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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5. 10. 17:49 |
Part 4: 윤리
실천의 의미와 덕의 본질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덕의 상실』 제14장 덕의 본질 |
이제까지의 논증으로부터 어느 정도 분명하게 나타난 덕 개념의 특징들 중 하나는, 덕은 그것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항상 사회적, 도덕적 삶의 특정한 특징들──이 특징들을 통해 덕은 정의되고 설명되어야 한다──관한 선행적 설명의 수용을 요청한다는 사실에 있다. [……] 그렇다면 나의 설명에 있어서 덕의 개념을 이해될 수 있도록 해주는 필연적 배경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제공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는 과정에서 덕에 관한 핵심적 개념이 갖고 있는 복합적, 역사적, 다층적 성격이 분명해진다. 왜햐나면 덕의 핵심개념이 이해되어야 한다면 순서에 따라 규정되어야 할 이 개념의 논리적 발전과정에는 적어도 세 단계가 존립하기 때문이다. 첫째 단계는 내가 실천으로 명명하려는 것에 관한 배경설명을 요청한다. 둘째 단계는 내가 이미 개별적 인간 삶의 설화적 질서로서 규정한 것의 설명을 요구한다. 그리고 셋째 단계는 하나의 도덕적 전통을 구성하는 것에 관한, 내가 이제까지 서술한 것보다 더, 포괄적인 설명을 필요로 한다. 모든 나중의 단계는 앞의 단계를 전제한다. 그러나 그 역은 아니다. 모든 전단계는, 그것이 본질적 구성요소를 제공하는, 나중 단계의 관점에서 변형되고 새롭게 해석된다.1
매킨타이어는 덕(virtue)에 대한 각각의 입장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입장들이 전제하고 있는 맥락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호메로스, 아리스토텔레스, 신약성서 등이 제시하는 덕의 목록은 서로 상당히 다르다. 가령, 전사 계급을 인간의 모범으로 삼고 있는 호메로스에게는 ‘신체적 힘’이 가장 중요한 덕의 목록에 포함되는 반면, 고귀한 아테네 자유인을 좋은 삶의 기준으로 제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신체보다도 ‘정신’의 가치가 훨씬 강조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많은 부와 높은 사회적 지위를 지닌 사람이야 말로 좋은 삶을 산다고 칭송하는 반면, 신약성서는 가난한 사람이야 말로 하나님 나라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신앙을 바탕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하찮은 노예의 특성이라고 평가한 ‘겸손’에 오히려 핵심적인 덕의 지위를 부여한다. 덕에 대한 각각의 입장들은 이렇듯 각각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성립한다. 맥락과 상관없이 덕 개념을 분석할 수 있는 하나의 의미론적 체계를 발견하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이제까지의 논증으로부터 어느 정도 분명하게 나타난 덕 개념의 특징들 중 하나는, 덕은 그것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항상 사회적, 도덕적 삶의 특정한 특징들──이 특징들을 통해 덕은 정의되고 설명되어야 한다──관한 선행적 설명의 수용을 요청한다는 사실에 있다.”
매킨타이어는 ‘실천(practice)’, ‘설화적 질서(narrative order)’, ‘전통(tradition)’ 개념을 통해 덕이 언제나 일정한 맥락을 전제한다는 사실을 보다 치밀하게 해명하고자 한다. 첫째로, 덕은 인간의 정합적이고 복합적인 활동형식인 ‘실천’을 바탕으로 의미를 지닌다. 각각의 실천에 내재된 선(good)이 무엇인지에 따라 그 선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덕이 무엇인지도 달라진다. 둘째로, 실천은 선을 추구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일종의 ‘이야기’를 형성한다. 이야기가 지닌 설화적 질서를 통해 실천을 구성하는 각각의 활동은 이해가능한 것으로서 통일성을 부여받는다. 셋째로, 이러한 이야기가 축적되어 한 문화의 ‘전통’으로 자리 잡는다. 선을 성취하기 위한 수많은 노력들이 낳은 성공과 실패의 역사는 우리가 오늘날 문화에서 제시되는 덕을 정당화할 수 있도록, 혹은 비판할 수 있도록 하는 근거이다. 그러나 ‘실천’, ‘설화적 질서’, ‘전통’ 개념이 구분된다고 하여서 세 가지가 서로 완전히 분리된 단계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천’은 언제나 ‘설화적 질서’를 통해 자신을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전통’을 쌓아 나간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 선을 추구하는 인간의 활동형식은 서사구조로 펼쳐지면서 성공과 실패의 역사가 되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역사를 척도로 삼아 ‘덕’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평가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실천”은, 특정한 활동 형식에 적합하고 또 부분적으로는 이 활동형식을 통해 정의된 탁월성의 기준을 성취하고자 하는 시도의 과정에서 이 활동형식에 내재하고 있는 선들이 이 활동을 통해──탁월성을 성취할 수 있는 인간의 힘과, 관련된 목표와 선들에 관한 인간의 표상들이 체계적으로 확장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방식으로──실현되는, 사회적으로 정당화된 협동적 인간 활동의 모든 정합적, 복합적 형식을 뜻한다. 삼목(三目) 놓기와 같은 어린이 놀이는 이런 의미에서 결코 실천이 아니며, 축구공을 숙련되게 던지는 것도 실천의 예가 아니다. 그러나 축구경기 자체와 서양장기 자체는 실천의 예이다. 벽돌 쌓기는 실천이 아니지만 건축은 실천이다. 순무를 심는 것은 실천이 아니지만 농사는 실천이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의 연구 활동들, 그리고 역사학자의 작업 및 회화 및 음악도 마찬가지이다.2
매킨타이어는 실천을 탁월성의 척도에 따라 내재적 선을 성취하고자 하는 인간의 정합적이고 복합적인 활동형식으로 규정한다. 단순히 모든 종류의 활동이 ‘실천’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삼목 놓기, 축구공을 숙련되게 던지는 것, 벽돌 쌓기, 순무를 심는 것 등에서는 대개 어떠한 행위가 다른 행위에 비해 더욱 ‘탁월성(excellence)’을 지니는 것인지, 혹은 어떠한 행위가 다른 행위에 비해 더 ‘좋은(good)’ 것인지 구분할 수 있는 척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행위자는 단순히 개별 행위를 통해 다른 무엇인가를 성취하고자 할 뿐, 그 행위 자체를 더욱 발전시키는 데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서양장기, 축구 경기, 건축, 농사 등에서는 시대와 공동체가 그 행위에 대해 요구하는 분명한 척도가 존재한다. 행위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척도를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보다 높은 수준의 행위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실천’이란 이렇듯 행위자가 다른 외재적 목적이 아니라 그 행위 자체에 내재된 선을 실현시키기 위해 탁월성의 척도를 바탕으로 수행하는 모든 행위의 체계를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실천은 탁월성의 척도와 규칙의 준수뿐만 아니라 선들의 성취를 포함한다. 실천을 한다는 것은 이러한 척도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또 이 척도들에 비춰볼 때 나의 업적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나의 태도, 선택, 선호체계, 취향들──실천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부분적으로 정의하는──척도들에 예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실천은 내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의 역사를 갖고 있다. 경기들, 과학들, 예술들은 모두 역사를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척도들은 그 자체 비판으로부터 면역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제까지 실현된 최선의 척도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실천을 시작할 수가 없다. [……] 실천의 영역에서 선들과 기준들의 권위는, 모든 주관주의적이고 정의주의적인 판단분석들이 배제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3
실천의 개념에는, 우리가 다른 참여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실천에 우리 자신을 예속시킴으로써만 그 실천의 선들이 성취될 수 있다는 점이 포함된다. [……]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는 정의, 용기, 정직의 덕들을, 내재적 선들과 탁월성에 대한 척도를 갖고 있는 모든 실천의 필연적 구성요소로서 수용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의 가상적 아이가 장기 게임을 처음 시작하면서 속이려는 것처럼 속일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탁월성에 대한 척도들을 충족시키지 못하게 하거나 또는 실천에 내재적인 선들을 성취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되면 실천은 외면적 선들을 성취하는 수단으로서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4
내가 보기에, 매킨타이어는 실천이 언제나 ‘선택’ 혹은 ‘결단’이라는 요소를 포함한다는 사실에는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초상화 그리기와 같은 실천에서 화가는 자기 시대가 제시하는 탁월성의 척도에 대해 단순히 순응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실력이 탁월성의 척도에 미치지 못할 때에는 보다 노력하여 시대가 인정하는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의 노력은 단순히 개인의 역량을 증진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 시대의 척도가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방식으로 공동체 전체의 실천을 풍요롭게 해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의 한계를 끊임없이 넘어서고자 하며 초상화 그리기의 척도를 향상시키기 위해 애써야 한다. 무엇이 훌륭한 초상화인지를 평가하는 척도는 화가의 노력을 통해 갱신되어 보다 높은 단계로 진보한다. 따라서 실천이 자기 내재적 선을 실현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중적 과정을 통해서이다. 우리는 이미 주어진 척도의 권위를 받아들여 보다 탁월한 실천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그 척도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면서 실천을 위한 새로운 선이 무엇인지를 만들어나간다. 우리가 실천에 참여할 때에 기존에 제시된 탁월성의 척도를 의식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그 척도를 계속 유지할 것인지를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여지가 남겨진다.
덕은 하나의 습득한 인간의 성질로서, 그것의 소유와 실천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실천에 내재하고 있는 선들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며 또 그것의 결여는 결과적으로 그러한 선들의 성취를 방해하는 그러한 성질이다. 이 정의는 나중에 확장되고 개선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적절한 정의에 이르는 첫 번째 접근으로서 그것은 이미 인간 삶 내에서의 덕들의 위치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왜냐하면 많은 핵심적 덕들에 있어서 만약 그것들이 없다면 실천에 내재하고 있는 선들이 우리에게 봉쇄된다는 사실, 즉 단순히 일반적으로 봉쇄될 뿐만 아니라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봉쇄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5
매킨타이어는 ‘덕’을 실천에 내재된 선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성질로 해명한다. 탁월성의 척도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기술적 숙련(technical skill)을 비롯한 대단히 포괄적인 종류의 요소가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는 미리 주어진 탁월성의 척도를 수용한 채 우리 자신을 여기에 맞추고자 하지 않고서는 결코 실천을 시작할 수 없다. 따라서 실천을 위해서는 전통의 권위에 대한 인정, 우리 자신이 탁월성의 척도에 도달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겸손, 엄격하게 우리 자신의 현재 상태를 바라볼 수 있는 진실성, 타인의 평가 앞에 우리 자신을 개방해 놓을 수 있는 용기 등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전형적으로 실천에 포함되어 있는 일종의 공동작업, 권위와 업적에 대한 일종의 인정, 일종의 척도에 대한 존경, 일종의 위험감수는 예를 들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공정을 요구하고 [……], 그것 없이는 공정이 불가능한 가차 없는 진실성을 요구하고 [……], 실천에 있어서 자신들의 업적 덕택으로 판단할 수 있는 권위를 [……] 부여받은 사람들의 판단을 신뢰하려는 자세를 요구하고, 때때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업적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모험을 감수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6
여기에서 덕들의 핵심개념에 관한 부분적 설명이──이제까지 내가 제시한 것이 이러한 설명의 첫 단계라는 사실을 나는 강조할 필요가 있다──내가 서술한 전통에 대해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그것은 예컨대 얼마나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가? 그것은──다행히도──그밖의 전통의 상당부분이 아리스토텔레스와 의견을 달리하는 두 가지 방식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이 아니다. 첫째, 덕들에 관한 이 서술이 비록 목적론적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생물학에 대한 복종의 의무를 요구하지 않는다. 둘째, 인간실천의 다양성과 이에 따른 선들의──바로 이 선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덕들은 실행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선들은 종종 서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복종에 대한 경쟁적 주장들을 제기할 수 있다──다양성 때문에 갈등은 단지 개인 성격의 경험으로부터 발생하는 것만이 아니다.7
내가 제시한 설명은 적어도 세 가지 방식에서 분명히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 첫째, 이 설명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 역시 요구하는 구별들과 개념들에 대한 보다 설득력 있는 해명을 필요로 한다. 자발성, 지성적 덕과 성격의 덕의 구별, 자연적 능력과 정념에 대한 양자의 관계, 실천적 판단의 구조. 내 자신의 설명이 설득력 있으려면, 이들 주제의 각각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각과 유사한 것이 변호되어야만 한다.8
둘째, 나의 설명은 쾌락과 향유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 일치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그것은 어떤 공리주의적 관점과도 양립할 수 없으며, 특히 덕에 관한 프랭클린의 서술과 양립할 수 없다.9
셋째, 나의 서술은 가치평가와 설명을 전형적인 아리스토텔레스적 방식으로 결합시킨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 특정한 행위를 어떤 덕 또는 악덕의 표현으로서 또는 표현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에서 보면 결코 가치평가만은 아니다. 그것은 왜 다른 행위가 실행되지 않고 바로 이 행위가 실행되었는가를 설명하는 데 있어 첫 걸음을 의미한다. [……] 실제로 정의와 불의, 용기와 비겁함이 인간의 삶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언급하지 않고서는 거의 아무 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모든 가치평가로부터의 “사실들”의 분리를──이 “사실들”의 개념을 제7장에서 설명하였다──방법론적 근본원리로 하는 현대 사회과학들의 설명 시도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이로부터 도출된다.10
매킨타이어는 덕에 대한 자신의 설명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이야기한다. 매킨타이어의 주장은 형이상학적 생물학을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덕과 선이 단순히 개인의 성격 차원에서 해명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다르다. 그러나 매킨타이어의 주장은 동시에 (1)실천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가지 요소에 대해 강조한다는 점에서, (2)덕과 선이 결코 쾌락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는 점에서, (3)‘사실/가치’의 이분법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유사하다.
나의 서술과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고 명명될 수 있는 다른 설명 사이의 이제까지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비록 내가 덕의 실천을 결코 실천의 콘텍스트로 제한하지는 않았지만, 덕들의 목적과 기능을 내가 실천의 범주의 도움을 받아 정의하였다는 데 있다. 이와는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좋다”고 명명될 수 있는 전체 인간 삶의 개념을 토대로 덕들의 목적과 기능을 확정하였다. 실제로 “덕들을 결여하고 있는 인간존재에게 결여된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내가 이제까지 말한 것을 넘어서는 대답이 주어져야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런 개인은 어떤 실천에의 참여를 통해 성취될 수 있는 특정한 탁월성과 또 이러한 탁월성을 보존하는 데 필수적인 인간관계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특정한 방식에 있어서만 실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체로서 파악된 그 자신의 삶이 아마 불완전할 수도 있는 것이다.(296)
매킨타이어는 실천의 개념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덕에 대한 해명이 아직 불완전하다고 지적한다. 첫째로, 우리는 개별적 ‘활동’이 아니라 ‘실천’ 그 자체를 평가하기도 해야 한다. 덕과 선이 실천의 맥락에서 정의될 경우 실천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가 제대로 해명되지 않는다. “나는 제12장에서 이미 덕의 윤리가 그 상대로서 도덕법의 개념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실천들은 이 도덕법의 요청들에도 역시 부합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아마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더 커다란 도덕적 콘텍스트 내에서의 실천의 위치에 관해 더 많은 것이 서술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포함하지 않는가?”11 둘째로, 우리는 수많은 실천으로 구성된 ‘인간 삶’의 총체성에 대해서 역시 평가해야 한다. 각각의 실천이 서로 결합하는 방식을 평가할 수 있는 지평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다양한 실천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선택에 대한 고민은 단순히 자의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전체적 인간 삶이 선, 즉 하나의 통일성으로 파악되는 인간 삶의 선을 구성함으로써 실천의 제한된 선들을 초월하는 하나의 텔로스가 없다면, 두 가지 경우가 발생한다는, 즉 특정한 파괴적 자의가 도덕적 삶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고 또 우리는 더 이상 특정한 덕들의 콘텍스트를 적절하게 규정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까지 암시하였다.”12 따라서 실천의 의미에 대한 논의가 끝나자마자 인간 삶이 ‘설화적 질서’ 혹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주장이 곧바로 뒤따라온다. 각각의 실천과 그 실천이 구성하는 통일성에 대한 평가를 위해서는 인간 삶의 전체 맥락이 전제된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매킨타이어는 ‘실천’과 인간 삶의 ‘설화적 질서’ 사이의 관계를 그다지 체계적으로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덕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실천’이라는 지평이 전제되어야 하고, 실천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인간 삶의 ‘설화적 질서’라는 지평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마치 그 두 개념 사이에 인식론적 위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그러나 사실 설화적 질서는 실천이 시간적 과정을 통해 진행될 때에야 비로소 형성된다. 실천과 독립된 설화적 질서가 따로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실천이 설화적 질서를 통해 해명되어야 하는 것처럼 설화적 질서 역시 실천에 의존하여 해명되어야 한다. 실천을 평가하는 것은, 또한 각각의 실천이 맺고 있는 통일성을 평가하는 것은, 실천이 만들어낸 성공과 실패의 역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역사를 통해 실천이 지향하는 ‘덕’의 의미가 변화하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실천 자체의 성격 또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