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선병(禪病)
오늘날 도를 배우는 사람에게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모두 두 가지 큰 병이 있습니다.
하나는 말과 문자를 많이 배워서 말과 문자 속에서 기특한 생각을 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달을 보았으면 손가락 잊는 일을 하지 못하고, 말과 문자에서 깨달아 들어가려 하다가, 불법(佛法)과 선도(禪道)가 말과 문자 위에 있지 않다는 말을 듣고는 곧 말과 문자를 모조리 쓸어 내버리고, 한결같이 눈을 감고는 죽은 사람처럼 앉아서 ‘고요히 앉는다’[정좌(靜坐)]느니 ‘마음을 본다’[관심(觀心)]느니 ‘묵묵히 비춘다’[묵조(黙照)]느니 하고 말하면서, 다시 이러한 삿된 견해로써 무식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꼬드겨 말하기를 “하루 고요하게 지내면 곧 하루 공부를 한 것이다.”라고 합니다.
안타깝습니다! 이들 모두가 귀신 집안의 살림살이인 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큰 병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배움에 참여할 몫이 있습니다.
경(經)에서 말했습니다.
“중생이 하는 말에 집착하지 말지니
모두가 유위의 허망한 일이로다.
비록 언어의 길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또한 말 없음에 집착하지도 말아야 한다.”
또 말했습니다.
“말을 보면 뜻과
다르다고 하지도 말고 다르지 않다고 하지도 말라.
뜻을 보아도 말과
다르다고 하지도 말고 다르지 않다고 하지도 말라.”
만약 말이 뜻과 다르다면, 말로 말미암아 뜻을 분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을 통하여 뜻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등불이 색깔을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않으며, 요의경(了義經; 궁극적 진리를 분명하게 말한 경전)에 의지하고 불료의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말과 침묵이라는 두 가지 병을 없애지 못하면 반드시 도에 장애물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비로소 수행하여 나아갈 몫이 있습니다. 무엇 보다도 조심할 것은, 아는 것을 붙잡고 일로 삼고서 다시는 묘한 깨달음을 찾지 않으면서, 그가 모르는 것을 나는 안다거나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나는 이해한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아견(我見)의 그물 속에 떨어져서 아상(我相)에게 부림을 당하여 아직 만족스럽지 못한데도 만족스럽다는 생각을 낸다면, 이 병은 더욱 무겁습니다.
말과 침묵이라는 이 두가지 병은 뛰어난 의사라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이 병을 없애지 못하면 증상만(增上慢)이나 사견인(邪見人)이라 부릅니다.
오래도록 공부해 온 영리한 자라야 비로소 여기에 이르러 자신을 모두 바꿀 수 있고, 자신을 바꿀 수 있으면 사물도 바꿀 수 있습니다. 사물을 바꿀 수 있으면, 바야흐로 뜻을 밝힌 사람이라 합니다. 이미 그 뜻을 밝혔다면 이 마음도 밝힌 것이고, 이 마음을 밝혔다면 밝힌 곳에서 시험삼아 미세하게 헤아려 보면 원래 밝힐 것이 없으니, 밝힐 것이 없는 곳에서 발딱 일어나 곧장 가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한 줄기 풀을 집어 장육금신(丈六金身; 불신(佛身))을 만들고, 어떤 때에는 장육금신을 다시 한 줄기 풀로 만들면서, 여러 가지로 변화하여 모든 법을 이루기도 하고 모든 법을 부수기도 하며, 뒤죽박죽 자유롭게 하여도 모두 이 밝힐 것 없는 마음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는 여래선(如來禪)도 아니고, 조사선(祖師禪)도 아니고, 심성선(心性禪)도 아니고, 묵조선(黙照禪)도 아니고, 방할선(棒喝禪)도 아니고, 적멸선(寂滅禪)도 아니고, 과두선(過頭禪)도 아니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선(禪)도 아니고, 오가종파(五家宗派)의 선도 아니고, 내가 제멋대로 말하는 선도 아닙니다. 이미 이러한 선이 아니라면, 결국 무엇일까요? 여기에 이르러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나 역시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님이 스스로 살펴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