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대축일 전례의 역사 (수정_1.1)
1. 머릿말
삼위일체 수도회의 역사를 들여다 보기 이전에 가톨릭 교회 안에서 어떻게 삼위일체의 신비가 성경에서 어떻게 드러 났으며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기리며 찬양하는 신심 미사가 어떻게 가톨릭 전례 안에서 표현되어지고 전통으로서 지금까지 유지 되어 왔는지를 알면 삼위일체 수도회의 창설의 역사 이해하기 좋습니다. 삼위일체 수도회가 공식적으로 로마 교황청의 인가를 받는 1198년의 사회 문화적 상황 속에서 종교 활동의 흐름을 파악한다면 삼위일체 수도회의 존재 이유와 정체성에 더욱 더 깊게 파고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삼위일체 수도회의 역사를 직접적으로 알아 보기 앞서서 이렇게 수도회의 명칭으로서 모든 창조물의 근원이자 뿌리이신 삼위일체와 그 대축일에 대한 역사를 먼저 알아가보려 합니다.
2. 축일을 지내는 이유와 전례화가 늦어진 이유.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 후 부활하시어 새롭게 열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마침내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 열 두 제자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사도로서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모든 민족에게 이 세례가 도달해야 함을 이야기해 주십니다. 삼위일체 대축일 전례의 궁극적인 목적은 삼위격의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이지만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일치를 이루고 있는 신비가 전례력에 오랜 시간 그리스도교의 보편 전례로서 제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원천이자 뿌리이기에 이는 조금 의아한 부분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성찬 전례의 기도 양식들을 들여다보면 모든 양식과 성인 성녀의 축일이 하나같이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시며 일치를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통을 지내고 축제를 즐긴다는 것은 역사 속에서 실제 혹은 사실로서 존재했던 사건을 영원히 그리고 세대에서 또 다른 세대로 끊김 없이 이어져 나가는 한 형태입니다. 특히나 그 전통과 축제의 가치와 중요도가 높기에 더더욱 관련된 사람과 이웃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게 더욱 더 성대하고 크게 행사를 지내게 됩니다.
3. 삼위일체 대축일의 간략한 역사
8세기경, 신학자이자 지혜로운 선생이자 수도자인 앨퀸 (Alcuino)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신비를 기리는 신심 미사를 제정하는 영적 영감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삼위일체의 신비를 기리는 신심 미사는 보편 전례가 아닌 개인의 경건함(Piedad)을 위한 신심 미사였다. 하지만 삼위일체의 신비를 기리는 신심 미사는 역사 속에서 천천히 퍼져 나갔고 1022년 독일의 젤리겐스타트 공의회[1]에서언급이되었다.
하지만, 이미 벨기에의 리에자의 주교 에스테반에 의해서 920년 지역교회의 전례로서 제정되어 삼위일체 축일을 지내고 있었다. 현대에 들어서서 제정된 교회법과 같은 제도적 장치가 없기에 후임 리퀴에 주교는 삼위일체 축일을 그대로 이어받아 지냈다.
봉쇄적 수도회 (Orden Monástica)[2]가 탄생하기 시작하던 시기, 대략 11세기 초, 라이헤나우 (Reichenau)의 아바드 (Abad)의 베르논을 중심으로 삼위일체 신심 미사가 천천히 전파되기 시작하여 프랑스의 클루니 (Cluny)에서 같은 시대에 공식적인 전례로서 거행되어 왔으며 1091년 봉쇄 수도회 원장 (Ordinario del Monasterio)의 기록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삼위일체 신심 미사가 거행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교황 알렉산데르 2세 시기 (1061-1073)에 보편교회 안에서의 전례를 지내는 것은 불허하였지만 지역 교회에서 일찍이 전통적으로 지내왔던 곳이면 삼위일체 축일을 거행하는 것을 허용 해 주었다. 하지만 로마 교황청에서는 일찍이 성호경 및 많은 기도 속에서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을 호칭하고 찬송한다는 이유로 공식적으로 삼위일체 축일을 공포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삼위일체 축일 전례가 전파가 되면서 아바드 루페르토는 12세기 초 삼위일체 축일 전례에 대해서 현재와 같은 전례의 형태로서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주일에 삼위일체 축일을 지내는 것을 공포한다.
영국의 경우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축일이 칸테르부리의 성 토마스 순교자를 통해서 1162년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주일에 삼위일체 축일을 지내는 것이 공포가 되며 프랑스에는 1260년 플로렌티노의 대주교가 주관하는 아를 공의회 (Concilio de Arlés)에서 삼위일체 축일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8일축제를 지내는 것을 공포한다. 1230년 이후 시토 수도회에서는 모든 시토 수도 공동체에서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기로 결정을 하게 되며 13세기 중 멘데의 듀란도 (Durando de Mende)는 다른 모든 라틴 교회에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을 공포하게 되며 대부분의 지역 교회에서 삼위일체 축일을 거룩하게 지내게 되면서 결국 교황 요한 22세(1316-1334)는 거룩한 삼위일체 대축일을 인정하여 보편 교회의 공식적으로 전례가 제정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