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루 라이또 요꼬하마’
곽구영
문학세계 2008년 등단
주한 라오스문화원장
(전) 호산대학교수
경제학 박사
오늘에야 이 노래를 부른 일본가수가 ‘이시다 아유미’인 것을 알았다. ‘부루 라이또 요꼬하마’ 노래는 48년 전 대학 시절 친구와 함께 하숙집에서 호기심으로 부른 노래였다. 식민지 강점기 36년 동안 일본의 지배를 생각하면 당시 일본 노래는 그다지 듣기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1965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한일협정 조인을 한 이후, 경제적인 이유로 해서 일본을 알고 배워야 한다는 기류가 뜨게 되었고 일본노래를 듣거나 부르는 것에 별로 죄의식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이 노래가사에 나오는 ‘부루 라이또’ 단어 자체가 영어로 ‘푸른 등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익힐 수 있었다. 하여튼 어릴 때 어머니께서 부르시던 일본노래를 제외하면 젊은 시절 가장 먼저 불러 본 일본노래였다.
마찌노 아까닝가 ‘街の燈りが とてもきれいね’
돗데모 기레이네 요꼬하마
부루 라이또 요꼬하마 ∙∙∙
(거리의 불빛이 참 아름다운.. 요코하마
푸른 불빛의 요꼬하마)
오랜 기다림 속에 모처럼 찾아 온 요꼬하마의 밤이었다. 요꼬하마 항구의 밤은 정말 푸른 불빛으로 가득 차 있는지? 도쿄와 요코하마 중간에 있는 공업 도시 가와사키에서 사위와 함께 전철을 타니 30분 만에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전차역에서 내려 항구 쪽으로 걸어가는 중간에 현대식 고층건물로 지어진 ‘퀸즈 스퀘어’에는 젊은이들이 푸른 조명 아래 불쇼와 마술공연 등 거리공연을 하고 있었고 해변에 도착하니 푸른 가로등이 차겁지만, 화려하게 길거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해변공원으로 꾸며진 니혼마루 메모리얼 파크(日本丸メモリアルパーク)는 연인들과 가족들이 겨울의 푸른 야경을 즐기고 있었다. 미나토미라이 21 지구에 최초로 조성된 공원이다. 범선 니혼마루(日本丸)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일본의 근대선박과 항해사를 기념하는 박물관과 옛 조선소의 도크에는 1930년대에 만들어진 훈련용 범선 니혼마루(日本丸)를 영구 정박시켜 공개하고 있다. 일본의 바다를 개척한 역사를 품고 있는 공원에서는 가끔 연주회나 전시회도 열린단다. 저녁이 되면 니혼마루 범선과 미나토미라이 야경이 아름다워 기념사진을 찍기에도 좋은 곳이다. 100여 년 전 역사적인 항구를 기억하는 도로변 건물 하나는 전체를 푸른 색 조명으로 비추어 그야말로 ‘부루 라이또 요꼬하마’ 야경을 기억할 수 있게 하였다.
맘 한구석에서는 그 옛날 나가사키 항구 개항기에 미국 병사와 게이샤의 사랑이야기인 오페라 ‘나비부인’ 같은 연극이라도 혹시 볼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그런 공연은 없었다. 푸른 가로등을 배경으로 연인들이 회전목마, 대형 하늘 물레방아를 타는 낭만의 해변이었다.
그림 1 - 퀸즈 스퀘어의 공연.
그림 2 - 푸른 요코하마의 야경
그림 3 - 범선을 배경으로 한 필자
그림 4 - 니혼마루 범선
패전 후 미군의 상륙지로 가난 속에서 복구를 기약하던 슬픈 기억을 간직한 요꼬하마 항구는 나에게 어떻게 다가왔는가? 45년 전, 1972년 8월 대학교 4학년 때, 어려운 출국 수속을 하느라고 기말시험도 놓치고 외국 여행이 하고 싶던 시절이 생각났다. 해외여행이 무척 힘든 그 시절 나는 어떻게 20일 동안이나 일본 중요지를 여행할 기회를 가졌는지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일본국제학생회의 한국 대학생 대표로 선발되어 초청장은 받았지만, 대학총장 추천서, 문교부 장관 추천서, 군미필자로서 국방부 장관의 조건부 허가서, 외무부 장관 허가 등, 해외여행 준비서류는 첩첩산중을 헤쳐 나가는 듯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드디어 나는 평생 처음 지금은 센텀 번화가로 변한 부산 수영 공항에서 대한항공 비행기에 몸을 싣고 국제학생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예비대회는 큐슈 후쿠오까 유스호스텔에서 개최되었는데, 한국대학생대표 10명이 참가한 것을 외무부에서 일본영사관으로 알려주었는지 영사께서 미리 오셔서 우리를 찾았다. 아직 학생 신분인 우리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오셨다는데 마침 그 영사님은 고등학교 은사님이셨고 우리는 무척 반갑게 옛이야기를 나누었다. 젊은 대학생들이 어렵게 일본까지 와서 세계 여러 나라 학생들과 교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축하한다고 하시면서 앞으로 한국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로 역할을 잘 해주기를 기대한다고 말씀하셨다.
3일간의 지방행사를 마치고 우리는 시모노세키에서 밤기차를 타고 도쿄에서 열리는 일본전국 국제행사에 참가하게 되었다. 밤새 달린 기차는 오사카를 거쳐 8시간을 만에 도쿄역에 도착하니 새벽이었다. 환경문제를 주제로 각국의 입장을 영어로 발표하고 토론하는 2일간의 대회를 마치고 3일 째는 도쿄 시내관광에 나서는데 큐슈에서부터 같이 온 일본 오츠카 아끼오란 친구는 요코하마에 사는 친구 집으로 간다고 했었다.
그때 요코하마를 같이 못 가본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이제 그곳을 간다는 설레임으로 찾아 온 곳이다. ‘불루라이또 요코하마’ 노래라도 불러볼 그 해변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45년이라는 긴 세월의 기다림이었지만, 나는 젊음의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 당시의 패기와 꿈을 되살려보았다.
대학생 시절 처음 일본을 방문한 그 후, 몇 번의 공식, 비공식 방문을 통해 다가 온 일본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는가? 7년 뒤인 1978년 가을, 나는 한국대학원생 대표로 일본 정부 외무성 초청으로 일본을 다시 방문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일본국비로 시찰은 잘하고 왔지만, 정치적인 복선이 깔려있는 일본정부 초청 케이스의 뒷맛은 결코 깔끔하지가 않았다. 일본은 정치학을 전공하는 한국 대학원생 10명을 초청하여 3일간 도쿄 중요지를 구경시켜 주었다. 공식 일정을 마치고 종결회의를 하는데 정부관료 외에 어떤 늙은 교수 한분이 자리를 같이 하더니 상호친선을 위한 주제와는 관계없이 대뜸 한국의 발전은 일본의 덕분이 크다는 주장을 하더니 우리의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는 자리였다. 우리가 자기 제자인 것으로 착각한 듯 당당한 태도였다.
우리 일행들은 기가차서 그 노교수의 눈을 똑 바로 쳐다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보냈다. 싸늘한 분위기 속에 서로가 불편한 자리가 이어지고 시간이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나였다. 나는 그 일본 노교수에게 지금 한국은 통일문제로 큰 고통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가장 힘든 과제인데, 일본의 패망 결과로 이어진 한반도 분단이 일본의 책임이 아닌가 하고 맞받아 질문하였다. 일본은 항상 우리를 얕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자리였고 일본 관료들이나 정치인을 상대할 때는 단단히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국의 발전이 일본 덕분이었다는 그들의 논리는 수많은 조선인 생명과 수탈 그리고 희생을 망각한 한국의 역사와 인격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귀국 한 후 일주일도 못되어 일본 외무성 국장은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발표를 하였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친선을 가장한 그들의 배신에 나는 평생 일본정부란 믿지 못할 정치적 대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요즈음 미국과 북한 간에 핵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한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 대한민국은 일찍이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로 오늘날의 경제발전을 이루어 도시의 외형만으로 볼 때는 일본에 버금가는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이상을 걸고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선택한 북한은 아직도 국민에게 시장경제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 지도자들이 아무리 자기 국민들의 삶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가졌다고 해도 미국은 핵무기를 두고 북한과의 대화는 없다고 못 박고 있다.
조선의 강제 개항과 식민통치라는 어려운 역사를 겪으면서 회복한 민족 생존권을 강조하는 북한의 입장에서 미국과의 타협이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일본이라는 역사적으로 적대감이 팽배한 국가와 교류를 허용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문제일 것이다. 베트남의 도이모이 정책을 본보기로 개혁을 원하는 북한의 입장은 이해할 만하지만, 역사적으로 일본과의 적대감을 영원히 해소하고 동북아 세력균형을 이룰 수 있는 수단으로 핵무기 보유를 이해하여 달라는 북한의 속셈을 미국과 일본이 쉽사리 이해할 것 같지는 않다.
국가 간의 문제와 관련된 운명적인 내 이야기를 또 한 번 하자면, 2007년 노무현 정권 마지막에 미국 부시대통령이 특사를 한국으로 파견하여 북한 핵문제에 대한 한국 리더들의 의견을 들고자 한 일이 있다. 지금은 대구 영남일보 사옥 건물이 된 빌딩 13층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80여 명의 학자 정치인들이 모여서 의견을 발표하였지만, 미국 특사는 모두 부정적인 의견을 말할 뿐이었다. 나는 최종 발표자로서 한반도의 역사적 과거를 설명하고 남한이든 북한이든 먼 미래를 위한 동북아 정치적 평화를 위해서 적대감을 가진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로 북한은 핵을 보유하고자 할 것이라는 입장에 대해서 발언하였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상징적이며, 지역의 항구적 평화를 향하여 미국과 북한은 친선관계를 수립하고 상호 평화 관계를 유지해야한다. 그리고 북핵은 동북아의 역사적, 세계사적 문명의 흐름에서 이해하여야 한다는 발언을 하여 미국특사의 감동적인 공감을 얻어낸 바 있다. 그리고 한 달 뒤 미국 부시정부는 내가 발언한 대로 북핵문제는 동아시아의 문명발달과 역사적인 문제로 해석한다는 내용을 전 세계 미디어로 공표하였다.
지금 남․북 화해, 미․북 간의 대화를 두고 일본은 미국과 어떤 거래를 하고 있을까? 일본은 또 다시 나에게 배신의 나라로 부각되고 있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한국과 상호의존 관계이지만, 일본은 우리 한반도에 대해서 또 다시 힘의 우위를 견지하려는 힘든 거래를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독도에 대한 지속적인 주장, 그리고 징용피해보상에 대한 일본정부의 협박 등을 생각하면서 푸른 요코하마를 다시 생각해 본다. 개항기 일본과 한국의 역사적 그레이트게임, 그리고 그 후의 역사를 다시 생각해 본다. 경제적 개항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북한, 나는 일본과 한반도의 미래에서 어려운 거래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