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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불확실성과 인간들의 삶. 조상들은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 예로부터 나무와 돌 등 자연지물에 강한 신앙을 담아냈다.
이는 결국 불리한 환경을 보완하는 수구막이같은 형식으로 마을의 평화를 지켜주고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 돌이나 나무들은 마을 수호신 역할을 했고, 주민들은 제의절차를 통해 마을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기회로 만들었다. 남근석, 선돌, 고인돌, 돌탑, 석불 등에서 볼 수 있듯 돌이 지닌 영원성과 불변성에 신앙을 불어넣어 형상화시켰다.
나주 불회사 돌장승과 선돌, 각 지역의 당산제 등 본 연재에서도 볼 수 있듯 자연지물에 대한 경외심으로 출발한 믿음은 신앙이자 민중문화, 오늘날 민속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첨단의 세기, 문명의 발달과 수많은 종교가 번창함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은 이어져 마을공동체의 민간신앙으로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준다.
이 가운데 민중들의 성신앙을 보여주는 남근석(속칭 좃바우, 자지바위)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조선조를 지나오면서 유교사상이 팽배해 성문제를 논하는 것 자체를 터부시했던 고정관념에 비춰 흔히 남녀가 함께 걷다가 남근석을 보고 망측하게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 내막을 들춰보면 금새 고개가 끄덕여진다.
남자나 여자의 성기처럼 자연석이나 돌을 다듬어 세운 후 풍요와 다산을 기원했던 남근석과 음부바위. 조상들의 간절한 믿음과 의지의 표출로 성신앙의 원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기를 쏙 빼닮은 모습이 보기에도 민망스러울 정도지만 성을 생산의 원천으로 숭배했던 조상들에 있어서 엄연한 민간신앙으로 이어져 왔던 것이다. 즉, 인간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남녀간의 성행위가 자식을 낳게 한다는 경험에서 사회와 자연 현상을 풀이하는 바탕으로 삼았으며 신앙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남근석은 전라도 땅 여기저기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사연도 가지가지.
나주시 남평읍 동사리 입구에 당산목과 나란히 세워져 있는 남근석 역시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주민들의 소망을 담고 있다.
주민들은 마을의 무사안녕과 국태민안을 빌며 매년 정월 초사흘 꼬박꼬박 당산제를 봉행하기도 한다.
마을지킴이로 250여년의 세월을 간직하고 있는 이 남근석은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딸만 낳은 사람들에게 영험하다 소문이 나 요즘에도 주변마을이나 도시민, 무속인들이 간혹 찾아 떡시루를 차리고 지성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2m크기의 남근석 위에는 짚으로 만든 ‘덩(뚜껑)’을 씌우는데 이는 비바람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자들의 바람기를 막기 위함이다. 만약 뚜껑이 사라지면 아낙네들은 남자들이 바람을 피울 것이라고 믿는다.
장흥군 장흥읍 평장리 들몰마을의 경우는 마을의 풍수지리와 연관이 깊다.
마을 앞산에 사인(舍人)바위라는 기이한 형상의 바위가 있고, 맞은편에 남근석이 세워져 있다. 이 남근석은 주민들이 인위적으로 깎아세운 것. 원래 마을 형국이 풍수지리학상 배의 형국에 해당돼 돛대를 세워야 화를 면한다고 믿어 오릿대(솟대)를 세우고, 배의 밧줄을 묶는 역할을 위해 남근석을 깎아 세웠다.
또한, 이 남근석은 마을에 있던 음부바위(지금은 없어짐)와 구색을 맞추기 위해 남자의 성기모양으로 세웠다고도 한다.
전북 순창군 팔덕면 산동리 팔왕터 마을과 창덕리 태촌마을에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남근석. 각각 민속자료 제14·15호로 지정돼 있어 조상들의 대표적인 성신앙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이들은 각각 화강암에 새겨진 연꽃무늬 조각솜씨가 빼어나 현존하는 남근석 가운데 작품성이 가장 탁월하다.
165㎝정도 크기의 태촌리 남근석은 발기했을 때 드러난 힘줄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이들 역시 다산을 기원하지만 주민들은 ‘미륵’이라 부르기도 한다.
옛날 사람들은 미륵집(움막)을 지어놓고 공을 들이기도 했다 한다. 남근석을 단순한 성신앙의 단계를 넘어 미륵부처님으로 받들었다는 것이다.
남근석은 여전히 민중들의 삶의 향기가 묻어나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천년의 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현대화의 조류에 밀려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