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우 바오로 신부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사도행전 2,36-41 요한 20,11-18
오늘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다가, 무덤 안쪽 하얀 옷의 두 천사를 발견하고 대화를 나눕니다.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을 떠나보낸 슬픔에 잠겨, 눈앞에 계신 그분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는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곧이어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그제야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슬픔의 눈물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주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그분을 알아봅니다.
마리아에게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고 눈물이 환희로 승화되는 순간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이렇게 분부하십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예수님께서 당신을 더 이상 붙들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이제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성자께서 성부께 건너가심으로써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부활하신 성자께서는 성부를 ‘내 아버지’, ‘너희의 아버지’, ‘내 하느님’,
‘너희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으로 하느님과 맺는 일정한 관계성의 차이를 전제하시고,
동시에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십니다.
공생활 중이신 예수님과 맺었던 관계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는
‘새 계약’을 통하여 새로운 관계로 나아갑니다.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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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사도행전 2,36-41 요한 20,11-18
‘복된 하느님의 애인’이라 불리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네 복음사가는 모두 주님 부활 이야기의
첫 장면과 그 중심에 등장시킵니다. 캔터베리의 안셀모 성인은 이처럼 부활의 첫 증인인 그를
다음과 같이 기억합니다. “그대 선택된 여인이여, 사랑 가득한 선택자여!”
무덤 밖에 선 채로 마리아는 울고 있습니다. 적막한 이른 아침에, 비록 돌아가셨을지라도
곁에 있고 싶어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관심과 존경을 받으셨던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것도 슬픈데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그 실망과 허탈감이 끝내 울음으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 뒤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잇달아 큰일이 닥치면 넋을 잃고
하염없이 울다가 끝내 실신까지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 마리아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야!” 하고 부르십니다. 한처음에 빛과 어둠,
하늘과 땅을 만들어 이름을 주셨고, 사람에게 온갖 생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건네는 것은 관계를 맺는 시작입니다.
사랑으로 맺어진 스승과 제자, 바로 이것이 부활의 신비입니다.
눈물이 주님 부활의 영광을 가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께 눈물 대신
응답해야 합니다. “라뿌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이름을 부르시고 이에 우리가 그분을 부르면,
부활의 신비는 사랑의 관계로 거듭 완성됩니다.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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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사도행전 2,36-41 요한 20,11-18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아침 산보 길에 자주 보는 것들이 있습니다.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새입니다.
새는 날개가 있기에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날개가 있는 새는 걸어 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새가 걸어 다닌다면 날개에 이상이 있거나, 나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걸어 다니는 새는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다람쥐도 볼 수 있습니다. 다람쥐는 새들처럼 날지는 못하지만 나무를 아주 쉽게 오를 수
있습니다. 곡예사처럼 높은 전선 위를 이동할 수 있습니다. 다람쥐에게는 단단하게
움켜잡을 수 있는 발톱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새들에게는 날개를, 다람쥐에게는 발톱을 주셨습니다. 새들처럼 날개는 없지만,
다람쥐처럼 발톱은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는 ‘신앙’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나는 새를 보면서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고, 나무를 오르는 다람쥐를 보면서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모든 것이 기쁨입니다.
예전에 캐나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커피를 마시면 컵에 경품이 있었습니다.
저는 아는 자매님과 커피를 마시면서 평소처럼 제 것이 당첨이 되면 가지시라고 말을 했습니다.
될 리도 없고 된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 그분이 제가 마신 컵을 가지고 열어보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동차 나와도 저 주는 거예요?” 저는 “그럼요!”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컵 말린 부분을 여는데 그분 표정이 변하는 겁니다.
보통은 ‘Please try again.'이라고 나오는데 처음 글자가 ’W'인 겁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조금 이상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 마음이 더 이상해졌습니다.
정말 자동차가 나오면 어떻게 하나! 신부가 되가지고 반씩 나누자고 할 수도 없고
짧은 시간이지만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결국 ‘Win coffee'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커피의 경품은 나의 마음을 그렇게 흔들어 놓았는데, 예수님의 부활은 정말 나를 완전히
딴 사람으로 만들 정도로 흔들어 놓는지 생각하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기쁨과 영광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꼭 해야 할 어떤 일을 해냈다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성삼일을 지내면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묵상하며
그 의미를 내 삶에 받아들이기 보다는 아! 올해도 주님의 부활이 지나갔구나! 이런 생각들을
하였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그렇게 나에게 의미 있고, 그렇게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큰 사건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날개가 있음에도 날지 못하는 새와 같았습니다.
날개를 믿지 못하고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새와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후에 복음을 선포하고, 어떤 고통과 두려움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제 그들이 모든 것을 던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명도, 재산도, 명예도,
욕심도 다 버렸을 때,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느끼고, 만날 수 있었습니다.
10개월 동안 엄마의 몸속에 있는 아이에게 탄생은 어쩌면 죽음과 같은 두려움과 고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탯줄에 연결되어 매일 아무 수고 없이 양식을 받아먹고, 엄마의 몸 안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지내는 아이에게 세상은 그렇게 자유롭고 편안한 곳이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이는 엄마의 몸에서 나와야 하고, 나오지 못하면 결국 아이도 엄마도 위험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먹여주고 지켜주던 탯줄을 끊어야만, 엄마의 몸에서 나와야만 또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는 죽음과 같은 체험일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탄생’이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마리아를 부르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으로 부르십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슬픔을 다 떨쳐버리고,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편안한 하루 되십시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