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세금마차 습격 봉기 현장 사진과 투쟁 내용입니다.
경주세금 마차습격을 위해 묵었던
광명리 동네로 추정된장소
광명리 동네로 추정된장소
무열왕능을 지난 광명리 방향 국도
광복단원이 묵었던 주막거리추정
오르막길 고개 길
도로에서본 동네모습
도로에서본 동네모습
경주세금마차 무장봉기 (1915년 12월)
대한광복단은 일제가 불법으로 한국을 강점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것에 반대하여 일제가 우리 백성에게서 징수한 세금을 빼앗아 독립군의 군자금으로 사용하려고 하였다.
일제의 우리 백성에 대한 불법세금징수는 우리 민족으로서는 천부당만부당한 처사라고 봤고, 이 세금을 탈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민족으로서는 정당한 처사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대한광복단(회)에서는 총사령관 박상진 지휘하에 세금탈취를 도모하였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915년12월 어느 날, 우재룡이 박상진에게 암호로 된 전보를 보내 모종의 정보를 알려왔다. 박상진이 참모장 권영만을 불렀더니 마침 전보를 친 우재룡도 와서 동석하였다. 우재룡이 말하기를 “1915년 음력11월17일(동지. 양력12월23일)에 경주, 영일, 영덕 등, 세 고을에서 거둔 세금을 수송하는데 이 돈은 왜놈들이 부당하게 징수한 것이니 우리가 빼앗아서 군자금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금수송수단은 우편마차인데 몇 대인지 예측 할 수 없으나 헌병경찰의 호위가 있을 것을 확신한다고 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 세금을 탈취하기로 결정하고, 현장지휘는 전투경력이 많은 권영만이 맡고, 참가할 단원은 의병출신을 중심으로 우재룡이 조직하기로 했다.
협의한 그날이 음력 열나흘이니까 3일 남은 셈이었다. 박상진의 지휘에 따라 우재룡이 무기를 준비하였다. 권총1정, 구식양총 3자루, 화승총 2정이 전부였다. 투쟁에 참가할 단원이 모두 8명이니까 우재룡을 제쳐놓고도 1사람 분의 총이 모자라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는 공격장소를 어디로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가능한 한 세금수송마차의 목적지로 알려진 대구에서 먼 곳이 좋다고 판단해서 경주의 광명리(현 광명동)부근으로 정했다. 현장을 답사하고 나서 작전을 짤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그곳 지리에 밝은 박상진과 약도를 그려가면서 작전을 짰다.
상세한 방침은 현장에 도착한 후에 세우기로 하였다. 음력 16일 새벽에 8명의 광복단원이 상덕태상회를 출발했다. 모두가 보부상 차림이었고 무기는 상품으로 위장해서 지고 길을 재촉했다. 저물어서 광명리에 도착하여 주막에 들었다. 저녁도 먹지 않고 우재룡은 어디엔가 다녀와서 우편마차가 지나갈 시각을 알았노라고 한다. 9시반 쯤에 지나가게 될 것이라고 모두에게 알려주고 일찌감치 자리에 들었다. 이튼 날 아침에 나가서 몸을 숨겨가며 고개에 올라 권영만의 지시에 따라 숲속에 몸을 숨기고 총을 손질하면서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1915년12월22일 음력으로는 11월17일 동짓날 아침 9시반경에 드디어 세금수송마차가 나타났다. 누군가 속삭이는 “왔다” 하는 소리와 함께 저 아래 고개 밑의 길모퉁이를 돌아서 마차가 나타났다. 한 대 뿐이다, 앞자리에 마부와 나란히 호휘병 한사람이 앉아있었고 마차 안에는 사람이 타고 있는 듯하였다. 경사 때문에 마차가 느려지니 마부가 내려 말의 고삐를 잡아끌자 경비병도 내렸으며, 마차 안에서 두 사람이 더 내려 함께 마차를 밀어주었다. 전원 4명에 경비원 3명이니 예상보다 경비원이 적었다. 마차는 점점 가까워졌고 눈 앞의 굽이 길을 돌때 권영만의 사격명령이 떨어졌다. 동시에 6정의 총구에서 불을 뿜었다. 마부와 경비원 모두가 즉사했다. 말도 쓰러졌다. 우재룡을 선두로 마차 안을 뒤져 보니, 돈은 모두 8천 7백원 생각보다 적었으나 작전은 성공하였다.
*주) 기록에는 세금마차 습격사건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왜놈들이 본 입장에서 "사건"이고 우리는 주권회복을 위한 무장봉기이므로 우리는 이를 "경주세금마차 습격 무장봉기"라고 소개합니다.
2012.3.22.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