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훈대부 군자감정 전순인 묘지
(通訓大夫 行 軍資監正 全舜仁 墓誌)
[1491년-1551년]
통훈대부 행군자감정 춘추관 기사관 지제교 전공순인묘지
(通訓大夫 行 軍資監正 春秋館 記事官 知製敎 全公舜仁 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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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全)씨는 계출(系出)이 멀리 황제헌원(皇帝軒轅)씨였으니 하우(夏禹)씨이며 문명이다. 사성(姒姓)으로 이어 오던 중 간난(艱難)함을 맞아 바다를 건너 신라와 백제로 옮겨온 이래로 현달(顯達)한 인물이 많았지마는 특히 정선(旌善)이라는 관향(貫鄕)을 쓰게 된 사유는 휘(諱) 선(愃)공(公)이 당나라로부터 공주를 모시고 신라에 돌아왔으므로 신라왕으로부터 정선군(旌善君)에 피봉(被封)되어 영지(領地)가 지금 정선(旌善)이어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후(其後) 휘(諱) 이갑(以甲)는 고려개국공신으로 시를 충렬공(忠烈公)이요. 정선군(旌善君)에 피봉(被封) 되었고 또 후손 휘(諱) 오륜(五倫)은 려말(麗末)에 있어 충절(忠節)이 이목은색(牧隱 李穡)과 정포은몽주(圃隱 鄭夢周)와의 그 이름이 같이 하였다.
증조 휘(諱) 호(瑚)는 문천군수(文川郡守)요, 조(祖) 휘(諱) 충효(忠孝)는 또 문천군수(文川郡守)를 역임하였고 고(考) 휘(諱) 계현(繼賢)은 조년서거(早年逝去)이나 문한(文翰)으로 이름을 얻어 세덕(世德)을 충분히 징거(徵據)하였고 비(妣는) 삼척심씨(三陟沈氏)니 참봉(參奉) 양보(梁甫)가 그의 외조(外祖)이시다.
공(公)이 형제(兄弟) 3인중 둘째로 순인(舜仁) 그 휘(諱)요. 원경(元卿)은 자(字)이라 어려서부터 재조(才操)가 영리하였고 자라서 글 읽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쌓은 덕의(德儀)와 빛나는 문장(文章)은 사림(士林)에서 특히 시율(詩律)로 감동을 주어 눈물이 날 정도로 잘 지었으며 친구로는 박삼가수량(三可 朴遂良) 심어촌언광(漁村 沈彦光)과 서로 신의를 깊이 하였다.
중종 기묘(1519년) 문과(文科)에 합격하고 사헌부 지평(持平) 승문원 교리(校理)로 배명(拜命)되어서 서장관(書狀官)으로 두 차례로 명나라에 방문함에 있어서 명황(明皇)이 특히 그 사명에 능란(能爛)함을 아름답게 여겨 각색(各色)의 선물(膳物)까지 하사(下賜)하였으니 이것만 보아도 이 분의 인격(人格)을 가히 알 수 있겠다.
기후(其后) 명종 乙巳(1545년) 사화(史禍)를 다다라 무단(無端)히 화기(禍機)가 전가(轉嫁)되었으나 증거(證據)가 분명(分明)하고 저술(著述)이 정직(正直)하므로 무죄(無罪)로 판명(判明)되었다.
외직(外職)으로는 충주(忠州) 및 풍천(豐川) 여량(餘糧) 학성(鶴城)을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거사비(去思碑)가 섰으며 다시 성균사성(成均司成)이며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직(辭職)하고 임영(臨瀛)으로 돌아 왔는데 생졸년월(生卒年月)은 병화(兵火)로 인하여 부전[不傳](임영지에 의하면 성종22년 신해 1491년에 태어나서 1551년 신해에 졸하였다.)하고 전배(前配) 민씨(閔氏)는 관(貫)이 여흥(驪興)이니 주부(主簿) 효익(孝翼)의 여(女)요. 계비(繼妃) 정씨(鄭氏)는 관(貫)이 영일(迎日)이니 사인(士人) 희년(羲年)의 여(女)라. 묘(墓)는 경포대뒷골에 있으니 민씨(閔氏)와 합폄(合窆)이요. 대전동에 별장(別葬)되었다.
2남을 생(生)하니 장(長)에 유(維), 차(次)에 의(儀)이다. 형제가 다 통덕랑으로 유(維)는 박삼가(朴三可)의 사위다. 장손(長孫)은 건산(建山)이니 수(壽)로 동추(同樞)에 이르고 증현손(曾玄孫) 이하는 다 기록치 못한다.
공(公)의 평일사업(平日事業)과 언행(言行)을 자세히 일 수 없으나 전통적인 충효가문(忠孝家門)이라. 그 이름을 남이 다 알고 존경하는 처지(處地)였으므로 사화 위기(士禍 危機)도 무사히 넘겼다고 생각되는 바 그 사실이 읍지(邑誌)에 비록 자세히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1-2건만 보아도 가히 담술(譚述)할 수 있었다.
이제 후승(後承)이 침징(寢徵)하다곤 하나 오히려 명(銘)을 청(請)하여 입석(立石)으로 선조(先祖)의 덕(德)을 천추(千秋)에 빛내고자 하는 자가 있으니 그 얼마나 아름다운일인가?
통정대부 행 강릉부사 겸 강릉진첨절제사 지제교 박종정 찬
(通政大夫 行 江陵府使 兼 江陵鎭僉節制使 知製敎 朴宗正 撰)
통훈대부 행 사헌부 장령 심보영 서
(通訓大夫 行 司憲府 掌令 沈普永 書)
숭정 갑신후삼 임신(순조12년 서기 1812년) 4월 7일
[崇禎 甲申後三 壬申(純祖12年 西紀 1812년) 4월 7일
손 치위 치규 치하 치겸 8세손 사적 사한 사정 사경 사범 9세손 일 등립
(孫 致徫 致珪 致河 致謙 8世孫 思迪 思漢 思鼎 思敬 思範 9世孫 鎰 等立
계미4월 12세손 중찬 13세손종손 재수 재각립
(癸未4月 12世孫 重燦 13世孫 宗孫 在壽 再刻立)
1986년 병인 4월 일 14세손 인경 재각립
(1986年 丙寅 4月 日 14世孫 寅璟 再刻立)
◎ 子姒(자사)
(하(夏)는 사성(姒姓), 은(殷)은 자성(子姓)인데서)하와 은을 아울러 이르는 말
◎ 전오륜[Jeon Ohryun, 全五倫]
본관은 정선(旌善). 호는 채미헌(採薇軒). 대제학(大提學) 전분(全賁)의 아들이다. 고려 말에 고관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이성계 세력에 의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창업되자,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켜 두문동으로 들어간 인물로서 유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오륜 [Jeon Ohryun, 全五倫]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정몽주[鄭夢周]
요약
고려 말기 문신 겸 학자.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주자가례》를 따라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했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단심가〉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몽주 [鄭夢周] (두산백과)
◎ 이색[李穡]
요약
고려 말의 문신·학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정방 폐지, 3년상을 제도화하고, 김구용·정몽주 등과 강론,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우왕의 사부였다. 위화도 회군 후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를 억제하려 했다. 조선 태조가 한산백에 책봉했으나 사양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색 [李穡] (두산백과)
◎ 심언광[ 沈彦光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1537년 김안로가 사사된 뒤 우참찬을 거쳐 공조판서가 되었으나, 앞서 안로를 구출한 일로 탄핵을 받고 이듬해 삭직되었다가 뒤에 용서되었다. 문장에 뛰어났고 문집에《어촌집》이 있다.
본관 삼척(三陟). 자 사형(士炯). 호 어촌(漁村). 시호 문공(文恭). 1507년(중종 2) 진사가 되고1513년 식년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에 보직되었다가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했고, 1529년 형 언경(彦慶)과 함께 유배 중인 김안로(金安老)의 용서를 주청하여 예조판서에 등용하게 하였다. 그후 응교(應敎) ·직제학(直提學) ·대사간 ·부제학을 역임,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나 김안로가 점차 횡포정치를 일삼고 자신의 외손녀를 세자빈(世子嬪)으로 삼으려 하자, 이를 극력 반대한 탓으로 김안로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된 뒤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공조판서가 되었으나, 앞서 안로를 구출한 일로 탄핵을 받고 이듬해 삭직(削職)되었다가 뒤에 용서되었다.1561년 좌참찬에 오르기도 했다. 문장에 뛰어났고 문집에《어촌집》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심언광 [沈彦光] (두산백과)
◎ 박수량[朴遂良]
정의
1475(성종 6)∼1546(명종 1). 조선 중기의 학자·효자.
개설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군거(君擧), 호는 삼가정(三可亭)·쌍한정(雙閑亭). 아버지는 박승휴(朴承休)이며, 어머니는 감찰(監察) 이중원(李仲元)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04년(연산군 10)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모친상을 당한 뒤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연산군 때 단상법(短喪法: 상례 기간을 단축시키는 법)이 엄했으나, 모친상을 당하자 선왕(先王)의 제도를 어길 수 없다 하여 3년 동안 최복(衰服)을 입고 여막에 살았다. 중종반정 후에 효자 정문이 세워졌다.
1516년(중종 11) 김정(金淨)이 풍악산(楓嶽山)에서 오는 길에 박수량의 집을 방문해 며칠을 머물다가 작별할 때 척촉장(躑躅杖: 철쭉나무의 지팡이)을 선물하며 시를 지어 “깊은 산 층암 절벽에 찬서리 흰눈을 겪은 가지일세. 가지고 와서 그대에게 주노니 오래도록 이 마음 간직하게나.”라 하였다. 그러자 “참뜻을 잃을까 의심스러워 궁촌(窮村: 아주 한적한 시골)에 살고 있으나 곧은 성품 남몰래 간직했으니 정의를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으리.”라고 화답하였다. 뒤에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어 용궁현감(龍宮縣監)이 되었는데, 그 때 용궁 고을에는 송사(訟事: 소송사건)가 많았으나 판단을 명석하고 빠르게 해 적체된 송사가 없었다. 이어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 등을 지내고 1519년(중종 14) 겨울에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고향인 강릉으로 돌아와, 당숙인 박공달(朴公達)과 쌍한정(雙閑亭)에서 시와 술과 담론으로 여생을 보냈다.
천성이 순수하며 후하고 소박했으며 뜻이 독실해 지조가 구차하지 않았다. 효행이 있었다. 1645년에 마을에서 사당을 세워 향사를 지냈다.
저서로는『삼가집(三可集)』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수량 [朴遂良]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지평[持平]
고려와 조선 시대에 시정(時政)을 논집(論執)하고 백관(百官)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원억(冤抑)을 풀어주는 일 등을 맡았던 사헌부(司憲府)에 소속된 관직 가운데 하나. 고려 충렬왕(忠烈王) 34년(1308)에 감찰사(監察司)를 사헌부로 고쳤을 때 감찰사의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지평으로 개칭되었음. 그리고 공민왕(恭愍王) 5년(1356)에 감찰사가 어사대(御史臺)로 개편되면서 폐지되었다가 동왕 11년(1362)에 감찰사의 복구와 함께 다시 설치되었으며, 18년(1369)에는 감찰사가 사헌부로 개편될 때 잡단(雜端)으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21년(1372)에 지평으로 고쳤음. 이러한 변화과정을 거치면서 때로는 종5품관이 되기도 했던 지평은 이후부터 사헌부 소속의 정5품관이 되었음. 그리고 조선 시대에는 백관의 비위사실에 대한 탄핵권과 인사 및 법률 개편의 동의 혹은 거부에 관한 서경권(署經權)을 가진 지평이 이조전랑(吏曹銓郞)과 함께 대표적인 청요직(淸要職)으로 인식되었음.
[네이버 지식백과] 지평 [持平]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교리[校理]
조선시대 집현전 ·홍문관 ·승문원 ·교서관 등에 둔 5품 관직.
◎ 서장관[書狀官]
중국에 보내던 부경사행의 일행인 정사(正使)·부사(副使)·기록관(記錄官) 등의 3사신 중 기록관으로 외교문서에 관한 직무를 분담하였다.
정4품에서 6품 사이의 관원이 임명되어 1품상위(一品上位)로 결함(結銜)되었다. 서장관은 사행 중 매일 매일의 사건을 기록하고 돌아온 뒤에는 왕에게 견문한 바를 보고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일행을 감찰하고 도강할 때에 일행의 인마(人馬)·복태(卜駄)를 점검하기도 하는 행대어사(行臺御史)를 겸하였다. 한편 일본에 가는 통신사에도 서장관이 함께 따라갔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장관 [書狀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사성[司成]
고려 말 1369년(공민왕 18) 성균관의 좨주(祭酒, 종3품) 1인이 사성으로 개칭되었으나, 조선건국 직후에 좨주로 환원, 설치되었다가 1401년(태종 1) 사성으로 개칭되었다.
성균관유생들의 유학교육을 담당하는 관직으로 『경국대전』에는 2인으로 증원되었으나, 1658년(효종 9) 좨주 2인이 성균관에 따로 설치되어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 이를 겸임하게 된 뒤 1인이 감원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성 [司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군자감정[軍資監正]
조선시대 군량미 등 군수품의 저장·관리·출납을 맡아본 군자감(軍資監)에 두었던 정삼품(正三品) 관직으로 정원은 1원이다.
정(正) 위로 도제조(都提調: 正一品) 1원은 의정이 겸하고, 제조(提調: 從二品∼從一品) 1원은 호조판서(戶曹判書)가 정례대로 겸임하며, 아래로는 부정(副正: 從三品), 첨정(僉正: 從四品), 판관(判官: 從五品)은 1원이 있는데, 부정·첨정은 삭감하였다. 도제조·제조를 타관이 겸직했기 때문에 정이 실질적인 으뜸 벼슬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군자감정 [軍資監正] (관직명사전, 2011. 1. 7., 한국학중앙연구원)
◎ 臨瀛(임영)
강릉(江陵)의 옛 지명(地名). 고려(高麗) 34대 공양왕(恭讓王) 원년(元年, 1389)에 강릉(江陵)을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昇格)시키고 별호(別號)를 임영(臨瀛)이라 했음
◎ 박종정(朴宗正)
[문과] 정조(正祖) 2년(1778) 무술(戊戌) 알성시(謁聖試) 갑과(甲科) 1[壯元]위(1/3)
순조9년1808년 강릉대도호부 부사 역임
◎심보영(沈普永)
[문과] 정조(正祖) 18년(1794) 갑인(甲寅) 정시(庭試) 병과(丙科) 37위(40/50)
1807년 사헌부장령 역임
◎ 徫 걸어갈 위
1. 걸어가다
◎ 迪 나아갈 적
1. 나아가다 2. 이루다 3. 이끌다, 인도하다(引導--) 4. 따르다, 계승하다(繼承--) 5. 임용하다(任用--), 쓰다 6. 행하다(行--) 7. 떠나가다 8. 길, 도리(道理) 9. 도덕(道德)
◎ 鎰 무게 이름 일
1. 무게의 이름 2. 중량 3. 중량 단위(單位)(=스물넉 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