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이빙 지음, [마르크스로 돌아가다--경제학적 맥락에서 고찰학 철학 담론], 김태성 김순진 고재원 피경훈 김현석 임춘성 옮김, 정성진 서유석 감수, 한울, 2018.10
옮긴이의 말―길안내를 겸하여
1.
이 글은 옮긴이의 후기인 동시에, 번역과 교정 과정을 통해 텍스트를 몇 차례 꼼꼼하게 읽은 옮긴이가 처음 읽는 독자를 위해 제공하는 길안내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서양에 경도되어온 한국 학술계에서 중국학자의 서양학 관련 연구서는 낯설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중국학자가 칸트의 비판철학을 연구한 결과물인 리쩌허우(李澤厚)의 『비판철학의 비판』을 한국어로 번역 출간하는 일은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 책 또한 중국학자가 마르크스 텍스트를 연구한 책이기에, 중국학자의 연구서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낯선 느낌이 없지 않을 것이다.
현재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연구 수준을 한 마디로 개괄하기는 어렵지만,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중국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마르크스주의 특유의 비판적 성격이 약화되고 마르크스주의 연구의 주류가 관변적 성격을 갖게 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책은 다소 달랐다. 중국 내 관변적 학자들은 장이빙(張一兵)의 마르크스로 돌아가다에 대해 어느 정도 이론적 급진성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를테면 탕정둥(唐正東)은 「『마르크스로 돌아가다』와 당대 중국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발전」(2018)에서, 이 책으로 인해 중국 학계의 많은 학자들이 경전 텍스트 의식을 가지기 시작한 점, 경전 문헌을 운용할 때 뚜렷한 역사의식을 가지게 된 점, 다성악(polyphony)적인 해석 논리로 마르크스 철학 및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심층적인 내용을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된 점을 그 긍정적인 점으로 들었다. 주류 이데올로기 범주에서 수행되는 연구의 일환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되 우리는 실사구시의 입장에서 장이빙의 연구 성과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저자 장이빙은 난징대학 부총장, 난징대학 마르크스주의사회이론연구센터 주임, 마르크스주의연구원 원장 등을 역임했는데, 그의 저서 목록은 그의 경력만큼이나 다양하다. 『마르크스 역사변증법의 주체 국면』(2002: 2판)과 『텍스트의 심층 경작―서양 마르크스주의 경전 텍스트 독해』(제1권, 2004; 제2권, 2008)는 『마르크스로 돌아가다』와 더불어 마르크스 및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연구서이고, 『무조(無調)식의 변증법적 상상―아도르노 ‘부정변증법’의 텍스트학 독해』(2001), 『문제설정, 징후적 독해와 이데올로기―알튀세르의 텍트스학 독해』(2003), 『불가능한 존재의 참―라캉 철학 영상(映像)』(2006), 『푸코로 돌아가다』(2006) 등은 서양의 마르크스주의자인 아도르노, 알튀세르, 라캉, 푸코에 대한 연구서이며, 『레닌으로 돌아가다―‘철학 노트’에 관한 포스트텍스트적 독해』(2008)는 『마르크스로 돌아가다』와 비슷한 연구를 레닌에 대해 진행한 저서다. 특히 ‘돌아가다’의 표제가 붙은 세 권은 현상학의 취지에서 진행하는 ‘사상의 고고학’ 시리즈다. 그 연장선상에서 현재는 후배 학자들과 함께 『개념의 맥락과 사상의 고고학: ‘마르크스로 돌아가다’의 기본으로 다시 돌아가기』와 『하이데거로 돌아가다』라는 표제의 저서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저자 장이빙이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레닌, 라캉, 알튀세르, 아도르노, 푸코, 하이데거 등을 폭넓게 전문적으로 연구한 경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저서들의 표제로부터 그의 주요한 연구방법이 텍스트 해석학 또는 포스트텍스트학임을 유추할 수 있다.
이 책을 독파하기 위해서는 우선 세 가지 주제어를 이해해야 한다. 첫 번째는 텍스트 해석학이고 두 번째는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경제학 맥락에서 고찰한 철학 담론의 전환이며, 세 번째는 저자가 자신의 연구를 명명한 역사현상학이다. 이는 저자가 해제에서 제시한 다섯 개의 키워드―마르크스로 돌아가다, 텍스트학 연구, 경제학 맥락, 잠재적 철학담론, 역사현상학―와 중복된다. 그 가운데서도 “이 책은 『마르크스·엥겔스 전집』 제2판의 최신 문헌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대량의 마르크스의 초기 경제학 노트를 독해했고, 이를 철학 이론 분석과 연결시킴으로써 학술적 혁신을 완성했다.”라는 경제학자 훙인싱(洪银兴)의 평가처럼, 경제학과 철학의 융합적 해석은 이 책의 커다란 성과라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세 가지 주제와 다섯 개의 키워드를 주요 표지판으로 삼아 아래에서 간략한 길안내를 시작해보겠다.
2.
1) 마르크스로 돌아가다: 원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아직 도달해보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텍스트 해석의 역사적 관점을 재구축하거나 우리로 하여금 마르크스 사상의 개방성과 당대적 가능성을 새롭게 구축하게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철학사에서 에드문트 후설은 ‘사실 자체로 돌아감’을 현상학의 중요한 이론적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훗날 해석학적 의미에서의 ‘돌아감’은 하이데거가 소크라테스 이전의 이른바 사유의 본원성으로 돌아감을 통해 현재의 사상사를 새롭게 쓰는 발단이 되었다. 실상 해석학에 있어 그 어떠한 ‘돌아감’도 역사적 관점의 정합(整合)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로 돌아가다’에서 ‘텍스트로의 돌아감’ 역시 ‘완고한 숭고의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마르크스 원전으로의 물러남’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교조적인 체제 합법성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준비이며 기성의 강제성을 배제시키고 텍스트에 대한 독해를 통해 새로운 ‘도구적 존재성(Zuhandenheit. ready to hand)의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중국인들이 과거에 말하곤 했던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로 돌아가다’ 자체는 우리가 오늘날 얻게 된 최신의 방법과 맥락으로 개방된 시각 속에서 마르크스를 대면하는 것을 말한다. 바꿔 말해 해석학적 관점에 의하면 마르크스는 결코 원초적 대상이 아니라 이미 해석된 역사적 효과가 되었다. 완전히 새로운, 하지만 근거를 갖는 마르크스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2) 마르크스 철학과 당대성: 마르크스 철학과 당대성의 문제는 결코 새로운 명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지난 1960년대 교조화된 체제에서의 서술 방식을 둘러싸고 구소련의 전통적인 학계가 논쟁을 벌였을 때부터 존재해왔던 것이다. 여기에는 전통적인 인식틀로써 마르크스를 해석하는 방식이 완전하다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한 해석방식의 이데올로기적 본질은 구소련의 전통적인 마르크스 철학 해석의 비역사적 성격과 절대적인 담론권력의 불법성을 은폐하는 것이다.
실상 마르크스 철학이 반드시 당대적 성격을 띠어야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관건은 그와 같은 의도를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감하게 이전의 경전을 다시 해석하고 새로운 텍스트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견실하게 텍스트를 새롭게 펼쳐들어 새로운 역사적 시각 안에서 당대 생활 세계의 새로운 문제들을 진정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장이빙은 마르크스 철학에 관한 텍스트(특히 MEGA2)를 직접 정밀하게 독해하지 않는다면 마르크스 사상 발전의 맥락을 과학적이고 전면적으로 파악할 수 없으며, 마르크스 철학의 당대성에 대한 언설 역시 실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3) 다섯 가지 해석 모델: 그는 우선 마르크스 철학 발전사를 고찰하면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다섯 가지 해석 모델’을 추출해낸다. 즉 서유럽 마르크스학 모델, 서유럽 마르크스주의 인간주의 모델, 알튀세르 모델, 구소련과 동유럽 모델, 그리고 중국의 쑨보쿠이 교수 모델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가 ‘이끄는 말’에서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는 만큼, 여기에서는 반복하지 않는다.
4) 마르크스의 텍스트의 분류학적 구분: 장이빙은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세 종류로 분류한다. 첫째는 책을 읽고 발췌한 노트와 사실을 기술한 노트이고, 둘째는 미완성 수고와 서신이며, 셋째는 이미 완성된 논저와 공개 발표 문헌들이다. 이는 마르크스의 텍스트에 대한 ‘분류학적 구분’이다. 과거 마르크스주의 연구에서 학자들이 보편적으로 중시하고 연구에 열을 올렸던 부류는 대부분 셋째 유형의 논저들이었고 둘째 유형의 문헌들 역시 어느 정도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첫째 유형의 텍스트들은 아직 실질적으로 그에 합당한 분석과 연구의 지위를 얻지 못하고 있다. 장이빙은 첫째와 둘째 유형의 텍스트들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을 통해서만 마르크스 사상의 발전과 변혁의 진실한 사유의 맥락과 원인이 되는 맥락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이 책의 상당 부분을 노트와 수고 등의 텍스트 자체로 돌아가 그에 대한 문헌학적 고증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장이빙은 노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마르크스의 노트에는 담론의 단절, 범주의 설정, 그리고 이론논리 속의 특이한 이질성이 남김없이 그리고 무형식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노트 기록은 주로 독서 노트가 중심인데, 이는 마르크스가 독서를 하면서 느낀 점과 해당 도서에 대한 논평을 메모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로부터 학술적 관점의 개요에 실린 이론적 경향성과 최초의 평론, 그리고 논쟁을 통해 형성된 저술 계획과 구상, 그리고 각종 사상이 최초로 형성된 이론적 촉발점과 원초적 단서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첫 번째 텍스트에 대한 ‘상호 텍스트’적 다시 쓰기로, 저자와 일차 텍스트가 만난 후 만들어진 의식적 효과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일반적인 이론 수고와 논저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5) 기능적 심층 독해 방법: 장이빙은 ‘기능적 심층 독해 방법’을 제안한다. 이는 알튀세르의 ‘징후적 독해’에서 계시를 받은 것이다. 장이빙의 스승인 쑨보쿠이도 동일한 텍스트에 담긴 이중 논리를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장이빙은 이 연장선상에서 비교적 성격의 기능적 독해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특히 마르크스의 노트를 대할 때, 문자에 머무르지 않고 더욱 많은 사고를 하는 것을 가리킨다. 특히 노트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복잡한 독해 구조, 예를 들어 전도적인 성격의 텍스트(예를 들어 『파리 노트』), 그리고 수고 텍스트의 복합적인 담론 구조(예를 들어 『1844년 수고』) 등을 분석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다.
6) 단어 빈도 통계연구: 텍스트 해석학과 관련해 주목할 것은 ‘단어 빈도 통계연구’이다. 이는 저자가 제3판 수정작업을 진행하면서 이 책이 근거로 삼는 마르크스의 주요 독일어 텍스트에 대해 불완전하게나마 문헌학적 단어빈도 통계를 진행하면서 명명한 방법론이다. 이는 일본 학자 모치즈키 세이지로부터 얻은 교훈 덕분이다. 단어빈도 통계 방법은 문헌통계학(Biblimetrics)의 전통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다. 이른바 단어빈도(term frequency)는 주어진 문헌에서 특정 단어가 그 문헌에 나타나는 횟수를 의미한다. 단어빈도 통계는 연구자가 일정한 연구목표에 따라 통계학 방법을 운용해 서로 다른 문헌 텍스트(예컨대 인터넷 검색엔진, 신문잡지, 역사문건, 개인기록 등) 연구에서 문제가 되는 핵심 어휘들을 수집하고 특수한 기호화 작업을 거친 뒤 정량(定量) 어휘빈도 분석을 진행하는 방법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특정 시기 특정 단어의 사용 빈도수를 통해 마르크스의 개념 형성 과정을 고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한 사상가의 중요한 텍스트의 모국어 원문에 대해, 지배적 담론 구조에서 나타나는 지배적인 개념 혹은 범주의 통계와 다른 시기에 발생한 중요한 사상 변이의 텍스트에 나타나는 단어빈도를 통계화해 시기에 따른 비교분석을 진행하고, 아울러 2차원적인 단어빈도 그래프에서 직관의 곡선을 표시해냄으로써 기존의 텍스트학 분석에 데이터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7) 경제학 맥락의 철학 담론: 부제에서도 밝힌 것처럼, 이 책의 새로운 관점의 하나는 ‘경제학적 맥락에서 고찰한 철학 담론’이다. 문자 그대로, 마르크스 경제학 연구의 심층적 맥락에서 그의 철학 담론의 전환을 새롭게 탐색해내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사후 최초일 것이다. 1842년 하반기 마르크스가 처음으로 경제학 연구를 시작한 이래로 경제학에 관한 내용이 그의 중후기 학술 연구에서 70% 이상을 차지했고 만년에 이르러서는 그 비중이 90%에 달했다. 1846년 이후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인 마르크스에게 순수한 철학과 과학적 사회주의는 독자적인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정치경제학 경전에 대한 텍스트 독해를 통해 경제학이 대면하고 있는 각종 상황이 바로 당시의 사회 현실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역사적 현실로부터 출발하기 위해서는 우선 경제학에 대한 이해와 깊이 있는 탐구를 완성해야 했다. 그리고 이 주도적인 연구 자체의 실질적인 과정을 분명히 해야만 철학과 과학적 사회주의 발전 경로의 진정한 기초를 근본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 이론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마르크스의 철학, 경제학, 그리고 사회와 역사에 대한 현실적 비판(과학적 사회주의)은 하나의 완전하고 시종일관 분리되지 않는 총체로서, 각종 이론 연구의 상호 간에는 상호 침투하고 포용하는 관계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경제학을 연구하려면 마르크스의 철학적 관점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철학적 분석이 마르크스 경제학 연구와 완전히 분리되어서도 안 된다. 이 두 연구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비판했던 현실적 목적과 분리되어서는 더욱 안 된다. 장이빙은, 마르크스의 철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반드시 마르크스의 경제학 저작을 진지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으면 형이상학적 거품 속에서 헤매게 된다. 이것은 또한 『마르크스로 돌아가다』가 본래 의도한 것이기도 하고 이 책의 완전히 새로운 시각이 겨냥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8) 마르크스의 3대 담론 전환: 유물론―역사유물론―역사현상학: 장이빙은 이 책에서 마르크스의 세 개의 이론 정점을 지적하고, 그것이 마르크스 철학사상 발전과정의 3대 담론 전환 및 인식의 비약이라 칭하고 있다. 첫째 정점은 1844년으로서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는 청년 마르크스가 수립한 인간주의 사회현상학의 파리 노트 가운데 밀 노트와 1844년 수고다. 둘째 정점은 1845년 1월에서 1846년 12월까지로,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는 마르크스의 첫 마르크스주의 문헌들, 즉 광의의 역사유물론을 창립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와 독일 이데올로기, 그리고 마르크스가 안넨코프에게이다. 셋째 정점은 1847년부터 1858년까지로,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는 마르크스가 마르크스주의의 협의의 역사유물론 학설과 역사인식론 위에 역사현상학을 수립한 57-58 수고다.
마르크스 철학사상 발전의 첫 번째 전환은 청년 헤겔의 관념론에서 일반 유물론으로, 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로 전환한 것이다. 장이빙은 이 전환이 마르크스주의로의 전향이 아니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전환은 크로이츠나흐 노트에서 시작되어 헤겔 법철학 비판과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를 거쳐 파리 노트 후기와 1844년 수고에서 최고점에 이르렀다. 일반적으로 말해 이 시기 마르크스의 사상 전환의 현실적 기초는 마르크스의 역사연구와 사회주의 노동자운동 실천의 접촉이었다. 하지만 이 단계의 후기에 마르크스는 이미 첫 번째 경제학 연구를 시작했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사상 배경과 사고의 맥락을 당시 유럽사상사의 총체적 단면에 놓는다면, 마르크스의 이 사상 전환은 단순한 이론 혁신이 아니라 여러 배경 요소의 제약 아래 발생한 논리적 승인이다. 배경 요소로는 포이어바흐의 일반 유물론과 헤겔의 변증법 외에 청년 엥겔스와 헤스, 프루동 등의 경제학에 기초한 철학 비판과 사회주의 관점도 있다. 그리고 청년 마르크스에게 표면적으로 부정당한 고전경제학의 사회유물론의 사유 경로와 방법도 있다. 마르크스는 이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해 사상 전환의 자료로 삼은 셈이다.
마르크스 철학사상의 두 번째 전환은 바로 마르크스주의 철학혁명, 즉 마르크스의 첫 번째 위대한 발견인 광의의 역사유물론을 수립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두 번째 경제학 연구(브뤼셀 노트와 맨체스터 노트) 과정에서 발생한 이 철학사상의 혁명은 「포이어바흐 테제」에서 시작하여 독일 이데올로기를 거쳐 마르크스가 안넨코프에게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전환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기초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과학적 비판의 기초가 형성된 것이었다. 장이빙의 새로운 관점은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실천과 기타 철학 관념의 영향을 받은 외에도 고전 정치경제학에서의 스미스와 리카도 사회역사관의 사회유물론에 대한 승인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초월 위에 역사유물론과 역사변증법을 수립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실천유물론을 기본 입장으로 한 일정한 사회역사 단계의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의 사회관계에 대한 연구, 특히 과학적인 역사적 존재에 대한 ‘본체’적 규정에 관한 사유는 마르크스 철학 관심의 이론적 초점이 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 연구의 새로운 단계는 사회현실의 경제학 및 역사학에 대해 과학적 연구를 진행하는 시기였다. 따라서 이 특별한 혁명 시기에 마르크스주의 철학변혁의 발단과 정치경제학에 대한 과학 연구의 시작은 전통 연구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르크스가 먼저 역사유물론을 창립하고 나서 뒤이어 정치경제학 연구로 전향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 철학사상의 세 번째 전환은 협의의 역사유물론과 역사인식론으로부터 역사현상학의 창립이라는 위대한 인식의 비약이다. 이러한 변화는 마르크스의 세 번째 경제학 연구에 기초한다. 이 변화는 철학의 빈곤에서 시작되어 런던 노트에서 크게 발전한 다음 57-58 수고에서 기본적으로 완성되었다. 그 기초는 직접 마르크스 경제학 혁명의 탐색, 즉 마르크스의 두 번째 위대한 발견인 잉여가치 이론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1847년 이후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사회’를 생산력 발전의 최고점(‘인체’)으로 하는 인류 사회역사에 대해 과학적 비판과 고찰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이전 자본주의 사회, 특히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의 연구에서 인류사회 발전의 역사본질이 처음으로 과학적 설명을 얻게 되었고 모든 사회역사 발전의 특수한 운행법칙도 처음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인간과 자연(주위환경)의 관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관계가 처음으로 진실한 사회역사의 정경 속에 구체적으로 인식된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창립한 협의의 역사유물론 철학이론의 주요 내용이다. 자본주의 사회화의(라는?) 물질 대생산 발전과정에서 분업과 교환이 형성하는 생활조건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사회적 노동관계의 객관적 외면화(가치) 및 자본주의 시장조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물에 노예화되는 전도된 관계(자본)를 유발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역사적으로 유사 이래 사회생활 분야에서 가장 복잡한 사회차원과 내재구조를 구축하게 되고, 이는 필연적으로 독특한 비직접적 역사인식론의 완전히 새로운 철학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각종 전도와 사물화된 경제관계 가상을 통해 비판적으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물신숭배를 배제하고, 최종적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본질을 설명하게 된다. 이것이 마르크스 역사현상학의 주체적 내용이다.
9) 다섯 번의 전환과 전도: 장이빙은 자신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마르크스에게 5차례의 방법론 전환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전환은 단순하고 돌발적인 변화가 아니라 여러 차례 다차원적인 전진을 거쳐 완성된 복잡한 과정이다.
1838년부터 계산하면 첫 번째는 1843년 청년헤겔학파에서 포이어바흐식의 일반 유물론으로의 전향이었고, 두 번째는 1845년에 일반 유물론에서 방법론상의 역사유물론으로의 전환이었으며, 세 번째는 1847년 철학에서 현실 비판으로의 전향이었고, 네 번째는 1857-1858년에 역사현상학의 비판논리 실현이었으며, 다섯 번째는 경제학 표현 논리방법의 확립이었다.
시각을 바꿔보면 상술한 변화들은 마르크스 철학논리의 다섯 차례 전도를 말해준다. 첫 번째는 1843년 마르크스 철학 전제의 전도로서, 감성적 구체에서 출발한(실제로는 아직 비역사적 추상임) 논리를 형성하기 시작했고, 두 번째는 1845년 인지방법의 전도로서, 실천과 생산의 역사 ‘본체’라는 현실에서 출발한 논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세 번째는 연구내용의 전도로서, 역사현실에서 출발한 논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네 번째는 1857-1858년의 자본주의 사회 대상화의 표상 현상학의 전도였고, 다섯 번째는 경제학 이론 구축의 형식 전도, 즉 추상에서 구체로의 재귀환이었다. 물론 이처럼 복잡한 사상변화의 과정은 본질적으로는 상술한 3대 담론 전환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다.
이상의 길안내는 표지판의 위치를 지시할 뿐이다. 자세한 길 찾기는 독자들이 만보객(flâneur)이 되어 수행할 몫이다.
3.
3년 전 맑스 코뮤날레 집행위원회 회의석상에서 만난 정성진 교수가 장이빙 교수의 『마르크스로 돌아가다』의 번역을 제안해왔을 때, 내가 이 책 번역에 참가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2005년 리쩌허우(李澤厚)의 『중국근대사상사론』을 번역 출간한 후 다시는 번역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번역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내 글 쓰는 데 투여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중국연구를 하면서 번역과 무관해질 수는 없었고, 그 후에도 여러 권의 책을 엮으면서 감역(監譯)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아울러 ‘문화연구’의 연장선상에서 ‘번역연구(translation studies)’에 관심을 가지면서 대학원에 관련 분야 과목을 개설하고 자연스레 논문 지도를 하게 되었다. 와중에 ‘번역연구’와 관련해 몇 편의 글도 쓰게 되었다. 그러나 번역을 하는 것과 감역 및 번역연구를 수행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얼마 전 『루쉰전집』(20권) 완역 출간을 지켜보면서 오랜 시간 생명력을 가질 책은 어쩌면 『루쉰전집』과 같은 대가의 글일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럼에도 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옮긴이의 말을 쓰게 된 이유는 공동번역자의 하나인 김태성 선생과의 오랜 인연과 의리 때문이다. 석사과정부터 고락을 함께 해온 오랜 친구(老朋友) 김 선생과는 먹고사는 문제로 인해 소식이 끊겼다가 만나는 과정을 두어 차례 겪었다. 그가 중국어 전문 번역가의 길을 걷게 된 이후에는 동업자로서 자주 만나게 되었고, 정성진 교수가 이 책의 번역을 의뢰했을 때에도 중국 정부의 ‘중화도서특별공헌상’을 받은 번역자인 만큼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 그를 소개했던 것이다. 그런데 철석같이 믿었던 김 선생이 제 시간에 번역을 완료하지 못함으로 인해(중국 출판사와의 계약 문제도 있었던 듯) 소개자로서의 도덕적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번역에 뛰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금년 10월에 열릴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기념 학술토론회에 맞춰 출간하면 좋겠다는 저자의 제안에 부응해야 한다는 주위의 강박에 못 이겨, 부득불 몇몇 동료들과 공동번역팀을 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번역팀의 일원인 김현석 박사는 번역한 원고를 가지고 세미나를 진행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촉급한 시간은 우리에게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상의 외적인 과정과 더불어, 내가 이 책의 공동번역을 조직해 참여하고 인고(忍苦)를 요구하는 통고(統稿)를 자임한 속내는 따로 있다. 무엇보다 중국학자가 ‘마르크스로 돌아가’ 그의 원초적 텍스트를 새롭게 검토하되, 정치경제학과 철학을 결합해 연구해야한다고 주장하는데, 그의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논술되었는지가 궁금했다. 나아가 중국학자가 마르크스를 비판적으로 읽어 낸 결과물에 대해 그간 서양에 경도되어 온 한국 학술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했다. 다행히 이 책은 저자의 학술 파트너인 정성진 교수의 추동에 힘입은 바 크기 때문에 한국 학계의 적극적인 반응이 예상된다. 그리고 더 깊은 층위에는 이 기회를 빌려 그동안 띄엄띄엄 진행해온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학습을 정리해보자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이 책의 번역은 주로 ‘중국어 『자본론』 독해 세미나’의 구성원이 담당했다. 중국어 『자본론』 세미나는 2017년 제8차 맑스 코뮤날레를 마치고 뒤풀이 자리에서 이재현 선생의 제안으로 구성되었다. 평소 한국의 진보 진영 학자들이 중국에 대한 이해(Chinese literacy)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는 관심과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라도 모여 중국에 대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고 하며 이 세미나를 제안했던 것이다. 이에 2017년 7월부터 『마르크스엥겔스 저작 선독―정치경제학(馬列著作選讀-政治經濟學)』(人民出版社, 1988)을 텍스트로 삼아 ‘참세상연구소’ 세미나실에서 격주 토요일 오후에 한 번도 거르지 않고 3시간 씩 독해 세미나를 해왔다. 지금은 독해 세미나에서 발제 토론 세미나로 변신한 『자본론』 세미나 팀에게 이 책의 번역은 훌륭한 실천과 자기검증의 장이 된 셈이다.
학제간 융복합과 통섭이 대세임에도 불구하고 전공 영역의 고유성은 존중되어야 한다. 옮긴이들은 대부분 중국 근현대문학을 기반으로 공부한 터에(경제학 전공의 김현석은 예외) 사회과학, 특히 마르크스주의에 익숙한 편은 아니다. 중국 근현대문학의 전공 특성상 마오쩌둥 사상 및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개인적으로 마르크스의 저작들을 읽기도 하고 『자본론』 독해의 공동 학습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 전공자라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이에 정치경제학의 권위자인 정성진 교수에게 감수를 부탁했고, 정 교수의 소개로 마르크스주의 철학 전공자인 서유석 교수에게 감수를 의뢰함으로써, 부족함을 보완하고자 했다. 아울러 모호한 부분에 대해서 여러 차례 저자와 이메일로 확인 과정을 거쳤다. ‘손안에 있음’으로 번역한 상수성(上手性)이 대표적인 예다. 상수성이 하이데거의 Zuhandenheit(ready to hand, 도구존재성)의 중국식 번역어라는 사실은 저자와의 메일을 통해서야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오역이 있다면 이는 오롯이 옮긴이들의 몫이다. 3판 서문과 이끄는 글, 그리고 1, 2, 3장은 김태성, 4장은 김순진, 5장은 고재원, 6장은 임춘성, 7장과 저자 해제는 피경훈, 그리고 8장과 9장은 김현석이 맡아 번역했다.
이 책은 정성진 교수의 제안과 추동이 없었다면 출간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형식적인 감수에 그치지 않고 거의 모든 원고를 꼼꼼하게 읽고 전문적인 용어와 내용에 대해 대안을 제시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어판을 대조해 상세한 교정까지 진행해주었다. 특별한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2교 교정을 보면서 독일어 표기를 검토해준 서유석 교수에게 감사드린다. 저자가 마르크스 원전을 읽겠다는 일념에 반백이 넘어 독일어를 학습해서 원전을 대조해 병기한 노고를 치하하는 동시에, 독일어 표기에 일부 혼선이 있어 번역본에서 그것을 바로잡는 데 서 교수가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밝힌다. 흔연하게 출판을 수락해준 한울 출판사 김종수 사장에게 감사드린다. 아울러 편집부의 신순남 선생에게도 감사드린다. 촉급한 시간과 공동번역으로 인해 난삽(難澁)하게 작성된 초고가 신 선생의 꼼꼼한 교열을 통해, 딱딱한 번역 투 원고에서 벗어나 순통한 우리말 문장으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겨진 번역 투의 문장은 당연히 옮긴이들의 책임이다.
지속적으로 학술공동체를 지향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공동 작업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각 성원들의 개성과 스타일, 그리고 학문 수준과 중국어 독해력 등을 감안해 하나로 묶는 통고 작업은 경이로운 다양함을 경험하는 과정인 동시에 독자에게 통일된 방안을 제시해야 하는 인고의 과정이기도 하다. 바쁜 와중에 나를 믿고 공동번역에 참가하고 많은 부분을 위임해준 옮긴이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우리들의 이후 공부에 좋은 밑거름이 되기를 충심으로 기대한다. 이 책은 2014년 1월 장쑤런민(江蘇人民)출판사에서 나온 제3판을 저본으로 삼았고, 부분적으로 영역본과 일역본을 참조했다. 영역본은 두루뭉술한 번역이 많았고, 일역본은 설명적인 의역이 많았음을 부기해둔다. 독자 여러분의 생산적인 비판을 기대한다!
2018년 10월 1일
옮긴이를 대표하여
임 춘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