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에 출판된 가다머의『진리와 방법』(Wahrheit und Methode)은 현대의 철학적 해석학의 고전으로 자리잡았지만 동시에 이 책만큼 해석학의 정체성에 대한 열띤 논쟁을 불러 일으킨 책도 없었다. 한편에서는 이 책이야말로 슐라이어마허로부터 딜타이를 거쳐 하이데거에 이르는 독일의 해석학의 이념과 방법을 현대 상황에 가장 적절하게 재정립해준 작품이라는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 책이 가다머의 스승 하이데거가 ‘존재의 물음’ 아래 국수주의를 감추었던 것처럼 ‘해석의 보편성’의 기치 아래 정치적 보수주의를 강요하며 학문적 방법론의 가치를 폄하하고 있다고 혹평했다.
과연 가다머가 이 책에서 말하는 ‘해석학’이란 어떤 것일까? 가다머는 해석학이 이른바 올바른 해석을 위한 일반원리을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이해현상 또는 이해사건의 구조를 해명하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에는 이해를 인간 실존의 존재구조로 보는 하이데거의 통찰이 전제되어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가다머는 그보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인간의 이해구조를 예술과 역사와 언어 현상에서 구체적으로 밝혀내고자 한다. 바로 이점이 가다머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그는 이 책을 “예술경험에서의 진리물음“, ”인문학(정신과학)에서의 이해에 대한 진리물음“, ”언어를 실마리로 하는 해석학의 존재론”에 관한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전개한다.
가다머는 예술이해, 역사이해, 언어이해의 본질을 잘 설명해주는 현상을 ‘놀이’(Spiel)에서 찾는다. 놀이는 사람의 의식활동을 대신해 주는 기능을 갖는다. 왜냐하면 놀이에 몰두하는 사람의 의식은 놀이의 전개과정과 따로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놀이에 몰두하는 한 우리의 의식은 놀이 행위에 완전히 용해되고 통합되어 나타난다. 우리는 놀이가 끝난 후에야 우리가 경험한 일을 거리를 두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예술작품의 감상이나 예술공연에 몰입하는 시간동안 우리는 그 작품이 표현되는 과정에 우리를 내맡긴다. 따라서 예술경험의 진리성은 감상자가 작품감상 이전에 미리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과의 생생한 만남 자체에서 일어난다.
또한 역사이해의 현상 역시 놀이 경험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놀이에 집중하는 동안 우리의 의식이 놀이와 분리되지 않듯이 과거의 역사를 이해하는 의식은 과거와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의식은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축적되어 온 경험안에서 현재의 순간을 경험한다. 따라서 어떠한 현재의 역사이해도 전통을 떠나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가다머는 과거의 영향 아래서 과거를 지향하는 순환적인 역사이해의 방식을 ‘영향사적 의식’(das wirkungsgeschichtliches Bewusstsein)에 의한 ‘지평융합’(Horizontverschmelzung)이라고 부른다. 언어야 말로 인간이 세계를 경험하는 가장 보편적인 매개체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끊임없이 언어를 사용하면서, 즉 일종의 언어놀이(Sprachspiel)를 통해서 세계를 경험한다. 언어놀이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대답을 찾으면서 타자와 자기자신을 이해해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언어는 인간의 의식을 비추는 거울과 같아서 언어와 분리된 순수 의식이란 없으며 따라서 세계에 대한 경험도 불가능해 진다.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철학적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 경험의 역사와 언어에 대한 귀속성일 것이다. 이 두가지 특성은 바로 인간 인식의 유한성의 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사고가 전통의 산물이라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통의 내용을 비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한 가다머를 비판하는 하버마스(Habermas)와 아펠(Apel) 역시 해석학적 사유를 받아 들인다. 또한 야우스(Jauss)와 이저(Iser)의 수용미학(Rezeptionsaesthetik), 에벨링(Ebeling)이나 판넨베르그(Pannenberg)의 신학적 해석학, 영미의 사회철학이나 로티(Rorty)등의 신실용주의에 미친 가다머의 해석학의 영향력은 이러한 특징에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2. 해석의 모험가 뽈 리꾀르
프랑스의 대표적 해석학자 뽈 리꾀르(Paul Ricoeur, 1913-현재)는 그의 다양한 철학작업을 통해 아주 인상적인 사상의 길을 걸어왔다. 그의 철학은 인간의 의지와 악, 신화와 상징, 은유와 이야기 등 의 다양한 주제와 실존주의, 현상학, 구조주의, 정신분석학, 이데올로기 비판, 분석철학 등의 현대철학의 방법들을 해석학의 관점에서 종합하려는 시도의 연속이었다. 이 점에서 리꾀르의 철학은 끊임없는 ‘해석의 모험’이라고 불려질 수 있다.
프랑스 남동부의 발랑스(Valence)의 신교 가정에서 태어나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서북부의 브레따뉴 지방에서 자란 그는 1930년대에 라슐리에와 라그노 등의 프랑스 유심론에 대한 관심으로 부터 철학에 입문한후, 소르본 대학에서 마르셀과 야스퍼스의 실존철학, 훗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통해 현대 철학의 방법을 배운다. 그 역시 레비나스나 싸르트르처럼 이차대전중 독일군에 포로가 된 상태에서 전후의 사상적 길을 준비한다. 전후 빠리로 다시 귀환한 후, 그는 1948년 슈트라스부르 대학에 철학사 교수로 초빙되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누스의 희랍철학으로부터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근세철학을 거쳐 마르셀, 야스퍼스, 하이데거의 철학을 강의한다. 이 시기의 그의 연구의 결과는 『칼 야스퍼스와 실존철학』(1947; 미켈 뒤프렌과 공저),『가브리엘 마르셀과 칼 야스퍼스』(1948),『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존재, 본질 그리고 실체』(1953-4 강의; 1960 출판), 논문집『역사와 진리』(1955)를 거쳐 그의 초기 대작인 『의지의 철학』(Philosophie de la volonté)(제1부: 1950; 제2부 1, 2권 1960)으로 나타난다. 리꾀르는 이 작품의 제1부에서 인간의 의지 현상을 현상학적 기술과 심리학적 설명을 종합하여 진단학적으로’(diagnostic) 해명한다. 즉 의지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욕구 현상에 대한 기술과 의식에 나타나지 않는 신체 작용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을 상호 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2부 1권 『오류의 인간』(L'homme faillible)에서 그는 먼저 의식의 선험적 구조와 언어와 정서를 통해 나타나는 실천적 종합 사이의 불균형에서 생겨나는 인간의 ‘오류 가능성’을 부각시키고 나서, 제2부 2권인『악의 상징론』(symbolique du mal)에서는 이러한 가능성이 구체화된 ‘악’의 현상을 신화와 종교적 상징에 대한 유형론적 분석을 통해 해석한다. 이제 리꾀르는 더 이상 악의 체험을 기술하거나 심리학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언어로 표현된 ‘악의 상징’을 해석하고자 한다. 바로 이 점에서 리꾀르 철학의 ‘해석학적 전환’이 수행된다.
60년대 이후 리꾀르의 해석학적 작업은 두가지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는 한편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현대 해석학을 구조주의, 정신분석학, 현상학, 설명이론, 이데올로기 비판, 분석철학 등의 현대 철학의 방법과 변증법적으로 종합시킴으로써 전통적인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의 틀로부터 해석학의 방법론적 갱신을 추구한다. 다른한편 그의 철학은 ‘언어’(langage) 현상의 해명을 통한 인간의 역사적 실존에 대한 해석을 그 과제로 삼게된다. 본래 실천지향의 기독교 ‘인격주의 운동’(Personalisme)에 깊이 관여했던 리꾀르가 이렇게 사회-정치 철학의 영역을 떠나 기초이론적인 언어중심의 철학에로 전향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프랑스와 독일의 정치 상황에 회오리 바람을 일으켰던 1968년의 학생운동이다. 1956년 부터 빠리의 소르본에서 가르치게 된 리꾀르는 마침내 1966년 신설된 낭떼르 대학(빠리 제10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한다. 미국의 월남전 수행과 드 골의 장기 집권에 반대하는 사회주의 계열 학생들의 중심지인 이 대학에서 정부와 과격파 학생들 사이에서 대학의 자율성을 지키려던 그는 결국 학생들에게 감금되고 만다. 1969년 그는 학장을 사임하고 벨기에 루방(Louvain)대학을 거쳐 시카고 대학에 틸리히의 후임으로 부임한다. 이때부터 그의 철학적 작업은 언어의 창조력에 촛점을 맞추게 된다.
70년대 이후 그의 연구 성과는 1975년의『살아있는 은유』(La métaphore vive)와 1983-85년에 출간된 『시간과 이야기』(Temps et récit) 3부작으로 나타난다. 리꾀르는 이미 그가『악의 상징론』에서 발견했던 상징언어의 ‘다의성’(Polysemie)을 메타포 현상에서 재발견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전통 수사학과 현대 구조주의 수사학이 메타포를 한 단어와 다른 단어사이의 의미의 전이 또는 치환의 관계로 보는데 반하여, 문장 전체 의미의 이중적 지시 관계로 파악한다. 예를 들면 ‘장미꽃’이라는 은유적 표현의 참 의미는 항상 장미라는 꽃의 사실적 의미와 그와는 다른 의미의 긴장속에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리꾀르는 인간 실존의 가장 근원적 지평인 시간성의 수수께끼를 시간적이고 역사적 삶의 언어적 표현인 ‘이야기’(récit; narrative)의 해석을 통해 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행위를 통해 상징적으로 매개(préfiguration)되는 시간 경험은 설화와 민담, 수필과 소설 등으로 구성(configuration)된다. 이렇게 언어로 창조된 의미세계는 그 이야기를 읽는 독자의 정신적이고 정서적 수용에 의해 산출되는 독자들의 행위 속에 또 다시 현실화 된다. 리꾀르는 이러한 언어의 창조적 순환 과정을 이론화하는 해석학의 과제가 바로 “(인간의) 삶과 행위와 고통의 불투명한 기반으로부터 작가에 의해 형성된 작품이 그 작품을 수용해서 자신의 행위를 수정하는 독자에 이르는 전 과정을 재구성”하는데 있다고 선언한다.
3. 리꾀르의 이야기의 해석학: 역사기술과 문학의 교차성
1) 여는말 가다머와 쌍벽을 이루는 현대 해석학의 대가 뽈 리꾀르(Paul Ricoeur, 1913- )는 그의 후기의 대작『시간과 이야기』(Temps et récit I-III, 1983-1985)에서 역사학과 문학의 영역을 포괄하는 하나의 종합적 해석학을 발전시켰다. 우리는 이 해석학을 역사와 문학을 포함하는 가장 ‘넓은 의미의 이야기’를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야기의 해석학’(the narrative hermeneutics)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는 이 책에서 과거의 사실을 기록하는 역사기술(l'historiographie)과 인간의 삶을 상상적으로 묘사하는 문학 작품(la fiction)의 두 영역이 그 근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사실적인 역사기술과 허구적인 문학작품의 공통점은 바로 양자가 각각 상대방의 구성원리를 자신의 구성원리로 빌어오고 있다는 점에 있다.
역사를 기술할 때 역사가는 우선 과거의 사실을 있었던 그대로 재구성 해 내기 위해 과거의 경험적 사실들을 지향한다. 그러나 어떤 역사가도 일어난 사건들을 사실 그대로 모두 기술하지는 못한다. 물론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들의 복잡한 관계를 가능한한 인과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역시 과거의 엄청난 양의 단편적인 자료들을 모두 자연과학적 인과율에 따라 연결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소설가와 같이 일종의 이야기 구성에 의해 역사를 서술한다. 리꾀르는 이러한 이야기 구성의 원리를 상상력에 의해 매개된 ‘유사 허구성’(quasi-fictif)이라고 부른다.
반면에 소설가(또는 시인)는 인간의 실제의 삶을 모방하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이때 소설가는 그의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사실과 일치하는가를 문제 삼지 않는다. 그는 인간 경험의 단편들을 문학적 상상력에 의해 마음대로 재구성하거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순전히 상상에 의한 가상적인 내용을 창작해 낸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비현실적이고 가상의 산물인 문학작품도 마치 사람들이 시공간 속에서, 즉 역사적으로 경험하는 사건인 것처럼 그려진다. 리꾀르는 바로 이러한 문학작품 속의 시간성을 ‘유사 역사(quasi-historique)나 “유사 과거’(quasi-passé)라고 부른다. 리꾀르는 이러한 문학적 허구의 ‘유사 역사성’을 잘 표현해주는 예를 “옜날 옜적에. . ”로 시작되는 민담이나 설화에서 발견한다. 우리는 이러한 옛날 이야기의 정확한 연대나 그 사실 여부를 입증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누군가가 지어냈다고 하더라도 과거에 있었을 법한 사건과 그 교훈을 전해주기 때문에 우리에게 의미를 준다.
리꾀르에 따르면 이렇게 인간의 삶에 대한 서로 다른 문자적 표현방식인 역사기술과 문학작품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상대방의 구성방식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역사책과 소설은 결코 동일시 될 수 없지만 서로의 유사성을 통해 만난다. 리꾀르는 양자의 이러한 운명적인 만남을 “역사와 허구의 교차”(l'entrecroisement de l'histoire et de la fiction)Paul Ricoeur, Temps et récit III. Le temps raconté, Paris 1985, 264. (이하 TR III으로 표기함). 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앞으로 지금까지 언급한 대로 역사 기술이 갖는 ‘유사 허구성’과 문학작품이 갖는 ‘유사 역사성’에 대해 각각 현대의 역사이론과 문학이론의 논의들을 통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리꾀르의 이야기의 해석학의 신학적 함축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리꾀르가 제시한 역사와 허구의 교차적 성격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우리가 이해하고 해석하고자 할 때 어떤 방법적 통찰을 제시해 줄 수 있는가? 이 문제에 적극적인 대답을 줄 수 있다면 리꾀르가 철학자로서 제시한 이야기의 해석학은 리꾀르 자신을 포함하는 성경계시를 믿는 그리스도 신앙공동체를 위한 하나의 기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역사기술의 서사성 우리는 이 장에서 역사기술에서 얼마나 서사성, 즉 문학적 허구의 구성방식이 문제가 되고 있는 가를 현대 역사이론의 전개과정을 요약적으로 설명해 보고자 한다. 먼저 현대의 역사이론 가운데 역사기술의 서사성을 부정하는 입장에는 프랑스에서 발전된 아날 학파(école des Annales)와 C. G. 헴펠(Hempel)에 의해 대변되는 신실증주의 역사이론이 있다.
프랑스 아날학파의 창시자의 한 사람인 마르크 블록(Marc Bloch) 참조: M. Bloch, Apologie pour l'histoire ou Métier d'historien, Paris 1944. 과 대표적 학자인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참조: F. Braudel, La méditerranée et le Monde méditerranéen à l'epoque de Phillppe II, Paris 1949. 은 역사적 특정인물에 의해 좌우되는 정치적 사건을 기술하는데 중점을 두는 정치사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그들의 이론을 출발한다. 그들은 정치적 인물과 관련된 역사적인 중대 사건만을 서술하는 사건의 역사 대신에 경제, 사회, 정치, 문화를 모두 포괄하는 사회전체의 사실(fait social total)을 역사기술의 대상으로 삼는다. 특히 브로델은 이러한 총체적인 역사 기술 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범주로서 수백년 단위의 ‘장기간’(longue durée)을 설정하고 그 기간에 이루어지는 점진적인 문명의 변화를 기술하고자 한다. 그는 사회조직들의 관계와 사회을 움직이는 심층적 경향을 분석함으로써 역사를 설명한다.
두 번째로 논리실증주의의 전통에서 발전된 신실증주의 역사이론은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법칙정립적 모델’(nomological modell)을 제시했다. 이 이론을 대변하는 헴펠은 그의 “역사에서 일반법칙의 기능”(1942)이란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입론을 세웠다: Carl. G. Hempel, 'The Function of General Laws in History', The Jounal of Philosophy, 39 (1942), 35-48. 일회적으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 역시 일반적 가정, 즉 일종의 규칙성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한 입론에 따라 헴펠은 하나의 사건의 성립을 두가지 전제들로부터 도출한다. 만일 경험적 사실에 관한 진술 속에 들어있는 그 사실의 ‘초기조건’을 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조건으로부터 검증가능한 규칙성에 근거한 ‘법칙’(laws)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상의 법칙을 논리적으로 적용하면 마침내 우리는 복잡하게 얽혀딘 사건들의 원인과 결과를 연역해 내고 설명할 수 있다.
역사기술이 단순히 사건들의 연관관계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이 아니라 이야기 구성 방식을 사용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입장이 현대의 역사이론 논의에서 점점더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 역사기술의 서사성을 중시하는 입장에는 프랑스의 탁월한 역사가 뽈 벤(Paul Veyne)과 영미의 분석철학자 A, 댄토(Danto), 그리고 역사학자 W. B.갤리(Gallie), L. O. 밍크(Mink)와 하이든 화이트(Hayden White)등이 있다.
현재 프랑스의 역사학을 대표하는 역사가의 한 사람인 뽈 벤은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와 프랑스의 역사철학자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의 이론을 받아들여 역사기술이 갖는 양면적 성격을 부각시켰다. 그에 따르면 역사기술은 한편으로 문학적 구성 원리인 ‘플롯’(intrigue 또는 plot)에 의해 구성된다. 따라서 모든 사건은 그것이 이야기로 구성되는 한 역사적 지식이 된다. 다시 말하면 역사란 사실들을 단순히 연대 순으로 배열한 것이 아니며 원인, 목적, 우연이 뒤석여 있는 하나의 이야기이다. P. Veyne, Comment on écrit l'histoire, Paris 1971, 46. 더 나아가서 벤은 역사학은 하나의 학문적 ‘방법’(methode)이 아니라 ‘비판’(critique)이나 일종의 ‘범주론’(topique)이라고 주장한다. 역사학은 사실들의 종합을 산출해 내는 규칙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들이 역사를 기술하기 위해 유비적인 관계에서 이끌어 낸 이상형(idealtyp)이 적절한지를 점검하는 ‘발견적’(heuristique) 기능을 갖는다. 따라서 역사학이 사용할 수 있는 논리는 역사의 모든 사실들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단지 가능적 설명만을 제시하는 ‘개연성의 논리’(logique du probable)이다. Paul Ricoeur, Temps et récit I, Paris 1983, 242 (이하 TR I로 표기함).
다른 한편 영미의 분석철학에서도 역사기술에 대한 법칙정립적 모델에 대한 비판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비판은 자연과학의 설명(Erklärung)개념을 역사학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시도를 부정하고 역사기술이 이야기 서술과 일맥상통한다는 관점을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비판의 선봉에 섰던 학자들이 윌리엄 드레이(William Dray) 참조: W. Dray, Laws and Explanation in History, London/N.Y. 1957. 와 핀란드의 폰 브릭(Georg H. von Wright) 참조: G. H. v. Wright, Explanation and Understanding, London 1971. 이 있다. 먼저 드레이는 실증주의적 설명모델에서 추구하는 역사의 법칙성의 개념을 맹렬히 비판하면서 역사적 설명이란 자연과학의 법칙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과적이고 합리적 분석이라고 주장했다. 폰 브릭은 자연과학적 설명과 역사적 설명의 차이를 더욱 명확히 구분했다. 그에 따르면 법칙정립적인 ‘인과적’(causal) 설명은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데이빗 흄(Hume)이 제시한 원칙에 따라 하나의 원인(Explanans)이 어떤 결과(Explanandum)를 일으키는 데 반드시 요구되는 충분조건으로서 작용할 때만이 성립한다. 이와는 달리 역사적 설명은 원인과 결과가 명백한 필요 충분 관계에 의해서만 연결되지 않고 복잡한 동기와 행위들에 의해 매개되므로 일종의 “유사 인과적‘(quasi-causal)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역사기술의 실증주의적 이해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1960년대 이후 영미의 역사학계에는 역사기술의 서사성을 본격적으로 주장하는 이론가들이 등장한다. 이들 중에서 우리는 두 사람의 대표적 이론을 소개할 것이다.
역사기술의 문제를 언어분석에 의해 논구한 댄토(Danto)는 역사를 통해 세계경험이 진술되는 방식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는 역사기술에서 전형적으로 사용되는 과거형의 이야기체 문장과 현재의 지각경험을 기술하는 경험적 진술문장의 차이를 구분한다. 이야기체의 문장은 과거의 사건들을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이후의 사건을 염두에 두면서 쓰여진다. 그러므로 과거의 역사에 대한 진술들은 후세의 역사가에 의해서 계속 수정될 수 있기 때문에 그 본질상 항상 미완결적이다. 그러나 현재의 경험에 대한 진술은 현재 일어나는 현상의 진술에 그치므로 그 다음 사건과의 관계를 함축하지 않는다. 댄토에 따르면 역사가 기술되는 이러한 이야기체 방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설명방식이다. 어떤 역사가가 “X란 사건이 어떤 시점과 다른 시점 사이에 일어났다”고 기술한다면 그는 동시에 사실들 사이의 연관관계를 해명하고 있는 것이다. TR I, 209. 따라서 역사 기술에서는 무엇이 일어났다고 기술하는 것은 이미 그 사건이 왜 일어났는기를 설명하는 것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더 나아가서 역사가 하이든 화이트(H. White)는 아예 단적으로 역사기술이 일종의 문학작품(a literary artifact)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19세기 유럽의 역사적 상상력을 다룬『메타 역사』(Metahistory)라는 작품에서 그는 여태까지 역사학자에게 불문율로 받아들여 졌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학적 허구와 역사사이의 엄격한 구분을 무너뜨린다. 참조: H. White, Metahistory: The Historical Imagination in Nineteenth-Century Europe, Baltimore/London 1973. 그에 의하면 역사기술은 다음 네 단계의 문학적 구성방식의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첫 단계는 가장 단순한 이야기(story)로서 시작, 본론, 결말의 순서로 구성된다. 화이트는 현대의 역사기술들이 이러한 단순한 이야기 형식보다 훨씬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다음 단계는 플롯(plot 또는 emplotment)으로서 역사적 사건들을 네가지의 문학적 유형 - 낭만소설, 비극, 희극, 풍자 -에 따라 재구성하고 설명하는 경향이다. 세 번째 단계는 논증(argument)의 단계로서 여기에도 세계의 사실들을 설명하는 네가지의 범형 - 형식적, 유기적, 기계적, 맥락적 - 에 의해 역사적 사건들의 관계가 설명된다. 마지막으로 그는 역사기술의 문학적 구성에도 역시 이데올로기적 입장들 - 무정부주의적, 보수적, 급진적, 자유주의적 - 이 개입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이렇듯 화이트는 역사기술을 하나의 문학적 에세이의 복잡한 형태로 간주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역사가 얼마나 문학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가의 문제를 현대 역사학의 논쟁을 통해서 살펴 보았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검토를 통하여 역사기술이 갖는 독특성이 바로 자연과학의 기술방법과는 다른 유사 문학적 성격에 기인함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반대의 경우, 즉 문학의 영역은 얼마나 역사성을 전제하고 있는가를 살펴 보기로 하자. 이 물음는 인간이 상상력을 통해 창작해 낸 문학이 얼마나 인간의 역사적 경험과 관계하고 있는 지를 묻는 것이 될 것이다.
3) 문학 작품의 역사성(시간성) 이미 언급했듯이 리꾀르는 역사 기술이 이야기체 구성방식을 통해 문학작품을 모방하듯이 문학작품 역시 이야기 속의 사건들이 “마치 실제로 일어났던 것처럼”(comme si passé) 표현함으로써 역사기술을 모방한다고 본다. TR III, 275. 즉 문학작품은 ‘유사 역사적’ 특성을 통해 실제의 역사에서 억압되었던 인간의 가능성을 독자들이 다시 발견하도록 하는 기능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리꾀르의 입장은 현대 문학이론에서 러시아 형식주의와 프랑스 구조주의에 의해 강력한 반대와 도전에 직면했다. 우리는 이번 장에서 문학 작품의 시간성과 역사성을 부정하는 입장과 긍정하는 입장의 차이를 살펴보고 리꾀르의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을 갖는지 검토해 보고자 한다.
문학작품이 가지고 있는 그 자체의 시간 차원을 부정하고 작품이 서술하는 인간 행위사이의 구조와 기능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입장의 선구로서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자 블라디미르 프롭(Vladimir Propp)을 들 수 있다. 프롭은 그의 대표작 『민담의 형태론』(Morphologie du conte)에서 전해내려오는 여러 가지의 동화나 민담의 구조를 식물학자 린네(Linné)의 식물분류학에서 착상을 얻은 기능적 분류 방식에 의해 분석한다. 참조: V. Propp, Morfologija skazki, Petersburg 1928; 독어판: Morphologie des Märchens, München 1972. 프롭에게는 한작품의 구조란 등장인물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인물들이 수행하는 역할과 기능에 의해 결정된다. 프롭이 제시하는 작품의 기능에는 일시적 퇴장, 금지, 금지의 위반, 문의, 배신, 기만, 도움 등이 있는데 이 기능들은 작품에 나오는 어떤 인물과 관계하는가는 상관없이 전체 이야기의 지속적이고 변하지 않는 구성요소를 제공한다. 프롭은 러시아의 마술민담을 분석한 결과 민담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작품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기능은 31개로 줄일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모든 이야기에서 이러한 기능들의 순서가 동일하다고 파악함으로써 러시아의 모든 마술민담이 구조적으로 하나의 유형에 속한다고 결론지었다. 따라서 프롭의 견해에 따르면 러시아의 모든 민담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야기의 내용이 갖는 이야기 전개상의 시간성과 작품내의 인물들의 행위의 역사적 성격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기능들의 구성원리, 즉 구조의 단일성이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소쉬르(Saussure)의 구조주의 언어학의 기초위에서 프롭의 러시아 형식주의의 민담의 구조기능론은 프랑스의 구조주의 언어학을 태동시켰다. 구조주의 언어학의 한 분야인 이야기의 구조분석(l'analse structurale des récits)에서는 이야기를 가능한한 단순하고 근본적으로 비시간적인 모델로 환원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기호학(sémiotique)이라고도 불리우는 이러한 이론의 대표적 학자에는 롤랑 바르트(R. Barthes)외에 그레마스(A.J. Greimas), 토도로프(T. Todorov), 브레몽(C. Bemond)등이 있다. 구조주의 언어학은 여러 문장들이 결합된 글의 기본 구조는 문장보다 작은 단위의 언어 구조(한 문장의 문법적 구성, 단어들의 의미관계, 음절들의 음성학적 유사성과 차이)로부터 연역해낼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가정에 힘입어 이야기의 구조분석에서는 이야기 전체를 확장된 구조의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야기의 구조는 제한된 수의 구성단위의 관계들의 총합에 다름이 없게 된다. 특히 롤랑 바르트는 이야기의 구성과정을 두 개의 기본과정, 즉 분절(articulation)과 통합(intégration)으로 파악한다. 참조: R. Barthes, 'Introduction à l'analyse structurale des récits', in: Poétique du récit, Paris 1977. 이에 따르면 하나의 이야기에서 이야기가 담고있는 내용의 전개에 따른 시간성과 역사성이 문제되지 않고 오직 통합된 의미가 어떻게 기본 형식으로 분화되고 논리적으로 구성에 따라 재통합되는가의 규칙적이고 병행 대립적인(paradigmatique) 설명방식이 중요시 된다.
구조주의와는 반대로 이야기를 ‘시간과의 놀이’(les jeux avec le temps)로 보는 문학이론이 있다. 주로 독일의 문학비평을 중심으로 발달된 이 이론은 이야기를 ‘서술하는 행위’(Aussageakt; énociation)와 ‘서술된 내용’(Aussage; énoncé)으로 구분함으로써 이야기 속의 사건이 어떻게 플롯에 의해 재구성되어 이야기되는가의 문제를 깊이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이야기 서술행위의 기능은 이야기 속의 행위들의 시간을 실제로 이야기되는 시간속에서 새롭게 재구성하는데 있다. 이야기의 순서적인 배치(disposition successive)는 이야기의 시간적 전개를 문법상의 기본형식의 병행 대립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과거의 동작을 나타내는 현재완료와 상태를 나타내는 단순과거의 연속관계에 의해 순차적 차원에서도 잘 나타내 준다. Paul Ricoeur, Temps et récit II. La configuration du temps dans le récit de fiction, Paris 1984, 93. 이렇게 이야기를 서술할 때의 동사의 시제에 의해 구성되는 이야기의 시간은 동시에 이야기로 구성되기 이전의 본래의 경험의 시간과 이미 구성된 이야기를 읽는 독자의 시간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생생한 시간경험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야기 진술의 시간성의 문제를 깊이 탐구한 문학이론가로 독일의 캐테 함부르거(K. Hamburger) 참조: K. Hamburger, Die Logik der Dichtung, Stuttgart 1957. , 하랄드 바인리히(H. Weinrich) 참조: H. Weinrich, Tempus. Besprochene und erzählte Welt, Stuttgart 1964. , 귄터 뮐러(G. Müller) G. Müller, Morphologische Poetik, Tübingen 1968. 등이 있다. 함부르거가 처음으로 과거시제로 표현되는 이야기의 서술적 시간과 이야기 자체의 시간적 의미를 처음으로 명확히 구분한 후 바인리히는 이야기를 서술하는 시간의 구조가 어떻게 일상적인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속의 체험된 시간을 대치하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뮐러는 더나아가서 문학작품에서의 시간에 대해 더욱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 그는 ‘이야기하는 시간’(Erzählzeit)와 ‘이야기된 시간’(erzählte Zeit)을 구분함으로써 ‘서술하는 행위’와 ‘서술된 의미’의 시간성을 뚜렸하게 부각시켰다. 그에 따르면 ‘이야기하는’ 시간은 과거의 것을 현재화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이야기된’ 시간과 구별이 된다. 더욱이 우리는 이야기할 때 이야기속의 사건의 시간을 균등하게 배치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인위적으로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은 오래동안 이야기하고 중요하지 않은 부분은 서술에서 단 몇마디로 혹은 아예 빼버리기도 한다. 따라서 작품내의 이야기된 시간은 양적으로 계산되는 무의미한 시간의 연속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지시해 주는 질적이고 특별한 시간이다. 이러한 두 종류의 시간사이의 긴장관계에서 문학적 작품의 시간성과 역사성이 형성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문학작품이 갖는 시간성(역사성)을 배제하는 문학이론과 문학작품이 갖는 이중적 시간성을 제시하는 문학이론을 리꾀르의 관점에서 짧게나마 설명해 보았다. 아무리 역사기술이 과거의 사건에 대한 엄격한 이론적 설명이고자 해도 거기에는 문학적 구성의 성격이 개입되는 것처럼 형식주의나 구조주의가 작품내의 시간성을 배재한 채 언어형식이나 구조를 통해 작품을 이해하려는 노력 역시 인간의 역사적이고 시간적인 삶과 연결되어 있는 문학작품의 근본적 성격 때문에 불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기술과 문학작품이 갖는 교차적 성격을 리꾀르와 함께 인정하고자 한다. 우리는 추상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이야기의 해석학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서 이 글을 매듭지으려 한다.
4) 닫는 말
리꾀르의 이야기의 해석학은 역사기술과 문학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두종류의 형식이 서로의 구성원리를 차용하고 있음을 밝혀준다. 일종의 역사기술로 볼 수 있는 성경의 부분도 문학적 구성방식에 힘입어 기술되었고 문학적 성격이 강한 성경의 부분들도 인간경험의 시간성과 역사성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리꾀르의 이야기의 해석학을 통해서 성경의 역사성을 철저히 인정하면서도 역사 자체가 갖는 ‘유사허구’(quasi-fictif)적 차원 때문에 문학적 방법을 적용하여 성경을 해석할 수 있으며, 반대로 문학작품의 성격을 인정하면서도 문학이 갖는 ‘유사 역사’(quasi-historique)성에 근거하여 그 역사적인 사실을 지시하는 기능(reference)을 드러낼 수 있다. 즉 리꾀르의 이야기의 해석학은 성경의 이해를 위해 서사적 방법과 역사적 방법이 상호 보충적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다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가다머, 『진리와 방법 I』, 문학동네 하머마이스터, 『한스-게오르크 가다머』, 한양대학교 출판부 조지아 윈키,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 사상사 폴 리쾨르, 『악의 상징』, 문학과 지성사 폴 리쾨르, 『해석이론』, 서광사 폴 리쾨르, 『해석의 갈등』, 아카넷 폴 리쾨르, 『시간과 이야기 1』, 문학과 지성사 폴 리쾨르, 『시간과 이야기 2』, 문학과 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