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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자 「나자렛 예수상」
1. 스페인 제국과 라 마모라.
삼위일체 수도회는 1198년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규칙서 인가로 가톨릭 교회 안에서 공시적으로 수도회로서 시작을 하였으며 1599년 8월 20일 「클레멘테 8세」 교황의 개혁 승인으로 새로운 개혁 삼위일체 수도회의 또 다른 가지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게 새로운 개혁 삼위일체 수도회의 이름으로 최초로 그리스도인들의 구속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1625년입니다.
스페인은 1469년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 계승자인 「이사벨」과 아라곤의 왕위 계승자 「페르난도」의 결혼으로 현재의 스페인의 역사적 시작을 알리게 됩니다. 이 후, 왕위 계승의 갈등을 겪으면서 유일한 왕자인 「후안」과 「이사벨」 공주와 「마리아」 공주가 후손을 보지 못하고 죽게 되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아노」 1세의 아들 「펠리페」와 결혼을 한 「후아나」에게 카스티야의 왕위가 넘어가게 됩니다. 「후아나」와 「펠리페」 사이에서 태어난 「카를로스」는 정당하게 카스티야와 신성 로마 제국 (현 독일)의 통치자로 이름을 올렸으며 여자의 왕위 계승이 가능했던 카스티야와는 반대로 여성 계승권을 인정하지 않던 아라곤 왕국 역시 「카를로스」의 통치권 안으로 들어오면서 대 스페인 제국의 시작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당시「크리스도발 콜럼버스」의 대담한 항해로 남미를 발견하게 되었고 남미에 스페인의 영향력이 뻗어나가며 스페인은 제국의길을 걸어나가기 시작했고 북아프리카의 아랍인들이 거주하던 땅까지 점령을 하였습니다. 현 모로코의 서쪽에 위치한 지역을 스페인제국이 점령하였고 「라 마모라(La Mámora)」라는 도시가 구속된 「나자렛 예수상」이 이슬람교도들에게서 구속되어 스페인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가게되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장소입니다.
1614년 스페인 제국은 「라 마모라」를 점령을 하게 되었고 1681년까지 스페인령으로 존재하였습니다. 스페인 제국은 「라 마모라」에서 「오마르」의 이슬람 대군의 치밀한 전략에 결국 「라 마모라」를 포기하게 됩니다. 그렇게 「라 마모라」에 거주하던 스페인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이슬람 왕국의 노예로서 남게 되었고 수많은 성상과 성화가 고스란히 그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으며 노예로 잡힌 약 250 여명의 백성들과 함께 이슬람 국왕의 거처가 있는 「메키네스」로 이송되게 되었고 포로들을 이송 중에 이슬람 국왕은 포로들의 생명을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병사들이 카푸친 수사 둘을 폭행하게 되고 성상 피해가 속출하였습니다.
「발도발의 프란치스코」의 증언에 따르면 「라 마모라」에서 옮겨진 성상 중에는 「나자렛 예수상」, «로사리오의 성모상», «사도상», «전쟁의 대천사상» 등이 있었으며 성상을 길거리에서 질질 끌고 다니며 모욕을 주었으며 유대인들에게 헐값에 팔아먹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성상에 대한 모욕이 극에 달하자 삼위일체 수도자 「베드로 앙헬레스」는 직접 이슬람 국왕에게 찾아가 성상에 대한 모욕을 멈춰 달라고 하며 성상과 이슬람 노예의 거래를 제안하였다.
삼위일체 구속자들(수도자들)은 성상과 성화를 되 찾을 준비를 시작하였고 「세우따」에서 군를 거느리고 있는 이슬람 국왕을 삼위일체 수도원에서 만나 성상을 건내 주는 대가로 금을 건내 주었다. 「나자렛 예수상」이 「세우따」에 도착한 시기는 대략 1682년 1월 28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삼위일체 수도회 내에서 «나자렛 예수 기념일»을 이날에 지낸 것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정확한 날짜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세우따」에서 이베리아 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알헤시라스」로 「나자렛 예수상」이 옮겨졌다.
스페인 이베리아 반도로 옮겨진 「나자렛 예수상」은 마드리드의 삼위일체 수도원으로 옮겨 졌고 많은 신자 분들의 「나자렛 예수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과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못했던 일들을 찬양하며 「나자렛 예수상」에 대한 신심이 나날이 높아져만 갔다.
「메디나셀리 공작 후안 프란시스코 데 라 쎄르다」 와 「공작 부인 카탈리나 데 아라곤 이 산도발」 그리고 「레르마의 공작」 세 명은 「나자렛 예수상」의 경당을 제작할 목적으로 1686년 10월 2일에 자금을 모아 삼위일체 수도원에 봉헌하였다. 약 30년이 흐른 뒤인 1716년 「니콜라스 데 꼬르도바 이 라 쎄르다」 와 「마르케스 데 프리에고」, 「메디나쎌리의 공작」은 자신들의 선조들의 의지를 이어서 경당을 확장하기로 한다.
삼위일체 마드리드 공동체는 일찍이 「마드리드」의 맨발의 삼위일체 수도원이라 불렸지만 「나자렛 예수상」이 이 곳에 머물면서 신자들이 «나자렛 예수의 수도원»이라고 부를 정도로 「나자렛 예수상」에 대한 명성이 높아만 갔다. 1835년까지 마드리드 삼위일체 공동체에서 「나자렛 예수상」에 대한 신심 예절을 이어 나갔으며 오늘날에 이르러 «메디나셀리의 예수상» 또는 «메디나셀리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 후 1891년 이 경당을 관리하는 수도원이 카푸친 수도회로 바뀌었고 1930년 현재 자리하고 있는 대성당이 들어서게 되었다.
2. 「나자렛 예수상」의 근원과 원작자
이 「나자렛 예수상」이 「라 마모라」로 옮겨진 이유나 목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하지만 1705년 「데우세비오」 신부의 9일기도의 도입부에 「라 마모라」로 누가 옮겼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분명 성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신심 예절을 지속 해 나갔다는 것을 서술하고 있다.
「라마모라」에서있었던한역사적사건을들여다보게된다면, 1645년경 발생한 성당 화제에서 발견된「성 미겔 울트라마르」가「카디스」의 주교에게 10월 12일과 13일에 쓴 3개의 편지에서 당시 화제가났던 성당에관한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다.
첫번째 편지에서는 화제를 직접 목격한 「디에고 데 케로」 수도자의 증언이 실려 있었다. 화염이 성당 제대와 제의실까지 번지게 되었고 성모상까지 불타버렸으며 한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디에고」 수사는 성당 내부로 들어가서 감실에 모셔져 있는 성체를 회수하여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번째 편지는 「라 마모라」에 살았었던 카푸친 수사들의 지도자인 「세바스티안 데 산타페」은 9월 17일 성 프란치스코 축일날 「라 마모라」 의 「산 미겔 울트라마르」 항구에 도착하기 4일 전 이 화제가 일어 났고 성당이 부지만 남기고 다 타버렸지만 유일하게 남아있던 성상이 로사리오의 성모상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성당이 불타는 와중에 성체를 회수하여 안전한 곳에 옮길 수 있었던 순간이 있었다는 것을 바탕으로 다른 성상이나 성화도 대피시켰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후 이 성당에 성 미카엘 성상을 도로 돌려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으로 로사리오의 성모상뿐만 아니라 다른 성상도 함께 대피시킨 것으로 추측이 된다.
하지만 「나자렛 예수상」이 라 마모라의 성당에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카로세라」 신부의 성당 화재에 관한 증언에 따르면 1645년 카푸친 수사들이 도착할 당시 아직 「나자렛 예수상」은 라 마모라에 없었으며 오히려 카푸친 수사들이 유일하게 그 곳에서 사목자로 활동하였기에 그들이 1665년과 1668년 사이에 돌려 놓았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카푸친 수사들의 행적을 기록한 문서는 「나자렛 예수상」이 카푸친 수도회 세비야 공동체의 소유였고 「라 마모라」에 옮겼다는 것을 증명해 주지는 않는다.
「카로세라」 신부는 「나자렛 예수상」을 「라 마모라」로 옮긴 이들이 카푸친 수도회 세비야 공동체의 수사라고 가정하게 된다면 분명 그 성상을 만든 이가 「후안 데 메사 (Juan de Mesa 1583-1627)」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이야기를 한다. 「후안 데 메사」의 작품 중 «그랑 포데르»와 «사랑의 그리스도상» 이 두 성상과 「나자렛 예수상」이 꾀나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푸친 수도회의 「세비야」 공동체는 「후안 데 메사」가 죽었던 1627년도에 창설된 공동체였기에 그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고 본다. 그렇기에 「에우세비오」 신부가 증언하 듯 「나자렛 예수상」을 「라 마모라」까지 가지고 간 역사적 증거는 전혀 없으며 그 주최자가 누군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3. 「나자렛 예수상」의 신심의 전파
삼위일체 수도회 수사 「에우세비오 신부」는 일찍이 1705년부터 「나자렛 예수상」에 대한 기록을 남기셨다. 「에우세비오」 신부는 「나자렛 예수상」이 「마드리드」 같은 도시에만 국한되어서 그 예절을 지켜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고 당시 스페인 영토 전역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폴란드, 인도 서부 지역 등등)으로 「나자렛 예수상」에 대한 신심이 전파되었다고 언급을 한다. 같은 시대에 「알레한드로」 신부 역시 「나자렛 예수상」의 복사본이 많은 곳으로 퍼져 나갔다고 언급을 한다. 「발데페냐스」의 삼위일체 수도원에서 운용하는 학교에도 이 성상이 있으며 「산타 크루스」와 「바요나의 후작 알바로 바산 데 베나비데스」 역시 「나자렛 예수상」 신심이 상당하였다고 한다. 삼위일체 관상 수녀회 「발렌시아」 공동체와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나」에서도 그 신심 예절을 지속해 왔습니다.
1713년, 「메르철」 신부의 증언에 따르면 「비엔」과 「세비야」에서도 신심 활동이 있었으며 「알카사르 데 산 후안 (Alcázar de San Juan)」과 「알칼라 데 에나레스 (Alcalá de Henares)」, 「톨레도」에서도 그 신심활동이 활발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스페인의 「안떼께라」, 「그라나다」, 「알고르따」, 「비야누에바 델 아르소비스포」, 「안두하르」에서 이 성상이 여전히 존재하며 아르헨티나의 「비야 마리아」, 「에르난도」 뿐만 아니라 칠레의 「산티아고」에서는 「나자렛 예수」의 이름을 딴 성당이 존재하며 페루의 리마에서도 이 성상의 복사본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