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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무한 (전문)
산정무한(山情無限)
정비석
내금강 역사(驛舍)에 도착.
어느 외국인의 산장을 그대로 떠다 놓은 듯이 멋진 양관(洋館) 외금강 역과 아울러 이 한국식 내금강 역은 산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무한 정다운 호대조(好對照)의 두 건물이다. 내(內)와 외(外)를 여실히 상징한 것이 더 좋았다.
십삼야월(十三夜月)의 달빛 차갑게 넘실 거리는 역 광장에 나서니, 심산(深山)의 밤이라 과시(果是) 바람은 세찬데, 별안간 계간(溪澗)을 흐르는 물소리가 정신을 빼앗을 듯 소란하여 추위는 한층 뼈에 스민다. 장안사(長安寺)로 향하여 몇 걸음 걸어가며 고개를 드니, 산과 산들이 병풍처럼 사방에 우쭐우쭐 둘러선다. 기쓰고 찾아온 바로 저 산이 아니었던가고 금새 어루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힘껏 호흡을 들여마시니, 어느덧 간장(肝臟)도 청수(淸水)에 씻기운 듯 맑아 온다. 청계를 끼고 물소리를 즐기며 걸어가기 십 분쯤, 문득 발부리에 나타나는 단청(丹靑)된 다리는 이름부터 격에 어울려 함부로 건너기조차 외람된 문선교(問仙橋)!
문선교! 어느 때 어떤 은사(隱士)가 예까지 찾아와서 선경(仙境)이 어디냐고 목동에게 차문(借問)한 고사라도 있었던가? 있을 법한 일이면서 깜짝 소문에조차 듣지 못한 것은, 역시 선경과 속계(俗界)가 스스로 유별(有別)한 탓이었던가?
차문주가하처재(借問酒家何處在)
목동요지행화촌(牧童遙指杏花村)은 속계의 노래로, 속계에서는 이만하면 풍류객이었다. 동양류의 선경이란 풍류객들이 사는 고장을 일컬음이니, 선경과 속계는 백지 한 겹밖에 아닐 듯이 믿어지니, 이미 세진(世塵)을 떨치고 나선 몸이라 서슴지 않고 문선교를 건너기로 하였다.
이튿날 아침, 고단한 마련해선 일찌감치 눈이 떠진 것은 몸이 지닌 기쁨이 하도 컸던 탓이었을까. 안타깝게도 간밤에 볼 수 없던 영봉(靈峯)들을 대면(對面)하려고 새댁 같이 수줍은 생각으로 밖에 나섰으나, 계곡은 여태짙은 안개 속에서, 준봉(峻峯)은 상기 깊은 구름 속에서 용이(容易)하게 자태를 엿보일 성싶지 않았고, 다만 가까운 데의 전나무, 잣나무 들만이 대장부의 기세로 활개를 쭉쭉 뻗고,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것이 눈에 뜨일 뿐이었다. 모두 근심 없이 자란 나무들이었다.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하늘을 향하여 밋밋하게 자란 나무들이었다. 꼬질꼬질 뒤틀어지고 외틀어지고 한 야산(野山) 나무밖에 보지 못한 눈에는, 귀공자와 같이 기품(氣稟)이 있어 보이는 나무들이었다.
조반(朝飯) 후 단장(短杖) 짚고 험난한 전정(前程)을 웃음경삼아 탐승(探勝)의 길에 올랐을 때에는, 어느덧 구름과 안개가 개어져 원근(遠近) 산악이 열병식(閱兵式)하듯 점잖이들 버티고 서 있는데, 첫눈에 비치는 만산(萬山)의 색소는 홍(紅)! 이른바 단풍이란 저런 것인가 보다 하였다. 만학천봉(萬壑千峯)이 한바탕 흐드러지게 웃는 듯, 산색(山色)은 붉은 대로 붉었다. 자세히 보니, 홍만도 아니었다. 청(靑)이 있고, 녹(錄)이 있고, 황(黃)이 있고, 등(登)이 있고, 이를테면 산 전체가 무지개와 같이 복잡한 색소로 구성되었으면서, 얼른 보기에 주홍(朱紅)만으로 보이는 것은 스펙트럼의 조화던가?
▲ 내금강에서 첫번째로 만나게 되는 장안사. 신라 23대 법흥왕때 창건 ⓒ 2012 한국의산천
복잡한 것은 색(色)만이 아니었다. 산의 용모는 더욱 다기(多岐)하다. 혹은 깎은 듯이 준초(峻痒)하고, 혹은 그린 듯이 온후(溫厚)하고, 혹은 막잡아 빚은 듯이 험상궂고, 혹은 틀에 박은 듯이 단정하고 . 용모, 풍취가 형형색색인 품이 이미 범속(凡俗)이 아니다.
산의 품평회(品評會)를 연다면, 여기서 더 호화로울 수 있을까? 문자 그대로 무궁무진(無窮無盡)이다. 장안사(長安寺) 맞은편 산에 울울창창(鬱鬱蒼蒼) 우거진 것은 다 잣나무 뿐인데, 모두 이등변삼각형(二等邊三角形)으러 가지를 늘어뜨리고 섰는 품이, 한 그루의 나무가 흡사히 괴어 놓은 차례탑(茶禮塔) 같다. 부처님은 예불상(禮佛床)만으로는 미흡(未洽)해서, 이렇게 자연의 진수성찬(珍羞盛饌)을 베풀어 놓으신 것일까? 얼른 듣기에 부처님이 무엇을 탐낸다는 것이 천만부당(千萬不當) 한 말 같지만, 탐내는 그것이 물욕(物慾) 저편의 존재인 자연이고 보면, 자연을 맘껏 탐낸다는 것이 이미 불심(佛心)이 아니고 무엇이랴. 장안사 앞으로 흐르는 계류(溪流)를 끼고 돌며 몇 굽이의 협곡(峽谷)을 거슬러 올라가니 산과 물이 어울리는 지점에 조그마한 찾집이 있다.
다리도 쉴 겸, 스탬프북을 한 권 사서, 옆에 구비된 기념 인장을 찍으니, 그림과 함께 지면(紙面)에 나타나는 세 글자가 명경대(明鏡臺)! 부앙(俯仰)하여 천지에 참괴(慙愧)함이 없는 공명(公明)한 심경을 명경지수라고 이르나니, 명경대란 흐르는 물조차 머루르게 하는 곳이란 말인가! 아니면, 지니고 온 악심(惡心)을 여기서만은 정(淨)하게 하지 아니하지 못하는 곳이 바로 명경대란 말인가! 아무러나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찻집을 나와 수십 보를 바위로 올라가니, 깊고 푸른 황천담(黃泉潭)을 발 밑에 굽어보며 반공(半空)에 외연(巍然)히 솟은 절벽이 우뚝 마주 선다. 명경대였다. 틀림없는 화장경(化粧鏡) 그대로였다. 옛날에 죄의 유무(有無)를 이명경에 비추면, 그 밑에 흐르는 황천담에 죄의 영자(影子)가 반영되었다고 길잡이는 말한다.
▲ 영롱하고 구슬같은 수면에는 사면의 침봉이 비치고 보는 이로 하여금 숭고한 느낌을 갖게하는 명경대 ⓒ 2012 한국의산천
명경! 세상에 거울처럼 두려운 물건이 다신들 있을 수 있을까! 인간 비극은 거울이 발명되면서 비롯했고, 인류 문화의 근원은 거울에서 출발했다고 하면 나의 지나친 억설일까? 백 번 놀라도 유부족(猶不足)일 거울의 요술을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일상(日常)으로 대하게 되었다는 것은 또 얼마나 가경(可驚)할 일인가?
신라조(新羅朝) 최후의 왕자인 마의 태자(麻衣太子)는 시방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바위 위에 꿇어 엎드려, 명경대를 우러러 보며 오랜 세월을 두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염송(念誦)했다니, 태자도 당신의 업죄(業罪)를 명경(明鏡)에 영조(暎照)해 보시려는 뜻이었을까! 운상기품(雲上氣稟)에 무슨 죄가 있으랴만, 등극(登極)하실 몸에 마의(麻衣)를 감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이 이미 불법(佛法)이 말하는 전생의 연(緣)일는지 모른다.
두고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보며 계곡을 돌아 나가니, 앞으로 염마(閻魔)처럼 막아 서는 웅자(雄姿)가 석가봉(釋迦峯)! 뒤로 맹호(猛虎)같이 덮누르는 신용(神容)이 천진봉(天眞峯)! 전후 좌우를 살펴봐야 협착(狹窄)한 골짜기는 그저 그뿐인 듯. 진퇴유곡의 절박감을 느끼며 그대로 걸어 나가니, 간신히 트이는 또 하나의 협곡(狹谷)! 몸에 감길 듯이 정겨운 황천강(黃泉江) 물줄기를 끼고 돌면, 길은 막히는 듯 나타나고, 나타나는 듯 막히고, 이 산에 흩어진 전설과, 저 봉에 얽힌 유래담(由來談)을 길잡이에게 들어 가며 쉬엄쉬엄 걸어 나가는 도안에, 몸은 어느덧 심해(深海)같이 유수(幽邃)한 수목(樹木) 속을 거닐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천하에 수목이 이렇게도 지천(至賤)으로 많던가! 박달나무, 엄나무, 피나무, 자작나무, 고로쇠나무 . 나무의 종족은 하늘의 별보다도 많다고 한 어느 시의 구절을 연상하며 고개를 드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단풍 뿐, 단풍의 산이요, 단풍의 바다다. 산 전체가 요원(燎原) 같은 화원(花園)이요, 벽공(碧空)에 외연(巍然)히 솟은 봉봉(峯峯)은 그대로가 활짝 피어 오른 한떨기의 꽃송이다. 산은 때 아닌 때에 다시 한 번 봄을 맞아 백화난만(百花爛漫)한 것일까? 아니면, 불의(不意)의 신화(神火)에 이 봉 저 봉이 송두리째 붉게 타고 있는 것일까? 진주홍(眞珠紅)을 함빡 빨아들인 해면(海綿)같이, 우러러 볼수록 찬란하다.
산은 언제 어디다 이렇게 많은 색소를 간직해 두었다가, 일시에 지천으로 내뿜는 것일까? 단풍이 이렇게 고운 줄은 몰랐다. 김 형(金兄)은 몇번이고 탄복하면서, 흡사히 동양화의 화폭(畵幅) 속을 거니는 감흥을 그대로 맛본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도 한 떨기 단풍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다리는줄기요, 팔은 가지인 채, 피부는 단풍으로 물들어 버린 것 같다. 옷을 훨훨 벗어 꽉 쥐어 짜면, 물에 헹궈 낸 빨래처럼 진주홍 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다. 그림 같은 연화담(蓮花潭) 수렴폭(垂簾瀑)을 완상(琓賞)하며, 몇십 굽이의 석계(石階)와 목잔(木棧)과 철삭(鐵索)을 답파(踏破)하고 나니, 문득 눈 앞에 막아서는 무려 3백 단의 가파른 사닥다리―한 층계 한 층계 한사코 기어오르는 마지막 발걸음에서 시야는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탁 트인다.
여기가 해발 5천 척의 망군대(望軍隊)―아! 천하는 이렇게도 광활하고 웅장하고 숭엄하던가! 이름도 정다운 백마봉(白馬峯)은 바로 지호지간(指呼之間)에 서 있고, 내일 오르기로 예정된 비로봉(毘盧峯)은 단걸음에 건너뛸 정도로 가깝다. 그밖에도, 유상무상(有象無象)의 허다한 봉들이 전시(戰時)에 할거(割據)하는 군웅(群雄)들처럼 여기에서도 불끈 저기에서도 불끈, 시선을 낮춰 아래로 굽어보니, 발 밑은 천인단애(千?斷崖), 무한제(無限際)로 뚝 떨어진 황천계곡(黃泉溪谷)에 단풍이 선혈처럼 붉다. 우러러보는 단풍이 새색시 머리의 칠보 단장(七寶丹粧) 같다면, 굽어보는 단풍은 치렁치렁 늘어진 규수의 붉은 치마폭 같다고나 할까. 수줍어 수줍어 생글 돌아서는 낯 붉힌 아가씨가 어느 구석에서 금방 튀어나올 것도 같구나!
▲ 마하연 ⓒ 2012 한국의산천
저물 무렵에 마하연(摩詞衍)의 여사(旅舍)를 찾았다. 산중에 사람이 귀해서였던가. 어서 오십사는 상냥한 안주인의 환대도 은근하거니와, 문고리 잡고 말없이 맞아주는 여관집 아가씨의 정성은 무르익은 머루알같이 고왔다. 여장(旅裝)을 풀고 마하연함(摩詞衍庵)을 찾아갔다. 여기는 선원(禪院)이어서, 공부하는 승려뿐이라고 한다.크지도 않은 절이건만 승려 수는 실러 30명은 됨직하다. 이런 심산(深山)에 웬 중이 그렇게도 많을까?
한없은 청산 끝나 가려 하는데, [無限淸山行欲盡]
흰구름 깊은 곳에 노승도 많아라. [白雲深處老僧多]
옛 글 그대로다.
노독(路毒)을 풀 겸 식후에 바둑이나 두려고 남포동 아래에 앉으니, 온고지정(溫故之情)이 불현 듯 새로워졌다.
"남포등은 참말 오래간만인데." 하며, 불을 바라보는 김 형의 말씨가 하도 따뜻해서, 나도 장난 삼아 심지를 돋우었다 줄였다 하며, 까맣게 잊었던 옛 기억을 되살렸다. 그리운 얼굴들이, 흐르는 물의 낙화(落花) 송이 같이 떠돌았다.
밤 깊어 뜰에 나가니, 날씨는 흐려 달은 구름 속에 잠겼고, 음풍(陰風)이 몸에 선선하다. 어디서 솰솰 소란히 들려 오는 소리가 있기에 바람 소린가 했으나, 가만히 들어 보면 바람 소리만도 아니요, 물 소린가 했더니 물 소리만도 아니요, 나뭇잎 갈리는 소린가 했더니 나뭇잎 갈리는 소리가 함께 어울린 교향악인 듯 싶거니와, 어쩌면 곤히 잠든 산의 호흡인지도 모를 일이다.
뜰을 어정어정 거닐다 보니, 여관집 아가씨는 등잔 아래에 외로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무슨 책일까? 밤 깊은 줄조차 모르고 골똘히 읽는 품이, 춘향(春香)이 태형(苔刑) 맞으며 백(百)으로 아뢰는 대목일 것도 같고, 누명(陋名) 쓴 장화(薔花)가 자결을 각오하고 원한을 하늘에 고축(告祝)하는 대목일 것도 같고, 시베리아로 정배(定配)가는 카추샤의 뒤를 네프 백작(伯爵)이 쫓아가는 대목일 것도 같고 . 궁금한 판에 제멋대로 상상해 보는 동안에 산 속의 밤은 처량히 깊어갔다.
자꾸 깊은 산속으로만 들어가기에, 어느 세월에 이 골을 다시 헤어나 볼까 두렵다. 이대로 친지와 처자를 버리고 중이 되는 수밖에 없나 보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이키니, 몸은 어느새 구름을 타고 두리둥실 솟았는지, 군소봉(群小峯)이 발 밑에 절하여 아뢰는 비로봉 중허리에 나는 서 있었다. 여기서부터 날씨는 급격히 변화되어 이 골짝 저 골짝에 안개가 자옥하고 음산(陰散)한 구름장이 산허리에 감기더니, 은제(銀梯), 금제(金梯)에 다다랐을 때, 기어이 비가 내렸다. 젖빛 같은 연무(煙霧)가 짙어서 지척을 분별할 수 없다. 우장(雨裝)없이 떠난 몸이기에 그냥 비를 맞으며 올라가노라니가, 돌연 일진 광풍(一陣狂風)이 어디서 불어 왔는지, 휙 소리를 내며 운무(雲霧)를 몰아가자, 은하수같이 정다운 은제와, 주홍 주단 폭 같이 늘어놓은 붉은 진달래 단풍이, 몰려가는 연무 사이로 나타나 보인다. 은제와 단풍은 마치 이랑이랑으로 섞바꾸어가며 짜 놓은 비단결 같이 봉에서 골짜기로 퍼덕이며 흘러내리는 듯하다. 진달래 꽃보다 단풍이 배승(倍勝)함을 이제야 깨달았다.
오를수록 우세(雨勢)는 맹렬했으나, 광풍이 안개를 헤칠 때마다 농무(濃霧) 속에서 홀현홀몰(忽顯忽沒)하는 영봉(靈峯)을 영송(迎送)하는 것도 과히 장관(壯觀)이었다. 산마루가 가까울수록 비는 폭주(暴注)로 내리붓는다. 만 이천 봉을 단박에 창해(滄海)로 변해 보리는 것일까. 우리는 갈데 없이 물에 빠진 쥐 모양을 해 가지고 비로봉 절정(絶頂)에 있는 찻집으로 찾아드니, 유리창 너머로 내다보고 섰던 동자(童子)가 문을 열어 우리를 영접하였고, 벌겋게 타오른, 장독 같은 난로를 에워싸고 둘러앉았던 선착개(先着客)들이 자리를 사양해 주낟. 인정이 다사롭기 온실 같은데, 밖에서는 몰아치는 빗발이 뒤집히는듯하다. 용호(龍虎)가 싸우는 것일까?
산신령이 대노(大怒)하신 것일까? 경천동지(驚天動地)도 유만부동(類萬不同)이지, 이렇게 만상(萬象)을 뒤집을 법이 어디 있으랴고, 간장(肝腸)을 죄는 몇 분이 지나자, 날씨는 삽시간에 잠든 양같이 온순해졌다. 변환(變幻)도 이만하면 극치에 달한 듯싶다. 비로봉 최고점(最古點)이라는 암상(巖上)에 올라 사방을 조망(眺望)했으나, 보이는 것은 그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운해(雲海)뿐, ―운해는 태평양보다도 깊으리라 싶었다. 내 외 해(內外海) 삼 금강(三金剛)을 일망지하(一望之下)에 굽어 살필 수 있다는 한 지점에서 허무한 운해밖에 볼 쑤 없는 것이 가석하나, 돌이켜 생각건대 해발 육천 척에 다시 신장 오척을 가하고 오연(傲然)히 저립(佇立)해서, 만학천봉(萬壑千峯)을 발 밑에 꿇어 엎드리게 하였으면 그만이지, 더 바랄 것이 무엇일랴. 마음은 천군만마(千軍萬馬)에 군림하는 쾌승 장군(快勝將軍)보다도 교만해진다.
▲ 금강산 일만이천봉중에서 그 어느 봉우리도 비로봉을 따르지는 못한다 ⓒ 2012 한국의산천
비로봉 동쪽은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흰 자작나무의 수해(樹海)였다. 설자리를 삼가, 구중심처(九重深處)가 아니면 살지 않는 자작나무는 무슨 수중 공주(樹中公主)이던가! 길이 저물어, 지친 다리를 끌며 찾아든 곳이 애화(哀話) 맺혀 있는 용마석(龍馬石)― 마의 태자의 무덤이 황혼에 고독했다. 능(陵)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던― 철책(鐵柵)도 상석(床石)도 없고, 풍림(風霖)에 시달려 비문(碑文)조차 읽을 수 없는 화강암 비석이 오히려 처량하다. 무덤가 비에 젖은 두어 평 잔디밭 테두리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석양이 저무는 서녘 하늘에 화석(化石)된 태자의 애기(愛騎) 용마(龍馬)의 고영(孤影)이 슬프다. 무심히 떠도는 구름도 여기서는 잠시 머무르는 듯, 소복(素服)한 백화(百花)는 한결 같이 슬프게 서 있고, 눈물 머금은 초저녁 달이 중천에 서럽다.
태자의 몸으로 마의(麻衣)를 걸치고 스스로 험산(險山)에 들어온 것은, 천 년 사직(千年社稷)을 망쳐 버린 비통을 한몸에 짊어지려는 고행(苦行)이었으리라.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入山)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던가! 고작 胸裡)가 어떠했을까? 흥망(興亡)이 재천(在天)이라. 천운(天運)을 슬퍼한들 무엇하랴만, 사람에게는 스스로 신의(信義)가 있으니, 태자가 고행으로 창맹(蒼氓)에게 베푸신 도타운 자혜(慈惠)가 천 년 후에 따습다.
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悠久)한 영겁(永劫)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칠십 생애(七十生涯)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角逐)하다가 한움큼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愁愁)롭다.
- 끝 -
▲ 해금강 해만물상 ⓒ 2012 한국의산천
▲ 해금강의 송도 ⓒ 2012 한국의산천
▲ 삼일포 ⓒ 2012 한국의산천
▲ 해금강 총석정 ⓒ 2012 한국의산천
관동팔경(關東八景) 중의 1위에 속하는 총석정은 북한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강원도 통천읍의 동쪽, 동해에 돌출한 해식애(海蝕崖) 지대에 있으며 그 아래 바다 속에 구릿빛으로 그을은 육각형의 현무암 돌기둥이 여러 개 총립(叢立)하여 절경을 이룬다. 높이가 100척이 넘는 돌기둥도 있다.
총석정이라는 말은 이들 가운데 세워진 정자를 뜻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주상절리로 이루어진 바위기둥들과 절벽을 일컫는다. 현재 북조선의 제13호 명승지와 제214호 천연기념물이다. 오래전에 이곳에 정자를 세웠으나 (총석정) 그 보존이 어려워 끝내 헐어버렸다 한다.
▲ 집선봉 ⓒ 2012 한국의산천
▲ 五峰山 ⓒ 2011 한국의산천
강원 회양군(현 자강 장강군)과 고성군(현 금강군과 고성군)과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 1,264 m. 장전(長箭) 서남서쪽 7 km, 온정리(溫井里) 북서쪽 7.5 km, 외금강(外金剛)의 한 봉우리로 세지봉(勢至峰:1,041 m) ·문주봉(文珠峰:906 m) ·선창산(仙蒼山:1,224 m) ·상등봉(上登峰:1,277 m) 등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 산은 다른 산과 달리 원추형 첨봉(尖峰)이며 북쪽으로는 천불동(千佛洞)의 대협곡이 장장 2 km에 걸쳐 펼쳐져 있고, 저마다 독립봉을 이루며 매우 뾰족한 봉우리가 화살처럼 솟아있으며 남쪽은 세지봉 사이에 만물상 ·천선대(天仙臺) ·삼선암(三仙岩) ·온정령(溫井嶺) 등 금강산의 정수(精粹)를 모은 경승지가 펼쳐져 있다.
▲ 만폭동 ⓒ 2012 한국의산천
▲ 구룡연 ⓒ 2012 한국의산천
▲ 표훈사 보덕암 (表訓寺普德庵) ⓒ 2012 한국의산천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강산 만폭동 골짜기에 자리잡은 암자로, 고구려 안원왕(安原王) 때에 보덕화상이 창건했다. 지금의 건물은 1675년(조선 숙종 1)에 다시 짓고, 1808년(순조 8)에 중수하였다.
보덕암은 내금강의 유명한 만폭8담(흑룡담·비파담·벽파담·분설담·진주담·거북소·배소·화룡담) 중에 하나인 분설담의 오른쪽 20m 벼랑에 매달리듯 서 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기묘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원래 2채의 건물이 있었는데 하나는 너비 1.6m, 높이 2m, 깊이 5.3m의 자연굴인 보덕굴 앞을 막아 절벽에 지은 본전이고 다른 하나는 굴 위에 지었던 요사채 판도방이다.
본전은 정면 1칸(3.35m), 측면 1칸(0.86m)의 단칸 익공형식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벼랑 중간에 높이 7.3m의 구리기둥 하나로 마루귀틀을 받쳐 세웠다. 단층 건물이지만 층층이 기둥과 보를 짜올려 3층처럼 보인다. 구리기둥은 1511년(조선 중종 6)에 설치한 것으로, 나무기둥에 19마디의 동판을 감은 것이다. 벼랑 위 평지에 정면 3칸(6.49m), 측면 1칸(3.47m)의 판도방과 돌탑이 있었으나 지금은 보덕굴로 내려가는 층대가 남아 있을 뿐이다.
보덕굴이란 이름은 옛날 이곳에서 마음씨 착한 보덕각시가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보덕굴 절벽 아래 만폭동 계곡의 바위에는 보덕각시가 머리를 감았다는 세두분이라는 지름 40㎝, 깊이 40㎝의 동그란 샘구멍이 있고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보덕각시가 세수를 하고 수건을 걸었다는 수건바위가 있다.
동굴을 이용한 전실 시설을 여러 가지 형태의 지붕으로 층층이 조화롭게 세운 기교있는 건축이다. 내금강의 오현봉, 청학봉, 향로봉 등을 배경으로 구리 기둥 하나에 의지하여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기묘한 사찰이다.
▲ 외금강 구룡연 계곡 들머리에 자리잡은 천년 고찰 신계사(神溪寺)는 옛적이나 지금이나 외금강을 탐승하는 이들이라면 꼭 거쳐가는 길목이다 ⓒ 2012 한국의산천
육당 최남선이 기행기 <금강예찬>에서 절묘한 필력으로 옮긴 것처럼 신계사 터는 금강산 사찰 가운데 지정학적으로 가장 명당자리다. 외금강의 등뼈격인 ‘관음연봉이 군선, 한하의 양 골짜기 사이로 줄기차게 뻗쳐 나오다가 문필봉을 보당(절 행사 때 쓰는 깃대)으로 앞세우고 너부죽하게 열린 바닥에 있는 고찰’인 것이다. 게다가 뒤에 붓끝을 닮았다는 문필봉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앞에는 세존봉의 기기묘묘한 장관을 끼고 있으니, 옛 사람들은 절 영역을 일컬어 ‘세존 원내’라고도 일컬었다고 육당은 기록하고 있다. 문필봉의 문자향과 관음·세존봉 영기가 서로 어울리는 이 절에서 근대 선불교를 이끈 석두(1882~1954)와 그의 제자로 판사였다가 출가해 종정이 된 효봉(1888~1966) 등의 걸출한 선지식이 배출된 것도 우연은 아니다.
1825년에 지은 <금강산신계사사적>을 보면 고찰은 신라 법흥왕 5년인 519년 보운스님이 세운 뒤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이 653년 중건하고, 김유신의 동생인 김흠순과 문무왕 동생인 김인문이 대웅전을 보수했다고 전해진다. 또 지방기록인 <관동읍지>를 보면 ‘(신라 마지막왕인)경순왕이 쫓겨난 뒤 불사를 닦으려고 원당을 지었으나 시비는 알 수 없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려 광종 때에 국사를 지낸 탄문스님이 신계사를 보수했고 서경천도를 주장했던 실력자 묘청이 1130년에 중창한 기록도 전해진다. 왕실과 다소 소원했던 신계사는 1789년 영조에 의해 굶어죽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비는 곳으로 다시 일어선다. 정조가 원불전과 어향각을 지어 수원 현륭원(사도세자의 사당)의 원당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구한말엔 고종 황실로부터 공명첩과 거액의 내탕금 등을 지원받아 대웅보전과 각종 불구를 장만할 정도로 살핌을 받았다. 당시 중신인 소하 조성하는 “ 허위허위 걸어 뒤늦게 신계사에 이르니 기러기 날아갈듯한 탑의 자태하며 절 처마 밑 풍경에 걸린 물고기하며 아주 큰 도량이로구나’라고 절의 위세를 노래하고 있다.
19세기 말 전각이 21채에 이를 정도로 대찰이었던 신계사는 1911년 정문누각인 만세루 2층 15칸과 최승전 60여칸이 불에 타면서 다시 퇴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일제시대인 1920년대 대웅전 앞 석축과 만세루, 요사채 등이 복원 되었으나 이미 전통적인 절집의 배치와 1000년 이상 된 삼층탑 자리의 놓임새, 구조가 일본인들에 의해 크게 왜곡되어 현재 진행중인 전통 사찰 복원도 쉽지 않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춘원 이광수도 <금강산유기>에서 이게 못내 아쉬웠던 탓인지 ‘신계사라, 그 사무소가 유리창, 의자, 탁자의 면 사무소나 순사 주재소 식인 것이 매우 눈에 틀립니다. 오래된 석탑만 오직 옛 뜻을 변치않고 서있을 뿐이외다”라고 털어놓고 있다. 다행히 지난해부터 본격화한 남북 합동발굴에 따라 올해 만세루와 요사채 제 위치를 찾아 원상복원하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제행무상의 진리를 떠올리게 하는 절 터에서 의연한 것은 곧 대자연뿐이다. 이를 깨우쳐주기라도 하듯 1887년 씌어진 신계사 법당 중건 상량문의 게송은 달뜬 밤 절집 공간의 환상적 풍경을 전해준다. “ 한 지팡이로 밤에 삼 만리를 돌아가니 달은 밝고 끝없는 하늘 바람 소리 들리네… 만 이천봉은 권속과 같으니 한 신선의 피리소리에 흰 구름이 멈추도다… 하늘 향 계수나무 바람에 날리니… 방장의 깊고 깊은 데서 승려가 결제에 드네…’달 비치는 새벽 깨달음에 목말랐던 신계사 옛 승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 표훈사 (表訓寺) ⓒ 2012 한국의산천
강원도 금강군 내금강면 장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찰.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97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강산 1만 2천 봉에 머무르고 있다는 보살들의 우두머리 법기보살을 주존으로 모신 사찰로, 670년(신라 문무왕 10)에 신라의 승려 능인·신림·표훈이 처음 세우고 신림사라 하였다가 3년 후 표훈사로 이름을 고쳤다. 내금강 만폭동, 내금강 어귀에서 골짜기를 따라 약 4km 거리에 있으며, 금강산 4대 사찰(유점사, 장안사, 신계사, 표훈사)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불에 타버리거나 쇠락한 것을 1682년(숙종 8)과 1778년(정조 2) 두 차례에 걸쳐 복원하였다. 원래 20여 동의 많은 전각이 있었지만 현재 경내에는 반야보전(般若寶殿), 명부전, 영산전, 어실각(御室閣), 칠성각, 능파루(凌波樓) 등의 전각과 7층석탑이 남아 있다.
표훈사의 가람배치는 마당의 7층석탑을 가운데에 두고 동·서·남·북에 건물이 담을 에워싸듯 배치되어 있는 사동중정형(四棟中庭形)의 산지가람형이다. 7층석탑을 중심으로 본전인 반야보전과 입구인 능파루가 남북의 중심축을 따라 마주 보고, 반야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과 영산전이 양쪽에 나란하게 있으며, 석탑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 극락전터와 명월당터가 있다. 또 능파루를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는 요사채인 판도방(判道房)과 어실각이 있다.
반야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으로 가구는 7량집의 규모이다. 네 모서리기둥과 어칸 양쪽 기둥 상부에 용두형 안초공을 짰는데, 외부로는 용의 머리를 내고 안으로는 몸통을 조립했다. 귀기둥 상부에는 낙양을 조각하여 매달았다. 내부는 천장 복판에 현란한 단청을 장식한 반자로 꾸미고 섬세하게 조각한 닫집을 설치했다. 불단에는 법기보살의 장륙상(丈六像)을 봉안하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정면이 아니라 동쪽 법기봉을 향해 있다. 불당 이름이 반야보전인 것은 주존인 법기보살이 늘 반야(般若)를 설법하기 때문에 지어졌다고 한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주심포 형식의 맞배지붕집이다. 영산전은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형식으로 5량구조의 맞배지붕집이다. 전체적인 단청은 금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능파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주심포 형식의 팔작지붕 누각건물이다.
이밖에도 중심영역의 북동쪽에 칠성각이 있고 서남쪽에 어실각이 있다. 어실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다포계 형식의 맞배지붕집이다. 일반적인 사당건축 형식으로 지어졌으나, 단청이 화려하다. 1796년(조선 정조 20) 왕이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동쪽의 법기봉을 비롯한 금강산의 주봉들이 사방을 둘러 일대 경관을 이루고 있는 깊은 산골짜기의 반듯한 절터에 있는 사찰이다. 반야보전을 비롯한 건물들의 조성기법이 조선시대 사찰건축의 절정을 보여주며, 단청이 화려한 조선 후기의 건축술을 대표한다.
▲ 유점사(楡岾寺) ⓒ 2012 한국의산천
강원도 금강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
창건시기 신라시대
소재지 강원도 고성군 서면 백천교리
일제강점기 60여 개의 말사를 거느린 전국 31본산 중의 하나로, 신라 중기 남해왕 때 창건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중건하였는데, 특히 조선시대에는 1408년(태종 8) 효령대군이 금 2만냥을 들여 3,000여 칸으로 중건하였다. 경내에 아름드리 느릅나무가 많아 '유점사'가 되었다고 한다.
유점사는 외금강 효운동 계곡에 세운 금강산 4대 사찰 중에서도 가장 크고 웅장한 금강산 제일의 대찰이었다. 당시 이 절에는 우리나라 중세 건물 중에서 가장 높고 화려한 건물로 꼽혔으며 53불을 안치한 능인전(能仁殿), 수월당, 연화사, 제일선원, 반룡당(盤龍堂), 의화당(義化堂), 서래각(西來閣) 등 6전 3당 3루가 있었다.
또 창건설화를 간직한 53불상, 패엽경, 나옹 혜근이 스승인 지공(指空)으로부터 받은 '보살계첩(菩薩戒牒)'과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었을 때 쓴 '보문품', 신라 남해왕이 하사했다고 전해지는 향로와 비취옥배, 나옹선사의 가사 장삼 등 수많은 보물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절에는 까마귀가 쪼는 곳을 팠더니 샘물이 솟았다는 창건 설화가 전하는데, 이 전설을 증명하듯 실제로 유점사에는 오탁수(烏啄水)라는 샘물이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 때 파괴되어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고, 지금은 조선 세조 때 조성된 13층 석탑과 묘향산 보현사로 옮긴 동종(銅鐘)이 보존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당이 이곳에서 승병을 지휘하였다.
(옮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