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국론자 대원군, 쇄국론자 최익현의 공격에 무너지다
고종 1년(1864) 2월 28일 함경감사 이유원(李裕元)은 경흥부(慶興府) 망덕(望德) 봉수장(烽燧將) 한창국의 “두만강 건너편에 이상하게 생긴 사람들[異樣人]이 나타났다”는 치보(馳報:급보)를 조정에 알렸다. ‘이상하게 생긴 사람들’이란 통상을 요구하는 러시아인들이었다. 경흥부사(慶興府使) 윤협이 “이런 문제는 지방관이 독단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자 러시아인들은 돌아갔지만 조선은 이미 서세동점(西勢東漸: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밀려옴)의 가시권에 들어갔다.
3년 전인 철종 11년(1860) 제2차 아편전쟁으로 영·불 연합군은 북경의 원명원(圓明園)을 점령했고 러시아는 청나라와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맺어 우수리강 동쪽 영토를 차지했다. 조선은 뜻하지 않게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야 했다. 청나라는 이미 1841년 제1차 아편전쟁에서 패해 홍콩을 할양하고 광주(廣州)·상해(上海) 등의 항구도시를 개항하는 남경(南京)조약을 맺었고, 일본도 1854년에 미국에 5개 항(港)의 문을 여는 가나가와(神奈川) 조약을 맺었다. 조선만이 계속 진공지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대원군은 러시아인들이 두만강 건너편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내통하는 조선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색출을 지시했다. 비변사(備邊司)의 지시를 받은 함경감사 이유원은 그해 5월 15일 김홍순·최수학을 러시아인과 내통한 혐의로 두만강가에서 효수했다. 대원군도 서양인과 내통한 조선인의 목을 베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조선에는 이미 서양인 신부들이 여러 명 들어와 있으며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 사망 직후 노론 벽파가 정조 때 성장한 이가환·정약용 등의 남인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일으킨 신유박해(辛酉迫害:1801)와 노론 벽파 풍양 조씨가 천주교에 관대한 노론 시파 안동 김씨를 몰아내기 위해 일으킨 기해박해(己亥迫害:1839)로 조선 천주교는 거의 초토화됐다.
그러나 헌종 11년(1845) 조선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金大建)이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페레올 신부를 밀입국시키는 데 성공할 정도로 천주교는 다시 살아났다. 김대건은 이듬해(1846년) 5월 인천 옹진군 순위도(巡威島)에서 체포돼 사형 당하지만 3년 뒤에는 조선인 제2대 신부 최양업(崔良業)이 귀국한 데 이어 프랑스 외방선교회 소속 신부들이 잇따라 밀입국했다. 다블뤼 주교가 ‘경상도 여러 마을에서 주교가 지나갈 때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길가에 나오곤 했다’고 말할 정도로 천주교는 공공연하게 전파되었다.
천주교는 대원군의 집 안채까지 전교하는 데 성공했다. 베르뇌 주교는 1864년(고종 1년) 외방선교회에 편지를 보내 “임금의 어머니(부대부인 민씨)는 천주교를 알고 교리문답을 배웠으며 몇 가지 기도문을 매일 외웠는데 아들(고종)이 왕위에 오른 것을 감사하는 미사를 드려 달라고 청했습니다(샤를 달레, 한국천주교회사(1874))”라고 보고했다. 베르뇌는 “궁중에 머물러 있는 왕의 유모(박씨)도 신자”라고 보고했다. 자신의 아내와 왕의 유모가 신자라는 사실을 대원군이 모르지는 않았다. 대원군은 국내의 천주교 세력을 러시아 견제용으로 활용하려고 계획했다. 베르뇌는 대원군이 “내(베르뇌)가 만일 러시아 사람들을 쫓아낼 수만 있다면 종교 자유를 주겠다”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에 고무된 천주교 지도자 홍봉주(洪鳳周)는 대원군에게 접근했다. 김대건이 기해박해 때 부친을 잃은 것처럼 홍봉주도 신유박해 때 조부를 잃고 기해박해 때 부친과 모친 정소사(丁召史:정약용의 조카)를 잃은 순교자 집안이었다. 홍봉주는 영국·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해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저지한다는 ‘방아책(防俄策:러시아를 막는 방책)’을 작성해 대원군 딸의 시아버지인 조기진(趙基晉)을 통해 대원군에게 제출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이 편지를 읽고 또 읽고 하더니 아무 말 없이 깔고 앉았다(샤를 달레, 한국천주교회사)”는 기록처럼 답변을 보류했다.
그때 대원군의 부인 민씨가 “내 남편에게 편지를 한 번 더 올리라”고 권유해 전 승지 남종삼(南鍾三)이 다시 대원군을 만났다. 5~6명의 대신과 함께 남종삼을 만난 대원군은 “프랑스 주교가 러시아를 막을 수 있느냐”고 물었고, 남종삼이 “가능하다”고 답하자 주교를 만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고 대원군의 태도는 돌변했다. 그 이유에 대해 ‘주교가 지방에서 늦게 상경하자 대원군이 화를 냈기 때문’이라고 전해지고 있지만 그보다는 대왕대비 조씨의 반대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크다.
신앙의 자유를 바라는 천주교도들의 희망과는 정반대로 고종 3년(1866:병인년) 천주교에 대한 대박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남종삼과 홍봉주는 “나라를 팔아먹을 계책을 품고 몰래 외적을 끌어들일 음모를 꾸몄다”고 사형당했다. 대왕대비 조씨는 천주교도들을 “모두 소탕한 뒤에 그치도록 해야 할 것”이라면서 숨겨준 자들까지 ‘코를 베어 죽여야 한다’는 전교를 내렸다. 정조 사후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내린 ‘사학엄금교서’의 복제판이었다. 극단적인 공포정치가 자행됐는데 박제형(朴齊炯)은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1886)에서 “나라 안을 크게 수색하니 포승에 결박된 죄인이 길에서 서로 바라보일 정도였고, 포도청 옥이 가득 차 이루 재결(裁決)할 수 없었다…시체를 수구문(水口門) 밖에다 버려서 산같이 쌓이니 백성들이 벌벌 떨며 위령(威令)을 더욱 두려워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 조선 입국 21년째인 다블뤼 주교가 유창한 조선어로 천주교 교리를 변호한 뒤 사형당한 것을 비롯해 프랑스 선교사 9명과 8000여 명에 달하는 조선인 신자들이 사형당했다.
대원군은 남인을 자처했지만 정조 때 남인들이 지녔던 개방성과는 전혀 다른 노론 벽파식 정치행태를 자행한 것이다. 이때 조선인 천주교도의 보호로 겨우 목숨을 건진 리델 신부가 청나라 산동반도의 지부(芝<7F58>)로 탈출해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프랑스 신부 처형 사실을 전하면서 병인양요의 서막이 올랐다. 주청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가 청나라 공친왕(恭親王)에게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 호조(護照:여권) 발급을 요청하자 청의 총리아문은 “조선은 중국에 조공은 바치지만 일체의 국사를 자주(自主)하고 있다”고 거부했다.
그러자 프랑스는 직접 조선 원정을 감행했다. 7척의 함선에 1500여 명 규모의 프랑스 함대는 강화도 갑곶이(甲串鎭)와 김포의 문수산성을 점령하고 학살 책임자 처벌과 조선·프랑스 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의 양헌수(梁憲洙)가 이끄는 결사대가 그믐밤에 강화도 정족산성을 장악하자 강화도의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해 퇴각했다. 같은 해(1866) 8월 평양 대동강에서 평양감사 박규수(朴珪壽)는 화공(火攻)으로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를 소각하고 선원 24명을 몰살시켰다. 고종 8년(1871:신미년) 미국의 로저스 제독은 5척의 함선에 1200여 명의 군사로 조선을 공격했다. 이 신미양요도 미국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돌아갔지만 강화도 광성보(廣城堡)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은 데 비해 조선군은 350여 명이 전사했다는 사료도 있을 정도로 큰 피해를 보았다. 내용은 조선의 패전이지만 형식은 승전이었다. 이때 대원군이 형식상 승전의 여세를 몰아 개국을 단행했다면 조선은 서구 열강과 평등한 조약을 맺는 최초의 동양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형식상 승전에 고무된 대원군은 그해 8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主和賣國]”이란 내용의 척화비(斥和碑)를 전국 각지에 세웠다. 대원군은 군사력으로 쇄국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망상을 품었고 막대한 군사비를 조달하기 위해 환곡제를 부활시켜 자신의 개혁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호포제와 서원 철폐로 양반 사대부들의 지지를 잃은 데다 경복궁 중건, 환곡제 부활 등으로 상민들의 지지까지 상실했다.
드디어 고종 10년(1873) 10월 25일 동부승지 최익현(崔益鉉)이 “나라[公]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괴격(乖激:이지러지고 과격함)하다고 하고 개인[私]을 섬기는 사람은 뜻을 얻습니다. 염치없는 사람은 때를 얻고, 지조 있는 사람은 죽게 됩니다”라는 대원군 공격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 대해 고종이 뜻밖에도 “매우 가상하다”면서 호조참판을 제수했다. 황현(黃玹)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이때 대원군은 분통을 참지 못해 문을 닫고 앉아서 정사를 사절했지만 고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전한다. 쇄국론자 대원군이 쇄국론자 최익현의 상소로 무너진 것은 대원군 정치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고종은 자신을 국왕으로 만들어준 부친을 버리는 것으로 즉위 10년 만에 정치 전면에 비로소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