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7년 - 왕건출생
889년 - 상주에서 원종과 애노의 난이 일어남.
원종, 애노 등이 사벌주에서 반란하자 왕이 나마 영기 에게 명해 사로잡게 했는데 영기는 도망가고, 촌주 우련은 전사. 이에 영기를 죽이고 우련의 10살 난 아 들을 촌주에 임명.
- 이후 본격적으로 전국에서 농민반란 일어남. 이런 혼란의 와중에 아자개가 사불성(상주)을 근거지로 장군을 칭하였다. .
- 서남의 해변을 지키던 견훤은 예하의 병력을 이끌고 독립함. 1개월 사이에 5천 명의 무리가 모임
892년 - 양길이 궁예에 군사를 나누어 줘서 궁예로 하여금 동쪽으로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이에 치악산 석남사 에 나와 머물면서 酒泉(주천-영월), 奈城(나성-영월), 鬱烏(울오-평창), 御珍(울진) 등 명주 관내의 여러 군 현을 습격해 모두 항복 받았다.
- 견훤 나이 27살 때 무진주(광주)를 습격하여 왕이 되었으나 감히 왕이라 일컫지는 못하였다.
895년 - 궁예가 저족, 성천, 부약, 금성, 철원 등 장악. (865년 철원의 도피안사의 향도들은 석가가 입적한 후 1806년이 되었음을 슬퍼하며 불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지역 하층농민들은 강한 말세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미륵불이 하생하는 이상세계의 도래를 대망 하고 있었을 것이다.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듯)
- 궁예, 僧嶺, 臨江을 점령. 궁예, 스스로 왕을 칭하 며 내외관직을 설치.
- 신라, 서남쪽에 ‘적고적’이라는 도적들이 경주의 서부 모량리까지 침략.
896년 - 왕륭, 왕건 부자 궁예에 귀부.
898년 7월 - 후고구려 궁예, 浿西道 및 한강주내 30여 성을 취하고 송악부에 본거를 옮김. 紅巖(김포군 양주), 金浦 (김포), 穴口(강화) 등 30여성을 점령.
899년 7월 - 북원의 양길, 국원(충주) 등 10여 성주를 시켜 궁예를 공격하다가 非惱城에서 대패.
900년 - 견훤 완산(전주)에 도읍하고 백제라는 국가를 건설함.
10월 - 궁예, 왕건을 보내어 광주(경기), 충주, 청주, 당성(경기 남양), 괴양(충북 괴산) 등의 지역을 평정. (경기 남부와 충북 지역 장악) 이러한 공이 인정되어 왕건을 아찬으로 삼음. 이후 이 지역에서 궁예(왕건)의 세력권에 편입된 인물로는 진천의 임명필(왕건 즉위 후 순군부령), 임희(병부령)과 청주출신의 김언규(백서성경), 근겸, 관준, 능달 등이고, 광주의 왕규, 충주의 유긍달은 왕건과 혼인관계를 맺음. (왕건이 정벌한 지역의 호족들이 왕건의 세세력으로 편입된 예이다. 물론 이때는 궁예의 부하였다.)
901년 8월 - 견훤, 금성(나주)군 남쪽의 10여개 주현 공략.
- 견훤이 대야성(합천)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견훤은 신라의 목을 죄기 위해서 낙동강 동안에 이르는 최단 거리인 합천 루트를 이용하고자 했다. (진훤이라 불러다오)
903년 3월 - 후고려 왕건, 錦城(현 나주) 등 10여성을 공격 점령 함. 금성의 명칭을 나주로 고치고 군대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귀환. 나주는 전남의 심장부이자 경제적 요충 지로 당의 선진문물을 접근키 용이하였다 더구나 유학생, 선승들이 들어오는 길목으로서 왕건은 실제로 당 에서 귀국하는 선승들과 교류했고 그 가운데 형미는 왕건이 철원으로 회군할 때 함께 돌아오기도 했다. 영산강 하구에 위치한 나주 회진은 중국 대륙으로 가는 중요한 항구였던 것이다.
- 양주(良州 -경남양산) 장수 김인훈이 급히 구원을 요청하매 궁예가 왕건에게 명하여 구하게 함.
904년 - 궁예, 국호를 후 고구려에서 마진으로 연호를 무대 라 함.
- 패서도 10여 주현이 왕건에게 투항함.
7월 - 공주장군 홍기가 궁예에게 귀부하면서 궁예의 세력권이 금강 유역까지 미치게 되었다. (진훤이라 불러다오)
905년 8월 - 마진, 신라의 변경 읍락 침탈. 신라 왕은 이를 막아내기 역부족이라며 성주들은 나가 싸우지 말고 성벽을 지키라고 명함.
906년 4월 - 왕건(30세), 정기장군 금식 등을 인솔하여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사화진(상주)을 공격, 견훤과 여러번 싸워 이김. 이에 경북 상주(당시 상주는 루트가 교차하는 요충지), 문경, 영주 등 낙동강 이북 지역이 마진의 땅이 되었다. 이 지역은 조령과 죽령 등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의 경주로 이어지는 길목으로 낙동강 상류 지역의 중심권이었다. 이후로 나주를 확실하게 위해 궁예의 왕건 부대와 견훤 부대는 해상전을 자주 벌리게 된다.
907년 - 후백제, 일선군(선산) 이남 10여성을 빼앗음. 이 전투는 낙동강 중류를 끊어 놓는 전략상의 개가였다.
909년 - 왕건, 궁예가 나날이 포악해지자 지방 군무에 뜻을 두었는데 마침 궁예가 왕건에게 나주를 지킬 것을 명령, 관등을 높혀 한찬 해군대장군에 임명. (이때부터 독자적 세력 형성 시작)
- 왕건, 염해현(영광)에 머물렀다가 오월에 보내는 후백제 使船을 나포.
- 궁예, 왕건에게 명하여 정주(경기도 풍덕)에서 전함들을 수리.
910년 - 견훤이 나주에서 왕건에게 패함. 왕건은 알찬 종희, 김언 등을 부장으로 삼아 군사 2천 5백을 거느리고 진도군을 가서 치게 하여 함락시킴. 다시 진격하여 皐夷島 (고이도) 점령. 다시 나주 포구에 이르러 견훤의 함대와 격전. 풍세를 타 화공으로 격퇴. 견훤, 작은 배로 도주. 나주에 진을 둠.
- 견훤은 금성이 궁예에게 투항한 것에 분노해 보병과 기병 3천 명으로 금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였으나 열흘이 지나도록 결말이 나지 않았다. (삼국사기)
911년 1.1 - 궁예는 다시 왕건을 무진주로 출정시켰다. 왕건의 선단이 뭍에 올라 나주를 경유, 광주 땅으로 진격한 것이다. 그러나 견훤의 사위 지훤이 굳건하게 방비한 성으로 잘 물리쳐 싸웠다. (세종실록 지리지)
912년 4월 - 후백제 견훤, 궁예의 군대와 덕진포에서 싸움.
914년 - 왕건, 백선장군이 되어 수군을 거느리고 나주에 출진. 백제인들과 해상의 도적들이 감히 준동하지 못함. 이 해에 왕건은 후백제로부터 해상권 위위를 위해 100척의 선박을 더 건조하였다. 이 배들중 큰 전함 십수 척은 사방이 각각 16보인데 갑판 위에는 망루를 만들고 병마가 달릴 수 있도록 했다.
916년 8월 - 후백제, 신라의 대아성 침공. 그러나 이기지 못하였다.
918년 6월 - 고려건국. 왕건, 궁예에 반기를 들고 고려를 건국. 궁예의 세력을 제거하였다. 기병장군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에게 추대할 뜻을 말하려 하면서, 부인 유씨에게는 이 일을 알리지 않으려고 동산 안에 새 오이가 있을 것이니 그것을 따오라고“하였다. 유씨가 그 뜻을 알아차리고 북쪽 문으로부터 나가서 몰래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왕건이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자, 부인 류씨가 손수 갑옷을 들어 왕건에게 입혔다.
- 마군장군 환선길의 역모. 선길은 그 아우 향식과 함께 왕을 추대한 공이 있어 왕건이 심복으로써 위임하여 왕궁을 숙위케 하였었다. 그의 아내가 ‘당신의 능력이 남보다 뛰어나 사졸이 복종하고 큰 공이 있는데 정권은 다른 람에게 있으니 부끄럽지 않냐’고 하자 선길이 마음 속으로 그 말을 옳게 여겨 틈을 엿보아 변란을 일으키려고 하니, 복지겸이 이를 알고 비밀히 왕건에게 아뢰었다. 왕건은 형적이 드러나지 않아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느 날 왕건이 전전상에 앉아서 학사 두서너 사람과 국정을 의논하고 있는데 선길이 50명의 병사를 이끌고 내정으로 쳐들어왔다. 왕건이 ‘짐이 비록 너희들의 힘으로써 왕이 되었지만 어찌 천명이 아니랴. 천명이 이미 정해졌는데 네가 감히 그럴 수 있느냐’고 호통을 쳤다. 선길이 왕의 말과 얼굴빛이 평시와 같이 침착해 보이자 복병이 있는가 의심하여 달아났는데 숙위하던 군사가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 향식은 뒤에 오다가 일이 실패한 것을 알고 도망가다가 역시 군사가 추격하여 죽였다다. (고려사절요)
- 마군 대장군 이흔암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단. 그는 궁예 말년에 웅주를 쳐 빼앗았으므로 그대로 그 곳을 지키게 하였는데 왕건이 즉위한 소식을 듣고 몰래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 부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떠나오니 사졸들이 많이 도망해 버렸으므로 웅주가 다시 후백제의 소유가 되어버림. 이흔암의 이웃에 사는 수의형대령 염장이 태조에게 고변. 왕건이 “흔암이 제 마음대로 와서 변경의 땅을 잃었으니 죄는 실로 용서하기 어려우나 나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왕건과과 대등한 지위?) 왕을 섬겨 그전부터 정분이 있으니 차마 죽일 수 없으며, 또 반역의 형적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저도 변명할 말이 있을 것이”라 하 자, 염장이 흔암을 엿보기를 청해 왕건이 은밀히 내인을 보내 감시하던 중, 흔암의 처 환씨가 변소에서 ‘남편의 일이 성취되지 못하 면 나는 화를 받을 것이다’라고 중얼거린 것이 발각되어 드디어 하옥됨. 왕건이 꾸짖기를 “법이란 것은 천하의 공정한 것이므로 사정으로써 법을 굽힐 수 없다”하니 흔암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저자에서 목베게 하고 집을 적몰하였으나 그 도당들에게는 죄를 캐묻지 않았다. (고려사절요)
- 청주의 호족 세력은 이해관계에 따라 심한 내분을 겪으면서 왕건에게 협조한 문식, 명길, 김근겸, 관준, 김언규 등의 세력과 능달, 견금 등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왕건은 청주인들의 변란에 대비하기 위해 명길, 문식, 능달을 청주에 보내어 동태를 살피고 오게 하였다. 이에 능달은 청주인들이 딴 마음이 없다고 보고하여 청주의 영군장군으로 있었던 견금 등의 재지 세력과 이해를 같이 하고 있었고, 문식과 명길은 청주인들이 모반의 뜻이 있음을 상경종사하고고 있었던 청주인 김근겸, 관준, 김언규에게 말하면서부터 두 세력은 서로 상대방을 모함하고 대립하게 되었다. 왕건은 그들이 서로 모함하는 것을 용서하고 회유, 무마하는 한편 마군장군 홍유와 유금필로 하여금 1500명의 병사를 청주 부근의 鎭州에 보내 변란에 대비토록 하였다.
8월 - 웅주(공주), 운주(홍성) 등 10여개 주현이 모반하여 백제에 붙음.
9월 -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 고려의 귀부.
- 순군리 이춘길 등 모반. (복지겸이 고변한 사건임) 이춘길은 청주인으로 동향의 배금규, 계천(전남 장흥)인 경길 아차, 매곡(충북 회인)인 경종과 모반함. 이에 그 당을 모조리 목베려 하였는데, 청주인 현률이 아뢰기를 경종의 누이는 매곡성주 공직의 처이고 그 성이 매우 견고하고 백제에 인접해 있으므로 공직이 반드시 반할 것이니 회유하라고... 그러나 결국 처형되고 맘. 이에 매곡성주 공직이 견훤에게 투항하였다.
- 왕건은 평양을 대도호부로 하고 당제(4촌동생)왕식렴과 열평을 보내어 평양을 수비케...
10월 - 견훤의 조종으로 청주의 帥 파진찬 진선이 그의 아우 선장과 함께 반역을 꾀하다가 죽음을 당함. 견훤은 파진찬 진선과 선장 형제 등 궁예 계열의 호족들 포섭하면서 왕건 정권의 전복을 원격 조종하였다. (진훤이라...)
920년 3월 - 고려, 유금필에게 명하여 북계의 ?巖鎭(골암진)에 축성. 북방 오랑캐에게 자주 침략을 당해서...
9월 - 후백제, 아찬 공달을 고려에 보내어 孔雀扇, 竹箭을 선물. 이것은 신라 침공을 앞두고 고려를 무마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각되어 진다.
10월 - 후백제 견훤, 기병 1만명을 이끌고 대야성(합천), 구사성(초계-창원)를 공취하고 신라의 진례군(김해 서북방)에 출진. 이에 신라는 아찬 김률을 보내 처음으로 고려에 원병 요청. 그 소식을 듣고 견훤이 물러감. 견훤은 35세 나에도 함락시키지 못했고 초로인 50세 때에도 공격했다 실패했던 대야성을 노인이 되어서야 쟁취한 것이니 감회가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후로 고려와 틈이 생겼다는 것은 그간 호의를 보여왔던 왕건에게 자신의 공격의도를 보인 것이며 또한 이제까지의 단순한 국지전이 아닌 앞으로의 전면전 양상으로 바뀌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진훤이라 불러다오)
923년 4월 - 고려 유금필, 북번을 招諭(초유). 귀부한 자가 1천 5백명이고, 사로 잡혀간 우리 나라 사람 3천명이 돌아왔다.
924년 7월 - 견훤은 오랜 침묵을 깨고 경상도 북부 지역으로 출병을 단행, 아들 수미강과 둘째 아들 양검으로 하여금 대야성(합천)과 문소성(경북 의성) 등 두 성의 군대를 동원하여 조물성을 공격하였다. 여기서 수미강은 견훤의 총애를 받던 금강으로 생각 되어진다. 이에 왕건이 장군 애선과 왕충을 보내 이를 구원하게 했으나 고려 장군 애선이 전사. 조물군 사람이 굳게 성을 지켜 수미강 등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감.
- 거란 아보기 발해 침공.
925년 - 고려, 정서대장군 유금필을 파견하여 백제의 영향권에 있던 연산진(문의-청주)을 쳐 장군 길환을 죽이고, 任存郡(임존성-예산)을 공략해 3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음.
- 왕건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조물군에 와서 견훤과 교전. 유금필이 군사를 이끌고 와 응원. 견훤과 인질 교환. 이 때에 견훤의 군사가 날래어 승부를 결단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에 왕건은 일시적으로 화친하여 견훤의 군사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려고 글을 보내서 화친할 것을 요구하고 종제 왕신을 인질로 보내니 견훤도 역시 진호를 보내서 교환했다. (삼국유사) 이때 고려는 신라와의 화친을 깨고 신라와 동맹을 맺은 댓가를 톡톡히 치루었다. 이 조물성 전투에서서 왕건은 크게 불리하여 견훤에게 화해를 청하여 우선 견훤을 尙父라고 칭하여 존대하고 자신의 조카인 왕신을 인질로 보냈다. (신호철) 이때 왕건이 견훤을 군영에 불러들여 일을 의논하려고 하니 유금필이 사람의 마음은 알기 어려우니 어찌 가벼이 적과 서로 가까이 하겠냐고 간해 왕건이 그만 두었다. 신라 경애왕이 이 소식을 듣고 사신을 파견하여 ‘견훤은 화친할 사람이 못된다’고 함.
12월 - 후백제, 거창 등 20여성 공취. 화친으로 북군(고려군)을 묶어둔 견훤은 남군(백제군)군대를 이끌고 거창 등 20여개 성을 일거에 점령했다. 기세를 올린 견훤은 즉각 후당에 사신을 파견, 후당에서는 그에게 검교태위 겸 시중판백제군사면도통지휘병마판치등사 백제왕이라 하고 식읍 2,500호를 주었다. - 삼국유사
926년 4월 - 갑자기 고려에 인질로 간 견훤의 外甥 진호가 병사하였다. 이에 발끈한 견훤이 고려의 인질 왕신을 죽이고 웅진으로 진군하자, 왕건이 여러 성들에게 명령하여 성을 고수하고 나와 싸우지 못하게 하였다. 그 결과 웅주, 운주 등 충남 일대 10여개 주현과 충북 일대가 후백제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7월 - 발해의 103성, 모두 거란에 점령됨. (발해 멸망)
927년 1월 - 왕건이 친히 후백제의 용주(경북 예천) 침공하자 신라도 지원병 보냈다. 왕건은 용주를 얻게 됨으로써 소백산맥 이남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자 견훤은 특유의 화해 제스처를 취했다. 진호의 죽음에 대한 앙갚음으로 처형했던 왕신의 시신을 정중히 돌려보낸 것이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북군의 공세가 심화되었다. 한편 이 무렵 남군과 북군의 전장이 형성된 곳은 내포 지역이었는데 이곳 관련된 합덕지의 합덕방죽은 견훤이 군사와 말에 물을 먹이기기 위해 조성했다는 전설인 내려온다. 이것은 그의 농업 경영에 대한 안목과 더불어 당시 남군의 주둔이 둔전 형식(현지에 주둔하는 군대의 식량을 자급자족하게 하고 군량미 비축을 통해 주변 호족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임으로 이탈을 막음)을 띄었음을 전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견훤이 지금의 원주시 문막에 성을 축조하였고 둔병들이 왕건의 군대를 맞아 싸웠다는 조선화여승람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진훤이라 불러다오)
3월 - 후백제 근암성을 왕건에게 빼앗김.
- 왕건이 운주(충남 홍천)로 쳐들어가 성주 긍준을 성 밑에서 격파하였다. (긍준은 이후에 고려에 투항, 936년 왕건이 신검을 칠 때 대상 벼슬을 하고 있었다.)
- 운주를 공격한 지 3일 후에 왕건이 직접 근암성을 함락시켰다.
4월 - 고려는 해군 장군 영창, 능식 등을 시켜 수군을 거느리고 가서 후백제의 강주(진주) 공격하였다. 원정군은 전이산(남해), 노포평(서산), 돌산(순천) 등 4개 향을 함락시켰다.
- 왕건이 웅주(공주)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함.
7월 - 고려, 애선과 원보 재충이 대야성을 공격하여 그 성의 장군 추허조를 사로잡았다. 견훤은 당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문경 일원에 병력을 집중 배치하여 북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있었다. 문경은 견훤에게는 결코 빼앗길 수 없는 땅이었다. 그러나 김락이 등이 끄는 북군이 후백제의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곧 고사갈이성의 성주인 홍달은 북군에게 속속 넘어가는 주변 정세에 편승하여 항복하였다. 홍달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파견된 후백제 관리들마저도 일제히 투항했했다. 이로서 북군은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거대한 수운로를 확보하여 병참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후에 후삼국의 진운을 결정짓는 고창전투를 승리 왕건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도 문경 지역 장악에서 비롯된 수운 교통로 확보에 힘입었다고 볼 수 있다. -진훤이라 불러다오
- 명주 장군 순식이 아들 장명을 보내 군사 600명을 거느리고 들어와 숙위.
8월 - 후백제의 고사갈이성(문경시 문경읍) 성주 홍달이 고려에 귀부.
- 고려군이 배산성(문경시 호계면)에 주둔.
9월 - 견훤이 近品城과 경주에 근접한 高鬱府(고을부-영천) 공격. 신라왕이 연식을 보내어 고려에 구원 요청하였다. 왕건이 시중 공훤, 대상 손행, 정조 연주에게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홍달의 투항에 분노한 견훤은 계립령로 (문경일대) 주변의 탈환과 보복을 위해 출정했고 근암성을 공격, 불 태운 후 빠른 속도로 남하해 고울부(영천)로 진격했다. 남군은 문경 쪽을 공격하였지만 기실은 성동격서 전략으로 전광석화처럼 남하하여 신라의 도성에 바바짝 다가선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는 남군의 신속한 이동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훤이라 불러다오)
- 후백제 견훤, 신라의 왕경에 침입. 경애왕을 자살케 하고, 경순왕을 세웠다. 또한 친고려인사들인 국상 김웅겸(왕건을 신라에 초빙하려 했던 인물), 아찬 김률, 연식 등을 제거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때 끌려간 王弟 효겸과 재상 영경도 친고려 인사들이었을 것이다. * 이것은 의자왕에게 했던 행주(行酒)의 보복이다. 이후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된 신라는 잔인무도한 견훤에게 신라를 넘길 수 없다하여 인자한 왕건에게 신라를 넘기게 되는 것이다. 결결국 백제와 신라는 3백년 간격으로 망해 버리고 만다.(풀어 읽는 우리 신화에서 “행주” 견해) * 견훤이 의자왕의 원한을 갚고 백제 부흥을 내세웠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방민들의 호응을 얻기 위한 대의명분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것은 견훤이 무진주를 점령하고도 공공연히 청왕하지 못한 것으로도 알 수 있는데, 견훤은 한낱 신라의 지방을 통치하는 지방관임을 내세웠고, 그것은 그가 대외적으로 후백제왕을 자칭하고 設官分職 등 정치체제를 수립립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외교(중국과 일본)관계에서도 신라 지방관의 지위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왕건과 주고 받은 문서에서도 (당시 견훤정권은 막강한 군사력 -경애왕을 참하고 공산전투에서 승리했을 당시에도- 을 가지고 신라에 압력을 가하고 있던 시기) 견훤은 신라에 대해 자신들은 군신관계임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 이것은 왕건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다고 함. 결국 견훤이 경주에 침공한 목적은 신라를 병합하기 위한한 것이라기 보다는 국상 김응렴을 통해 고려와 결합하여 견훤정건에 대항하려는 경애왕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애왕은 박씨왕으로 신라왕실 내에서 김씨 진골 왕족들의 도전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견훤은 박씨왕을 제거하고 김씨왕을 세운다는 대의 명분을 내세워 신라 내의 김씨 왕족으로부터 경주침공의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왕위계승 서열상 신덕왕보다 앞에 있던 효종의 아들 김부, 경순왕을 왕위에 옹립한 것이며 때문에 경순왕은 견훤에 의해해 옹립되었으면서도 별다른 반발없이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신호철) * 견훤의 신라 침공은 역시 신라의 멸망이 아니라 친고려주의자 경애왕의 제거에 있었다. 당시 박씨왕이었던 경애왕은 김씨 진골귀족들에게 또한 불만이었고 견훤의 침공당시 김씨 진골들에게 모종의 협조를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에 고려 구원군이 채 당도하기도 전에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장면은 견훤의 군대가 포석정에까지 이르렀을 때도 유흥은 계속되었다.. <동사강목>에는 “경애왕은 호위군사가 없자 다급한 김에 손수 병풍으로 가리고 광대 1백여 명으로 막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황급히 이궁으로 달아나 숨었으나 곧 군사들에게 잡혀와 견훤의 강요에 의해 자결해 죽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견훤에 의해 아비규환이 되었던 신라의 궁정을 신라인들은 잊지 못하였고 결국 경애왕의 친고려정책은 고려가 한반도 통일의 승자가 되었으므로 혜안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 당시 견훤은 궁중으로 들어가 억지로 왕비를 강간했다고 하는 기록을 역사서들은 한결같이 남기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 자결을 강요했던 견훤이 과연 그와 같은 금수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었을까? 하여간 이 일로 인해 견훤은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입게 되는데 아마도 이것은 견훤을 악인으로 만들기 위해 조작된 사건일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본다. (진훤이라 불러다오)
- 공산전투. 왕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제. 친히 정예한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공산 동수(대구)에서 견훤과 전투. 견훤의 군대가 왕건을 포위하여 사태가 위급해지자 신숭겸과 김락이 힘을 다해 싸우다가 희생되고 왕건은 단기로 도망하였다. * 견훤에게 패한 왕건이 군대를 이끌고 공산 밑의 한 조그마한 봉우리를 보존하고 있는데 이곳이 태조지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 고려 태조가 진훤과 더불어 물을 사이에 두고 대진해서 화살이이 수중에 쌓였다. 그래서 이곳을 살내라 부른다. 태조는 신숭겸의 시신에 머리가 없자 목공에게 명하여 머리와 얼굴을 새겨서 만들게 하고 의복을 갖추어 입힌 후 후하게 장례를 치뤄 주었다. (증보문헌비고) * 신숭겸은 용모가 왕건과 흡사하였으므로 왕건을 대신해 죽고자 했다. 그리하여 왕건으로 하여금 깊은 숲 속에 숨도록 하고는 자신이 왕인 것처럼 어차를 타고 나가 싸우다 전사했다. (대동운부군옥. 평산신씨고려태사장절공유사) * 신숭겸의 시신은 그의 왼쪽 발발에 있는 북두칠성 모양의 검은 사마귀를 보고서야 찾았다.(동사강목) * 남군이 신숭겸의 머리를 베어 차에 꽂아 가져갔다. (대동운부군옥)
- 견훤, 기세를 타 신라의 大木郡(대목군-안동지방) 침공하여 곡식들을 불살랐다.
10월 - 견훤, 고려의 벽진군(성주)을 공격하여 대목, 소목(칠곡) 두개 군의 곡식을 베어감. 고려 장군 索相(색상)이 전사. * <증보문헌비고>에는 칠곡 조에는 왕봉이라는 지명의 유래있는데 이것은 견훤에게 쫓기던 왕건이 이곳에 숨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928년 1월 - 명주 장군 김순식이 조현하러 옴. (고려가 위기에 빠진 상황이었기 때문) 왕건이 왕씨의 성을 내려주고 대광을 임명. 아들 장명에게는 염이란 이름을 내려주고 원보를 임명. 小將 관경에게도 역시 왕씨성을 내려주고 대승을 임명.
- 후백제의 남군이 강주를 공략하자 북군의 원윤 김사과 정조 직량 등이 구원하러 병력을 이끌고 출동하였으나 후백제 남군의 성주 흥종이 초팔성(초계)을 통과하는 북군을 급습하여 고려의 김상을 전사시킨다. (진훤이라 불러다오)
2월 - 고려, 대상 염상과 능강을 보내 안북부에 성을 쌓고 원윤 박권으로 진두를 삼아 개정 군사 700명을 거느리고 이를 지키게 함.
4월 - 운주의 옥산에 성을 쌓고 지키는 군사를 둠.
5월 - 강주 원보 珍景(진경) 등이 고자군(경남 고성)에 양곡을 운반하여 강주가 빈 사이에 견훤이 강주를 기습하였다. 진경 등이 급히 돌아와 싸웠으나 패배하고 300명 전사. 장군 유문은 후백제에 귀부.
7월 - 왕건이 몸소 삼년산성(충북 보은)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해 청주로 도망했다. 이에 견훤이 장수를 보내 청주를 침공하였다. 이때 유금필이 명을 받들고 탕정군에 성을 쌓고 있었는데 꿈에 한 대인이 말하기를 “내일 서원에서 변란이 있을 것이니 빨리 가라”고 하였다. 금필이 놀라 깨어 바로 청주로 달려가 후백제 장수와 싸워서 이를 패배시키고 추격하여 득기진에 이르러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300여명이었다. (절요)
8월 - 왕건, 충주로 감. 그 때 견훤이 관흔을 시켜 양산에 성을 쌓았기 때문에 왕건은 명지성(포천) 원보 왕충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양산을 쳐서 패주케 함. 관흔은 퇴각하여 대야성을 확보하고 군사를 풀어 대목운의 벼를 베었다. 또 그 다음에는 오어곡에 군사를 나누어 주둔하니 죽령 길이 막히었다. 이에 왕건이 왕충등에게 명령하여 조물성의 형세를 정찰케 함. * 이때 견훤의 남군이 유독 대목군 등의 벼를 베었던 것은 벽진군의 장군인 이총언이 양식을 비축하여 고립된 성에서 잘 버텼기 때문으로 전투에 임하지 않는 데에 대한 보복이자 고사책이었다. 이후로 남군은 계속 북상하여 오어곡에 주둔함으로써 죽령의 길을 막았다. (진훤이라 불러다오)
10월 - 견훤이 부곡성을 함락시킴.
11월 - 후백제, 고려의 烏於谷城(오어곡성-군위)을 공격해 고려군 1천명을 죽임. 장군 陽志, 明式 등 6인이 탈출하여 항복. 왕건이 그 소식을 듣고 군사들을 구정에 모아 놓고 6명의 처자들을 그 앞에서 조리를 돌리고 저자에서 사형시킴.
- 이 해에 고려 태조 북계에 순행하여 진국성을 옮겨서 쌓고, 통덕진이라 고침. 원윤 충인으로 진두를 삼음.
929년 초 - 후백제가 나주를 점령하였다. 나주는 바닷길로 통하는 길이었고 왕건의 처향(妻鄕)이기도 하였던 만큼 고려측에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로서 후백제는 서해의 재해권까지 지배해나갔다. -진훤이라 불러다오.
3월 - 고려, 대상 염상을 보내 안정진에 성을 쌓고, 원윤 언수고로서 이를 지키게 하며, 또 영청현에 축성함.
7월 - 견훤이 갑사 5천명을 이끌고 의성부 침공. 고려 장수 홍술 전사. 이에 태조는 나의 좌우의 손을 잃었다고 개탄하였다. * 후백제가 의성부를 점령하게 되면 고려와 신라의 연결통로가 봉쇄되는 동시에 고려의 영향권인 문경, 예천, 안동, 영주 일원이 그 남부의 요지인 의성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럼에 따라 이들 지역은 상호간에 횡적인 연결은 가능하지만 종적인 연결이 불가능하여 각개격파되기 십상이었다.
- 견훤이 순주(안동시 풍산면)을 치니 장군 원봉이 도망.
9월 - 왕건이 剛州(경북영주)로 갔다. 왕식렴을 보내 안수진에 성을 쌓고 원윤 흔평으로 진두를 삼고, 또 흥덕진에 성을 쌓고 원윤 아차성으로 진두를 잡음.
10월 - 견훤이 장차 고사갈이성을 치려하니, 성주 흥달이 이를 듣고 나가 싸우려고 할제, 목욕하다가 갑자기 오른팔 위에 滅자가 있음을 보았는데, 그 후 10일만에 병들어 죽음. * 그 곳을 함락시켰는지는 기록에 없으나...
- 견훤이 신라의 가은현(문경군 가은면)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함. 비록 이기지는 못하였으나 그 위세가 가히 압도적이었다. 남군은 절대 우세를 자랑하면서 북군을 연파해왔고 이때까지 후백제 영역은 북쪽으로는 충청남도 당진에서 충북 청주, 보은, 충주로 이어지는 선이었다. 그리고 소백산맥 이남으로는 합천을 위시해 대구, 칠곡 그리고 의성을 지배하에 두었고, 그 밖에 낙동강 서안의 진주를 비롯 경남지역을 석권하였다. 이와 더불어 대외 교섭의 걸리돌이었던 나주를를 장악하여 이로써 후백제는 호남지역을 완전히 석권하게 된 것이다. (진훤이라 불러다오)
12월 - 후백제 견훤, 고창군(현 안동) 포위. 이에 김선평, 권행, 장길 등 고창 재지세력이 결사항전으로 성을 지켰다. 왕건이 예안진에 이르러 여러 장수와 의논하기를 “싸우다 이기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는가”하니, 대상 공선과 홍유가 아뢰기를 “마땅히 샛길로 갈 것이요, 죽령으로 갈 수는 없”다고 함. 유금필은 “죽 을 마음만 가지고 살려는 계책이 없어야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인데 먼저 패배할 것을 염려함은 무슨 까닭인가. 만약 급히 구원하지 않으면 고창군 3천여명을 그냥 적에게 주는 것이니 급히 공격하기를 원한다”고 해 왕건이 그 말을 따랐다. 이에 유금필이 저수봉으로부터 힘껏 싸워서 크게 이겼다. (절요)
930년 - 안동 병산 전투. 태조가 견훤과 더불어 古昌郡(고창군-안동) 병산 아래에서 싸워 크게 이겼으며, 죽이고 잡은 성과가 매우 많았다. 견훤은 고창군(안동부)을 치려고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석산에 영채를 마련하니 왕건은 백보 가량을 격해서 고을 북쪽 병산에 영채를 마련했다. 여러 번 싸웠으나 견훤이 패하여 사랑 감악이 사로 잡혔다. * 현지 전설에 견훤 (진훤-지렁이 설화) 이 전세가 불리해지면 지렁이로 변해 모래 속으로 기어들어가 고려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이에 고려의 삼태사는 전략을 세워 물 속에 소금을 수없이 풀어 견훤은 배겨낼 수 없어 패주했다는 것이다. (진훤이라 불러다오) * 전투가 계속 될 무렵 이곳 호족인 성주 김선평과 권행 그리고 장길, 이 세 호족이 향군을 이끌고 북군을 지원했다. 현지 민심의 향배에 직접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지세에도 밝은 이들이 북군에게 협조했다 것이다. 권행은 과거 견훤이 경애왕을 시해했다는 이유로 고려에 귀순하여 치욕을 씻으려 한 것이라 한다. 그럼에 따라 견훤의의 남군은 지극히 불리한 국면에 놓이게 되었고 저녁 무렵에 남군은 붕괴되어 남군의 전사자만 8천 명에 달할 정도로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한다. 오대산 상원사 동종은 북군이 승리한 사실을 청아한 소리로 알렸다 한다. (진훤이라 불러다오)
- 병산 전투 다음 날에 견훤이 고창군에 장수를 보내 순주를 공격 함락하고 민가를 약탈해 갔다고 고하자, 왕건이 순주로 가서 그 성을 수리하고 장군 원봉에게 책벌을 줌. * 순주성 습격은 견훤의 상주 지역(아버지의 배신)에 대한 보복감을 엿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왕건의 경우는 첨해하게 입장을 달리한다.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가 상주 지역을 지킨 것이다.(신호철)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930년 고창전투에서 패전한 견훤이 퇴각하면서 오히려 북쪽에 있는는 순주를 공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납득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사실의 여부는 모른다 (진훤이라 불러다오)
- 永安(영천), 河谷(하양), 直明(안동), 松生(청송) 등 30여 군현이 차례로 왕건에게 항복. * 이후 견훤의 후백제는 고려에 급격히 전세가 불리하게 바뀌어 간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견훤 정권 내의 정치적 혼란에 기인한 것이었다. 즉 견훤왕의 후계를 둘러싼 내분이 이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이후로 호족들은 왕건에게 흡수되어 갔고 신라 정부는 새로운 질서에 순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순왕은 고려의 고창 전투 승리에 대한 축하를 보내오고 신라와 고려는 본격적으로 서로 교류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신호철)
- 이 때에 신라의 동쪽 연해 溟州(강릉)에서 흥례부(안동)에 이르기까지 110여성이 고려에 항복.
- 북미질부성(경북 홍해) 성주 훤달이 남미질부성 성주와 함께 고려에 항복.
9월 - 개지변(울산)에서 최환을 보내어 고려에 항복하기를 청함.
932년 6월 - 후백제 장수 공직(매곡성 성주), 고려에 투항. 견훤은 공직의 두 아들과 딸 하나를 잡아서 다리 힘줄을 지져서 끊었다. (삼국유사) * 공직의 고려 귀부는 견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매곡성은 중요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또한 공직이 고려로 귀부한 것은 자신의 고을 보전이라는 현실적 이해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후에 공직이 왕건에게 “일모산군은 경계가 저의 고을과 인접해 있어 제가 귀화한 까닭으로 항시 침략을 일삼아 백성이 생업에 안정하지 못하므로 일모산성을 빼앗아.... 다스리겠습니다”하자 왕건이 허락했다고 한다. (진훤이라 불러다오)
7월 - 공직의 부추김으로 왕건의 북군은 일모산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 왕건이 태자 무를 보내 북쪽 변경을 순찰하게 함.
9월 - 후백제, 일길찬 상귀를 시켜 수군을 거느리고 고려의 예성강으로 쳐들어와 염주, 백주, 정주 등 세 고을의 배 100척을 불사르고 저산도 목장에 있는 말 3백필을 약탈하였다. 견훤은 일모산성 공격에 대한 보복전을 계획하여 염주(황해도 연안), 백주(황해도 배천), 정주(개성 풍덕)를 친 것이다.
10월 - 복수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견훤의 해군 장수 상애 등이 대우도(평북 용천)을 공격하게 하였다. 곧 왕건이 대광 만세 등을 보내 대우도를 구원하려 했으나 이기지 못해 (후백제는 고려군의 해군력을 궤멸시키고 서해의 재해권을 완벽하게 장악하였다) 왕건이 근심하였다. 이에 유금필이 곡도에서 글을 올리기를 “신이 비록 죄를 짓고 귀양 중에 있으나 후백제가 우리 해변 고을을 침공했다는 말을 듣고 신이 이미 장정을 뽑아 전함을 수리하여 이를 막으려고 하오니 임금께께서는 근심하지 마시기를 원합니다”하였다. 왕건이 이 글을 보고 울면서 “참소를 믿고 어진 사람을 쫓은 것은 내가 밝지 못한 탓이다” 하고 사자를 보내 불러와서 위로하기를 “ 경은 실상 죄가 없는데도 귀양간 것을 일찍이 원망하지 않고 오직 나라를 도울 것만 생각하고 있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고 뉘우치는 바이다. 후사에까지 상을 미치게 하여 경의 충성과 절의에 보답하겠다”고 함. (절요)
933년 5월 - 후백제 신검, 혜산성과 아불진을 공략하였다.
- 정남 대장군 유금필이 의주부를 지키는데, 왕건이 “후백제가 혜산성과 아불진 등을 약탈한다고 하니, 만약 신라의 국도에까지 침공하거든 마땅히 가서 구원하라”하였다. 이에 유금필이 장사 80명을 뽑아 달려가 사탄에 이르러 후백제 신검 등을 만났는데, 후백제 군사들이 유금필의 군사가 날래고 용맹한 것을 보고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무너졌다. 유금필이 신라에 이르니 백성들이 울면서 절했다. 7일만에 경주에서 돌아올 때 다시 신검을 자도에서 만나 싸워서 크게 이이겼다. 유금필이 돌아와 왕건을 뵈니 왕건이 궁전에서 내려와 그를 맞이하여 손을 잡고 치하했다. (절요)
934년 9월 - 노인성이 나타남. 남극성의 다른 이름으로 수성이라고도 한다. ‘사기’천관서에는 “남극성이 나타나면 평안부사하고 남극성이 출현하지 않으면 전쟁이 발생한다”라고 하였다.
- 왕건, 운주(충남 홍주) 정벌.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갑사 5천명을 이끌고 이르러 “양편의 군사가 서로 싸우니 형세가 양편이 다 보전하지 못하겠소. 무지한 병졸이 살상을 많이 당할까 염려되니 마땅히 화친을 맺어 각기 국경을 보전합시다” 하였다. 왕건이 여러 장수들과 의논하니 유금필이 “작금의 형세는 싸우지 않을 수 없사오니, 임금께서는 신 등이 적군을 부수는 것만 보시고 근심하지 마소서”하였다. 견훤이 진을 치기 전에 강한 기병 수천명으로 돌격하여 3천명의 목을 베고, 술사 종훈, 의사 훈겸과 장수 상달, 최필을 사로잡았다. 이 소식을 듣고 웅진 이북 30여성이 제풀에 항복함. (절요) * 이 운주성 싸움은 견훤 자신이 주도했던 일생일대의 마지막 전투였다.
- 웅진 이북의 30여개 성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935년 3월 - 견훤, 아들 양검과 용검의 정변으로 금산사에 유폐됨.
4월 - 고려의 유검필이 나주를 정벌함. 이때 유검필에 의해 장악된 나주는 곧 견훤의 탈출로로 사용이 되는데, 견훤의 고려 귀부는 견훤의 의사타진과 고려에 공작에 의해 치밀하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려는 견훤의 탈출로로 나주를 선택하고 그곳을 정벌한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 진훤이라 불러다오.
936년 6월 - 고려, 견훤의 요청에 따라 후백제 신검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 우선 태자 무와 장군 희술을 시켜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천안부로 가게 함. * 왕건이 후백제를 치기 위한 전진기지로 천안을 선택한 것은 교통의 요로 임은 물론 당시 의탁했던 풍수지리설과 관련이 없지 않다. 또한 바로 전주로 직공하지 않고 천안을 거쳐 선산으로 내려간 것을 신검 군대를 기만하기 위한 양동작전으로 보는 시각도 있고 낙동강을 병참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다. (진훤훤이라 불러다오)
9월 - 후백제군 일선군(선산)의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군에 참패당함. 고려 태조(60세), 삼군을 거느리고 천안부에 병력을 합세하여 일선군(경북 선산)으로 나아가니 신검이 무력으로 이에 대항하였다.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북과 남군은 진을 쳤다. 왕건, 견훤과 함께 군사들을 사열하여 군사가 총 8만 5천명이었는데 당시 견훤은 박술희 등과 함께 마군, 즉 기병 1만 명을 지휘하였다. 이외에 왕건의 북군은 능달이 지휘하는 보병 1만 명을 좌강에, 홍유 등이 지휘하는는 기병 1만 명 삼순 등이 이끄는 보병 1만 명을 우강으로 삼았으며 김순식과 긍준, 왕렴, 왕예 등이 지휘하는 기병 2만 명, 유검필 등이 이끄는 흑수, 달고, 철륵 출신의 기병 9천 5백 명, 정순 등이 이끄는 보병 1천 명, 종희가 지휘하는 보병 1천 명, 김극종이 이끄는 보병 1천 명을 중군으로 삼았다. 또 공훤이 이끄는 기병 2백명 등 10만 대군이라 일컫을 만했다.
- 군사를 정비한 후 북을 치며 진군하니 갑자기 창검 형상으로 된 흰 구름이 고려 군사가 있는 상공에서 일어나 백제 쪽으로 떠갔다고 한다.
- 백제 좌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 등 4명이 창을 버리고 견훤이 타고 섰는 말 앞에 와서 항복함. 이에 적측의 사기가 저상되어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 왕건이 효봉 등을 위로하고 신검이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이 말하기를 신검이 중군에 있으니 좌우로 들여치면 격파할 수 있다고 하였다.
- 왕건이 대장군 공훤에게 명령하여 고추 적측의 중군을 향하여 삼군과 함께 일제히 나가면서 맹렬하게 공격하니 적병이 크게 패함. 백제 장수 흔강, 견달, 은술, 금식, 우봉을 비롯하여 3천2백명을 사로잡고 5천7백명을 죽였다.
- 백제군사들은 창끝을 돌려 저희들끼리 서로 공격하였다.
- 고려 군사, 황산군까지 이르렀다가 탄령을 넘어 마성에 주둔하였다.
- 결국 신검이 아우들인 청주(경남진주) 성주 양검, 광주 성주 용검과 문무 관료들을 데리고 와서 항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