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국의 뿌리, 3.1운동을 기획한 선구적 실천가
1919년 2월초 비밀임무를 띤 몇 명의 청년들이 중국 상하이를 떠나 조선 각 처(경성, 평양 등)와 일본 도쿄로 향합니다. 이들의 임무는 조선의 민족인사들과 도쿄의 조선유학생들에게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독립청원을 위해 김규식을 파견해다는 사실을 알리고, 조선인들이 독립을 원하고 있음을 세계에 알리는 궐기운동을 도쿄에서 2월초에, 조선에서는 3월초에 실행하도록금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노력으로 2월8일 도쿄유학생들은 독립선언을 발표합니다. 2.8독립선언서는 국내에서 궐기를 준비 중이었던 민족인사들에게 전해지고, 2.8독립선언 때 모인 도쿄유학생 600명 가운데 359명이 조선으로 들어와 이후 벌어질 만세운동의 선두에 서게 섭니다. 드디어 3월1일 경성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1년여에 걸친 전국적인 만세운동이 벌어집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으로 시작합니다. 대한민국 건국은 3.1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3.1운동을 촉발시킨 청년들, 그들은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당원들이었습니다. <신한청년당>은 1918년 1월 미국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 선언 이후 전개된 식민지 해방의 세계 흐름에 주체적으로 대응하고자 중국 상하이에서 만든 당입니다. 이 당의 대표이자, 청년들의 리더로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이를 뒷받침할 거족적인 궐기를 기획한 사람이 바로 몽양 여운형입니다.
일제를 제압한 정의의 웅변가
3.1운동에 충격을 받은 일제는 그 배후핵심인물인 몽양을 같은 11월 도쿄로 불러들입니다. 회유를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당시 34세의 몽양은 논리적이고 당당하게 일본의 고관대작들을 오히려 주눅들게 했습니다.
식민지 정책을 책임졌던 고가(古賀) 척식국장관은 몽양과의 회담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의 의지에 나는 동의한다. 내가 만일 조선에서 태어났다면 나도 그대와 같이 했을 것이다. 만일 뜻대로 되지 않으면 조선총독부에 불을 질렀을 것이다. 나의 계책
이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대에게 높은 경의를 품고 있다”
1919년 몽양 여운형 모습
일본군의 총수로서 몽양을 위압하려했던 다나카 육군대상은 “조선인이 독립운동을 기획하는 것은 오히려 오늘날의 시세를 볼 때 당연하지 않은가?”라며 오히려 몽양의 도전정신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동경제대 요시노(吉野)교수는 “여 씨의 말에는 확실히 한가지 범하지 못할 정의의 섬광이 있다. (중략) 중국, 조선, 대만 등 많은 사람과 회담했으나 교양 있는 존경할 만한 인격으로서 여운형 씨는 가장 뛰어난 사람임을 단언한다” 라며 몽양을 격찬했습니다.
1919년 11월27일 오후3시 도쿄제국호텔.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밝힌 몽양 여운형의 웅변을 듣고 감동한 일본사람들의 박수갈채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이 웅변에 감명 받은 일본의 좌익 지도자들은 몽양을 환영하는 만찬을 열었으며, 이들은 몽양의 연설을 듣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조선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빛나는 성과로 평가받는 몽양의 일본 방문 독립선전활동! 조선의 독립을 일제의 수도에서 당당하게 외친 몽양의 사자후는 일본인들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고, 몽양을 회유하려다가 자신들의 수도를 조선 독립의 선전장으로 만들어준 꼴이 된 일본 정계는 큰 혼란에 빠집니다.
제국의 콧대를 꺽어 버린 조선의 청년. 그가 바로 몽양 여운형이었습니다.
한 시대를 껴안은 조선의 거인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몽양은 폭넓은 행보를 하고, 그의 특출한 능력은 자연스럽게 세계적인 혁명가들과 교류를 가능케 했습니다. 중국 상하이에서 3.1운동을 도모할 당시 중국의 지도자였던 손문과 만났으며, 미국 윌슨 대통령의 특사를 만났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운 뒤에는 당시 조선의 독립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소련의 지도자 레닌, 트로츠키 등을 만났습니다. 모두 조선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로서 만났던 것입니다.
1921년 모스크바 극동피압박인민대회에 참석한 몽양 여운형 (좌측 높은 의자 앉은)
그러나 몽양의 활동이 자기편에만 국한됐던 것이 아닙니다. 몽양은 일제의 고위인사들과도 친분을 맺고 있었습니다. 몽양은 그들을 만나 진정한 동양평화를 위해 조선의 독립이 필수적임을 역설했고, 몽양을 만났던 일본 인사들은 몽양의 범접하기 어려운 정의감과 시대를 꿰뚫어보는 통찰력 그리고 사람들을 품는 포용력에 감복하며, 비록 식민지의 인물이고, 적국의 지도자였으나 교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1936년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 도쿄 유학생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