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며 돈 벌수 있다’...전남-충남 300명 동원 겨우 돌아 온 고국에선 ‘정신대’ 손가락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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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고야 미쯔비시 도토쿠 공장에 위치한 도난카이지진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 당시 이 공장에서 근무한 무라마츠(오른쪽)씨가 당시 희생된 조선인 소녀들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 |
| “다시는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이 자리에 진실을 새깁니다.”
일본 나고야시 미쓰비시 중공업 도토쿠(道德) 공장 한 켠에 새겨진 한 조선인 희생자들의 위령비다. 옛 명성과 달리 미쓰비시 도토쿠 공장은 의외로 낡고 허름한 건물들이었다. 12~14세 어린 조선인 소녀들의 꿈과 청춘을 앗아간 60여년 전의 역사도 조용히 세월과 함께 잠들어 있었다.
양금덕(광주.76)씨 등 아직 앳된 조선인 소녀들이 일본 교장의 말에 속아 일본 땅을 밟은 건 1944년 5월경. 일제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노동력을 조달하기 위해 징병, 징용, 노무자, 정신대 등의 명목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끌어가기 시작했다.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 돈도 벌고 상급학교에도 진학시켜 준다는 말은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소녀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일부는 뒤늦게 부모에게 들켜 상황을 돌려보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헌병이 대신 부모들을 연행해 가겠다고 위협하고 나선 상황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차역은 어린 딸과의 생이별에 허겁지겁 달려온 부모들의 아우성과 울부짖음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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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고야 성 앞에 선 근로정신대 모습. 왼쪽 끝이 당시 나주초등학교 교사이고, 오른쪽 끝은 야마조에 산뻬이 사감. |
| 나주 대정 초등학교에서만 이렇게 24명이 일본인 교장과 담임선생의 말에 속아 일본으로 끌려갔다. 모두 12~14세 소녀들이었다. 광주, 나주, 목포, 순천 등 전남에서 141명, 충남지역에서 138명 등 300여명의 앳된 조선 소녀들이 낯설고 이름도 모르는 나고야의 미쓰비시 군용항공기 제작소에 강제동원 된 것이다.
공부도 하고 배고픔도 달랠 수 있다는 기대는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작업은 주로 비행기의 페인트칠에 투입됐다. 독한 화학약품 때문에 일본인이 기피하고 있던 작업이다. 10시간이 넘는 중노동을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었지만 그날의 허기조차 달랠 수 없었다. 물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돈 한 푼 손에 만져보지 못했다.
“한창 클 나이인데 제대로 먹지도 못해 항상 배고파했습니다. 어느 날 한 소녀가 하도 배가 고팠던지 남이 먹다 버린 것을 주워다 먹은 적이 있었는데 일본 관리인이 그걸 목격했습니다. 남들 앞에서 심하게 매를 때리고, 지저분한 애라고 손가락질까지 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무라마츠(77)씨의 증언이다. 당시 그는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녀들과 함께 이 공장에서 근무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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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라마츠씨가 1944년 당시 미쯔비시 도토쿠 공장 배치도를 놓고 근로정신대의 노역 실태를 설명하고 있다. |
| 그러던 1944년 12월 7일 오후 1시 30분경, 귀청을 울리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지축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이치현 서부에 위치한 도시 나고야 일대를 강타한 도난카이 지진이었다. 규모 8.0의 이 강진으로 최소 1,223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지진피해로 최정례씨 등 이 공장에서 일하던 조선인 소녀 6명도 함께 희생됐다. 방공호로 급히 대피했지만 천정이 무너져 내리면서 매몰되고 만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도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봉건적 유교의식이 뿌리 깊게 남아있던 시절, 또 다른 시련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 다녀왔다는 이유 하나로 오가던 혼담이 깨지기 일쑤였고, 결혼을 했더라도 정상적인 가정을 꾸려간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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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쯔비시사는 대만과 중국의 희생자를 인정하면서도 조선인 희생자에 대해서는 끝까지 이를 감추려 했다. |
|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마치 군 위안부인 것처럼 이들을 오해했고, 외도와 폭력으로 차갑게 외면했다. 몇몇 할머니들은 황혼기에 접어들어서까지 이혼을 당했으며, 60여년이 넘는 세월이지만 아직까지 자식들한테 마음 속 한과 상처마저 털어놓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피가 끓어오른다”는 김혜옥(76)씨는 지금도 병마와 시름중이다.
1988년 12월 다카하시 마코도(62)씨 등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애쓰는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단체 회원들이 당시 희생된 조선인 소녀들의 명복을 빌며 이 위령비를 세웠다. 위령비 제막식 현장을 찾은 당시 피해자들도 죽은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며 가슴속 어린 한을 목 놓아 부르짖었다.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회’ 근로정신대 진실규명 위해 18년째 발 벗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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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까하시 마코도 지원회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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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여년이 넘은 세월을 뛰어넘어 일제 군국주의의 식민지배를 단죄하기 위한 외로운 투쟁이 일본 나고야 법정에서 벌어지고 있다. ‘나고야 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이 그것이다.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는 지난 1999년 일본 내 시민단체의 도움에 힙 입어 원고 7명의 이름으로 나고야 지방법원에 일본과 미쓰비시 회사를 상대로 이 소송을 제기했다.
반세기도 훌쩍 넘긴 이 사건이 다시 역사의 심판을 받기까지는 일본의 한 역사교사의 노력이 적지 않다.
다까하시 마코도(高橋 信.63)씨는 역사교사로 재직중이던 지난 1986년 전쟁관련 한 조사과정에서 처음 이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미쓰비시 회사를 통해 당시 희생자들의 명단을 확인하고 진상규명 작업에 뛰어들었다.
미쯔비시 도토쿠 회사 경비실에 비치된 출입자 명부는 그와 고이데 유타카(小出 裕.64)씨 등 주변 인사들이 이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해 얼마나 발품을 들였는가를 엿보게 한다. 낡은 표지의 빛바랜 출입대장은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비실에서는 그들을 위해 18년째 내려온 출입대장을 따로 비치해 두고 있다. 그의 답은 “몇 번이나 방문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도난카이 지진희생자 위령비의 내막도 남다르다. 애초 희생자는 6명중 5명의 신원확인은 가능했지만 그중 1명은 일본 이름으로 개명돼 있었다. 조선인 본명을 찾아주겠다고 결심한 이들은 1988년 위령비에 이름을 새기면서도 5명과 달리 미처 확인이 안 된 성명불상의 이 희생자 옆에 빈 자리를 남겨뒀다. 그때부터 광주와 전남을 방문하기를 12년째. 드디어 한 초등학교에서 당시 희생자의 한국인 본명을 확인했다. 한 희생자의 제 이름 석자를 찾아주겠다는 그들의 각별함이 다시 한번 묻어나는 대목이다.
7년여를 끌어온 나고야 지방법원은 지난 2월 한일협정을 이유로 소를 기각했다. 원고단은 이에 반발, 다시 고등법원에 항소했고 내년 3월경 2심 선고가 이뤄질 예정이다. 뜻을 같이 하는 일본인 변호사 30여명이 지금까지 공동변호단을 꾸려 활동해왔고, 다카하시씨는 이 소송을 ‘지원하는 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지원회’는 이 소송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 마련을 위한 각종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1천여명의 회원이 스스로 자비를 털어 연회비 3천엔(한화 3만원가량)을 내고 있으며, 지난 8월에는 ‘그 소녀들을 잊을 수 없다’는 제목으로 나고야 한 문화극장에서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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