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가? 그분은 죄인에게 왜 찾아 오셨나? 그분은 죄인과 무슨 상관이 있기에 십자가의 죽으신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셨는가?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 단지 죄인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그분을 알아가는가? 그분이 도대체 누구시길래.
찬송가에 이런 가사 내용이 실려 있다.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예수를 닮기 원함이라, 예수의 형상 나 입기 위해 세상의 보화 아끼잖네. 예수를 닮기 내가 원하네 날 구속하신 주예수를, 내 마음 속에 지금 곧 오사 주님의 형상 인치소서."
'주님의 형상 인치소서...' 죄인이 예수님을 알아간다는 의미가 죄와 오물투성이인 죄인의 심령에 주님의 형상이 인침을 받았음을 성령으로 알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은 죄인의 세상에 주님의 형상인 곧 '그리스도의 형상'을 십자가를 통해 제대로 보여주셨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예수님의 언약의 피를 통해 재해석되어 지지 않고 다른 것으로 대체해서 이해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는다면 그분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형상'인 십자가의 피 안에 담긴 복음의 내용 외에는 아무 것도 받기를 원치 않으신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수님을 죽인 죄와 허물, 곧 자기애착과 자기고집과 자기기만과 자기자랑과 자기 육망과 자기 심령의 폐부에서 올라오는 헤아릴 수 없는 거짓과 자기의 죄로 만든 육의 가면 뒤에 숨겨진 자신의 본 모습의 얼굴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담아서 성령으로 내어 놓아야 한다.
죄인의 죄의 덩어리를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약속의 피를 통해 매일 같이 하나님 앞에 성령으로 주님의 믿음안에 갖고 나와야 한다. 그리스도의 형상인 십자가의 복음이 성도의 심령에 긍휼과 자비로 인침을 받았음을 주님의 믿음으로 고백함으로 하나님과 은혜의 관계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십자가의 복음으로 고백되어지는 은혜의 신앙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진리의 성령안에 알아가는 출발이요, 세상의 그 어떤 보화보다 소중하고 귀함을 십자가의 부정된 자리에서 고백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고후 4:4, 개정)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