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온 시집 감상평 5
- 공광규 시집 『서사시 금강산』
그 동안 공광규 시인으로부터 수많은 시집을 받았다. 그리고 무려 8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시창작이론서 『이야기가 있는 시창작수업』도 받았다. 그때마다 참으로 대단한 시인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까지의 그런 생각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부질없는 일이었다. 이번에 공광규 시인이 펴낸 『서사시 금강산』을 읽으면서 나는 ‘아연 실색했다’는 말을 실감한다. 지금까지 우리 시인들이 써온 금강산은 부분 부분에 대한 감정일 뿐, 이렇듯 1만2천봉우리 사이로 뻗어 내린 계곡의 갈피갈피를 모두 아우른 이 작품은 우리 문단사의 쾌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찍이 율곡 선생께서 19세 때 금강산을 답사한 후 쓰셨다는 『율곡 선생 금강산 답사기』에 견줄 만하다. 그 책은 율곡 선생이 금강산의 절경을 600구(句), 3,000자(字)의 시로 읊은 「풍악행」을 기(起)·승(乘)·전(轉)·결(結)로 구분하여 원문을 번역하고 해설을 붙인 것인데, 이에 비견된다 하겠다. 공광규 시인은 직접 발로 밟아본 후 『서사시 금강산』이란 대 서사시를 저술하였으니, 이는 분단 70년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시대에 “누구에 주제련가 맑고 고운 산…”으로 시작되는 한상억 작사 최영섭 작곡의 「그리운 금강산」이란 가곡이 주는 그 웅장함이 계곡처럼 접힌 책 갈피갈피에서 맑은 물로 흘러나온다. 불자 시인 공광규의 철학관과 인생관에 시 요소요소에 묻혀 있어, 목탁소리를 따라 들리는 독경소리의 청아함과 금강산에 자생하는 잣나무 향나무 측백나무 노간주나무 소나무 전나무 등 갖가지 나무의 향내가 진동한다. 한용운을 시작으로 신경림으로 이어져 공광규로 맥을 잇는 우리나라 불자 시인의 계보를 보는 듯하다. 듣는 이는 보는 이만 못하고, 보는 이는 직접 체험한 이만 못하다 했으니 이는 금강산 구석구석을 집접 발로 밟아 써낸 이 웅장하고 리드미컬한 리듬에 우리는 어느새 금강산 신봉자가 된다. 난세에 영웅난다 했으니, 이 분단의 난세에 공광규 시인의 존재는 『서사시 금강산』만으로도 충분히 가치롭다. 금강산이 궁금한가? 가보고 싶은가? 그토록 그리운가? 여기 공광규 시인의 『서사시 금강산』이 있다. 가슴 저린 『서사시 금강산』의 일독을 권한다. 시집을 붙드는 순간 그대는 금강산의 장엄한 아름다움에 갇히고 말 것이다.
김순진(문학평론가 ‧ 고려대 평생교육원 시창작강사)
- 천년의 시작 / 376페이지 / 정가 13,000원
-------------------------
비로봉, 일만 이천 기상이 모인
공광규
금사다리 은사다리를 기어올라
비로봉과 영랑봉을 잇는 등성이에 오르면
비바람과 눈비가 뛰어놀기에 충분한 평지
바위에 눕고 엎드린 잣나무와
측백나무와 향나무와 소나무와 전나무들
자작나무가 드문드문 서있다
이런 비로고대에서 조금 더 오르면
불쑥 높아진 곳
내금강과 외금강 중심 비로봉
일만이천 봉우리 기상이 모인 이곳에 올라서면
수많은 봉우리와 계곡
동해바다가 장쾌하게 보인다
한 그루 잡목도 허용하지 않는
어떤 위대한 정신 같은
가파르고 험준한 바위 봉우리
시인 정지용은
1933년 6월
적요하고 아름다운 시 「비로봉 1」을 발표했다.
(정지용 시 중략)
그리고 또 한 편의 시
「비로봉 1」에서는
담쟁이와 다람쥐와 자작나무와 바람이 보인다
(정지용 시 중략)
바위가 틈을 보이는 곳에
뿌리를 내리고 납작 엎드려 붙어있는
측백나무와 소나무와 진달래와 철쭉과 만병초
봉우리 아래서 발원한 물은 서남향으로 흘러
여러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만나
만폭동이 되고
영원동에서 굽이쳐 오는 물과 만나
장안사 앞을 거쳐
산을 벗고 들을 건너 서해로 간다고 한다
--------------------
공광규 시인
1960년 서울 돈암동에서 태어나 충남 청양에서 성장.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문학박사).
1986년 월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대학일기』 『마른잎 다시 살아나』 『지독한 불륜』 『소주병』 『말똥 한 덩이』 『담장을 허물다』 『파주에게』, 시선집 『얼굴 반찬』, 인도네시아어 번역시집 『Pesan Sang Mentari 햇살의 말씀』이 있음.
윤동주상문학대상, 현대불교문학상, 신석정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