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옥.
임정의 어른들을 찾아가서 조선 총독부를 폭파하겠으니
비행기를 사달라고 했던 독립투사 권기옥 비행사.
권기옥은 한국 최초의 여성 전투기 조종사다.
그때 중국 각지에는 약 60만명에 달하는 교포들이 살고 있어서 그 가운데 적어도 20만명을 소집할 수 있었으며, 만주의 2백만명과 국내 동포의 일부까지 소집대상으로 포함시킨다면 30만명의 군인을 확보할 수 있다고 전망되었다.
또 이때 중국의 화북(華北)·러허(熱河)·후베이(湖北)·산시(山西)·산둥(山東)·안후이·장시 등지에도 수십개의 한국인 군사집단이 유격대로 활약하고 있었으며, 장백산(長白山) 일대에도 3천명의 독립군이 중국 유격대와 합작하고 있었다. 더욱이 소련과 중앙아시아 및 시베리아에는 30만명이나 되는 훈련된 병사들이 독립전쟁에 참여하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북간도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이와 같은 여건에서 광복군의 발전 가능성은 무한하였으나, 통일적인 항일민족전선을 형성하는 데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존재가 큰 장애요인이었다. 즉 중국공산당치하의 옌안(延安)에 김무정(金武亭)의 조선의용군이 조직되었으며, 또한 광복군이 중심이 된 통일적인 항일전투태세의 확립이 시급한 과제였으나, 중국측의 재정원조는 1941년 12울에는 6만원밖에 안되었고, 1944년에는 1백만원까지 증액되었으나 당시의 원화의 인플레이션으로 사실상 무의미한 증액이 되고 말았다.
조선의용군 윤세주.
1942년 중국 태항산에서 일군의 40만 병력과
최후의 결정을 치르고 장렬히 전사했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는 영국·미국·소련 등 연합국에 군사차관 5천만원을 교섭하려 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약간의 군사원조로 광복군이 중국군에 예속된 듯한 인상을 받게 되자 임시의정원에서는 '한국광복군행동준승9개항'을 폐기하는 문제를 토의하였다. 임시정부의 요구에 따라 중국정부는 새로운 군사협정 체결에 동의하였으나, 1945년 4월 4일에 이르러서야 수락됨으로써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의열단
의열단. 1919년 김원봉이 조직한 독립단체이다.
철저하게 자신들을 어둠속에 감추고 일본의 고관들을 암살한 후 유유히 사라져가던 그들.
그들은 자신들의 행적을 단 한줄도 스스로 남기지 않았으며 같은 단원끼리도 되도록 사적인
이름이나 무슨 작전을 펼치는지 숨겼다고 한다.
서로 무언가를 알 수 있는 상황이 와도 절대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잡히면 여러사람의 정보가 새어나갈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열단은 당시 식민지 조선 청년들의 희망이자 별이였으며 일본에게는 공포이자 절망이었다.
그 예로 임시정부는 몰라도 의열단은 안다는 민중의 기록이 있다.
(의열단의 단원들)
김원봉(金元鳳)· 윤세주(尹世胄)· 이성우(李成宇)· 곽경(郭敬)· 강세우(姜世宇)·
이종암(李鐘岩)· 한봉근(韓鳳根)· 한봉인(韓鳳仁)· 김상윤(金相潤)· 신철휴(申喆休)·
배동선(裵東宣)· 서상락(徐相洛)· 권준(權俊)
의열단의 단장은 김원봉이 맡았고 파괴 대상으로는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의 중요기관을 선정하고 이 시설에 대한 폭파를 의도했다.
이를 위해 의열단은 폭탄 제조법을 배웠지만 사제 폭탄이라 그런지 불발탄이 많았다.
일본이 독립투사들을 잡아다 고문을 자행하고 강제로 감옥에 가두는 암울했던 시대에도 단원
13명은 의열단 조직 이후 광복의 그날까지 단 한명도 조국을 배신하지 않았다.
(의열단의 주요 행적)
이 행적 부분은 앞에서 말했듯이 의열단 단원이 스스로 밝힌 공식적인 기록이 없다.
그래서 단편적인 기록들 뿐이므로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조선총독부 폭파사건, 다나카 기이치 저격사건, 종로경찰서 폭파사건, 밀양경찰서 폭파사건,
도쿄 이중교 폭탄사건,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김달하, 박용만 등 친일파 암살, 그 외 많은 친일인사들을 폭사,
암살시켰으며 유유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의열단의 한계)
의열단의 한계점은 무정부주의를 기반으로 했다는 것이며 무정부주의가 모든 기구는 일체 거부했다는 것이다.
의열단의 행동은 지극히 개인적 이어서 대규모로 활동할 수가 없었다.
반면 한인애국단은 자금 부족과 인재 부족으로 인해 개인 전술을 사용했지만 조직체계가 있어 체계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으나 문제는 국제적으로는 의열단이 테러 단체로 보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비운의 남북 분단이 일어났으니.
2. 한인 애국단
① 애국단의 중심 인물 : 김구
② 이봉창 : 일본 국왕에게 폭탄 투척 의거
③ 윤봉길 : 상하이 홍커우 공원 투탄 의거
④ 기타자료.
(1) 한인 애국단은 1930년대 초 김구 선생이 주도한 단체로 중국과 우의를 높이고 일본 요인
을 암살하기 위해 조직하였으며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대표적인 활동이다.
1.운요호 사건: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지 10년만에 정권에서 물러나면서 조선의 정권은 왕비(명성황후)중심으로 가게됩니다. 이떄 일본은 적극적으로 조선과 교섭을 요구해 온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새로운 국가체재를 마련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통상을 강요하기 이하여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일본은 열강세력에 앞서 조선에의 진출을 시도한 계획이 지연됨에 따라, 그 타개책으로 무력시위로써 조선당국을 굴복시키고자 군함 30척을 조선연해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사건을 구실로 일본은 조선에 통상조약을 맺을 것을 강요하였다. 이는 서양열강이 군사력을 앞세워 아시아 국가들에 강요한 방식을 본뜬 것이다.
운요호 사건뒤에 이를 계기로 강화도 조약이 벌어지게 됩니다.
2. 강화도 조약:
강화도 조약은 두나라대포가 모여 조약을 맺으니 이것이 강화도 조약이다. 강화도 조약은 우리나라가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으로 여러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조약에 따라 조선은 부산 , 원산, 제물포까지 3항구를 개항하고일정지역에 일본인의 거주를 허용했다. 주요내용에는 강화도 조약은 조선의 자주국가임을 밝혔지만 조선에 불리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치외법권인정 등 불평등한 내용의 조약이다.
3.임오군란:
이처럼 정부의 개화정책이 실시되는 과정에서 개화론과 척사론이 대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민씨 세력과 흥선대원군 세력사이의 갈등 일본세력의 침투에 대한 국민의 반발등이 얽히면서 정치는 혼란되었다. 개화정책이 추진되는 가운데 구식군인들이 신식군대인 별기군에 비해 상대적낮은 대우를 받음으로서 반발하였지만 , 밀렸던 급료로
모래를 섞인 급료를 받게 되자 미워하던 정부의고위관료와 일본 공사관의 경비를 구실로 서울에 일본군의 주둔을 허락하게 되었다.
4. 갑신정변:
임오군란 후 청의 내정간섭을 받고 다시 집권한 민씨 세력은 개화정책에 소극적이라서 개화파 세력에게는 불만이었다 그래서 정변을 일으켰다. 즉 개화당은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분야를 개혁하여 일본처럼 근대국가로 가려고 하였지만 청군의 개입으로 3일천하로 끝나게 됬다.
5. 경제의 침투:
갑신정변으로 조선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잃은 일본군은 경제적 침투를 더욱 강화하였다. 개항 이후 조선에서 쌀과 콩 등의 곡식을 많이 사가고 영구제 면제품을 팔았다. 그래서 농민들의 경제상황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 일본의 경제적 침투에 대항하여 몇개의 지방은 방곡령을 내려 일본상인들이 곡식을 사가지 못하게 막기도 하였지만 일본은 손해를 보게 되었다면서 배상을 요구한다. 그리고 우리는 굴복했다. 이에 동학이 널리 보급되었다 왜냐하면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외세의 침투에 반발 등으로 인하여 현실에 불만이 높아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6. 을미사변과 단발령:
조선에 대한 침략 정책을 추진하던 일본은 조선의 이러한 움직임에 크게 당황하였으며 명성황후는 일본의 조선 침략에 방해가 되는인물로 지목되엇다. 그리하여 일본공사는 일본군과 일본이 불량배를 동원하여 궁궐에 침입,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를 을미사변이라고 한다. 일본의 야만적인 행위는 조선의 주권을 짓밝ㅂ은 것으로 국제사회에서도 일본을 비난하는 여론이 드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이를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였다.단발령은 겉으로는 조선의 근대적 개혁을 내세운 것이었지만 한국의 전통을 끊음으로서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약화시키기 위한 일본의 정략이 숨어 있다.
한편 일본의 압력으로 구성된 친일 내각은 그동안 지지부진하였던 갷ㄱ을 적극적으로 추진할는 태세를 갖추었다. 이에 음력페지와 양력사용, 종두법시행, 우편제도실시, 건양연호제정, 단발령 발표등의 개혁이루어졌는데 이를 을미개혁이라고 한다.
7. 을미의병 단발령에 대한 국민들이 바발은 상소나 관직의 사직, 학교자퇴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일본은 경제적 정치적 침략과 명성황후 시해로 분노한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여 항일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의병운동은 그전부터 서양과의교섭, 특히 일본과의 조약 체결을 반대하면서 그들의 침략을 경계를 주장하던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8. 을사조약:
청일 전쟁후 러시아는 만주철도 부설권을 획득하는ㄷ 등 세력을 확대시키고 우리나라에도 세력을 침투시키려 하였다. 이때 러일 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이 승리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고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의 주요 내용으로 간섭하기 시작했다.
고종황제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을사조약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자 이에 반대하는 민족의 분노가 여러가지로 폭발하였다.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민족의 움직임이 전개되는 가운데 고종황제는 조약체결이 무효임을 선언했으며 국제사회에 독립국가로서의 정당성을 호소하였다. 헤이그 특사를 보내서 을사조약의 무효화를 알리려고 했지만 일본의 한국지배를 인정하고 있던 세계정세 아래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9. 고종황제의 강제퇴위:
헤이그 특사파견을 구실로 일본은 그들의 침략에 방해가 되는 고종황제를 군대로 위협하여 강제로 퇴위시켰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민들의 저항이 격렬하게 일어났으나 무력으로 억누르면서 한일 신협약 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그래서 일본인 통감이 대한 제국의 내정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10. 국권침탈:
헤이그 특사사건을 구실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일제는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두에 사법권과 경찰권마저 장악하여 군사 행정 사법 친안등 모든 분야의 지배권을 장악해 나갔다. 또 일제는 강력한 항일 전쟁을 폇던 의병활동을 어느정도 잠재우자, 식민지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일진회의 이용구 송병준 등 친일파를 앞세워 나라를 일본에 합치자는 각종 청원서나 성명서를 발표하게 되었다. 이는 국권침탈이 한국인의 요청으로 이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위장하여는 술책이었다.일제는 군대와 경찰을 각지에 배치하여 우리민족의 저항을 미리차단,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매국 내각과 이른바 합방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리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함으로서 발전해 온 우리민족은 나라를 배앗기고 일제의 노예상태로 떨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