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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창헌(羅昌憲) 선생 (1896. 1. 29~1936. 6. 26)
.1919 청년외교단, 대동단 조직, 활동
.1922 한국노병회 활동
.1925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차장 등 역임
.1926 병인의용대 활동
우리 독립은 우리의 사활문제임은 췌언(贅言)을 기다릴 것이 없을 것이며, 우리들의 독립은 총과 검과 혈이 아니면 성공할 수 없다. 고로 우리들은 금후 한사람이 될 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철과 혈로써 저 간악하고도 악독한 왜구(倭仇)를 배제할 것이다.
- 선생이 조직한 철혈단의 선언서 중에서(1920. 6) -
사람은 대개 자신의 소양대로 행동하기 마련이다. 독립운동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특장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어떤 사람은 외교 독립운동으로, 어떤 사람은 무장 독립운동으로, 어떤 사람은 민족 실력양성으로 독립운동을 펼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소양을 뛰어넘어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들도 있다. 더구나 그것이 안정된 미래와 안락한 삶이 보장된 직업을 던져버리고 독립운동이라는 가시밭길을 갔다면, 그들의 인생은 더욱 빛나는 데가 있는 것이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도 그런 인물들이 있었다. 당초 의사의 길을 가려고 했던, 그래서 독립운동과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인물들 말이다. 이들은 의술을 단순히 인간의 병을 치료하는 일로만 이해하지 않고, 민족과 더 나아가서는 인류의 아픔을 치유하는 일로 여긴 것이다. 여기에 이들만의 다름이 있는데, 그런 인물이 바로 선생이다. 특히 선생의 독립운동 방략은 의사치고는 과격한 데가 있는 의열투쟁 방식이었으니, 더욱 다름이 있는 것이다.
선생은 1896년 1월 29일 평안북도 희천군 진면(眞面) 행천동(杏川洞) 577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가문이나 성장 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중국 망명 이후 선생은 왕성준(王成俊), 강우규(姜宇圭), 정궤(丁几)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선생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은 학생층의 3.1운동 추진 계획에 동참하면서부터이다. 1919년 경성의학전문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선생은 같은 학교 4학년인 김형기, 한위건 등과 함께 3.1운동 추진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때 선생을 비롯한 서울의 학생 대표들은 2월 25일 서울 정동(貞洞)에 있는 정동교회의 이필주 목사 방에 모여 3월 1일 독립선언 민중대회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들은 3월 1일 각 전문학교와 중등학교 학생들을 2시 정각에 탑골공원으로 소집하여 독립 선언대회에 참가하도록 노력하고, 나아가 각 전문학교 생도를 중심으로 일대 만세시위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하였다. 다음날 2월 26일에도 선생을 비롯한 김문진, 이용설, 윤자영, 김병조 등 각 전문학교의 대표들은 다시 이필주 목사 방에 모여 독립운동에 학생들을 동원하여 참여할 것이며, 또 1회와 2회 독립운동에서 체포를 모면한 사람들은 그 뜻을 굽히지 말고 더욱 더 독립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최후의 목적을 완수할 것에 합의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결의에 따라 선생은 3월 1일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 민중대회와 그 이후 전개된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제의 검거를 모면한 선생은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은 1919년 5월 초 선생을 비롯한 안재홍, 이병철, 조용주, 연병호, 송세호 등이 한창 절정에 이른 3.1운동을 지원하고, 상해에 조직된 임시정부를 후원할 목적으로 결성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은 격문을 살포하여 만세 시위운동의 확산에 주력하고, 임시정부에 국내의 상황을 보고하는 동시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송금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1919년 5월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특파원으로 상해에 파견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국내의 3.1운동 상황을 보고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선생은 임무를 마치고 다시 귀국하였는데, 그것은 한국의 왕족과 귀족을 상해로 탈출시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일제는 3.1운동을 일부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의 망동’이라고 국제적으로 선전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에 대한 반격으로 한국의 황족과 귀족을 해외로 망명시켜 이들까지도 일제의 식민통치에 반대한다는 사실을 공포함으로써, 한국민족의 전민족적인 독립 열망과 의지를 알리려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으로 귀국한 선생은 그해 8월 남작 김가진이 총재로 있던 조선민족대동단에 가입한 뒤, 고종황제의 아들인 이강(李堈)공과 김가진의 국외 탈출 계획을 추진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임시정부 특파원들과 연계하여 10월 31일 일본의 천장절을 기해 제2차 대규모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여 갔다. 그리하여 그해 10월 김가진은 무사히 상해로 탈출하였고, 또 10월 말부터 11월 초에 걸쳐 서울, 평양을 비롯하여 의주, 선천, 정주, 영변 등지에서 대대적으로 만세시위운동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어 선생은 이강공의 상해 탈출 계획도 추진하였다. 같은 해 11월 10일 이강공을 변장시켜 경의선을 이용하여 중국 안동까지 모시고 갔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일경에 적발되어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 선생은 1920년 1월 다시 상해로 귀환하였고, 여기서 김가진과 협의하여 그해 3월 6일 대동단 본부를 상해에 옮기고, “임시정부에서는 이제 혈전을 준비중에 있어 아(我)단원 또한 단결하여 혈전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포고문을 발표함으로써, 대일 결전의 의지를 천명하였다. 그리고 국내외에 군자금 모집 격문을 보내고, 또 안동현을 비롯하여 평안, 경기, 충청 각지에 지부 설치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일부 요인의 무능과 부정으로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자들의 비난을 면치 못하자, 선생은 1920년 봄 노무용, 황학선, 김기원, 김재희 등과 함께 철혈단(鐵血團)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선언서를 발표하여 독립운동자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임시정부의 체질 개선을 주장하여 갔다.
우리 독립은 우리의 사활문제임은 췌언(贅言)을 기다릴 것이 없을 것이며 우리들의 독립은 총과 검과 혈이 아니면 성공할 수 없다. 고로 우리들은 금후 한사람이 될 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철과 혈로써 저 간악하고도 악독한 왜구(倭仇)를 배제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독립운동자 중에는 부패한 분자가 적지 않고 독립운동이란 미명하에서 자기의 명예를 박득(博得)하려고 하는 야심가가 있다. 독립운동에 의해 공(公)을 빙자하고 사복을 채우려고 하는 비루(鄙陋)한 자도 있다. 독립운동에 의해 지방열과 사당(私黨)을 부식하여 세력을 다투고 상호 암투를 일삼아 왜구를 배제하는 것보다 동족을 구시(仇視)하는데 급급한 자도 있다.
오호 이와 같은 분자는 우리 독립을 방해하는 악마이다. 과연 악마인 이상 우리들은 이를 박멸하고 신성한 독립운동자는 그 보조를 일치하여 진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에 오배(吾輩)는 전진(前陳)한 악마를 제거하고 우리 사계(社界)의 신선하지 못한 공기를 소독하여 우리 전민족의 정신을 건전케 하고 밖으로는 철과 혈로써 왜적을 배제하여 우리의 독립을 완수하려고 하는데 있다.
기원 4253년(1920) 6월 철혈단
나아가 선생이 이끈 철혈단은 임시정부 내무부를 공격하여 경무국 대원들과 격투를 벌이기도 하였는데, 이는 임정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의 신선하지 못한 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독립운동 방략에서 선생이 중요시한 것은 철혈투쟁, 즉 무력투쟁이었다. 그것은 선생의 독립운동 노선에서 시종일관하고 있는 점이다. 비록 선생은 의학을 전공하여 유약하여 보이지만, 선생의 독립운동은 항상 암살․파괴를 주로 하는 무력적인 의열투쟁 방식을 채택하였고, 그것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었다.
그 같은 연계선상에서 선생은 1922년 10월 결성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에도 참여한다. ‘1만명 이상의 노병을 양성하고, 100만원 이상의 전비를 마련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할 목적’으로 조직된 것이 한국노병회인데, 선생은 이 회의 이사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선생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탄핵운동을 주도하여 갔다. 그것은 선생이 의열투쟁 방식을 견지한 데 반하여, 이승만은 외교 독립노선을 지향하는 등 독립운동 노선상의 차이도 한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임시정부가 무력증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최고 지도자로서 이를 방치하였으며, 또 임지에 부임하지 않고 미주에 체제하고 있던 것에 대한 불만의 폭발이었다.
1925년 3월 14일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선생은 최석순, 문일민, 임득산, 강경선, 강창제, 김현구, 고준택, 곽헌 등과 연서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제출하였는데, 그 사유는 다음과 같다.
一. 1924년 겨울 정변 후 이승만으로부터 임시대통령 대리 박은식에 대해 ‘현정부 및 의정원의 제반 행사를 부인한다. 아울러 현정부 및 의정원의 행위는 비법(非法)이므로 재미 한인은 모두 이에 반대한다’는 통지가 있은 일
二. 이승만으로부터 전(前)재무총장 이시영에 대해 ‘각원 전부가 협의 조인한 송금 청구가 있으면 송금할 것이나, 인두세는 정부에서 직접 수수할 이유가 없다’고 통지한 일
三. 대통령이 임지를 떠나 항상 미국에 체재하여 그 직책을 돌보지 않는 일
나아가 선생은 이승만 탄핵 심판위원장을 맡았다. 그리하여 3월 23일 의정원회의에서 이승만을 탄핵하여 면직시키고, 동시에 후임 대통령으로 국무총리 박은식을 만장일치로 추대하였다. 이렇게 하여 임시정부가 대통령제의 폐단을 극복하고 장차 내각책임제인 국무령제로 개헌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이후 선생은 임시정부 내무차장으로 1925년 6월 13일 정위단(正衛團)을 조직하였다. 이는 일부 독립운동자를 사칭하는 사람들이 동포 학생 및 상인을 협박하여 금품을 강탈하고, 혹은 유복한 유학생을 인질로 하여 송금을 강요하는 등의 사건이 빈발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독립운동가에 대한 이미지가 손상됨은 물론, 한인 동포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나아가 독립운동의 전도에 악영향을 끼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이를 방지하고자 선생을 비롯한 경무국 참사 강창제, 고준봉, 박창세, 유창준, 김정근, 박규명, 김예진 등 8명은 경무국 응원단체로서 정위단을 조직한 것이다.
1926년 1월 선생은 정위단을 기반으로 병인의용대를 결성하였다. 이는 독립운동 고양과 실추된 임시정부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병인의용대는 투쟁방식으로 일제의 주요 식민통지 기관의 파괴, 일제 관리 및 친일 밀정의 처단, 반일 시위운동의 전개 등 의열투쟁 방략을 채택하였다. 병인의용대가 추구한 의열투쟁 방략은 다음과 같은 창립선언서에 잘 나타난다.
본대는 임시정부의 기치하에 철혈주의로 독립운동에 예신(銳身) 자진하는 의용청년을 체맹(締盟)하여 적의 모든 시설을 파괴하고 적에 부수하는 일체의 이적행위를 서제(鋤除)하기 위해 이를 선언한다.
본대는 3.1선언의 기본약속을 극존(克尊)하여 1인 1각까지 최후의 노력으로서 민족의 전위를 자임하고 사회의 기율을 엄수하여 전선의 통일을 보유하는 신성으로서 전운동의 대본영인 임시정부의 권위와 정신을 옹호선양하여 적의 정치상 경제상 모든 시설을 파괴하고 침략정책을 주모(主謀) 행사하는 적리(敵吏)와 제국주의의 주구배인 한간(韓奸)을 습격 암살하는 적극행동을 취한다. 혁명은 길이 있다. 흑철(黑鐵)과 적혈(赤血)뿐이고 다시 제2, 제3이 없다. 암살 파괴는 혁명가의 무상(無上)한 무기이며 유일한 수단이다. 강대한 폭력을 타도 전복시키려면 오직 암살과 파괴뿐이다.
암살, 파괴를 행동방략으로 내건 병인의용대는 우선 상해 일본총영사관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였다. 그것은 상해 일본총영사관이야말로 임시정부 요인들은 물론 독립운동가들과 한인 동포들을 체포 탄압하던 원부(怨府)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병인의용대원들을 지휘하여 세 차례에 걸친 폭탄투척의거를 전개하였다.
첫 번째 의거는 1926년 4월 8일에 단행되었다. 선생은 김광선, 김창근, 이수봉 등 3명의 대원으로 하여금 일본총영사관과 그 후면도로에 접한 부속건물에 폭탄 2개를 투척하도록 한 것이다. 두 번째 의거는 같은 해 9월 15일 선생이 직접 제작한 시한폭탄을 중국인 서윤쌍(徐倫雙)에게 주어 일본총영사관의 폭파를 기도한 것이다. 세 번째 의거는 1927년 강창제, 김창근, 이수봉 등으로 하여금 시한폭탄을 일본총영사관에 투척하도록 하여 창고건물을 파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같이 계속된 폭탄 투척의거로 말미암아 일제는,
당관(상해 일본총영사관)에서도 충분히 경계하기로 하고 우선 경찰보조원 1명을 증원하여 감옥의 감시를 엄하게 하고, 정문을 폐쇄하여 출입구를 후문 1개소로 하고 이곳에 문번 이외에 순사 2명을 상치(常置)하여 입문자를 감시하게 하고, 또 수시로 관의 문외를 순시하게 하였다.
고 하는 등 재외공관으로서 귄위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세 번에 걸친 의거는 비록 상해 일본총영사관 폭파라는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는 못하였지만,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을 폭로하고 한국민족의 독립의지를 널리 알리는 데 충분히 기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이 바로 의열투쟁이 목적하는 바이다. 의열투쟁의 진정한 의미는 메시지 전달에 있는 것이지 인명의 살상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선생이 이끈 병인의용대는 친일 밀정 및 주구배를 색출하여 처단하였다. 1926년 2월 1일에 최병선, 장영환, 김광신, 박인 등 4명의 대원은 친일 밀정 박제건을 상해 북강서로에서 처단한 것이다. 최동윤, 박남제라고도 불린 박제건은 한중협회 회원에 관한 자료를 일제에게 넘겨준 자이다. 그리하여 이들 회원 다수가 체포되게 한 장본인으로 독립운동진영에서는 반드시 처단해야 할 밀정이었다.
같은 해 2월에서 3월에 걸쳐 선생이 이끈 병인의용대는 4인의 친일 밀정을 처단하였으며, 4월 16일에는 이영선을 시켜 일본총영사관 순사인 내굴(內屈)의 처단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특히 병인의용대는 국내의 비밀결사와 연계하여 일제 식민통치 기관의 폭파나 반일 시위운동을 주도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추진하여 갔다. 그리하여 1926년 6월 10일로 예정된 순종황제의 인산일에 맞추어 의거를 수행하기 위해서 김광선, 이영전, 고준택, 김석룡 등 4명의 대원을 국내에 파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상해의 황포탄에서 피체됨으로써 의도했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후 선생은 일제의 추적을 피해 사천성(四川省) 만현(萬縣)으로 갔고, 여기에서 만현의원을 경영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여 갔다. 그리하여 도산 안창호의 피체 이후 처음으로 1933년 1월 상해 프랑스 조계의 미국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제19회 흥사단 원동대회에 참석하였다. 20여 명의 단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이 대회에서는 일부 단칙의 개정, 작년도 사무보고, 안창호 체포의 전말 등에 대한 보고와 결의가 있었는데, 이때 선생은 흥사단 원동반 제5반 반원으로 선임되었던 것이다. 그해 7월 선생은 다시 상해로 와서 1개월 동안 체재하며 병인의용대의 재건을 위해 힘썼다.
그 결과 예전의 동지들은 다시 병인의용대를 부흥시켜 박창세를 대장으로, 강창제를 부대장으로 선임함으로써 조직을 재건하였다. 이렇게 병인의용대를 재건한 뒤, 선생의 의열투쟁 노선을 따라 친일 밀정 처단 등의 활동을 전개하여 갔다. 1935년 12월 14, 15일경 병인의용대원 김창근은 남경에서 김동우(본명 나종균)로부터 “상해 일본총영사관에 근무하는 등정(藤井) 경부보가 우리들 혁명투사를 체포함이 혹심하므로 살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김창근은 상해로 돌아와 자택에서 폭탄 1개를 제조하여 12월 24, 25일경 상해 공동조계 소재의 등정 경부보 관사 정문에 폭탄을 장치한 뒤 그가 외출할 때 폭사를 기도하기도 하였다. 이같이 선생의 의열투쟁 노선은 재건 병인의용대에 의해 지속적으로 계승되어 갔다.
하지만 선생은 1936년 봄부터 위암에 걸려 고생하다가 결국 6월 26일, 40세의 한창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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