 전부인 말씀가지고 맑은 마음으로 기도할래요~가위눌림,귀신형상은 저도 영적경험으로 알고요~
방언을 집단적으로 하는 수련회에 참석해서 다행히 방언은 직접적으로 받지는 못했으나 같은 방언 귀신의 영향으로 가위눌림 현상등 나타난 것이지요. 그 교회의 목회자가 방언하며 또 교인들에게 방언 받기를 권고하며 교회의 사역전체가 무당같은 롴 음악으로 찬양한다고 하니 결국 악령이 횡행하는 분위기에서 가위눌림이나 악령의 역사가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나와서 맑은 정신으로 말씀을 배우기를 충실히 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위눌린이나 귀신의 괴롭힘 현상이 점진적으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ㅋㅋㅋ.....믿음이 부족했던건아닐까요? 본인또한 비슷한경험이 많아서요.....예수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사탄왈.... 그정도가지곤안되.......그러면 꿈속에서 육탄전을 벌입니다.... 주먹으로치고 발로차고...... 꿈에서 깨고나면 기진맥진...힘이하나도없지요... 그리고 2~3주 교회도 빠지고.... 믿음이 강해지면 그꿈을꾸곤합니다. 그러다가 그런꿈을 꾸고나선 약해지고... 그냥저냥 교회다닐대는 안꾸더군요.... 좀 믿음이 들어간다싶으면 어김없이 꾸고요....하다못해 주기도문도 가르처주던데요.....ㅎㅎㅎ
귀신이 주는 방언 있습니다. 저도 계속 그 방언을 하나님이 주신줄 알고 씨부령거렸습니다.
영성있는 어느분이 귀신방언이라고 하여 알고서 제 의지로 맘추었습니다. 저도 가위눌림현상이 가끔 있을때 마귀를 예수이름으로 내쫓으면 가위눌림이 멈추지 않는것을 그동안 많이 체험하였었습니다. 방언멈추고 난 지금은 괜찮습니다.
귀신이 준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방언이라는 확신이 없으면(성령의 열매없는 삶이 않되면) 방언할 생각조차 안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언을 통하여 내몸에 귀신이 들락거리는 통로를 열어주게 됩니다.
결과는 엉뚱한 방향으로 가기도 하니까 방언 조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