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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X. 역사비평학은 원칙상 과학적으로 신뢰할만 하고, 객관적인 성경해석을 통해 복음전파에 일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이 의도하는 것과 현실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다.
지금까지 고찰한 바에 의하면, 하나님 말씀이 그러한 식으로 취급이 된다면 복음전파에 일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복음 전파를 가로막지는 않는다손 치더라도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이 명백하다. 또한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성서해석에 관한한 객관성과 과학적인 신뢰성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관적인 생각을 배제하고 여러가지 논거들을 심사숙고하여 논리적으로 진리를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1. 이론과 실제, 그리고 이상과 현실의 모순은 벌써 관계문헌을 다룰 때 나타난다.
이론상으로는 역사비평학적인 모든 관계문헌들을 자신이 다루는 테마에 참작을 해야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관계문헌이 계속적으로 홍수처럼 불어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1) 시간부족으로 할 수 없이 자의적으로 선별을 해야한다. 일반적인 경계선은 1900년, 혹은 1945년으로 잡는데, 1900년 이전의 책들은 매우 적게 사용되고, 1900-1945년 사이의 책들은 역사비평신학의 고전으로 통하는 책들만이 선정된다.
(2) 오늘날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역사비평신학이 가르쳐 지므로, 이 분야에서 발행되는 책들은 자신이 이 책이 쓰여진 언어를 모르면 읽을 수가 없다. 단지 이러한 이유만으로도 모든 중요한 관계문헌들을 다룰 수가 없다. 불어권 서적만 하더라도 영어권이나 독일어권 학자들은 언어장벽으로 인해 단지 중요한 고전만 참조로 할 뿐이다. 과연 누가 현대 그리이스어, 스페인어, 일본어로 된 책을 읽기위해 언어를 별도로 배우겠는가? 이렇게 언어장벽으로 인해 읽혀지지 않는 책들은 진리를 밝혀내고자 하는 탐구에서 처음부터 제외가 된다.
(3) 그 외에도 유명한 외국 서적들은, 자기가 그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책을 구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보통 3개월 이상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자신이 구할 수 있는 문헌에 제한을 둘 수 밖에 없다.
(4) 이러한 문헌의 홍수를 극복하기 위해 근래에 점차로 많이 사용되는 보조수단은, 주로 언어학자에 의해 많이 사용되는데, 이것은 같은 방법론을 사용하지 않는 참고문헌들은 제외가 되어있다.
(5) 따라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가진 기교가 점차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자신이 다루는 테마의 성격상 밀도있게 다루어야 할 문헌들을 단지 한 두줄로 표기를 한다거나, 아니면 단지 몇 줄로 왜곡하여 평가해서, 그 책에 대해 논의가 될 필요성이 더 이상 없게 만들어 버린다. 그렇지 않으면 책의 출판이 몇 년 늦어질 것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상을 참작한다면 그러한 것쯤은 눈감아 줄 수가 있다. 그러나 유명한 대학의 신학과에서 박사학위 논문이나 교수자격논문으로 인정된 것은 당연히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의심없이 관계문헌에 속하게 된다. 아마도 이 사실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관계문헌 사용방법을 두고 볼 때에도 역사비평신학의 객관성에 대해서는 의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2. 비판적인 논거를 근거로 진리를 찾겠다는 생각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1) 자신의 이론에 반대되는 가설이 등장하면 일반적으로 자기의 설을 옹호하는 반대 가설에 필적할 만한 논거를 세운다. 반대되는 가설의 형태와 근거를 자신의 논리로 바라보면 누구에게나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할만 한 것이 발견된다. 반대가 되는 논리라도 자신의 이론의 틀에서 검토를 하게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릇된 것으로 판정이 난다. 따라서 이러한 검토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이론을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흐른다. 역사비평학적 성서주석에 있어서 자신의 주장을 불안정한 것으로 인정하여 토론에 붙이고자 하는 자세가 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이러한 방법으로 진리를 찾아 내고자하는 의도가 아니다.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경우에는 –유명한 학자에게는 그런 경우가 별로 없지만 – 또 다시 새로운 의견을 뒷받침할 만한 좋은 논거가 등장한다. 이것은 이성이 창녀와 같기 때문이다.
(2) 실제적으로는 학자들 서로간에서는 자신의 입장을 굳히는 쪽으로 흐른다.
자신의 학설에 반대하는 논문을 전해 받고서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한다: „당신의 이론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이론에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이론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실 답변자가 잘못했다기 보다는 실상을 알면 이해가 가는 일이다: 교수는 꽤 넓은 분야를 담당해야 하고 신 구약 전 범위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학문적 연구를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가 현재 연구하고 있는 작은 특수한 분야에서만 그 질문에 전문적인 대답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분야에서 조차도 그는 지금까지 진행하고 있는 연구에 발이 묶여서, 그가 만약 새로운 생각을 받아 들인다면 그것은 막대한 분량의 새로운 작업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수는 평소에 할 일이 많다: 가르치는 것, 행정적 사무, 졸업시험생과 박사학위논문을 돌보는 것, 자신이 집필하고 있는 책을 완성하는 것, 혹은 전문잡지의 발행인으로서의 일 등으로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다.
이미 자신의 학설을 갖고있는 학자들이 새로운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러한 이유로 자의적일 수 밖에 없다. 저작자의 이름이나 그가 속한 학파가 그것들이 어떻게 받아 들여질 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X. 소장학자들 사이에서 (역자 주: 대략 1970년대 이후 신학자) 점차로 진리를 찾는 일에 포기하는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그들은 주관성 논리에 소진되어 있다. 그들은 사실 신학에 있어서 과학적인 방법을 적용하는 것을 포기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스스로는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한다. 여기서 우리는 솔직하게 과학이란 자기실현의 방편이 아닌지를 자문자답해야 한다. 이러한 신학과에서 공부한 사람들에게만 목사자격증을 주는 이러한 제도에서, 신학과가 과연 그가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양심을 갖고 하고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XI. 소장학자들에게는 신학이 사회주의적 해석으로 변화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구속대신에 세상을 개선시키자는 인간적 목적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것은 소위 „역사적 예수“라는 자의적으로 선택한 진실이 은폐된 용어이며, 이것은 경우에 따라 사회개혁자나 혁명가로 해석이 된다.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본문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25,37)와 세계심판(마 25:31-46), 안식일에 관한 예수님 말씀(막 2,27-28. 이 경우 인자라는 말을 단지 인간이라는 말로 대치한다), 세리와 죄인과의 예수님의 식탁 공동체(막2,15-17 등) 인바, 그들은 이러한 본문들을 예수께서 부조리한 사회 구조를 변화시켰으며 우리도 이렇게 예수와 같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목적으로 사용한다.
이러한 류의 기형적 신학의 특징은, 구약을 우리와 상관이 없는 문서로 간주하여 제대로 취급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약은 –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 당시 가부장적 사회 구조와 농민적 생산상태에서 나온 결과물이자 그들의 정신적 구조를 나타내는 것이며, 이러한 구조를 변호하고 안정시키기 위한 기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에 의하면, 십계명 조차도 우리들에게 구속력이 없는 것이며, 예수가 그것을 사랑의 계명으로 대치시켰다는 것이다. 그들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 말씀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육적으로 판단이 되는 것이다.
예언자들은 사회혁명가로 구분되며,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예는 선지자 아모스이다.
역사비평신학의 예
I. 모든 과학 분야에서 실행되는 것과 같이 신학도 가설로 시작이 된다.
가설이란 어떤 것이 어떠하다고 가정해 보는 것이다. 자연과학에서는 경험을 기초로 하나의 법칙을 추출해내어 그것을 실험을 통해 확증한다. 이에 정신과학에서는 가설이 자연과학과 같은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검증될 수도 없는 것이다.
구약학과 신약학은 주로 역사학과 문학비평의 방법론을 자신에게 나름대로 적용을 시키고 있다.
1. 역사학에서는 발굴된 사물이나 문서를 먼저 그들이 발생된 시대를 확정하여 지나간 한 시대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기 위한 근거로 사용한다. 이렇게 시대를 확정할 때는 추정을 근거로 한다: 시대 확정은 여러가지 가정을 종합한 것의 산물이다. 다음의 두 가지 예를 들어서 이것이 신학의 방법론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살펴본다.
(1) 열처녀의 비유가(마 25,1-13) 예수님이 말씀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에서 탄생된 것이라고 일단 추측을 한다면, 학자는 이 비유를 다른 맥락으로 종속시킨다. 그리고 그는 이 비유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얻지 않고 초대교회에 대한 정보만을 얻게된다. 그는 이 비유를 이해(해석)하는데 있어서 이미 알려진 예수님에 관한 정보를 사용하지 않고 초대교회에 대해 알려진 정보를 사용한다. (역자 주: 따라서 출발점이 잘못되었으므로 결론도 당연히 틀리다. 그런데 이 결론을 출발점으로 삼아 또 다른 결론을 도출해낸다)
(2) 요한복음과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요한복음의 저자가 예수님의 제자인 요한이 아니라고 추측하면, 이 추측은 일련의 계속되는 추측을 낳게된다: 이 경우에는 요한이 예수의 말이라고 전달하는 것이 예수의 말이 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는 요한복음을 작성하는데에 있어서 다른 문서(혹은 구전)를 참조한 것이다. 그 다음 즉시로 다음의 질문이 제기된다: 어떠한 종류의 문서가 사용이 되었는가? 그 다음에는 이 문서와 요한복음서와의 차이점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요한의 신학과 그의 경향성을 추측해 내야하고, 그가 어느 그룹(파)에 속하였는지를 찾아내야 한다. 그렇다보면 종교사적 배경의 문제가 등장한다(이 경우에는 요한복음과, 그가 사용한 문서를 별도로 취급한다): 종교사적 배경 중에서 어떤 것이 요한복음 저자에게 영향을 미쳤는가? 영지주의? 쿰란? 영지주의 경향이 있는 유대교? 아니면 그는 단지 구약에서만 영향을 받았는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면 그와 영지주의와의 관계는? 그것을 수용했는지? 비판했는지? 혹은 논쟁했는지?
2. 문학비평에서는 가설이 다른 기능을 한다. 여기에서는 „본문“의 구조와 전승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찾는다.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본문이 구전되었는가? 아니면 처음부터 문서화 되었는지? 아니면 구전과 문서화가 동시에 이루어 졌는지? 문학적으로 일관성이 있는지? (역자 주: 만약 본문이 문학적으로 일관성이 없다면 본문이 전승되어 오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이 추가를 한 것이다) 본문의 구성을 위해 다른 문서를 사용하였는가? 전승의 연속성이 있는가? 아니면 단편적인 전승인가? 문학적으로 볼 때 어떤 다른 문서와 연관이 있는가? 이 본문은 이후에 누가 변형을 시켰는가? 아니면 몇 사람이 시간의 간격을 두고 변형시켰는가? 양식이 형성되는데 있어서 그 구성을 특징지을 수 있는 법칙성이 있는가?
이 질문들은 내가 두서없이 열거한 것이다. 각각의 이러한 질문에는 추측을 통해 답변이 주어진다. 이 답변들은 검증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들은 단지 어느 정도 설득력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추측은, 여러가지 논거를 들어 그 추측에 근거를 내 놓을 수 있는 학자의 재량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러한 추측은 다른 학자들이 수용할 만한 것이 되어서 마침내 어느정도 인정이 된 추측들의 큰 집합체 속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다시 말하면 그 추측은 지금까지 연구된 것들(추측들의 집합체)과 세밀하게 관련을 지으면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신구약에 있어서의 가설은 스스로를 안정시키는 시스템이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지 않는, 하나님 말씀과의 쓸모없는 유희에 불과하다. 혹시 개중에는 이러한 일들을 통해 하나님을 섬긴다는 믿음으로 하는 학자들이 있을 지라도.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해 많은 작업과 고생을 감수해야 한다. 일주일에 60시간은 보통이며, 이것도 정신적, 육체적 힘이 소진할 때까지 일생을 바쳐야하는 것이다.
성서 학자들의 이러한 일생의 작업이 의미가 있게 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가설이 인정을 받아야한다. 그들은 인간으로 부터 명예를 얻기위해 애써야 한다. 많은 투자와 고생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러한 연구작업은 단지 서로 명예를 주고 받는 시스템이 있어야지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3. 이러한 연구 작업을 통해 신학교수는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확신을 갖게 된다: 신약학, 구약학의 이러한 가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잘 이해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진짜로 이러한 생각에 확신을 갖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확신을 학생들에게 심어줄 만한 능력이 있는 것이다.
학생들은 교수가 일생동안 연구해온 것의 결과를 섭렵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확신에 거할 수가 없게 되어 교수들에게 의지하게 된다. 성령께 도움을 요청하여 진짜로 성령께서 자기에게 하나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성경을 구구절절이 역사비평학적으로 풀어놓은 주석서를 참고하게 된다. 그들은 신학공부를 통해 분문에서 „어려운 부분“을 잘 발견해 낸 다음에 주석서의 도움없이는 본문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잘 길들어져있다.
모든 추측은 연쇄적으로 계속되는 다른 추측을 불러오기 때문에, 하나의 성경말씀을 해석하기 위해 자신이 배운 가설 하나만 기억하면 자연히 주석서를 참고하려는 생각을 갖게된다.
따라서 대학에서 공부를 한 대부분의 목사는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할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단지 역사비평 신학을 통해서 만이 성서가 이해될 수 있다는 자신이 교수에게 물려받은 확신을 교인들에게도 물려주며, 그가 대학에서 배운대로 말씀을 솎아내어 가르친다.
그가 이러한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을 많이 기울인 만큼, 그만큼 그의 지식은 귀한 것이다. 그 외에도 그의 지식은 그에게 학생들로부터, 혹은 교인들로 부터 인정을 받는 명예도 가져다준다.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 하나님 말씀과 교제를 한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목사에게는 그러한 명예가 주어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분이 원하시는 자에게 자의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즉 말씀박사는 없는 것이다.
학생이나 교인들은 목사의 전문성에 위압이 들어 스스로도 하나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는 자기 신뢰를 잊어버리게 되어 말씀과의 교제로 인한 기쁨마저 잃게된다.
II. (소위)과학적인 연구를 하는 대학에서 보다 더 많이 믿어지는 곳은 없다. 적어도 신학공부에서는 그렇다.
1. 각각의 가설에는 논거들이 근거를 이루고 있지만, 평범한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수한 학생들 까지도 그 논거들을 소화시킬 만한 능력이 없는 연고로 가설들의 80-90%를 인정하게 되는데, 그나마 반수 이상의 학생들은 그 논거를 알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강의나 세미나시간에 비교적 새롭거나 일반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명제(주제)가 소개될 때에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출수 있는 정도에서만 논거들이 주어진다. 혹은 반대되는 의견이 나왔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학설을 배우기 위한 면밀한 연구가 행하여지는 경우가 있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과학이란 건물은 많은 수의 가설로 지어져 있기 때문이며, 이 가설들의 하나 하나에는 그것을 지탱하기 위해서 수많은 논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2. „일반적 합의“의 성격을 가진 일련의 „기초 전제“들, 즉 학자들 사이에서 보편적 동의가 되어있는 그러한 것들은 하나의 틀을 구성하게 되는데, 학생들에게 이러한 틀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 강의나 세미나에서 정보를 받아들이거나 이용을 할 수가 없다.
이러한 기초 전제들은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실제적으로는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즉 학자들이 이것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생각한다. 이로한 기초 전제들을 자신의 생각에 깊이 연관을 시키는 자들은 자신이 그것들에 의해 형성이 되어가고 변화가 되어간다.
그러므로 신학공부의 위험은 대단히 크다. 왜냐하면 이러한 변화는 필연적으로, 그리고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치명적인 일산화탄소가 있는 곳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만약 하나님의 은혜가 특별하게 임해서 그들을 돕지 않는다면 이것은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3. 과학적 연구의 객관성이란 하나의 허구이다.
실제로는 비과학적인 요소들이 큰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그룹을 지어 연구하는 것, 개인지도, 학자의 이름, 전문잡지의 발행인, 요직에 있는 교수, 유명한 기관의 교장 등이다.
4. 신학생은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가 받아들이는 정보는 이미 선별이 된 것이다. 이 선별의 기준(필터)은 교수에 의해 형성되어진다.
(1) 대학교의 선택은 학생의 신학적인 방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학생이 그 대학의 방향을 잘 모르고 대학을 다른 기준에 의해 선택하기 때문이다.
(2) 또한 이 필터는 학생이 제한된 시간내에 자신이 읽을 수 있는 책들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생기게 된다. 학생은 많은 양의 책을 읽을 수 없으므로 일반적으로 자신이 방문한 강의나 세미나에서 추천되는 것에 국한된다. 그가 추천되는 것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읽고 싶은 책들이 있어도 그에게는 여의치가 않다. 대학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 있는 책들은 이미 특정한 방향에 의해 선정된 것이다. 성서에 충실한 저자들의 책들은 금기로 되어있다. 일군의 출판사에서 발행되는 책들은 이예 처음부터 과학적인 논의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참고문헌 리스트에 누락되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책들이 인용되면 그 학생은 감점을 받을 것이다. 교수들도 그러한 책들을 모르며, 만약 그들도 이러한 책들을 인용한다면 압력을 받게된다. 만약 그렇게 하려면 먼저 책을 구입하여야 하고, 읽고 또 내용을 세밀히 검토해야 한다. 그런데 교수는 어차피 시간이 없기 때문에 애당초 그러한 책들을 의심하여 일반적으로 거부한다.
(3) 오늘날에는 학생들에게 세미나 과정에서 연구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연구라는 것이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단순한 일들을 넘겨받는 것으로서, 그 일이란 교수가 이미 결론을 내린 것으로서 단순작업이 요구되는 일들로서 교수가 정해준 자료를 갖고 일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아이들이 레고를 갖고 어떠한 특정한 건물을 모델을 본따서 그대로 짓는 것과 같다. 물론 학생이 한 일의 결과가 교수가 이미 내린 결론과 일치하지 않을 수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이미 내린 결론을 바꾸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교수는 그 학생을 자기 논리에 맞게 쉽게 설득을 시킨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예측된 결론이 더 확고하게 증명된다: 그런데 그 학생은 „스스로를 확신시킨 것“ 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반항자들은 시스템속으로 몰아넣어 버린다. 학자로서 인정을 받고자하는 명예심도 여기에 한 몫을 한다.
III. 교과 과정은 제 2차적인 사회화의 성격을 갖고 있다.
학생은 교과 과정에 맞게 형성이 된다. 그는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으며, 어떤 일이 행하여 지는지를 전혀 모르는 신생아처럼 대학문을 두드린다. 그는 인정을 받기 위해 부지런히 법칙과 관습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며 학업에 필요한 여러가지 지식과 능력을 습득해야 한다.
1. 학생은 정보의 홍수로 인해 압박을 받는다. 교수는 강의나 세미나에서 자신이 일생동안 연구한 것의 결과를 펼쳐놓는다. 그 연구 결과는 몇세대의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한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교수의 연구결과를 가능케한 방법론을 배우는 것 만으로도 벅차다.
이렇게 필요한 정보를 빨리 처리해야 하는 마당에서는, 자신이 그 동안 믿고 있었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를 계속 붙잡고 있기는 어려운 일이다. 더우기 그것들이 비 과학적인 것으로 평가절하되는 곳에서는. 믿음이 있는 학생들은 상급생들이나 교수들로 부터 다음과 같은 반응을 야기시킨다:
무시: 당신은 점차로 배우게 될 것이요!
시험: 적어도 이론적으로 라도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시오!
도전과 유혹: 당신이 그러한 생각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당신의 믿음이 그렇게 약하며 믿음이 그렇게 없소?
이렇게 되어 학생은 자신이 하나님 말씀에서 배운 것과 반대되는 생각들을 섭렵하게 된다.
2. 학생은 항상 그룹의 압박 밑에서 있어야 한다.
특히 상급생이나 특별히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이러한 사회화에 결정적으로 공헌을 한다. 그들은 교수와 함께 학생을 교육시킨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자신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역사비평 신학의 결과나 다른 특별한 방법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믿음이 있는 학생들은 대부분 차별대우를 받는다. 그는 비웃음, 경멸을 당하고 이방인으로 취급을 당한다. 속마음으로는 존경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가 자신의 의견을 논리정연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혹시 여기 저기서 존경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견해가 동등하게 인정을 받는 경우는 극소수이며, 이 경우에는 그의 견해가 과학적 연구의 결과로 이루어진 전통의 맥락에 어느정도 근접한 경우일 뿐이다.
3. 학생이 역사비평적 생각에 빠지면 빠져들수록, 그는 자신이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믿음의 동료들과 멀어지게 된다. 이들은 이제 더 이상 그 신학생 친구와 대등하게 이야기 할 수가 없게 되고, 그는 그들의 의견을 듣기가 거북해진다. 그는 그들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게되고, 그들도 그를 이해할 수 없게된다. 그는 고립되고, 자신이 우월감을 갖게 되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는 학교에서 교수와 다른 학생들에게 받는 압력에 점차로 약하게 되어 마침내 그들에게 굴복하게 된다.
4. 학생은 자신이 역사비평 신학의 연구방법을 충분히 습득했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 연구 레포트를 제출해야 한다. 그는 스스로 역사비평적으로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글을 쓰도록 강제를 당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은혜 없이는 자신의 생각과 믿음에 중대한 변화를 주게된다. 그는 더이상 과거의 그가 아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도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그가 말씀을 자신의 신앙을 위해 읽을 때도 그렇게 된다.
IV. 기독교 문서를 다루는데 있어서 역사비평 신학에서는 영지주의 연구에서 위형 (Pseudomorphose, 僞形)이라고 호칭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위형이라는 말은 개념이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를 말한다. 이러한 의미의 변질은 신학이라는 과학에 한 걸음씩 침투해오는 현상이다. 믿음으로 얻는 의, 대리, 은혜, 구속, 해방, 원죄, 믿음, 기도,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됨 등과 같은 성서적 개념은 계속적으로 사용되기는 하지만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예를 들어, 하나님으로 부터 오신 하나님, 빛으로 부터 오신 빛, 진정한 하나님으로 부터 오신 진정한 하나님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역사적 예수“는 무언가 특별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단순한 기호에 불과하다. 즉 그는 역사상의 일반 위인과는 구분되며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한다는 무언가 특별한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각 시대는 그 시대 나름대로의 운명이 있고, 그러므로 나름대로의 기독론을 만들어 내야한다는 이론이 나오게되는 것이다. 나는 30년 이래로 이러한 용어에 익숙해져 있다. 나는 전에 직접 그러한 것을 가르쳤고 매우 진지하게 그러한 기독론을 기다려 왔지만 허사였다. 그래서 그러한 용어는, 우리의 주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미 지나간 시대의 기독론으로 치부하는 면허장에 불과하다는 것이 입증이 되었다.
사람들은 메시아,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은 단지 칭호에 불과하다고 한다. 구원자라는 말도 예수님을 추종했던 초대 기독교의 여러 그룹들이, 이 칭호를 구원과 관계짓는 이방인들에게 예수의 특별성을 알리기 위해서 사용했다고 한다. 그들은 오늘날, 예수는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그러한 칭호를 통해 업그레이드 되었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누구나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당연히 그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단순한 믿음을 떠나서 피해를 입게된다. „당신은 믿는대로 소유를 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마틴 루터는 올바르게 지적했다. 내가 만약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반만 믿는다면, 나는 그 분이 나를 위해 이루신 것을 반만 믿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단지 내가 믿는 만큼 체험하게 되고, 내가 역사비평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 분의 축복이나 그 분과의 교제에 결핍이 생긴다. 우리는 예수님이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이신 사실로부터 물러서면 안된다.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우리를 단순한 용어를 사실로 착각하는(역자 주: 구원자라는 용어를 실제로 구원자라고 생각하는), 골동품과 같고 말도 안되는 철학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난을 할 지라도.
단 한가지 이러한 의미변질이 되지 않는 것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피“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주장함으로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피에 관한 이야기는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 피를 흘리는 제사가 빈번했던 시절에나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단지 성령만이 우리가 이러한 의미변질을 궤뚤어 볼 수있는 능력을 주실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한다. 그것들은 우리들의 적들의 거짓 그물과 같은 것으로 매우 정교하게 짜여져 있어 성령의 도움만으로 그것을 빠져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속아서는 안된다. 신학교수는 자신들이 가르치는 대로 믿는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은혜로 그곳을 빠져 나가게 해서 어두움의 권능으로부터 빼내어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의 왕국으로 데려오실 때까지는 그들 스스로도 이러한 거짓 그물에 걸려있는 것이다.
과거의 개념들은 그것들이 과거에 사용되었던 그대로는 현대인들에게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므로 고대인이 말하고자 했던 것을 오늘의 상황으로 의미를 바꾸어 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 말씀에서 말해진 것과 의미하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6-17)
사람들은 우리의 주 예수가 교회가 고백하는 대로 하나님이신 동시에 인간인 고로 성경도 하나님 말씀인 동시에 인간의 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고백에는 „섞이지 않고 구분이 되지 않는“ 이라는 말이 이어진다. 그러므로 시공에 제한된 인간의 언어와 영원하신 하나님 말씀과의 사이를 구분하는 것은 허용되지도 않을 뿐더러 가능하지도 않다.
철 부스러기와 톱밥을 섞어 놓으면 나는 철을 자석으로 가려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유효한 하나님 말씀과 시간의 제한을 받는 인간의 언어의 혼합으로 간주하여 그것을 가려내야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역사비평 신학의 결과들
이 글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구원키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독약이 든 병에 알맞는 표시를 붙여 놓듯이 역사비평 신학의 시스템의 위험성을 잘 표시를 해서 누구도 실수로 그 독약을 마신다거나, 그것을 통해 자기가 좋은 약을 먹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누가 신학공부가 어떤 것인가를 알고 있다면, 하나님 으로부터 목사나 선교사, 교사로 부르심을 받았을 경우 당연히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세상에서 좋은 보수를 받고,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서라면 가능하다면 대학에 다녀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집은 세상이 아니라,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 우리는 세상과 함께 하지 말라고 명함을 받았다(롬12:2).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요15:19; 요일3:1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군사는 진군 명령이 없이는 움직여서는 안된다. 적진에 뛰어드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만약 그가 그러한 행동을 한다면, 상당히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이러한 신학을 공부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서 있는 젊은이는 자신의 계획을 일단 단념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신학공부가 하나님의 뜻인지를 물어 보아야 한다. 그는 주님이 그를 하나의 „마디“(엪4,16)로서 뿐만 아니라, 분명히 그러한 학문으로서의 신학의 길로 부르셨는지에 대해 확증이 있어야 한다. 주님이 부르신 자는 용기를 갖고 신학공부를 해야한다. 그는 그를 부르신 왕의 사자로서 왕께서 그를 그러한 곳에서도 보호해 주실 것이다. 단지 그는 군사가 적진에서 하듯이 매우 조심스럽게 처신을 해야할 것이다.
이러한 신학공부에 부르심이 없는 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사람을 자신의 일을 위해 준비시키는 여러가지 길과 가능성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셉은 바로의 왕국에서 제 2인자가 되기 위하여 왕립 행정 아카데미에서가 아니라 왕의 감옥에서 교육을 받았다.
모세는 바로의 딸의 아들로서 애굽의 모든 학문과 지혜로 교육을 받았지만, 하나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내기 위해서는 40년간을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치기로서 교육을 받았다.
여호수아는 수십년 동안 모세의 수종으로 일을 함으로써 준비가 되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잠23:26)
번역자:
송다니엘. 하이델베르크 한인교회(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