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정(榴亭) 조동호(趙東祜)는 1892년 8월 4일(음)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 299번지에서 풍양조씨(豊壤趙氏) 조명하(趙明夏)의 3남으로 출생했다. 풍양조씨는 고려시대 풍양현(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능리)에 바위라는 은자(隱者) 한 분이 천마산 지맥인 독정산(獨井山) 암굴(巖窟)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고려태조 왕건이 찾아가 장군을 삼으니 보령 70세였고 모습이 웅위하고 수염이 아름다웠다.
태조의 남정(南征)에 여러 차례의 공을 세워 개국 공신이 되었고 맹(孟)이란 이름을 하사 받았으며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지금의 국무총리)에 이르러 풍양조씨의 시조가 되었다.
풍양조씨는 고려 시대에 중간세계(中間世系)의 실전으로 회양공파(淮陽公派) 평장공파(平章公派, 南原公派)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 호군공파(護軍公派) 금주공파(錦州公派)등 5개공파로 불려온다. 조선왕조에서는 문과 180여명에 정승 7명, 문형 4명 왕비 2명을 비롯하여 많은 문무 백관과 도덕 문장이 배출되어 우리 나라 성씨의 명문으로 일컬어진다.
조동호는 풍양조씨(豊壤趙氏), 회양공파(淮陽公派) 중 청교파(靑橋派)로 24대손이다. 6대손 염휘공(炎暉公)은 대제학(大提學)을 지내신 분인데 4자 1녀를 두셨다. 장자 사충공(思忠公)은 호군공파(護軍公派)의 종가이고 4자 임공은 금주공파(錦州公派)의 종가이며 7대손 회양부사(淮陽府使)였던 신공(愼公)은 3자로 회양공파의 종가(宗家)이다. 17대손 한성부 서윤(漢城府 庶尹) 철명공(哲命公)(영의정 현명의 종형)(領議政 顯命의 從兄)은 청교파(靑橋派) 종가이다. 18대 재우공(載遇公)은 전주부사(全州府使)를 지내셨고 19대 상진공(尙鎭公)은 양전판서(兩全判書)(중국과 조선에서 겸한 판서 즉 양국 판서)(中國과 朝鮮에서 겸한 判書 즉 兩國 判書)와 판돈령부사(判敦寧府使)를 지내신 분이다. 부친 23대손 명하공(趙明夏公)은 청교파 종가(靑橋派 宗家) 철명공의 7대주손(胄孫)이다.
소년 시에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1905년 청산에 사립신명학교(현:청산초등학교)가 개교하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다, 1908년 상경하여 경성측량학교(京城測量學校)에 입학, 1910년 수료, 측량기사가 되었다. 1910년 나라가 일제에 의해 백주에 강탈당하자 1914년 12월 하순 중국으로 망명하여 남경금릉대학 사범과 중문학부(南京金陵大學 師範科 中文學部 현 : 국립남경대학교)에 입학, 1917년 졸업했다. 졸업 후 상해에서 중국인 황자오(黃覺)가 경영하는「구국일보(救國日報)」와「중화신보(中華新報)」기자가 되면서 언론인이 시작되고, 신규식(申圭植), 박은식(朴殷植)등이 창립한 독립단체「동제사(同濟社」이사와 조선사회당(朝鮮社會黨) 조직에 참가, 신규식·박은식·조소앙(趙素昻)·조성환(曺成煥) 등과 중국내 한인민족주의자들이 조직한 항일 독립운동단체로 한국독립을 얻기 위한 독립단체에 몸 바치게 된다.
유정 조동호는 민족의 앞날을 예견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뜨거운 가슴의 독립운동가요 곧은 언론인이었으며 동시에 따듯한 마음을 가진 이 땅의 민중이기도 했다. 그가 온몸을 던졌던 독립운동 31년(1914~1945)의 기간 중에 무려 7년이라는 기간을 감옥에서 보낼 정도로 열정적이었으며 타협을 몰랐다. 우리민족이 일제의 억압에 힘겨워 할 때 누구보다 먼저 독립운동의 길에 뛰어 들었으며 우리민족이 독립되는 그날까지 잠시도 펜을 놓지 않았던 인물이 바로 유정인 것이다.
유정의 글 솜씨는 당시 어떤 문필가보다 뛰어났는데, 그런 모습은 이미 그의 어린 시절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그가 엄덕수(嚴德洙) 훈장의 가르침 아래서 서당을 다니던 시절 큰형님과는 아홉 살, 작은 형님과는 다섯 살 차이인데도 불구하고 셋이 같은 과정을 배울 정도로 명석했으며 문장에 대한 이해와 쓰기가 남달랐다. 당시 영동, 옥천 인근의 한학자들이 모여 시문회(詩文會)를 가졌을 때 모든 이들이 그의 글 솜씨를 보고 놀라워하며 신동(神童)이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독립운동의 길에 투신할 때 몽양 여운형과의 만남이 이렇게 이루어 진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여운형이 1929년 중국에서 체포, 그 해 8월 3일 경성지방법원 법정에서 행해진「조동호의증인신문조서」에 의하면「증인은 여운형을 언제 알았는가?」의 질문에「그 사람은 1907년(명치40년) 경부터 알고 지냈다.」고 답한 것을 보면 유정이 1908년 [국립 측량학교]를 다닐 때 그때쯤 [국립우편학교] 출신인 여운형과 같은 건물에 [국립 측량, 우편학교]에서 알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당시(1910년 전후) 둘의 만남이 빈번했었으며 조국의 독립에 대한 피 끓는 젊음은 두 사람을 더욱 가깝게 만드는 촉매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유정을 이야기할 때 몽양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음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 둘 사이의 끊을 수 없는 우정, 동지애 때문인 것이다. 물론 유정과 몽양은 무려 나이가 여섯 살 차이가 나기는 했다. 하지만 외관상의 이유(유정의 키는 6척(180Cm)에 달했으며 그 외모 또한 숙성해 보여 몽양보다 어려 보이지 않았다 한다. 더불어 내면적으로 성숙했던 유정은 몽양과 같은 위치에서 서로를 바라보았고, 신체 건장하고 가슴이 넓은 몽양의 관대함 또한 동등한 눈높이로 서로를 바라보는데 꼭 필요한 요소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음이다.
둘은 서로의 의견을 터놓고 이야기 했고 그 이야기 속에는 조국의 독립에 대한 여러 가지 방안이 오고 갔다. 결국 유정과 몽양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실행함은 대단히 힘들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중국으로 건너 갈 것을 계획한다. 몽양이 처음엔 미국망명을 생각했는데, 동생인 여운홍이 미국으로 갔으니 중국으로 간 것이라고 후에 회고한바가 있다.
그들이 중국으로 갈 때는 1914년 겨울 흰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압록강 철교를 건넜다. 1915년 1월 유정과 몽양은 남경「금능대학(현:난징대학교(南京大學校)」에 입학하게 되는데 유정은 사범과 중문학부(師範科 中文學部),
※여기에서 요즘 러시아의 모스크바에 '코민테른'에서 개방한 문서 중에 1922년 1월에 당시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서 유정은 56명과 함께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경제,농민,노동자의 상태와 노동자, 농민대중의 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성균관대학 임경석 교수 논문)
그때 참석자 모두는 '조사표'라는 문서에 한글자필로 적은 글에는 '금능대학교 사범학과'라고 적었다. 그러나 여러 문서에는 '중문학부'로 나와 있어 사범과 중문학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귀한 한글자필문서는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인 김희곤 박사가 보내주어 6,25사변 통에 자택을 폭격을 맞은 관계로 친필이 없어 안타깝던 유족에게 큰 기쁨을 주어 감사한 마음 표현 할 길이 없다.
또 근전 김재봉(槿田 金在鳳)선생의 장손인 김 윤(金 潤)(본 기념사업회 고문)선생이 1931년 12월 유정이 안동에 근전선생에게 보낸 '초서서신(草書書信)'도 보내주고, 얼마 전 성균관대학 사학과 전명혁 교수가 자필영문(英文) 문서를 보내주어 이제는 '영문''한문''한글' 친필을 모두 찾아 그 세분에게 감사한 마음 여기에 적는다.
몽양은 영문학 부였다. 당시 「금능대학」은 각 학부별로 특정학점을 이수해야만 졸업이 가능했다는데 유정과 몽양은 낮에 학교에서 공부했던 것을 밤이 되면 서로에게 가르쳐주고 배우는 방식으로 공부하여 정상적으로 걸려야 할 기간의 반 정도를 투자하여 학점을 이수하여 졸업하게 된다. 고국을 떠난 두 젊은이들이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타지에서 공부를 하며 밤을 지새우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서로가 서로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격려를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렇게 둘은 3년의 학업 끝에 1917년 금능대학을 졸업하게 되고 그들이 이곳에서 배웠던 학문, 특히 영어와 중국어는 후에 그들이 독립운동을 하는데 큰 힘이 된다.
그렇게 유학생활을 하면서 유정은 여운형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기독교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여운형의 권유에 유정은 그때부터 기독교에 입문하게 된다. 유정은 곧 중국인이 경영하는 「구국일보(求國日報)」와 「중화신보(中華新報)」에서 기자생활을 하게 된다. 이는 그의 중국어 솜씨가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상해에서 신문기자 생활을 하며 신규식,박은식 등 노장 독립지사를 도우면서 동제사(同濟社:1912년 창설)의 이사로 활약하던 유정과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을 고하게 되면 자연 약소국의 독립문제가 제기될 것으로 믿고 있었기에 매주 토요일을 기해(토요모임) 자발적으로 장덕수(張德洙), 선우혁(鮮于爀), 김철(金澈), 한진교(韓鎭敎) 등 여섯 명이 조촐하게 집결 선후책을 토론한 것이다.
그러다가 1918년 8월 청년학생을 교양하고 그 당원들을 독립운동에 이용할 목적으로 신한청년당(新大韓靑年黨 : 준말)을 창당하게 되는데, 처음엔 조촐하게 모이는 조그만 단체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때마침 1918년 11월 중순경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특사인 크레인(Charles Crane)이 상해에 도착하였다.
크레인의 상해도착 임무는 중국의 대표가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토록 권유하는 업무전달이었다. 크레인의 환영회를 열겠다는 광고가 신문에 나고 회비는 1원이라고 하였다. 이 소식에 동지 여운형은 환영회장을 찾아 칼튼 요정에 갔다. 집회가 끝나자 그는 별실로 크레인을 찾아갔다. 중국인 왕정정(王正廷)이 특별히 소개를 해주었다.
「우리 한국도 피압박 민족이니 이 기회에 해방운동에 참여하고 싶다. 우리도 대표를 파리로 파견하여 우리 민족에 실정을 호소 할 수 있는가?」라고 물으니 크레인은 「그렇다 」고 하면서 크게 원조하겠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너무 감격하여 한국이 독립이나 된 듯이 생각이 들었다. 이 기회에 우리는 일제의 압박과 지배에서 해방되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화회의에 우리도 대표를 파견하여 우리 민족의 참혹상과 일본의 야만적 침략성을 폭로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유정과 몽양 등은 동지들과 협의 했다.
협의 끝에「독립청원서(공고서<控告書>) 」 2통을 작성해서 크레인을 통하여 한 통은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나머지 한 통은 세계평화회의에 전달케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유정과 여운형, 장덕수 3인은 합동으로 상해 프랑스조계 패륵로(貝勒路) 길익리(吉益里) 장덕수의 숙소에서 영문으로 원고를 작성하고, 피치(Fith) 박사의 수정을 받은 다음, 1918년 11월 28일자로 여운형이 신한청년당 대표의 자격으로 서명하였다. 또한 유정 등 신한청년당원들은 우리의 정식 대표를 「파리강화회의 」에 파견할 것을 결의하고 대표의 인선이며, 각국 대표에게 전달할 「독립청원서 」작성 등이 우선 시급하다고 판단되었다. 이렇게 하여 청원서 초안을 창당 멤버들과 심의하였다. 이에 유정 조동호는 중국신문의 기자신분이면서 국제정세감각이 뛰어나 크게 이 문제를 매듭짓는데 주도적인 임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마침내 이들은 이틀간 구수회의를 거친 뒤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를 파견하기로 했으며 대표는 김규식(金奎植)을 선정하였다. 그 이유는 그가 미국 버지니아의 로노크대학 영문과 출신으로 영어에 능했고 정치적인 감각도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하여 김규식은 천진에 있다가 상해로 와서 신한청년당에 입당하게 되었고 1919년 1월말에 파리를 향해 상해를 출발했다.
이 사건의 모든 사연이 일본과 국내로 알려지니, 일본의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 」을 국내에서는 그 유명한 「3.1만세혁명 」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불같이 일어나니, 그 조그만 청년단체가 결국「독립운동지 초성(獨立運動之 初聲) 」을 일으키는 어마어마한 큰일의 촉매가 된 것이다.
1919년, 4월「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그 기관지로 안창호(安昌浩), 이광수(李光洙). 차리석(車利錫), 백성욱(白性郁) 등과 함께 「독립신문」을 창간하게 된 유정은 그 곳에서「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에 참가, 정부 일을 보면서도 이제는 떳떳하게 우리나라의 신문기자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신문을 찍어낼 우리나라 글 즉 한글 활자체들이었다. 중국에선 물론 구하지 못 하고 국내에서 들여오기도 불가능 했으니 한문 외에 활자가 없었다. 1917년 7월 7일 완성한 한일관계사료집 전4권도 한문으로 완성한 것이다. 그러나 유정의 지혜는 여기서도 발휘하게 된다. 한글성경에서 한자 한자 자체를 따서 한글 활자를 고심 끝에 만드는데 성공하여 어렵지 않게 한글혼용「독립신문」을 찍어낼 수 있게 했으니 그의 손 솜씨와 정열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또 그 활자로 「신한청년 창간호」도 발간하게 된다. 창간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어 그 발간의 중요성과 정신은 바로 우리의 「독립운동사」임을 증명한다.
# 편집하고 나서#
창간호를 독립운동 사료로 채운 것은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전 국민에게 우리 독립운동의 진실과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이에 대한 비평을 알리려 함도 있지만 그 보다고 우리 독립선언서의 모든 기록은 정말로 우리다시 일어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적 이상을 표현하는 것이니 이는 만세에 우리국민 생활의 주장이 되고, 표준이 될 것으로「이 책을 각 가정에 보관하고 이 정신을 각 마음에 담아 우리국민의 제일 중요한 일로 생각해야 할 것이 최대 이유인 것 입니다.」 이 편집후기를 쓴 유정의 마음과 글이 바로 「독립운동 정신」인 것이다.
해방의 날을 힘겹게 기다리고 있는 동포들에게 한 가닥 희망이 되어 줄 수 있는 신문을 향한 애착, 비록 식민지하에서의 언론 활동이지만 할 말은 하는 언론인으로서의 자세는 이미 중국에서부터 만들어진 조동호만의 당당한 모습이었다. 특히 1919년 11월 1일 독립신문에 쓰여 진 「독립완성시기」라는 논문은 아주 유명하다. 우리는 어떤 인물을 시대의 선구자로 부를 때 단순히 그의 영웅적인 모습만을 이유로 들지 않는다. 인격적인 면, 지식적인 면 뿐 아니라 시대를 통찰하는 눈,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대를 앞서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을 그 시대의 선구자요, 위인이라 부른다.
지금도 그러지만 당시 모든 한국 사람이나 독립운동가들은 왜인을 「왜놈」이라고 했는데 유정은 말할 때나 글 쓸 때에는 「섬 오랑캐」라고 호칭을 많이 했다. 우리는 단 한편의 논설을 보기만 해도 조동호가 바로 그러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논설은 바로 「독립완성시기」이다. 우리는 이 논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미 1919년에 유정은 미국과 일본의 전쟁을 예견하였으며 이러한 미. 일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에 일본의 자만심은 곧 패망을 부를 것이며 이는 곧 조국독립을 맞게 된다는 확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독립이 되나”, “언제나 저놈들이 다가나” 하는 것이 우리 2천만 동포가 밤낮으로 바라고 축원하는 것이다. 또 미.일 전쟁도 상상치 못할 바는 아니니 1년 내에 못하면 2년 그도 못하면 3년 4년 내지 10년을 가더라고 2천만이 다 죽기까지는 맹세코 기필코 우리의 신성한 국토 내에서 우리를 노예로 하는 원수의 이 민족을 축출하고 말리라 함이 2천만 대한민족의 결심인 줄 알고 적은 전율할 지어다.」(1919년 11월 1일 독립신문 24호 1면 독립완성시기 中에서)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한국의 대표로 참석.「한국의 경제,농민,노동자의 상태와 노동자,농민대중의 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임정요인을 비롯한 56명의 한국대표가 참석했으나 우사 김규식과 유정, 그리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또 한분과 3인만이 연설을 한 것이다. 그만큼 그는 모든 면에서 열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상해에서의 활동은 임시정부의 노인들과 더 어쩔 수 없는 정열적인 유정을 답답하게 만들었고,「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독립신문」 역시 더 이상의 발전을 못 보니 결국 유정을 고국의 격전장으로 뛰어 들어오게 만들고 말았다.
1923년 12월. 유정은 정태희(鄭泰熙), 여운홍(呂運弘):여운형의 동생)과 함께 바로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 자신의 조국을 위해 독립운동을 할 부푼 가슴을 안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미 서울의 동아일보의 장덕수는 미국유학을 떠나고 이광수는 변절의 길로 들어서니 동아일보의 김성수, 송진우가 뛰어난 언론인인 유정을 신문사로 오게 하는 작업으로 결국 귀국의 길을 택하게 한 것이다. 국내로 들어온 유정은 경찰에 체포. 10여 일간의 취조를 마치고 동아일보의 도움으로 고향으로 내려가 10년 만에 그리운 어머니, 그리고 형제자매와 상봉을 했다.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있었을까? 아버지를 일찍(1900년) 여의고 늙으신 어머님과 특별한 형님, 누님과 상봉 한 것이다.
그러나 한 달도 못 쉬고 1924년 1월. 유정은 동아일보에 논설반의 논설위원으로 입사하게 된다. 10개월 정도 내근하면서 논설반에서 집필을 하던 그였지만 그의 논설은 일제의 눈길은 그를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1925년 1월 28일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동아일보]에 있다.
「이 날짜 동아일보(東亞日報)는 조동호(趙東祜)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대한 기사(記事)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교육정책(敎育政策)을 비판한 기사(記事)로 차압(差押)당하다. 」
그의 기사는 이런 식으로 여러 번 '삭제' 당하며 감시의 망을 점점 좁혀오는 것을 알고 어느 날, 동아일보는 결국 조동호의 중국특파를 결정한다. 유정은 명분상 중국의 봉,직전쟁 특파원으로 떠났지만, 많은 기사와 총 20회에 걸쳐 1면에 연제된 종군기「전지행(戰地行)」의 내용은 놀라운 것이었다.
주 내용은 중국의 전쟁이 우리 민족에게 미치는 영향이었으며 종전이 되면서 마지막 회에는 손문(孫文)씨가 북경(北京)에 다녀간 후 13년간을 해외로 표류하다가 북경에 입성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부러워서
「아- 우리 이승만(李承晩), 이동휘(李東輝), 안창호(安昌浩) 등 여러 선생들은 어느 때에나 그 모습을 한성(漢城)에 나타낼까 손 선생의 이번 행동이 남의 일 같이 보이지 아니한다.」(1924년 11월 30일 북경에서)
라고 쓰기 까지 했으며 당시 이러한 기사내용을 [동아일보]가 1면에 올렸다는 것은 용감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또 당시 특파원으로 봉,직 전쟁이 끝나고 귀국을 할 때 상해를 방문한 후 「귀도(歸途)에 임하여」 라는 제목에 글에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임시정부의 당시사정을 기사내용에 끼어놓고 시치미를 떼는 그였다.
「중국일도 중국 일이지만 우리 '임시정부' 에서도 그동안 일신한 변동이 있어서 박은식(朴殷植) 선생의 통령 하(統領下)에 이유필(李裕弼), 이규홍(李圭弘)씨 등 유위의 인(有爲의 人)이 보필의 임무를 당해서 이상적 새 국면을 포설(布設) 하려고 무한이 노력을 하며 또 다대한 희망이 비치는데, 박 노(朴 老:박은식 칭함) 선생까지 절대한 자부심으로 여러 가지로 진력하심에는 무지한 이 사람도 기쁨을 못 이기겠다.」
이후에도 기사나 또「조선중앙일보」 시절에도 당시로서는 이런 아슬아슬한 글로서 50%이상은 검열에 걸리곤 했다고 한다.
1928년 2월 결국 유정은 상해의 일제영사관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하지만 그는 너무도 당당했으며 오히려 그들을 조롱하는 듯한 일화를 남기게 된다. 취조를 받던 중,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취조경관 책상 앞에 증거서류를 뜨거운 난로 뚜껑을 맨 손으로 잡아 열고 집어넣어 태워버리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일로 일본 경찰들은 감탄하기까지 했다하니 조동호의 불같이 뜨거운 성격이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결국 유정은 허헌(許憲)과 고향후배인 정구영(鄭求瑛), 두 변호사의 불같이 뜨거운 무료변론에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지금의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위반과 증거인멸죄로 4년형을 선고 받게 된다.
그리고 그의 투옥은 [동아일보]에서 대서특필하게 된다. 그가 독립운동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인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가 출옥하게 되는 1932년까지 그의 형 조동석(趙東?)은 전답을 팔아 옥바라지를 하는데 차후에도 여러 번의 옥바라지를 그의 형이 도맡아 하게 된다.
1932년 출옥한 뒤에 한 달을 입원했지만 곧 그는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행동에 옮기게 된다. 그의 형 조동석, 사촌동생 조동순(趙東珣), 그리고 조동순의 처남인 논산(論山)갑부인 윤희중(尹希重) 등의 출자로 마침 자본금에 허덕이던 「중외일보」를 인수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조선중앙일보」로 개칭, 확장하여 평생 동지인 몽양 여운형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유정은 편집고문(編輯顧問)의 직책으로 무기명 항일논설을 집필했지만 후배양성을 위하여 정태희(鄭泰熙)와 함께 젊은이들을 중국으로 유학 보내는 사건이 1933년 11월4일 일제에 걸리게 되었고 1936년2월26일 까지 2년 4개 월 간을 신의주형무소에서 또 고생을 하게 된다. 신의주 사건 때의 일이다. 당시 [조선중앙일보]에 편집고문으로 있을 때니 물론 몽양에게도 혐의가 갈 수 밖에 없었다. 신의주경찰서에 출두한 몽양에게 취조경관이 유정과의 상의한 내용을 빠짐없이 이야기 하라고 했다.
몽양은 「조동호는 나의 친우다. 매일만나 상종하는데 그 많은 이야기를 어찌 다 일일이 기억할 수 있는가. 조동호의 공술이 다 옳다고 하고 나도 감방으로 가면 그만이 아니냐.」
몽양의 이 말은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실로 기지에 가득 찬 명답이다. 일제치하 에서는 무슨 꼬투리로든 경찰에 걸려들기만 하면, 보통사람인 경우에는 고문에서든 유도심문에서든 그 진상이 백일하에 밝혀지게 마련이다. 연루자가 많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튀어나온 이 사람 말꼬투리, 저 사람 말꼬투리를 뜯어 맞추다 보면 건덕지는 드디어 나치가 되고 만다.
이름난 투사들의 치밀한 사전 계획이야 물론 이런 피해에서 어느 선까지는 구제되겠지만 승산은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이런 경우 몽양과 유정은 더 말할 나위 없는 백전노장들이다. 몽양의 대답에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몽양이 유정을 동지로서 든든히 믿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유정은 아무 말이나 마구 내뱉을 범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렇게 밀어붙임으로 몽양 자신의 늠름한 위신이 서고,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려는 경관의 시끄러움에서 거뜬히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의 사이를 잘 나타낸 일화이다. 물론 몽양은 무사했으며 유정은 2년 반을 그 곳에 고생을 했다.
1936년 2월26일 9시에 출옥한 유정은 다시 조선중앙일보 편집고문으로 복귀하고 더욱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논설로 우리 민중에겐 희망을 주었다. 그러던 와중에 일이 터져버렸다. 1936년 8월13일자 조선중앙일보에 베를린올림픽에서 세계기록을 깨고 우승한 우리의 건아 손기정(孫基貞) 선수의 일장기 제거사건이 문제가 되어 유정을 가로막은 것이다. 원래 일장기가 제거된 사진은 바로「조선중앙일보」에서 제작한 사진이었고 이를 다른 신문사에서 빌려서 쓴 것이다. 이로 인해 일제가 친일파를 사장으로 영입하라는 요구에 사주들과 운영진이 반대하고 결국 조선중앙일보는 폐간을 맞게 된다.
「유정은 1917년 [구국일보]와 [중화신보](2년), 독립신문(4년), [동아일보](3년), [조선중앙일보](4년)등 여러 신문에서 총13여 년간 언론으로 왜인들에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며 우리 동포에게는 희망과 긍지를 안겨주었다.」
1938년 많은 옥중생활과 일제의 예비검속자로 지명되니, 결국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도천리 652번지에 위치한 친지 김기상(金基祥) 사장이 경영하는 대륙광업사(大陸鑛業社) 현장으로 피신하여 몸과 마음을 추수리게 된다. 당시 유정 조동호는 회상하기를,
「 내가 6년 반 동안 옥중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몰랐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내가 옥중에 있으면서 성경을 몇 십번 읽었고 많은 기도로 고통을 참았다. 성경만큼 훌륭한 말씀이 없으며 누구나 읽어야 할 필독서이다.」
라고 회상했다. 결국 우리주님의 가호아래 어려운 옥고를 견디어 낸 것이다.또. 그의 회고에 의하면 그곳 봉화(奉化)에서 피신해 살던 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한다. 1936년 결혼한부인 사이에서 딸을 얻었고 그곳에서 큰아들(윤구(潤九))가 태어났다. 네 식구가 참으로 단란하게 살았던 것이다. 이곳에서 유정은 지금까지 그가 보여주던 강렬한 투사적인 이미지와는 전혀 대조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그중 한 가지 일화가 이런 모습이다.
대륙광업사는 다름 아니라 채취한 사금을 인부들로부터 사들여서 본사로 가게 되는 현장이다. 유정은 이곳에서 인부들의 사금을 사들이는 일을 보곤 했는데 다른 직원들과는 달리 그는 원래 가격의 10%정도를 더 언져 지불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금을 채취하는 노동자들이 유독 유정이 나와 있는 시간을 골라서 사금을 팔기를 원했다고 한다. 이것을 안 김기상 사장은,
「"선생님 그러면 우리는 망합니다.”」
하며 기분 좋게 웃어넘기는 것이다. 여기서 오로지 차가운 머리를 가지고 큰 일을 위해서 투신하는 그야말로 투사적인 조동호의 이미지를 반쯤 접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힘겹게 일하는 노동자의 편에서 그들을 위해서 돈을 조금 더 언져 주며 씽긋 웃는, 마치 마음씨 좋은 옆집 아저씨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이다. 이렇듯 유정은 크게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데 노력할 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빼앗긴 나라 안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민중들을 잠시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끝까지 독립운동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차곡차곡 쌓여진 민중들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유정이 1919년 상해 독립신문에 쓴 "독립완성시기"에서 미일전쟁이 일어나야 우리는 해방이 되고 미일전쟁은 필이 일어난다고 확신을 갖고 독립운동에 온 몸을 던진 것이다. 1941년 그의 예견대로 일본은 미국에 폭격을 가하니 한국에 독립을 얼마나 열망했던가(?) 미일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1943년 해방이 되기 두해 전 일제의 마지막 발악은 유정에게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요시찰인 즉 예비검속자로 지명되었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를 받아야만 했다. 그해 음력 설날도 마찬가지였다.
수원의 누님을 찾아갔을 때였다. 왜놈순사 둘이 누님의 집 앞에서 언제나 그러하듯 감시를 하고 있었고 유정은 그들을 불러들여 세배를 시킨다. 그렇게 세배를 받은 유정은 그들에게 음식까지 먹여주고 보냈다 한다. 이러한 모습은 아주 호탕하게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명절날까지 자신을 감시하려고 따라다니는 순사에게 화가 날 법도 한 일인데 넓은 마음으로 그들을 불러 음식을 먹게 한 모습은 여태까지 보여준 모습과는 또 다른 유정의 모습인 것이다.
해방 전후로 특히 유정정치학교(榴亭政治學校)를 운영할 때 백여 쌍의 선남선녀들 결혼주례를 맡으면서 주례의 감사로 양복이나 구두 와이셔츠 등 선물해 오는데 대체로 몸에 맞지 않는다는 핑게로 후배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다. 해방 후 유정은 자녀들에게 기술을 배우라고 하면서 기술자가 많은 나라만이 잘 사는 나라가 된다고 유언처럼 말했다. 자신은 오직 조국의 독립만을 위해서 힘 써왔고 이제는 조국이 해방 되었으니 할 일도 없고 할 힘도 없다했다. 다른 여력이 남아있다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었다. 자기 일을 다 했으니 자기의 일생을 크게 성공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김일성이 남침을 하니
「김일성은 나이가 어려 철이 안 난 아해(아이)이다. 백성을 다 죽이고 어쩌자는 건가」하며 유정은 이 일을 두고
「이제 남과 북이 원수가 됐으니 합치려면(南北統一) 앞으로 100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라고 예견했다하니 그의 선견지명은 놀랍지 않을 수 가 없다.
6.25 전란이 일어난 지도 이미 반세기가 지났건만 통일될 기미는 보이지 않으니 그때 어찌 그렇게 예견 했을까, 조동호는 그 후부터 수원의 누님 댁과 고향인 충북 옥천군 청산면을 오가면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1954년 9월 11일(陽) 오후1시에 한 많은 그의 일생을 마감했다. 자녀는 2남 1녀이다. 민족의 해방을 위한 투사로, 올곧은 성품을 보여준 선비로, 정론을 추구하는 언론인으로, 세상을 먼저 내다보는 예견자로 자신의 삶을 바쳤던 유정 조동호.
시간은 흘러 그가 세상을 떠나신 지도 반세기가 지났지만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은 변한 것이 없다. 그가 당당한 붓으로 가르쳤지만 과연 우리의 언론은 그에게 얼굴을 들 정도로 당당한가.
「정부라는 기관은 천년만년에 이르기까지 전하고 무궁할 우리민족의 자유요 생명인 귀중한 것으로 그 임원 되는 사람은 잠시 귀중한 곳에 위탁받은 국민의 심부름꾼이다.」
라고 상해 [독립신문]에 쓴 것이 있다. 그가 힘겨운 삶을 사는 민중에게 마음을 쏟아 부었지만 지금의 정치가들과 공무원들은 우리 국민의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아니, 그러한 질문이 너무도 크고 방대하다면 조금 작게 나 자신에게 물어보라. 과연 나는 조상들이 힘겹게 얻어낸 광복의 땅 위에서 얼마나 당당하게 발을 내 딛을 수 있는가. 얼마나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후세들은 우리들을 분명 기억 할 것이다. 그들에게 까지 부끄러워서야 되겠는가. 적어도 유정은 우리에게 당당하지 않은가.
국가에서는 해방 60년만인 2005년 3월1일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하고 8월 30일 경기도 이천군 마장면 산 24번지에 모셔져있던 묘소를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 166호로 천장(이장)해 모셔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