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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사람들은 학창시절 역사교과서를 공부하며 기본적 역사인식을 갖게 된다. 역사인식은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역사를 올바로 바라보는 능력인 ‘역사관’을 기를 수 있는 바탕이 되기에 역사교과서의 내용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필자가 파악해본 바 역사교과서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김제의 지역명은 바로 ‘금구’이다. 이 ‘금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면단위에 국한된 시각으로 바라봐서는 결코 ‘금구’를 이해 할 수가 없다.
금구는 봉남면과 황산면 금산면 일대가 금구현으로 1천년 넘게 이어져 왔으며 금구면으로 격하 된 것은 고작 100여년의 역사이기에 현재의 금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금구’로부터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가 ‘금구’를 한마디로 정의내리자면 “금구는 正義로운 고장!”이라 말하고 싶다. 그 이유를 기술하기에 앞서 ‘正義에대한 定意’가 필요하다. 사실 누구나 알고 있을법한 ‘正義’라는 단어는 막연하게, 또 쉽게 사용할 단어는 아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정의로운가?의 문제는 무엇이 윤리적인가? 의 문제로 이어지며, 이 윤리성의 문제는 생명존중, 부모에 대한 효도, 진실된 삶 등의 보편적 가치를 지켜야 정의로운 것이다! 라는 ‘의무론’적 입장이 있는 반면, 보편적 가치기준은 상황에 따라 바뀌며 결국 우리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결과가 정의로운 것! 이라는 ‘목적론’적 입장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진짜 정의로운 일’인지 판단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정의롭다고 생각한일이 누군가에게는 정의롭지 못한 일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하며 한민족의 지도자로 추앙받던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를 ‘정의봉’으로 숨지게 한 사람의 경우도 누군가에겐 정의로운 의인일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살인자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정의를 논할 땐 올바른 신념이 필요한 것이고, 올바른 신념을 가진자만이‘정의’를 부르짖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금구’가 정의로운 고장임을 필자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정의에 대한 올바른 신념’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자신을 희생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염원했던 의인들이 발현한 고장이기 때문이다. 이에 지금부터 후술할 금구의 대표적인 역사흐름 하나하나가 김제시민이라면 꼭 기억해야 할 ‘우리나라의 대표적 역사’란 걸 이번 이야기를 통해 강조하고 싶다.
첫 번째로 정여립을 기억해야 한다. 조선시대 당파싸움으로 황폐해진 나라에서 “혈통에 의해 세속되는 임금이 아니라 누구라도 능력을 갖췄다면 임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세상의 모든 것은 임금의 것이 아니라 백성의 것이다”라는 「천하공물설」을 주장한 정여립이, 대동계를 이끌며 활동했던 무대가 바로 금구이며 처갓집 또한 금구이다.
대동계 회원은 직업에 대한 귀천 없이 활쏘기, 무술, 강연 등을 하며 세력을 확장하였는데, 1587년엔 전남 여수에 침범한 왜적을 물리치기도 하였으나, 점차 확장되는 정여립의 세력과 왕권을 위협하는 위험한 사상으로 여겨, 결국 역적으로 몰려 1천여명이 넘게 희생당하는 ’기축옥사‘가 발생하였다. 이후 금구현은 강등되어 김제군에 예속되고, 전라도는 ’역적의 땅‘으로 내몰림과 동시에, 전라도사람들은 크게 등용되지 못하였다. 또한 정여립과 관련한 문건과 건물 등은 모두 파헤쳐지고 불타 없어져 금구 땅에 정여립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이렇게 정여립은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며, 정의로운 삶을 살고자 했으나, 누군가에게는 나라를 어지럽히고, 나라를 위태롭게 만든 역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두 번째로 ‘금구대첩’을 기억해야 한다. 정여립의 모반사건이후, 나라는 더욱 어지러워졌고, 임진왜란이 발발하며, 멸망직전에 나라를 구한 이순신은 무고로 하옥되었으며, 조정은 당쟁에 빠져있을 당시, 일본은 또다시 2차 침입(정유재란)을 일으켰다. 1597년 8월 16일엔 남원성이 함락되고, 8월 25일엔 전주성마저 점령당할 때 금구에서 대승을 거두었던 전투가 있었으니 이른바 ‘금구대첩’이다. 이 금구대첩은 9월14일 금구에서 전라도 조방장 원신과 전라우도 조방장 김언공이 육지의 야전전투로 왜군을 섬멸시킨 전투로, 이 당시 금산사를 비롯한 금구일대의 많은 승병들이 활약하여, 연패를 기록했던 전라북도의 임진왜란사에 금구대첩의 승리로 인하여 김제평야의 곡식창고를 지킬 수 있었고, 백의종군한 이순신과 김제 출신 안위장군의 활약으로 명량해전의 대승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로 ‘금구민란’을 기억해야 한다. 이후 금구는 ‘반역의 고장’이라는 오명으로, 금구대첩의 기록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뿐더러, 금구를 비롯한 전라도 출신 인재들의 출세길이 막히게 되었으며, 곡창지대였던 전라도로 부임한 지방관들은 각종세금의 명목으로 백성들을 압박하며 세금을 무리하게 거두어 들였는데, 이에 금구의 농민들이 불합리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대규모 민란을 일으켰는데, 이른바 ‘금구 민란’이다.
네 번째로 ‘금구집회’를 기억해야 한다. 금구민란과 더불어 동학농민 혁명당시에도 금구는 최중심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동학이 단순한 종교운동에서, 농민군을 결집시켜 민족적․계급적 요구를 실현시키고자한 정치적 혁명을 기도했던 시작이 바로 ‘금구집회’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동학농민운동의 발상지는 정읍도 아닌 고창도 아닌 김제가 될 것이다.
다섯 번째로 인동장씨 집안의 두 의인을 기억해야 한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는 인동장씨 가문에 두명의 의인이 활동하였는데 바로 일유재 장태수와 장현식이다. 지면관계상 장태수선생에 관해서는 필자가 김제신문에 기고했던 기사(김제신문에서 ‘백덕규’ 검색)를 참고하길 바라며, 명망 높았던 만석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장현식 선생은, 사재를 털어 중앙고등보통학교와 고려대학교설립, 동아일보사 창간에 거금을 기부하고, 1919년 비밀 결사조직인 ‘대동단’의 운영자금을 지원하다 체포되어 옥살이까지 한바있다. 이후에도 일제강점기 사라져가는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조선어사전’편찬에 거금을 제공하여 또다시 옥고를 치르다 해방을 맞이한 후 제2대 전라북도지사로 재임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북한군에 납치되어 그해 사망하였다.
농지가 넓어 소작농들을 부리는 지주들이 많았던 김제지역에 한 가지 전해져 오는 이야기를 소개하자면, 한국전쟁 당시 지주들에게 불만을 품은 좌익세력들이 수많은 지주들의 집에 불을 질렀으나 평소에 많은 재산을 배풀며 넉넉한 인심과 인덕을 쌓은 인동장씨 집안만큼은 불을 지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앞서 말했듯이 금구라는 지역은 우리나라 학생들 모두가 배우는 역사교과서에 수차례 등장한다. 이것은 반역으로, 민란으로, 혁명으로 꾸준히 ‘금구’라는 무대에서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학생들에게 각인되고 있다.
그리고 필자가 금구를 역적의 고장이 아닌‘정의로운 고장’이라 말 할 수 있음은, 옳다고 믿는 신념을 위해서, 또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한걸음씩 나아갔던 ‘義人들의 무대’였기 때문이다. 이에 금구면 일원 1편에 이어 선암리와 월전리, 오봉리와 대화리의 마을유래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금구면 일원 2편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 선암리(仙岩里)
본래 금구군 동도면 지역으로 곧게 선 바위가 있어 『선바우』 또는 『선암』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고적리, 영천리와 전주군 우림면의 축령리를 합하여 선암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금구면에 편입되었으며, 선암리에는 영천과 축령 두 마을이 있다.
〇 영천(永川)
『새터』 서쪽에 있는 마을로 『등천(登川)』 또는 『등내』라고도 부른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내가 가파른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자꾸만 땅이 씻겨나가고, 물의 흐름이 빨라 각종 사고의 위험이 있어 옛날 사람들이 곳곳에 바위를 세워 센 물살을 막았다는 뜻으로 『선바우』라고 불렀는데, 한자이름으로 『선암리』라는 이름이 되었다.
〇 싸리재=축령
본래 전주군 우림면 지역으로 주위에 싸리나무가 많아 「싸리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김제군 금구면에 편입되면서 한자로 적어 「축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이곳에는 ‘싸리재 문화마을’이 있어 점차 품격 있는 마을이 되어가고 있다. 축령에는 작은 마을이 올망졸망 생겨나며 재미있는 유래를 갖고 생겨났는데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막바우: 마을 앞에 큰 바위가 있어 세게 흐르는 냇물을 막아주는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 『샛터: 축령에서 새롭게 마을이 들어서 붙여진 이름』, 『대양너머: 축령마을 앞산의 봉우리가 옥녀봉인데, 옥녀가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세수하는 형상이라 붙여진 이름』 『소지: 마을 앞산이 쇠죽을 끓이는 솥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큰동네: 축령에서 제일 큰 동네이자 오래된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 『객동네: 옥녀봉의 옥녀가 세수를 하고난 다음 상을 차려 손님(客)에게 대접하는 형국이라 붙여진 이름』
■ 월전리(月田里)
본래 금구군 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당월과 봉산, 동도면의 어전리를 합하여 당월과 어전의 이름을 따 『월전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금구면에 편입되었으며, 월전리에는 봉산, 어전, 연동, 당월 등 4개 마을이 있다.
〇 봉산(鳳山)
「어전」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봉두산(鳳頭山)밑에 자리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〇 어전(御田)
봉산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 금구관아에 식량을 공급하던 터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이 마을이 물고기들이 놀고 있는 형국이라 「어영(漁泳)」이라 했는데, 행정구역 개편시 「어전」이라 적게 되었다는 사람도 있다.
〇 연동(連動)
어전마을의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뒷산의 형국이 연(蓮)의 잎사귀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〇당월(堂越, 堂月)
955년경 장씨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는 「봉산」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성황당이 있어 그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조선시대 호구수를 기록한 「호구총수」란 책에는 堂越로 기록되어 있어, 성황당 너머마을이란 뜻이란 걸 유추해볼 수 있다.
■ 오봉리(五鳳里)
본래 금구군 동면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오양리, 지봉리, 목련의 일부를 합하여 오양과 지봉의 이름을 따 「오봉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금구면에 편입되었으며, 「오봉리」에는 양석, 오산, 지장, 봉림, 목련 등 5개마을이 있다.
〇 오산(鰲山, 五山)
「목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지금부터 약 300여년 전 여산송씨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조선시대 말엽에는 금구군 동면의 면소재지였던 이 마을 앞산의 형국이 자라처럼 생겼다하여 자라‘오’자를 써 ‘鰲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五山’으로 명명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〇 봉림(鳳林)
「지장」남쪽에 있는 마을로 이 마을 동쪽에 있는 산이 봉황처럼 생겨 봉황산이라 하는데, 이 봉황산 아래 우거진 수풀 사이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〇 양석(兩石, 羊石)
「오산」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입구에 선돌(立石)두개가 나란히 서 있어서 ‘兩石’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전혀 엉뚱한 뜻의 ‘羊’자를 써 「羊石」으로 명명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 마을은 당초 몇 가구 안되는 마을이었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금광을 개발하면서, 인부들이 모여들며 큰 마을이 되었다. 한때는 금이 많이 채취되며 200여호가 넘는 번성했던 마을이었으나, 해방이후 폐광되었으며, 그때 당시 인부들이 묵었던 숙소나 한바집(배식집)등의 흔적만이 남아있는 실정이다. 현재는 일본인들이 금을 채취하기 위해 고깔봉에 뚫어 놓은 굴 입구에서 찬바람이 쏟아져 나와 무더운 여름철에는 전주 등 인근에서 사람들이 더위를 식히기 위해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마을 부녀회에서는 관광객과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굴 입구에 천막을 치고 닭백숙 등을 판매하기도 해 숨은 명소가 되었다.
〇 지장(芝庄)
「목련」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주위에 지초(芝草:옛날에는 자줏빛 물감의 재료였으며, 식용이나 약용으로도 쓰임)가 많이 나는 곳으로 풀이름을 그대로 따 마을이름이 ‘지초’라고 불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지장」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〇 목련(木蓮)
「봉림」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과거에는 연방죽이 자리잡고 있는데다, 마을 뒷산이 연꽃모양의 형태를 띄어 목련이라 불렀다.
■ 대화리(大化里)
본래 금구군 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장리, 오양리 동화리의 일부와 전주군 이서면의 앵곡리 일부를 합하여 대장과 동화의 이름을 따 「대화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금구면에 편입되었다. 「대화리」에는 금천, 대야, 장항 등 3개 마을이 있다.
〇 금천(金川)
대야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쇠내’라고도 부르며, 마을 앞으로 흐르는 내에서 사금이 많이 나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경주김씨가 터를 잡고 살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〇 장항(獐項 )
「금천」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동학혁명당시 이를 피해 온 구씨가 터를 잡고 살기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마을 북쪽에 노루처럼 생긴 산이 있어 노루의 목 부분에 해당되는 마을의 이름을 노루장(獐)자와 목항(項)자를 써서 ‘장항’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는 반면, 옛날에는 마을이름을 ‘너른목(땅이 넓어지는 지점)’이라 불러,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 ‘장항’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〇 대야(大也)
금천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뒷산이 대하(큰 새우)형국이기 때문에 대하로 부르다 음이 변질되어 대야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〇 등사멀
「금천」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종산(鍾山)」이라 하였는데, 행정구역 통폐합 때 동쪽에 있는 산 아래 마을이라는 뜻으로 「동산(東山)」이라 했다.
〇 삼베실=마전(麻田)
「금천」남쪽에 있는 마을로, 원래는 호대, 노승, 장승이라는 세분의 훌륭한 스님들이 살아서 ‘삼보살’이라고 했는데, 부르는 과정에서 잘못 전해져 ‘삼베실’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고쳐 쓰면서 삼 마(麻)자를 써 「마전」으로 변했다. 학예연구사 백덕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