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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투사 정찬진(丁贊鎭)
이 글은 1993년 8월 12일부터 11월 11일까지 12회에 걸쳐 경상남도 통영에서 발간되는《한산신문》에 정갑섭씨 집필로 게재되었던 것입니다.
1954년 7월 25일, 일본 동경의 데이고쿠(帝國)호텔은 정사복 경찰들의 삼엄한 경계가 펼쳐진 가운데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러 가는 길에 동경에 잠깐 들러 이 호텔에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일관계는 악화일로에 있었다. 1951년 10월, 예비회담으로 시작된 한일회담은 한일 기본관계 수립문제,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문제, 청구권문제, 평화선문제 등을 놓고 3차에 걸쳐 양국대표단이 마주 앉았으나 1953년 10월 소위 ‘구보다(久保田) 망언’으로 결렬되어 반한감정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이대통령의 일본체류에 공식접촉은 피했으나 조총련의 위협도 있어 경호에 각별한 신경이 쓰이고 있던 터였다. 이럴 때 「민단」간부를 접견하고 있던 이대통령의 방에서 느닷없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각하 혼자만 애국자고 각하 혼자만 독립운동 했습니까?” 수행 비서진이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대통령 방으로 귀를 모았다. “각하가 미국에서 마음 놓고 독립 운동할 때 나는 왜놈의 본바닥인 이 동경에서 그들과 싸웠습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계속된다. “각하의 그 아집과 유아독존이 한국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망발 인고…. “각하가 진실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신다면 지금이라도 깨끗이 물러나십시오.” 이런 폭탄발언을 밖에서 엿들은 비서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공연히 안절부절못했다. 상기된 얼굴의 정찬진(丁贊鎭 당시「민단」동경지방 본부단장)이 문을 박차듯 나왔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던 비서들을 거들 떠 보지도 않고 휑하니 나가버렸다. 좀 있다 이대통령이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비서진 앞에 나타났다. 그는 과연 노련한 정치지도자였다. “한국호랑이가 멸종된 줄 알았더니 아직은 있어. 정찬진, 바로 그 사람이 바로 한국호랑이야.”
한국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던 이승만, 6ㆍ25의 와중에서도 배짱 하나로 미국을 요리하던 카리스마 이대통령, 그러한 그의 면전에서 극언(極言)을 서슴지 않는 배포 큰 사나이 정찬진, 그는 과연 누구인가?
정찬진은 1905년 6월 16일 통영(태평동 556)에서 정병규(丁炳奎)의 세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정일무(丁逸戊)가 15살의 어린 나이에 통제영 집사를 했기에 사람들은 그의 할아버지를 아기집사라고 불렀다. 그가 태어난 해가 을사년(乙巳年) 소위 을사5조약으로 우리나라의 국권이 일본에 사실상 넘어간 해이니 파란만장한 그의 항일투쟁 역정(歷程)은 탄생과 함께 그에게 지워진 숙명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어려서 한문서당에 다니다가 12살에 통영초등학교(4년제)에 들어간다. 세병관에 칸을 막아 교실로 썼던 그 시절에 그는 서너 살 더 먹은 동급생들 틈에 끼여 그런대로 학업에는 착실한 편이었다. 그가 4학년에 진급하던 그해(1919년)에 통영에서 만세운동이 연달아 일어나고 수많은 만세꾼들이 잡혀가는 것을 보게 된다. 일본순사들의 발길에 마구 채이며 개처럼 끌려가는 조선 사람들을 떨리는 눈으로 쳐다보며 그는 순사들을 미워하기 시작한다. 만년에 그는 한일문제연구소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그때 우리 민족이 처해있는 상황과 또 우리 민족의 독립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1920년 3월에 통영국민학교를 졸업(11회)하였으나 상급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못되어 1년을 고향에서 놀게 된다. 이무렵 통영청년단의 브라스 밴드가 북치고 나팔 불며 자주 거리를 행진하고 계몽강연회도 가끔 열렸다. 그는 따로 할 일도 없어 강연회만 열리면 먼저 가서 앞자리를 차지했다. 연사는 대부분 유학생 출신이라 강연 틈틈이 동경의 풍물소개도 곁들이면서 끝에 가서는 우리도 배우고 알아야 자주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역설하곤 했다. 찬진은 새로운 지식에 대한 갈증과 대도시에의 동경으로 잠을 설치는 밤이 늘어갔다. 방학 때 사각모를 쓰고 고향에 돌아온 유학생들을 보면 부럽다 못해 몸살이 날 것 같았다. 뻔히 알면서 애꿎은 어머니를 졸라보지만 어머니의 한숨과 눈물뿐이었다.
갈등과 방황의 세월 1년을 보낸 그는 1921년 어느 봄날 일본으로 무작정 밀항을 하고 만다. 당시 남망산 금광에서 채굴한 광석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던 화물선의 선창에 몰래 숨어들어가 현해탄을 건넌 것이다. 17살의 어린 나이에 온갖 고생을 다하며 몽매에 그리던 동경까지는 왔으나 학교는 고사하고 당장 급한 것이 끼니와 잠자리의 해결이었다. 몇 푼 남지 않은 비상금을 헐어 싸구려 우동 한 그릇으로 저녁을 때우고 찾아들어간 곳이 노무자합숙소였다. 노무자합숙소에서 동경의 첫 밤을 지낸 찬진은 그곳에서 만난 조선노무자의 소개로 이튿날부터 공사판에 나가 막노동을 시작했다. 막노동판에서도 민족차별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사람인데다 풋내기라 일인노동자 품삯의 반의반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재일조선인은 약 4만 명 정도였지만 이들 대부분이 일제의 수탈로 조선땅에서는 살 수가 없어 일본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노동판에서 찬진은 피압박민족의 설움과 노동자의 참상을 뼈저리게 체험한다. 이 체험이 그로 하여금 아나키스트가 되게 하는 동인(動因)이 된다. 노동자생활이 어느 정도 몸에 배일 즈음에 찬진은 미사커조(三崎町)에 있던 세이쇼쿠(正則)영어학원에 입학한다. 낮에는 노동판에 나가 일하고 밤에는 학원에 나가 열심히 공부한다.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천신만고 끝에 동경까지 온 그인지라 정규과목인 영어뿐만 아니라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구해다 읽었다. 이 무렵 우연찮게 빌려본 오스키 사카에(大杉榮)가 번역한 크로포트킨의 저서〈상호부조론(相互扶助論)〉은 망국의 유민 젊은 찬진을 크게 감동시킨다. 그 후로 그는 이 방면의 서적(아나키즘)을 열심히 탐독하게 된다. 1923년 일본대학 사회학과에 적을 두게 된 찬진은 가끔 오스키 사카에를 심방하여 그의 강론을 들으면서 아나키즘이야말로 조국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훌륭한 논리를 갖추었다고 믿게 된다. 훗날 그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당시 아나키즘 운동은 어디까지나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지 그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 때의 재일 조선유학생들은 아나키즘운동이 조국의 독립운동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사전을 펼쳐보면 아나키즘(Anarchism)을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라고 번역하고 있다. 또 이 말의 어간인 아나키(Anarchy)는 ‘무정부, 무질서’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이 아나키는 무질서가 아니라 고도의 질서이다.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는 질서,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질서는 옳은 질서가 아니다. 잘못된 질서를 강제로 유지하는 패도정치(覇道政治)는 바른 정치일 수 없다. 따라서 바르지 못한 정치를 권력으로 집행하는 정부는 옳은 정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아나키즘은 그러한 정치를 반대하고 그러한 정부를 배격한다. 이런 의미에서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 할 수 있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몸부림치던 조선의 젊은이에게 아나키즘은 얼마나 매혹적인 사상이며 눈이 번쩍 뜨이는 복음인가. 이리하여 열혈청년 정찬진은 아나키즘의 논리를 간판으로 내걸고 자신과 민족의 참다운 자유를 쟁취할 때까지 일제와 투쟁할 것을 다짐하게 된다. 이렇게 사상적 체계와 이론을 정립해 나가던 1923년 8월 하순, 친구들과 영화관에 가서 서양 영화를 관람하다가 불현듯 고향이 그립고 어머니가 보고 싶어진다.
영화 장면에서 어느 한적한 바닷가 마을과 노파가 나오는데 그 장면에 느닷없이 고향과 어머니의 얼굴이 포개지는 것이었다. 2년 전 새벽에 몰래 집을 나와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무슨 엄청난 공부를 한답시고 소식도 제대로 전해드리지 못했나 싶으니 그동안의 불효가 한꺼번에 북받치면서 금방 울음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그 밤을 어머니 생각으로 뜬 눈으로 지새운 그는 날이 밝자 역으로 나가 시모노세키(下關)행 기차를 탔다. 마음이 공연히 바빠 애지중지하던 손목시계도 책상 위에 풀어 놓은 채….
그가 동경에 있는 동안에 통영에 있던 그의 부모는 욕지로 이사를 가 있었다. 욕지에 내려간 그는 오랜만에 어머니가 지어주는 따뜻한 밥에 싱싱한 생선반찬을 포식하면서 일상의 평화로움에 그윽이 젖어들었다. 낮에는 바닷가에서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해삼, 우렁쉥이도 따고 그것도 지치면 동산의 나무 그늘에 앉아 바다 위에 한가로이 떠있는 돛단배와 뭉게구름을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저녁이면 선창 끝에 나가 낚시를 즐겼다. 꿈속 같은 며칠이 지나갔다.
그러나 찬진은 이 행복한 꿈속에서 오랫동안 안주할 수는 없었다. 그의 피가 너무 뜨겁고 그 속에서 굽이치는 민족의식이 이러한 무위(無爲)의 생활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그는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찬진은 일단 마음을 먹으면 곧바로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다. 며칠만 더 있다가 가라는 어머니의 만류도 뿌리치고 통영에 올라온 그는 이곳에서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소식을 듣게 된다.
무고한 동포들의 학살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분노에 떨며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언제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일촉즉발의 위기감마저 감돌고 있었다. 경찰은 비상경계를 펴고 사람 셋만 모여도 단속을 하는 판이었다. 여로 경로를 통해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그는 다시 욕지로 내려간다. 다시 돌아온 욕지는 어제까지의 욕지가 아니었다. 바다와 섬이 하룻밤 사이에 변할 리는 없지만 그의 가슴에는 이제까지의 평화는 간데없고 격랑이 어지러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조선사람은 무조건 때려죽이고 일본사람이라도 소위 주의자(主義者)는 모조리 잡아들인다는데 동경에 남아있던 조선유학생 친구들, 또 오스키선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니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어찌해볼 도리조차 없으니 참말로 환장할 노릇 아닌가. 며칠을 번민하던 그는 불길한 잡념도 털어버릴 겸 욕지 앞 두미도(頭尾島)에 건너가 계몽운동을 하기로 했다. 주민 대부분이 문맹인 그 곳에서 집 하나를 빌려 강습소를 차리고 섬 아이들과 청장년들을 주야로 나누어 가르치며 섬사람 계몽에 나선 것이다.
관동대진재는 1923년 9월 1일 동경 일원에 일어난 미증유의 대지진이다. 막대한 재산과 인명피해를 낸 이 천재지변을 일제는 민심조작과 후데이센진(不逞鮮人)의 박멸 기회로 악용했다. 상해임시정부의 독립군이 상륙하느니 조선사람들이 우물에 독약을 넣느니 하는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흥분한 일본인들로 하여금 조선인을 마구 학살케 하는 참극을 연출했다. 이때 동경 권에 살고 있던 조선인 2만 명 가운데 약 6천 명이 학살됐다.
문맹퇴치와 계몽강습에 그런대로 마음을 붙이고 6개월쯤 지난 1924년 2월 어느 날이었다. 아이들의 낮 강습을 마치고 마루에 앉아 찬밥 한 덩이로 막 점심을 들고 있자니까 아이 하나가 선생님을 부르며 엎어지듯 집으로 뛰어 들었다. “선생님, 우리 얌생이를….” 아이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울부짖으며 말을 잊지 못했다. “울지 말고 차근차근히 말해봐라. 너그 얌생이가 우찌 됐단 말고?” 찬진이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우떤 사람이 우리 얌생이를 빼앗아 갑니다.”
듣자하니 더 이상 우는 아이를 상대하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숟가락을 놓고 신발을 꿰자 바로 달려 나갔다. 가는 길에 웅성거리고 있는 동네사람들에게 들으니 무슨 세금을 못 냈다고 군청 세무과에서 나와 염소 2마리를 끌고 갔다는 것이었다. 그는 내쳐 달려갔다. 저만치 마을 어귀에 도리우치 모자를 쓴 양복쟁이가 염소 2마리를 끌고 가고 그 뒤를 아이 할머니로 보이는 노파가 사정을 하며 매달리는 것이 보였다. “야아-, 거기 서라.” 질풍같이 쫓아가며 내지르는 고함소리에 도리우치가 돌아섰다. 도리우치 앞에 떡 버티고 선 찬진은 숨을 가다듬으며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보소, 그 얌생이를 돌려주소.” 도리우치는 웬 촌놈이 천지도 모르고 깨춤을 추나 싶었던지 꼴같잖은 듯 내뱉었다. “얌마, 니가 뭐꼬? 건방지게….” “그 얌생이를 주인에게 돌려주란 말이다.”
찬진은 혀끝으로 말을 한마디씩 밀어내듯 천천히 말했다. “이 자식이 엇따 대고 반말….” 도리우치는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말도 채 끝내기 전에 벌렁 나가 떨어졌다. 버둥거리며 일어나는 놈을 다시 발길질 한번으로 간단히 잠재운 찬진은 넋이 반은 나간 노파에게 염소 고삐를 건네주었다. "걱정 말고 집에 가이소." 기분이야 후련했지만 걱정은 농부가 할 게 아닌 바로 자기 몫이었다. 그는 그 길로 강습소에 가서 먹던 점심을 마저 먹고 난 다음 봇짐을 쌌다.
일경(日警) 사건 날조
동경에 돌아온 찬진은 참담한 마음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수많은 조선유학생과 동지들이 관동대진재 때 무참히 학살되었고 그가 존경했던 오스키선생은 그의 아내, 그리고 어린 조카와 함께 헌병대에 끌려가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유학생 아나키스트의 지도적 인물이었던 동지 박열(朴烈)이 대진재 이틀 후인 9월 3일 경찰에 소위 보호검속(保護檢束)되었는데 일제는 그에게 대역죄(大逆罪)라는 어마어마한 죄명을 씌워놓고 사건을 날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처음에 보호검속에서 치안경찰법 위반으로, 다음에는 폭발물 취급법 위반으로, 다시 대역죄로 죄명이 바뀌어 1926년 3월 25일에 사형이 선고되고 며칠 후에 무기로 감형된다. 이 사건은 조선인 대량학살을 호도(糊塗)하기 위한 사기극이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관동대진재를 현지에서 겪으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서 당시의 참상과 일제의 만행을 들은 찬진은 몸을 떨며 하늘에 맹세한다. “나는 천인이 공노할 만행을 자행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나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자유의 제단에 나의 신명을 바치겠다.” 그는 평생 종교를 가진 적은 없지만 우주의 섭리를 알았고 천도(天道)를 믿었다.
테러 대두
이 무렵 일본 아나키스트 진영의 일각에서 테러리즘이 대두한다. 나카하마(中濱鐵), 후루다(古田大次郞), 키와이(河合康左右) 등은「키로찐단(團)」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오스키와 많은 동지들을 살해한 원흉인 진재 당시 계엄사령관 후쿠다(福田雅太郞)대장과 하수인 아마카즈(甘粕)대위를 저격하고 자금 마련을 위해 은행을 털기도 한다. 또 이들의 테러에 조선인 아나키스트들이 무기와 폭탄을 제공하며 협력한다. 때를 같이하여 찬진은 계림장(鷄林莊)의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동지를 규합하고 조직화하기 시작한다. 계림장은 1924년 7월, 조선총독부가 조선인 유학생들을 합숙시켜 통제할 목적으로 동경 나카노구(中野區)에 세운 조선유학생 기숙사였다. 그런데 일제의 의도와는 생판 엉뚱하게 찬진이 계림장을 어느새 아나키즘의 온상으로 만들고 항일운동의 아지트 화 해버리자 요장(寮長) 마쓰우라(松浦)는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게다가 1927년 6월에 찬진을 중심으로 하는 아나계(系) 학생들이 계림장의 이름부터 한애료(汗愛寮)라 바꾸고 요 내(寮內)의 생활을 고학생(苦學生) 중심으로 개혁하려 들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기숙생들을 도저히 통제할 수 없게 된 마쓰우라는 이들의 추방을 폭력단체인「상애회(相愛會)」에 청탁하게 된다.「상애회」는 친일거두(親日巨頭) 박춘금(朴春琴)이 조직한 친일폭력단체로 경찰의 비호아래 온갖 못된 짓을 다하고 다니던 망나니 집단이었다. 동포노동자에게 공연한 트집을 잡아 공사현장에서도 예사로 폭력을 휘두를 뿐 아니라 걸핏하면「상애회」사무실로 끌고가 린치(私刑)를 가하는 등 행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들의 행패를 제지하던 한하연(韓何然) 등 노동조합 간부들도 이들에게 몰매를 맞았다. 참다못한 아나계「흑우연맹(黑友聯盟)」은 실력대결을 각오하고「상애회」의 행동대장 하고봉(河古奉)을 납치하여 따끔한 맛을 보여 주었다. 그런 참에 계림장의 관리인인 마쓰무라가 계림장의 토벌을 요청해오니「상애회」로서는 병신이 되버린 하고봉의 복수도 할 겸 이 기회에 이들을 완전히 쓸어버리고 판세를 장악하기 위하여 대 유혈극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1928년 2월, 눈발이 흩날리는 새벽녘에 일본도, 목검 등으로 무장한「상애회」의 기습조(奇襲組)는 일본경찰의 지원을 받으며 계림장,「흑우연맹」등 아나계 본거지로 쳐들어 왔다. 그러나 기습작전은 참담한 실패로 끝난다. 그런 낌새를 채고 아나계에서도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계림장을 기습했던「상애회」행동대 30여명은 투지만만한 유학생들과 찬진의 눈부신 활약으로 제대로 얼려보지도 못하고 일패도지(一敗塗地)하게 된다. 찬진은 무장한 그들에게 맨손으로 몸을 날려 선두 몇 놈을 삽시간에 처치하는데 그의 몸놀림과 발길질은 번개 같았다. 한편「흑우연맹」에 쳐들어간「상애회」패거리들은 한하연이 휘두르는 일본도에 몇 놈이 피를 뿜으며 쓰러지고 오히려 기선을 제압당하고, 허둥대던 나머지는 잠복해 있던「흑우연맹」행동대의 몽둥이세례를 받고 풍비박산이 된다. 한하연은「상애회」건달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한 뒤 만일을 대비해서 시게요시(繁慶)라는 명검(名劍)을 구해놓고 검술을 익혀두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찬진과 한하연 등 몇 사람이 경찰에 연행되지만 정당방위가 입증되어 풀려나오고, 도리어 경찰이 폭력단과 야합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폭로됨으로써「상애회」사건의 전말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사건 후로는「상애회 」건달들이 다시는 설치지 못한다.
싸움기술 탁월
찬진은 싸움이라면 신기에 가까운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무술 유단자인 고등계형사 서넛쯤은 순식간에 해치워 그들로부터 경외(敬畏)의 대상이 되기까지 했다. 그는 따로 호신술을 익힌 적은 없지만 타고난 강인한 체력에 몸이 워낙 날쌘 데다 담력 또한 초인적이어서 그 방면에서는 가위 전설적인 인물이다. 20여년에 걸친 그의 항일투쟁기간에 10수차례에 걸쳐 8년간의 옥고를 치르는 데 그동안 일경에게 쫓긴 적이 몇 십 몇 백 번이었겠는가. 그런 그가 혼자 도주하다가 붙잡힌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니 놀라운 일 아닌가. 오죽했으면 ‘정찬진이 붙잡히면 전봇대에 사쿠라가 핀다’는 말이 생겼을까. 예를 들면 일경의 추격을 받다가 도주로가 막히면 담을 타고 주택의 2층 옥상으로 올라가 이 집 옥상에서 다음 집 옥상으로 건너뛰며 내닫는 것이 무슨 장애물 경주라도 하는 듯이 했다하니 알만하지 않은가.
천황 암살계획
「상애회」사건이 있은 직후인 1928년 3월에 찬진은 인력거를 끌면서 고학을 하던 김호구(金豪九), 이학의(李鶴儀) 등 6명과「흑전사(黑戰社)」라는 비밀결사를 만들고 행동대「일성단(一聲團)」을 조직한다. ‘한 소리 한 방(一聲一擊)’으로 결판을 내자는 뜻이었다. 일제권력의 상징인 천황을 암살하고 중요기관의 파괴를 투쟁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행동규칙으로 1.기밀엄수 2.이탈불허 3. 변절자 제재 등을 정했다. 상해, 만주 등지에서 무기와 폭탄을 입수하는 대로 목표와 날짜를 결정하고 동시에 거사키로 했다. 이와 같이 지하조직을 결성한 후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흑전(黑戰)〉이라 이름 한 선전유인물을 5호까지 만들어 국내외에 우송했다. 1929년 5월에 그동안의 선전에 대한 반응도 살필 겸, 무기, 폭탄 구입의 임무를 띠고 김호구와 오병현(吳秉鉉)을 조선과 만주에 파견키로 했다. 장도에 오르는 기념촬영을 할 때 찬진은 딴 일로 빠지게 되어 뒷날 연좌를 모면하게 된다. 김호구와 오병현은 만주로 가는 길에 고향인 평남 용강(龍岡)에 들렀다가 마침 단오절을 맞아 씨름대회가 열린 기회를 타서 군중 속에 삐라를 뿌렸다. ‘농민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총독정치의 억압과 착취를 폭로하고 농민들은 단결하여 일본강권체제의 타도에 총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단서가 되어「흑전사」의 비밀조직이 탄로되고 함께 사진을 찍었던 8명이 체포되어 평양에 이송된다. 이때 통영출신 유학생 박유성(朴有城 통영군 통영면 정량리 204)도 부산에서 붙들려 평양으로 압송된다. 이것이「흑전사」사건으로 관련자 8명 중 5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노동절 시위 주도
한편, 계림장의 관리자 마쓰우라는「상애회」폭력단으로도 정찬진 세력의 구축(驅逐)에 실패하자 경찰의 협력을 얻어 1929년에「조선노동공조회(朝鮮勞動共助會)」라는 친일단체를 조직하여 계림장을 통제하려 들었다. 이때부터 아나계 고학생들은 찬진을 중심으로 수차 모임을 갖고 대책을 강구한 끝에 1930년 6월 14일「흑기노동자연맹(黑旗勞動者聯盟)」을 결성하고 찬진을 대표로 하여 1938년 1월 31일 일제에 의해 해체되기까지 항일투쟁의 가장 중요한 일익을 담당한다.「상애회」사건 이후 찬진은 일제의 정치권력과 폭력에 맞서 자위수단으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어느덧 아나키즘 노동운동의 기치를 든 민족해방운동의 선봉장으로 공인받게 되었고 그의 대담한 행동과 신출귀몰한 활약은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1931년 5월 1일, 메이데이(노동절)을 맞은 아나계 노동단체가 동경에서 대규모의 시위를 주도하였다.《흑색신문(아나계「흑우연맹」의 기관지로 찬진은 이 신문의 편집위원이었다.)》은 이때 ‘결전의 날 메이데이, 탈환의 날 메이데이이다. 흑기아래 모여서 전열을 가다듬자’라는 삐라를 살포하고 600여명이 흑기(黑旗)를 앞세우고 시위를 하다가 많은 사람이 구속되었다. 이때에도 선봉장을 맟았던 찬진은 진압 경찰들과 당연히 몸싸움을 하게 되었고 총검으로 강경 진압하는 경찰에 맞서 결국 혈투를 벌이게 되었다. 마침내 경찰 체포조의 표적이 된 그는 달아나지 않을 수 없었다. 포위망을 헤치고 도주하는 그의 뒤를 7,8명의 사복경찰이 쫓아왔다.
경찰의 추격을 피해 뛰어든 곳이 하필이면 요요기(代代木)의 어느 막다른 골목이었다. 골목 끝은 전철선로가 있어 높은 콘크리트 담장이 가로 막고 뒤에는 형사대가 쫓아오니 글자 그대로 진퇴유곡이었다. 찬진은 골목 끝에 서있는 전신주를 다람쥐처럼 올라갔다. 그 전신주는 전철의 선로를 가로지르는 선이어서 여느 전신주보다 훨씬 높았다. 뒤쫓던 형사대가 멀건이 쳐다보고 있는 사이 그는 전선에 매달려 전철선로를 순식간에 건너가 저쪽 전신주를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그리고는 그 때서야 전신주를 타고 콘크리트 담장 너머로 겨우 고개를 내미는 형사들에게 손까지 흔들어 보이며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이튿날《산케이신문(産經新聞)》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이 사건기사의 타이틀은 ‘원숭이 같은 정찬진’이었다.
이해 (1931년 7월) 흑색신문은 소위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을 일으켜 한중(韓中) 양 민족의 이간을 획책하고 유혈참극을 연출한 일제의 흉계를 폭로하고 삐라를 뿌리며, 아나계 단체들이 공동주최하여 만보산사건 규탄대회를 개최했다. 이때에도 찬진은 경찰과 맞서다가 쫓기는 몸이 되었다. 길이 막혀 몇 집 담장을 넘어 뛰어든 곳이 어느 가정집이었는데 그 집에는 마침 처녀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난데없이 뛰어든 그를 보고 너무 놀라 소리도 못 지르는 그녀에게 그는 조용히 부탁했다. “경찰에 쫓기고 있소. 잠깐만 숨겨주시오.” 그때 대문을 주먹으로 치며 문을 열라는 경찰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처녀는 상황을 판단한 듯 자기 방의 오시이레(벽장)를 가리키고는 대문께로 천천히 갔다. “누구세요?” “경찰이다. 빨리 문을 열어라!” “무슨 일이세요?” “빨리 문을 열란 말이야!” 그녀가 대문의 빗장을 따자 네댓 명의 사복경찰이 왈칵 쏟아져 들어왔다. “방금 어떤 놈이 하나 들어왔지?” 어느새 냉정을 되찾은 처녀는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냐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딴전을 피운다. “어떤 놈이라니오?” 더 이상 수작을 할 필요가 없다는 듯 형사들이 흩어져 후다닥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으나 흔적이 없자 “수상한 놈이 보이면 즉시 경찰에 연락해.” 하고는 밖으로 몰려나갔다. 찬진은 그 일본처녀에게 머리 숙여 감사했다. 그리고 자기는 도둑이나 흉악범이 아니라 도둑맞은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도둑과 싸우는 조선사람이라고 했다. 그날 그녀에게서 저녁까지 대접받고 어둠이 깔린 뒤에야 그 집을 나서는 찬진의 가슴에는 잔잔한 물결이 일고 있었다.
찬진은 평생을 일관되게 정의라고 판단될 때에는 바로 행동으로 옮겼고 불의라고 생각되면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이웃이 곤경에 처한 것을 보면 자기희생을 무릅쓰고 도와주었고 남이 의로운 일을 하면 어린애처럼 감동하였다. 계림장 시절 그는 조선고학생들의 대부였고 통영출신 유학생치고 직접 간접으로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할 정도였다.
1927년 큰 비로 낙동강이 범람하여 삼랑진 일대가 물바다가 되어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였다.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에 돌아온 유치진(柳致眞)이 이들 수재민을 돕기 위하여 ‘카르멘’이라는 작품으로 고향에서 자선공연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연비를 마련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을 때 이 소식을 들은 찬진이 30원을 만들어 주어 공연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그 당시 30원은 거금이어서 총 공연비 10원을 제한 20원과 입장료수입 3원을 합쳐 23원을 의연금으로 전달하였다.
만년에는 충무고등공민학교 학생들에게 용돈을 아껴 장학금을 주기도 했고 회고록을 출판하라며 재일교포들이 모아준 돈을 어려운 처지에 있는 옛 친구에게 몽땅 주어버리기도 했다. 그로인해 그의 회고록이 남겨지지 않았으니 참으로 애석하다.
1927년 소위 ‘김기정(金淇正) 망언사건’으로 통영의 많은 지사들이 잡혀 들어가 있을 때의 이야기다. 김기정은 통영출신 경상남도 평의원으로 1927년 3월 도 평의회 석상에서 “조선사람에게는 고등교육을 시킬 필요가 없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그해 5월 통영에서 범국민적인 규탄대회가 열리고 성난 군중이 문화동에 있던 김의 집을 습격하여 온 집안을 박살낸 사건이 있었다.
그해 여름에 고향에 다니러 왔던 찬진은 동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산에 잠시 들러 이 사건의 주범으로 구속 기소된 박봉삼(朴奉杉)․김영중(金永仲)들의 재판을 방청하게 된다. 박봉삼은 찬진보다 30세 연상이어서 까마득한 사이다. 그러나 박봉삼이 통영청년단 초대 단장으로 있을 때 찬진은 청년단의 강연회에서 그의 열변에 감명 받은바 컸기에 먼발치에서나마 존경하는 고향선배를 뵙고자 일부러 왔던 것이다. 재판이 시작되고 일인 판사가 박봉삼에게 물었다. “피고가 김기정이었다면 어떻게 했겠는가?” 박봉삼은 재판관을 빤히 쳐다보면서 똑똑 떨어지게 말했다. “나는 박봉삼이야.”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만일에 피고가 김기정의 입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느냐하는 말이다.” “어허, 나는 박봉삼이라니까, 당신은 어찌 감히 김가 놈을 나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는가?” 박봉삼이 대갈일성하자 일인 재판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더니 서둘러 휴정에 들어갔다. 이를 지켜본 찬진은 감격한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 박봉삼의 사식차입 영치금으로 넣어주고는 뿌듯한 감동을 안고 떠난다.
찬진에게는 친소(親疎)가 따로 없었다.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사람은 동지였고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는 사람은 형제였다. 1933년 11월에 소위 육삼정(六三亭)사건으로 원심창(元心昌)․백정기(白貞基)․이강훈(李康勳) 3지사가 상해에서 일본으로 압송되어왔다. 이때에도 찬진은 생면부지의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육삼정사건이란 윤봉길(尹奉吉)의사가 상해 홍구(虹口)공원에서 일제의 문무고관들을 폭살한 의거가 있은 지 1년 후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 중국에 있던「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의 3동지는 주중(駐中)일본대사 아리요시(有吉明)가 중국정부요인의 매수공작을 위해 1933년 3월 17일 밤9시에 상해의 중국요리점 육삼정에서 연회를 베푼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아리요시를 저격하여 이 음모를 사전분쇄하려다가 거사 직전에 발각 체포된 사건이다.
이들이 일본으로 압송되어온 7월부터 찬진은「동흥노동연맹(東興勞動聯盟)」의 양일동(梁一東),「극동노동조합」의 진철(陳哲),「흑우연맹」의 홍성환(洪性煥)들과 자금을 마련하여 이들이 갇혀있던 우라카미(浦上)형무소에 금품을 차입해주는 한편, 변호사를 선임하고 그들의 구명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원심창, 백정기 두 사람은 무기징역이 선고되고 이강훈은 15년형을 받았으나 이들이 공소를 포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찬진의 노력은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35년부터 탄압 가중
1935년을 기점으로 사회주의 노동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점차 가중된다. 그에 따라 찬진의 투쟁도 더욱 가열되고 그의 수배령은 풀릴 틈이 없어진다. 이 무렵 그가 경찰의 수배령을 헤집고 다니면서 만들어 낸 일화는 세인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또 그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적당히 윤색 되어 그는 신출귀몰한 항일투사로 경모의 대상이 되기까지 한다. 당시의 일화 몇 가지를 들어보자. 카구라사카(神樂坂)에 있던 친구 허남실(許南實)의 집에서였다. 아나계 학생연맹의 유치진을 비롯한 고향친구와 후배 몇 명이 모여 각 단체의 연계투쟁에 대하여 의논하고 있을 때였다. 바깥이 수상쩍어 내다보니 형사 네댓 명이 집을 포위하고는 죄어들고 있지 않은가. 그 집은 따로 떨어진 2층집으로 아래층은 창고였고 위층에 허남실이 세를 들어 있었는데 한낮인데다가 외딴집이라 움치고 뛸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다들 입을 봉한 채 찬진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찬진은 안주머니에서 태 굵은 안경을 꺼내어 떠억 쓰더니 벽에 걸려있던 허남실의 모자를 걷어 머리에 삐딱하게 얹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방안을 한번 둘러보면서 “어때?”하고 씩 웃고는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문을 나서자 형사대가 찬진을 에워쌌다. “네가 정찬진이지?” 찬진은 이 사람들이 왜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그러나 제법 싹싹하게 대답했다. “아, 찬진이, 찬진이는 지금 2층에서 자고 있소.”
형사대가 후다닥 2층으로 뛰어올라가는 소리를 들으며 찬진은 유유히 잠적했다. 한번은 찬진의 막내아우 원진(丁遠鎭)이 키지조지(吉祥寺)에 있는 형의 거처를 찾아 갔을 때였다. 형제간이라지만 나이 차이가 18살이나 되니 객지에서 어린 원진에게 찬진은 아버지 맞잡이이었다. 형이 학비를 대주지만 형이 늘 경찰에 쫓기는 몸이라 일정한 거처가 있을 수 없고 그러니 형을 만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형을 만난다는 흥분과 기대감으로 걸음을 재촉하여 형의 처소에 막 들어서려는데 일본형사 3명에게 붙들려 나오는 형과 마주치게 되었다 깜작 놀란 원진이 앞뒤 생각 없이 “형니임”하고 부르며 확 내달았다. 이를 보고 형사들이 잠깐 멈칫하는 순간, 이 틈을 포착한 찬진이 양팔을 끼고 있던 형사 둘의 옆구리를 양 팔꿈치로 한 대씩 가격하여 쓰러뜨리고 바로 돌아서면서 뒤 따라 오던 형사의 턱을 걷어차 버리니 눈 깜박할 사이에 형사 셋이 뻗어버렸다. 찬진은 놀라 얼어붙은 아우 원진에게 다가와 주머니를 털어주면서 걱정 말고 집에 돌아가라고 이르고는 사라져 버렸다.
형사들 허탕 일쑤
찬진이 코엔지(高円寺)의 친구 집에 피신해 있을 때의 이야기다. 여섯 명이 한 방에 자고 있는데 자정께에 형사대가 덮쳤다. 그러나 그들이 찾던 찬진은 그 방에 없었다. 동경경시청(東京警視廳) 특고과(特高課)의 고이즈미(小泉)형사는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닌가. 자기 눈으로 찬진이 이 집의 방에 있는 것을 확인했고 섣불리 뛰어들다가는 놓치기 십상이므로 찬진이 잠들기를 기다려 덮쳤는데도 연기처럼 사라졌으니 말이다.
허탕을 친 형사들이 성깔을 부리며 방안에서 자던 사람들을 닦달을 했지만 다들 꿀 먹은 벙어리들이다. 조금 전까지 함께 누워 얘기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형사대의 급습에 놀라 깨어보니 찬진은 물론 그의 옷가지와 그가 누웠던 자리 흔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찬진은 어느새 그 방 천정 위의 들보에 앉아있었다. 쫓기는데 익숙해 있던 그는 항상 자면서도 깨어있었다. 육감이 이상해 살짝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누웠던 흔적을 지우고 옷가지를 챙겨 방 옆 일식변소의 천정을 뚫고 오르자 형사대가 들이 닥쳤던 것이다. 그는 불과 한길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동에 한동안 귀를 기울이다가 들보에 등을 깔고 길게 누웠다. 먼지가 매캐하게 코로 들어왔지만 시간이 좀 걸리겠다싶어 아예 길게 누울 채비를 한 것이다. 그러나 부엌 찬장 밑에 숨겨두었던 신발을 미쳐 못 챙긴 것이 천려 중의 일실이었다. 한동안 도깨비에 홀린 듯한 기분에서 깨어난 고이즈미 형사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집 안팎을 차근차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부엌 찬장 밑에서 까만 구두 한 켤레를 발견하고는 그것이 찬진의 구두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찬진같이 담장을 뛰어넘고 옥상을 건너뛰며 지붕에서 뛰어내리기를 능사로 삼는 사람이 이런 밤중에 맨발로 멀리 도망갔을 리가 없다고 판단한 고이즈미는 찬진이 근처의 은밀한 곳에 숨어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형사대를 근처에 잠복시켜놓고 자기는 부엌에서 찬진을 기다리며 그 밤을 꼬박 새웠다.
그러나 날이 밝아도 신발 임자는 나타나지를 않았다. 한낮이 지루하게 지나고 날이 저물어도 소식이 묘연했다. 잠복형사들이 먼저 지쳐 찬진은 멀리 뛰었으니 철수하자고 해도 고이즈미는 듣지 않았다. 또 하룻밤이 새고 새날이 밝자 잠복형사들은 돌아가고 고이즈미 혼자 남아서 찬진이 모습을 나타내기를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었다. 천정 위에 웅크리고 있던 찬진으로서는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 한 이틀 밤만 버티면 제물에 지쳐 물러날 줄 알았는데 고이즈미란 놈이 끝까지 물고 늘어지니 천하의 정찬진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이틀 밤 하루 낮을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옹색한 장소에서 버티자니 목은 타고 온몸이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천정 바로 아래 방에서는 아침밥을 지어 친구들이 둘러앉아 먹고 있었다. 허기가 지니 후각은 더욱 예민해져서 밥 냄새와 된장국 냄새가 내장과 머리를 온통 휘저어 놓는데 견딜 재간이 없었다. 찬진은 버티는 것이 손해다 싶어 변소 천정을 뜯고 아래로 내려갔다. 인기척에 놀란 고이즈미가 밥상머리에서 후다닥 일어나 권총을 뽑아들었을 때 그 앞에 모습을 드러낸 찬진은 천천히 몸을 움직여 굳어있는 몸을 풀면서 말했다.
“고이즈미라고 했지? 자네는 정말 미련스럽게 끈질긴 친구로군. 내 이번에는 자네에게 붙들려 갈 터니깐 그 위험한 장난감은 치우게.” 밥상 앞에 물 한 대접을 벌컥벌컥 들이켠 찬진은 밥 먹다 말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는 친구들을 둘러보며 “뭘 해? 넋이 나갔나? 같이 먹자고”하더니 걸신들린 사람처럼 밥을 우겨 넣는다. “찬진이, 좀 천천히 씹어가며 먹게나” “걱정 말아, 나는 밥통에도 이빨이 있으니까” 호탕하게 농담까지 하면서 친구들이 밀어놓은 밥까지 개 눈 감추듯 치워버린다. 그리고는 잔뜩 굳어있는 고이즈미에게 일방적으로 말한다. “고이즈미군, 나 한숨 잘 테니까 잘 지키고 있게.” 고이즈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밥상을 옆으로 밀고 길게 누운 찬진은 기지개를 한번 크게 켜더니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다.
이날부터 찬진과 고이즈미와의 묘한 관계가 시작된다. 찬진의 의기와 인품에 감복된 고이즈미는 찬진을 깍듯이 모시고 나중에는 깊이 존경하게 되는 것이다. 찬진도 쫓고 쫓기는 자의 관계를 넘어 고이즈미를 아우처럼 대한다. 찬진이 공개 수배되어 숨을 곳이 마땅찮으면 고이즈미 집에 찾아가 며칠이고 머물면서 뒷수습을 해놓고 나서 고이즈미에게 붙잡혀가는 형식을 취한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서 고이즈미는 특진을 거듭하고 찬진의 전담형사가 된다. 그리하여 찬진의 사건은 그 것이 어느 지역에서 일어났건 동경경시청 특고과의 그에게 즉각 이첩되고 아무나 함부로 찬진을 조사하지 못하게 된다. 훗날 일본이 패망하여 미군정이 실시되었을 때, 실직하여 생활이 어려운 고이즈미에게 찬진이 생활비를 대주기까지 하는 것이다.
공범으로 오인
1934년 찬진은 동경에 있던 최석봉(崔石峯)이라는 조선사람의 집에서 며칠을 그와 함께 지낸 적이 있었다. 최는 강도 전과자였는데 이때 최가 일본인 총포상에서 권총과 실탄을 훔쳐내어 강도행각을 벌이고는 멀리 평양으로 도주했다. 이런 사실을 탐지한 찬진은 권총을 빼앗을 요량으로 최를 추적하게 된다.
한편 경찰은 최석봉을 추적하던 중 찬진이 최의 집에서 며칠 숙식을 했고, 강도사건이 나자 최와 함께 증발한 점으로 보아 찬진을 최의 공범이라 단정하고 전국에 지명수배하게 되었다. 수배 망을 뚫고 평양까지 쫓아가서 최를 붙잡은 찬진은 따로 크게 쓸 일이 있으니 권총을 좀 빌려달라고 간곡히 말했으니 최가 불응하자 할 수 없이 최를 힘으로 제압하고 권총을 빼앗았다. 권총을 손에 넣은 찬진이 동경으로 돌아오려고 역에 나가다가 잠복해 있던 평양경찰서 형사대에 체포되었다. 찬진의 몸에서 권총이 나왔으니 꼼짝없이 강도범이 되었고 ‘권총강도 정찬진 체포’라는 기사가《평양매일신문(平壤每日新聞)》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런데 최석봉이 체포되어 강도사건이 자기의 단독 범행임을 자백하고 찬진의 알리바이가 성립되자 찬진은 풀려나게 되었다. 불법무기소지죄로 입건하려 했으나 찬진은 최의 또 다른 범행을 막기 위해 권총을 빼앗고 그 것을 동경에 가서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다며 버티었고 최도 그 말을 입증해 주어 무사했던 것이다.
석방된 찬진은《평양매일신문사》를 찾아가 사장을 만났다. 자기를 권총강도라고 오보를 내어 명예를 훼손했으므로 손해배상을 하고 정정기사를 내라고 윽박질렀다. 불응하면 신문사의 인쇄시설을 모조리 부숴버리겠다고 얼러대니 찬진의 명성과 기백에 눌린 사장은 결국 정정기사와 2천원의 위자료를 내놓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 했다.
찬진은 동경경시청의 특급 요시찰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항상 미행이 따랐고 기미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예비 검속되었다. 10수차례에 걸쳐 8년간의 옥고를 치르지만 단 한 번도 배후나 조직을 댄 적이 없었다. 특히 그의 묵비권 행사는 유명했다. 묵비권은 일본의 형사소송법에 엄연히 보장되어 있는 기본권이지만 조선사람, 더욱이 항일민족주의자에게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 치렛말에 불과했다. 그러나 찬진은 경찰조사에서나 재판정에서나 끈질기게 묵비권을 고집했다. 그로해서 모진 고문도 수 없이 받지만 결국 손을 드는 쪽은 늘 신문하는 쪽이었다.
37년부터 탄압 가중
시국은 하루가 다르게 험악해지면서 찬진의 활동을 더욱 죄이고 들었다. 1937년 1월 소위 ‘무정부공산당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에 철퇴를 가하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항일민족주의자들에 대한 대검거선풍이 불었다. 조직은 파괴되고 동지들은 뿔뿔이 흩어진 동경 바닥에서 죽지 부러진 독수리 형세가 된 찬진은 가끔 고향에 돌아와 짧게는 며칠 길게는 달포 가량 머물다 갔다.
무모한 투쟁보다 새로운 항일방향의 모색을 위해 사색과 힘의 충전이 필요했던 것이다. 만년에 그는 이때를 두고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사물은 성(盛)할 때가 있고 쇠(衰)할 때가 있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데도 순경(順境)도 있고 역경(逆境)도 있지 않습니까? 운세가 성할 때는 자기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쇠할 때는 그게 제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만사가 나쁜 방향으로 꼬이지요. 그럴 때에는 움츠릴 줄 알아야 합니다. 움츠리고 때를 기다리다가 변화의 찬스를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경시청 형사와 숙식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찬진은 동경경시청의 특고과 형사와 동거를 하다시피 했다. 처음에는 멀리서 미행하며 감시를 하더니 언제부터인가 아예 찰싹 붙어서 같이 행동하며 먹고 자기에 이르렀다. 여러 번 따돌리기도 했지만 이것이 그를 보호(?)하기 위한 고이즈미 나름의 배려라는 것도 찬진은 알고 있었다. 찬진이 고향에 올 때면 특고형사가 동경에서 통영까지 동행해 와서 통영경찰서 고등계에 인계했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감시는 하되 정중히 모시라는 부탁까지 하는 것이었다.
찬진이 통영에 오면 늘 김용주(金容朱) 집에 묵었다. 그 당시 김용주는 동경 카와바카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인체연구실에서 6년간 연구생활을 마친 후 귀향하여 화실(항남동 9번지)에서 작품제작에 몰두하며 1940년과 1941년 선전(鮮展) 양화부에 이태 연거푸 입선하고 있었다. 둘은 동경시절부터 호형호제하는 친밀한 사이로 찬진이 5살 연상이었다. 찬진이 용주 집에 머물 동안 사복형사 둘이 교대로 보초를 섰고 찬진이 집을 나서면 따라 나서곤 했다. 당시 통영경찰서 고등계에 고모(高某)라는 조선인 형사부장이 있었는데 ‘고부장 온다’하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칠 정도로 악명을 드날리고 있었다.
고부장이 어느 날 가만히 생각했다. ‘정찬진이란 자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놈이기에 상전 모시듯 해야 한단 말인가. 내 이 놈을 혼내주고 옭아 넣어 천황폐하를 위하는 나의 충성심을 과시해 보이리라.’ 이렇게 마음을 정한 고부장은 용주 집에 있던 찬진을 연행해오게 했다. 경찰서 출입에야 이력이 나있는 찬진이지만 따로 마음에 짚이는 바도 없었고 마침 용주 집 마당에서 닭싸움을 한창 재미있게 구경하고 있던 참에 느닷없이 끌려오니 기분이 매우 상해 있었다. 찬진을 연행해온 순사는 2층 복도 맨 끝에 있는 으슥한 방에 찬진을 밀어 넣고는 가버렸다. 10평 쯤 되어 보이는 그 방에는 중앙에 책상 하나와 의자 두 개가 썰렁하게 놓여 있었고 구석 쪽에는 몽둥이, 포승, 로프, 쇠꼬챙이, 물주전자 따위의 고문도구가 널려 있었다. 찬진은 천천히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 때 옆방에서 고함소리에 이어 둔탁한 소리와 자지러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찬진이 책상 언저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담배 한 대를 다 피웠을 쯤 해서 문이 열리고 고부장이 들어왔다. “이XX 담뱃불 꺼!” 뱀눈으로 징그럽게 웃던 고부장이 꽥 소리를 질렀다. 찬진은 뚜벅뚜벅 구석으로 걸어가 거기 있는 주전자 뚜껑을 열고 그 속에 담배꽁초를 집어넣는다. ‘피식’하면서 담뱃불 꺼지는 소리가 묘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거기 앉아!” 턱으로 의자를 가리키고 건너편 의자에 앉은 고부장은 서랍에서 조서용지 몇 장을 꺼내어 찬진 앞에 밀어놓고 자기 윗주머니에 꽂혀있던 만년필을 뽑아 그 위에 놓는다. “자술서를 써!” “…? ” “네가 통영에 뭐 하러 왔는지 말로 할 때 정직하게 쓰란 말이야.”
찬진은 순간적으로 고부장의 의도를 간파했다. 이럴 때에는 역으로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 “이런 왜놈의 개XX가….” 찬진은 벌떡 일어서면서 앉아있던 의자를 집어 들고 고부장의 정수리를 보고 내리쳤다. 얼결에 의자에 앉은 채로 뒤 자빠져 간신히 골통의 박살을 면한 고부장의 몸 위로 찬진이 차버린 책상이 덮쳤다. 그 위로 다시 내려 친 의자가 박살이 났다. 순식간에 일어난 이 돌발 사태에 혼이 공중에 뜬 고부장이 자기도 모르게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살려 주십시오” 하고 빌게 된다. 부서진 책걸상 틈 사이에 끼어 허우적거리는 고부장의 멱살을 틀어쥐고 추켜세우고 찬진은 포효한다. “내가 바로 너 같은 왜놈의 개XX를 징벌하는 정찬진이다. 너 오늘 내 손에 죽어봐라.” 찬진의 기세에 워낙 되게 눌린 고부장은 그 후로 찬진을 ‘아네키(형님)’라 부르며 경원하게 된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개전 초 6개월 동안에 동남아 일대를 석권하고 태평양과 인도양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1942년 4월 미군기에 의한 동경 일원의 공습을 신호탄으로 전쟁의 양상이 반전되기 시작하더니 그해 6월 미드웨이해전에서 세계최강이라 자랑하던 일본해군의 연합함대가 괴멸되면서 전세는 급전직하 되었다. 일제는 총 동원령을 내리고 발버둥을 쳤으나 1945년 히로시마(廣島)와 나카사키(長崎)에 원자탄이 투하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무조건 항복하기에 이른다.
이어 미군이 일본전역에 진주하고 맥아더사령부(聯合國最高司令部)가 동경에 설치되었다. 몽매에 그리던 조국의 해방을 맞은 찬진은 해방조국의 건국에 참여하고자 귀국을 서둘렀다. 가산을 정리하여 아내(崔末香)와 세 아들(海龍, 海淸, 海遊), 그리고 젖먹이 딸(明順)을 먼저 귀국시켰다. 그러나 뒷정리를 위해 처진 찬진은 차일피일 귀국을 미루면서 재일동포문제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선 다급한 문제가 재일조선인의 안전과 원호 업무였다. 당시 일본의 치안은 혼란의 극에 달해 있었고 맥아더사령부의 군정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조국으로 돌아가는 귀환동포의 수송대책과 잔류조선인의 생활보호문제 등을 주선하고 대변할 모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특히 해방이 되어 조선이 주권국가가 되니 재일조선인의 일본체류가 국제법상으로 문제가 생겼다. 찬진은 아나키스트 항일운동가들을 주축으로「신조선촉진동맹(新朝鮮促進同盟)」을 결성하고 맥아더사령부와 일본당국을 접촉하면서 재일조선인 문제의 해결을 시도한다.
한편 해방 후에도 일본당국의 방해로 출옥 못하고 있던 박열의 석방운동에 나선다. 박열은 아나키스트로 1923년 9월의 동경대진재 때 일제가 조선인 학살사건을 호도하기 위해 대역죄라는 날조된 죄명을 씌워 무기형을 선고해 23년째 옥살이를 하고 있는 찬진의 옛 동지이다. 찬진의 탄원이 맥아더사령부에 받아들여져 박열이 석방된 것은 1945년 10월이었다. 일본당국은 해방 후 마땅한 이유도 없이 박열의 석방을 미루어 왔기에 보도를 관제하며 찬진에게 은밀히 연락을 취해왔다. 아키다(秋田)형무소장으로부터 ‘박열을 석방시킬 테니 조용히 데려갈 수 없겠느냐?’는 제의를 수락한 찬진은 아우 원진을 아키다로 보내 석방 전 박열을 면회하고 오게 했다. 그것은 그간의 소식도 전하고 박열의 건강도 살필 겸 출옥하는 독립투사에게 깨끗한 옷이라도 맞추어 입히기 위한 배려였다.
박열이 출옥하는 날 원진은 간소한 환영준비를 시켜놓고 혼자 아키다형무소로 갔다. 그때 이야기를 정원진(71세, 충무금고 대표이사)씨에게서 직접 들어보자.
당시 박열씨는 44살이었는데 22년간의 옥고에 지쳐 머리는 다 빠지고 몹시 허약해 있었습니다. 워낙 체구도 작았지만 제가 전날 면회 가서 보고는 눈짐작으로 12살짜리 아이 체격에 맞는 양복을 맞추어 갔었지요. 그런데 입혀놓고 보니 그 옷도 커서 헐렁해요. 제가 그 분을 감옥에서 업고 나와 차에 태웠지요. 박열씨는 출옥 후 한동안 저의 집에 묵었습니다.
해방 후 두어 달 동안에 재일조선인 사회에서는 조선인의 권익보호를 외치며 각종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민족계열, 공산계열, 아나계열로 대별할 수 있는 그 단체들은 저마다 의욕과 열정은 대단했으나 제가끔 따로 노는 통에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 계파들은 연쇄접촉을 갖고 모든 단체가 대동단결하여 재일조선인 사회를 대표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대표조직으로「조선인연맹(朝鮮人聯盟)」을 결성하고 일본 전국에 47개 지방본부를 구성하였다.
그런데「조선인연맹」은 각 계파 안배를 배격하고 공산계로 조직을 독차지하다시피하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민족계열에서는 1945년 11월「조선건설촉진청년동맹(朝鮮建設促進靑年同盟)」을 결성하고 따로 12개 지방본부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오월동주(吳越同舟)격으로 제각기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조선인연맹」이라는 배는 당시 재일조선인 사회를 실질적으로 대표하고 있었다. 이럴 무렵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 모인 미국, 영국, 소련 3국 외상이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와 함께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공산계열과 이를 반대하는 민족계열이 반목 대립하는 민족적 비극이 일본 땅에서도 시작되는 것이다.
1946년 2월 27일 동경 지오다쿠(千代田區)에 있는 나가다소학교(永田小學校) 강당에서「조선인연맹」은 임시대회를 열고 찬탁이냐 반탁이냐의 지지결의를 하게 된다. 강당에는 대의원들이 열 지어 앉고 정면 단상에는 의장단 5명(尹謹, 金正洪, 趙喜俊, 金民化, 申鴻湜)이 자리 잡고 김재화(金載華)가 진행을 맡아 보았다. 그런데 공산계열에서는 이날의 대회를 신탁통치 찬성 쪽으로 몰아가려고 행동대원 700여명을 풀어 대회장을 포위하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대회가 시작되자 찬탁 반탁 논의에 앞서 남북한의 정세파악을 위해 본국에 파견했던 대표단의 보고부터 듣기로 했다. 대표단을 이끌고 갔던 단장 윤근이 연단에 나섰다. 윤근은 동경 YMCA 총무로 있던 자로 기독교인이었는데 이날 뜻밖의 보고를 하며 민족계열의 분노를 촉발한다. 그는 보고의 말미에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이었다. “남조선에서 김구, 이승만 등 민족지도자들을 만나보았는데 권위주의자들로서 아집을 가지고 있어 비민주적이이고, 북조선의 김일성은 민주적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북조선 김일성의 노선을 따라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치밀한 사전계획과 시나리오를 짜놓고 있던 공산계열은 윤근의 보고를 기정사실화하면서 일체의 반탁발언을 봉쇄하고 찬탁 쪽으로 기세를 몰아갔다. 이렇게 되자 회의장의 분위기는 찬탁 쪽으로 기울어지는 듯 했다. 이때 민족계열의 정백우(鄭白宇)가 단상으로 뛰어올라 의장단 5명 중 2명이 일본경찰의 앞잡이라고 폭탄선언을 함으로써 회의장을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만들어 버렸다. 정백우의 기습에 허를 찔린 회장단은 정의 발언을 막지도 못하고 해명도 할 수 없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회의장의 분위기는 반전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지방대의원들과 회의장을 둘러싸고 있던 행동대원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되어 처음의 기세와는 달리 회의는 원점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첫날은 이렇게 아무 결론도 보지 못한 채 혼란 속에 서 보내고 이튿날(2월 28일) 회의가 속개되었다. 이날 오전, 대세에 밀린 회장단이 반탁논의도 수용한 후 오후에 대의원 투표로 결정키로 하고 점심시간에 들어갔다. 공산계열은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대세를 반전시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이때 회의장에 반탁 삐라와 격문을 뿌리면서 공산당의 음모를 폭로하고 있던 찬진과 이문열(李汶烈)을 공산계열 행동대원 몇이 덮쳤다. 그리고는 두 사람의 몸에서 권총이 나왔다고 외치며 둘을 묶어 단상으로 올라갔다. 단상에 오른 그들은 밧줄에 꽁꽁 묶여있는 두 사람을 무릎을 꿇리고는 소위 약식 인민재판을 열고 순식간에 사형을 선고해 버렸다.
이런 돌발 사태를 대세반전에 기민하게 이용한 공산계열은 득의만면하여 두 사람을 서둘러 처치하고 찬탁결의를 할 참이었다. 행동대원 하나가 어느새 교정에 있던 방화용 쇠갈고리를 가져와 찬진의 머리를 찍었다. 찬진의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 되었다. 찬진은 결박당한 채 꼼짝없이 그 자리에서 맞아 죽는 것 같았다. 이때 강당을 울리는 총소리와 함께 정철(鄭哲)이 권총을 뽑아들고 단상으로 내달았다. “해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일방적이 사형선고가 웬 말이냐?”
그는 접근하려는 행동대원에게 위협공포를 쏘며 뒤이어 단상에 뛰어오른 기관호(奇寬鎬)와 함께 두 사람의 결박을 풀고 함께 강당 밖으로 탈출했다. 강당을 나와서도 찬진은 행동대원들의 돌멩이 기왓장 세례를 받으며 위기에 몰려 있을 때 마침 출동한 미군 MP차로 병원에 호송되어 살아날 수 있었다. 그의 이마에 깊이 파인 흉터가 바로 그때에 생긴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민족계, 아나계는 퇴장하고 공산계만 모여 후딱 방망이를 치고는 신탁통치 지지결의를 해버렸다. 이날 1946년 2월 28일자「조선인연맹」을 탈퇴한 민족계, 아나계는「신조선건설동맹(新朝鮮建設同盟)」을 결성하고 반공투쟁의 막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이「신조선건설동맹」을 주축으로 비공산계열이 대동단결하여 1946년 10월「재일조선거류민단」이 결성되는 것이다. 이날 히비야(日比谷)공회당에서「신조선건설동맹」,「조선건설촉진청년동맹」을 위시한 20여개 단체가 발전적 해체를 하고「민단」에 합류했으며 초대 단장으로 박열을 옹립하고 육삼정사건의 이강훈, 원심창에게 부단장과 사무총장을 맡긴다. 이들은 해방 후에 출옥한 유명한 아나키스트독립운동가로 이들의 선임은 재일동포들에 대한 신뢰와 선전효과를 다분히 노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랜 감옥생활로 인해 현실감각이 무디었다. 찬진은「촉진회」와「문화인클럽」을 통하여「민단」을 사실상 조정하면서 자신은 무임소부장으로 뒤에 물러앉고 아우 원진에게 재무부장을 맡기고 아나키스트 동지들을 요직에 앉힌다.「민단」초창기에는 조직과 자금 모든 면에서「조련」에 비해 열세에 있었다.「조련」은 일본전국에 조직을 갖고 있었고 그때 이미 김일성체제를 굳힌 북한으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민단」은 남한이 미군정 하에 있었으므로 본국정부가 없으니 애당초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민단」이 그런대로 자리를 잡아갈 수 있었던 것은「민단」지도자들의 애국심과 헌신 때문이었지만 맥아더사령부의 은근한 지원도 무시할 수 없었다. 맥아더사령부에서는 해방 조선인의 조직이 비대해 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에 ‘분열시켜놓고 지배한다.’는 원칙하에 상대적으로 열세인「민단」측을 음성적으로 지원해 주었던 것이다.
1948년 8월, 남한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민단」도 공식명칭을「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이라 개칭하고 반공의 기치를 높이 든다. 이후「민단」과「조련」과의 대결은 그치지 않았고 6․25사변을 정점으로 유혈투쟁이 계속된다. 찬진은 6.25가 한창이던 1951년부터「민단」동경지방본부단장을 4년간(제8,9대) 연임하면서「민단」조직을 조총련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1955년부터 1958년까지 중앙본부단장을 3기(제17,18,19대) 연임하면서「민단」의 세를 확장하여「조총련」을 압도하기에 이른다.
1959년 12월 14일, 소위 북송선1호가 북한 청진(凊津)을 향해 일본 니가다(新瀉)항을 출발했다.「조총련」의 감언이설에 꼬인 재일교포 238세대, 975명이 소련 국적의 수송선을 타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북한 땅으로 영영 떠나버린 것이다. 한국정부의 강력한 항의와 반대를 무시한 일본정부의 처사로 한일관계는 벼랑 끝에 서게 되고 국내외에서 연일 북송반대데모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때 찬진은 북송을 강행하는 일본정부에 맨몸으로 맞선다.
갖가지 반대투쟁이 무위에 그치자 찬진은「민단」 애국청년 결사대원 100여명을 이끌고 니가다역에 대원들을 철로 위에 눕히고 자기는 맨 앞에 철로를 베고 누워 북송열차를 저지한 것이다. 이로 인해 북송열차는 5시간가량 지연되지만 찬진과 대원들이 경찰에 연행됨으로써 이 또한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찬진은「민단」을 이끌어 가는 동안 본국정부의 처사에 불만이 많았다. 자유당은 6․25의 와중인 임시수도 부산에서부터 정치파동을 일으키면서 정권 연장에만 혈안이 되어 민생은 뒷전이었다. 자연히「민단」의 지원도 안중에 없어 북한의 강력한 지원을 받은「조총련」과 힘겨운 대결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찬진은「민단」에 대한 인식제고를 위해 본국의 국회에 진출할 결심을 하게 된다. 또 찬진의 투사적 기질이 자유당의 횡포와 이승만의 독재를 좌시하도록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찬진은 제3대 국회의원선거에 고향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한다. 그러나「민단」관계자가 재일동포들에게서 모금해 온 선거자금이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전액 압수되면서 손발 묶인 싸움을 하게 된다. 자유당의 부패와 독재정권의 학정을 신랄하게 규탄하는 찬진의 유세는 입후보자 12명 가운데서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았으나 1954년 5월 20일 투표에서 그는 5위로 낙선하고 만다.
1958년 5월 2일 실시된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재도전했으나 입후보자 8명 중 3위로 또 고배를 마신다. 이때에도 선거자금이 압수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의 미움을 단단히 산 후 인지라 반정부인사로 낙인찍힌 그는 활동에 심한 제약까지 받았다. 특무대장은 압력과 회유가 먹혀들지 않자 유세원고까지 써주면서 그대로 읽어달라고 사정을 하지만 찬진이 어디 들을 사람인가.
4․19민주의거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1960년 7월 29일 실시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사회대중당 공천으로 다시 입후보한 찬진은 세 번째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그런데 세 번의 선거에서 세 번 다 낙선되지만 그는 대인다운 몇 가지 풍모를 고향의 선거구민들에게 보여준다. 그 하나는 막걸리, 고무신이 판을 치던 선거전에서 언제나 정정당당하게 득표활동을 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그에게 세 번씩이나 패배를 안겨준 최천(崔天) 당선자에게 맨 먼저 당선축하 인사를 했고 패배에 대해 군말 한마디 없었다는 것이다. 또 자기의 낙선이 확정된 후 트럭을 타고 지역구를 돌아다니며 처음으로 낙선인사(?)를 하고 다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치열한 선거전이 끝나면 운동경기를 마친 선수보다 더 소탈하게 마음을 탁 털고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제5대 국회의원 선거를 마친 찬진이 자기 운동원들을 데리고 수륙터로 가서 위로연을 베푸는데 자기가 먼저 바다에 뛰어들어 다이빙을 하는가 하면 고개를 떨구고 있는 운동원들에게 어깨를 툭 치며 “이봐, 왜 그렇게 우거지상을 하고 있어?”하면서 술잔을 권하는데, 이 양반이 정말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진 사람인가 하고 의심스러울 정도로 대범하더라는 것이다. 훗날 그는 조카 해길(海佶 42세, 진남협동조합이사장)씨에게 그때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나는 신념으로 행동하는 사상운동가 이지 역시 정치가는 아니야.” 찬진은 정치입신의 꿈을 깨끗이 포기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민단」의 상임고문을 맡아「민단」발전과 재일동포의 복지문제에 전념한60세, 현「민단」중앙본부단장)다. 동경지방 본부단장 시절에 다시 일본으로 불러들인 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장남 해룡(60세, 현 「민단」중앙본부단장)으로 하여금「민단」에 봉사하도록 한다.
한편, 국회진출의 꿈이 좌절된 찬진은「민단」의 입장 강화를 위해 자기보다 앞서「민단」단장을 역임한 김재화를 도와 신민당 비례대표로 제8대 국회에 진출시킨다. 그러나 당시 국내의 정치사회는 혼탁하기 그지없었다.
1971년 5월 소위 진산파동(珍山波動)으로 야기된 신민당의 내분은 제8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자마자 양분되는 진통을 겪으면서 공작정치라는 말이 유행하더니 1972년 10월 대통령특별선언에 의하여 국회가 해산됨으로써 제8대 국회는 헌정사상 최단명 국회가 되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서 김재화는 의정활동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정치조작극에 말려들게 된다. 신민당 비례대표로 입후보할 때 김재화가 헌금한 정치자금이「조총련」에서 흘러나온 자금이라는 것이었다.
찬진은 이 소식을 듣고 분연히 일어나 김재화의 정치재판에 증인으로 나설 것을 자청한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반대했던 그는 제3공화국에서도 역시 반정부인사로 분류되어 있어「민단」의 모든 간부들은 찬진의 법정증언을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격’이라며 만류하지만 그는 듣지 않는다. 급거 귀국하여 법정의 증언대에선 찬진은 사자후를 토한다. 김재화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의 항일투쟁 경력과 해방 후「민단」창설과 발전에 끼친 공적을 역설한다. 또 그가「민단」단장 시절에 벌인「조총련」과의 투쟁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그가 헌금한 정치자금의 모금내역을 하나하나 제시하고 나서 찬진은 담당 검사를 질타한다.
“당신의 오늘이 있게 된 것도 지금 피고석에 있는 저 분 같은 애국지사들의 항일운동과 반공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닌가? 그런 은혜 속에서 입신한 당신이 평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고난의 길을 걸어온 분에게 감사하고 도와주어야 마땅하거늘 도리어 없는 죄를 만들어 씌우려고 그 아까운 머리를 어쩌자고 헛돌리고 있는가?” 법정이 술렁대며 소란스러워지자 재판장은 서둘러 휴정을 선언하고 찬진을 그의 방으로 부른다. 법복을 벗고 마주앉은 재판장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정중하게 인사한다. “정 선생님의 명함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과연 이름이 헛되이 전해지는 것이 아니군요.” 마침 여비서가 날라 온 차를 권하며 재판장은 조용히 웃으며 덧붙인다. “그렇지만 증언만 해야 할 증인이 기소검사를 법정에서 그렇게 호통치면 재판을 어떻게 합니까?”
찬진은 「민단」일선에서 물러난 1970년대부터 자주 귀국하여 서울의 운당여관에서 주로 머물며 양일동 등 옛날 아나키스트 동지들을 만났다. 고향에 오면 사랑방에서 이정규(李廷圭)를 위시한 고향친구들과 어울리고 잠은 언제나 서호동에 계시던 어머니 곁에서 잤다. 이무렵 유신정부에서 그에게 훈장을 수여하려 했으나 그는 수훈을 단호히 거부한다. “항일투쟁에 젊음을 바친 내가 일본군의 하수인 노릇을 한 박정희에게 훈장을 받아? 어림도 없는 수작이지.”
또 제5공화국 초기 1981년 광복절에 그에게 국민훈장모란장을 수여했으나 군부통치를 반대했던 그는 훈장수여식에 나가지도 않는다. 1990년 광복절을 맞아 건국훈장애국장을 그에게 다시 수여했으나 역시 조금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의 사후에 최고훈장인 무궁화장을 추서하지만 유명을 달리했으니 그의 표정을 알 수 없다. 그의 나이 70을 넘어서자 항일투쟁 시절 일본경찰에게 받은 고문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정양 차 고향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때에는 오른쪽 상반신이 마비되어있었고 하반신마저 어줍어 거동이 불편했으나 결코 남의 부축을 받지 않는다. 1977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서호동 아우 원진의 집에서 머물곤 했는데 살림집이 4층에 있어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왼손으로 계단 난간을 붙잡고 간신히 오르내리는 것이 안타까워 부축하려고 하면 완강히 뿌리쳤다고 그의 조카 석현(丁碩炫 40세, 충무금고 전무이사)씨는 말하고 있다. 자기 몸 하나도 주체하지 못하여 남의 도움 따위를 받는 것을 그의 오연한 기상이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사신(不死身) 정찬진도 나이는 어쩔 수 없었던 듯, 그의 나이 80이 넘자 조용히 인생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유택(幽宅)이 정해지면 아내를 데려와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겠다며 조카들과 묻힐 곳을 찾다가 1990년 10월 아내의 부음을 듣게 된다. “백부님은 평생 눈물을 흘리신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백모님의 부음을 들으시자 순간 망연히 허공을 응시하시다가 눈을 감으시는데 눈물이 눈이 아닌 코에서 두 줄기 주르륵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몹시 비통해 하셨습니다.” 부음을 직접 전했던 조카 해길의 말이다.
자기가 내팽개치다 시피한 집안을 다스리고 온갖 고생을 하며 5남매를 훌륭히 키운 아내에 대한 자책과 회오와 연민의 정이 한꺼번에 밀어 닥쳤던 것이리라. 아내와 사별한 찬진은 일본으로 건너가 고향에서 따라간 조카딸 해옥(海玉)의 극진한 간병을 받지만 건강이 자꾸 나빠진다. 진찰을 받아보니 췌장암으로 이미 손을 써 볼 수조차 없는 중태라는 진단과 함께 여명(餘命)이 두 달 남짓이라는 것이다 가죽들은 그에게 진단결과를 감추었으나 그는 죽음을 예견했던지 귀향을 서두른다. 이때에는 그의 오른쪽 하반신마저 마비되어 1992년 2월 고향에 돌아올 때에는 동경에서부터 휠체어에 앉아서 와야 했다.
그가 거처하기 편하도록 개축해 놓은 도남동의 조카 해길의 집에서 정양하게 되는데 누울 곳에 왔다는 안도감과 체념 때문이었던지 건강이 호전되는 듯하자 그는 독서와 사색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종손(從孫)들의 재롱을 즐긴다. 그를 심방하는 친지 후배들과 담소를 하면서도 늘 이런 말을 잊지 않는다. “매사에는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이 원칙을 벗어나지 않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일신의 안녕을 위해 시세에 아첨하지 말라. 인생이란 현란한 것 같지만 결국 한 마당 꿈에 불과할진대 곡학(曲學)이나 아세(阿世)란 것이 얼마나 허망한 짓이냐?”
어느 날 조카 해길이 묻는다. “백부님께서 다시 태어나신다면 그때에도 가정과 가족은 뒷전에 밀어놓고 자기 신념을 위해 투쟁하시겠습니까?” 찬진은 조용히 대답한다. “나는 애국자가 되고 싶어서 항일투쟁을 한 것은 결단코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제 정신을 가진 조선청년이라면 일제와 투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그 투쟁 자체가 나의 존재증명이었다.”
어느 때 문안을 드리러 왔던 한하균(韓河均, 62세 연극연출 및 평론가)씨와 아나키즘에 대하여 이야기하던 중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꽤 알려진 아나키스트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아나키즘에 대해서는 향수와 함께 회의(懷疑)를 가지고 있다네. 너무 이상주의적인 사상이라서 현실과는 괴리(乖離)가 있거든.”
췌장암은 말기에 통증이 대단하다고 한다. 그러나 찬진은 단 한 번도 통증을 호소하거나 신음을 토해 본적이 없었다고 한다. 통증이 내습하면 어금니를 꽉 다물고 고통을 삭이시더군요. 워낙 심할 때면 소파에 앉아 왼발로 마루를 쿵쿵 구르기도 했습니다.″
역시 조카 해길의 말이다. “옛날 아나키스트 친구들이 두 번 문병 온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에는 통증도 잊은 듯 그렇게 즐거워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종일 친구들과 웃으며 옛날이야기로 꽃을 피웠습니다.” 1992년 6월 찬진의 생일을 맞아 아우와 조카들이 그의 미수연(米壽宴: 88세 생일잔치)을 마련해 주었을 때, 그는 70년만의 생일상을 받고 오히려 겸연쩍어한다 미수연에 왔던 옛 동지들과의 정회가 새로웠던지 그 후로 한동안 옛날 항일투쟁시절의 환상 속에서 유영(遊泳)하더니 1992년 9월 2일 이른 아침,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을 조용히 마감한다.
자신과 민족의 참다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일제시대에는 항일독립투사로, 해방 후「민단」시절에는 반공자유투사로, 5․16 이후에는 반독재민주투사로 전 생애를 불꽃같이 살았던 영원한 자유투사 정찬진은 그처럼 사랑하던 고향땅에서 자유의 수호신이 되어 승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