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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전쟁 The Trojan War
호메로스의 서사시《일리아드Iliad》와《오딧세이Odyssey》
트로이 전쟁(The Trojan War)은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그리스와 트로이와의 전쟁입니다.
당시 세계의 패권을 노리는 강대국 그리스와 견고한 난공불락의 요새를 가지고 있는 트로이와의 전쟁은
서로에게 매우 힘에 겨운 싸움이었죠.
결국 그리스는 무력과 군사력으로는 트로이를 점령할 수 없음을 알고
지혜와 모략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서사시《일리아드Iliad》와《오딧세이Odyssey》는
트로이 전쟁(The Trojan War)이 끝난 수백 년이 지난 후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오던
전쟁의 진행 과정을 서술한 것입니다.
이 전쟁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는 수많은 예술작품들을 탄생케 했으며
끊임없이 텍스트를 생산해 내는 전쟁 이야기로 남아있습니다.
《일리아드Iliad》
《일리아드Iliad》와《오딧세이Odyssey》에 나오는 영웅적 인물들은 책과 연극 속에 계속 현존해 있으며,
몇몇 모티브들은 관용적 표현이 되어 일상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싸움을 불러 일으키는 대상은 '불화의 사과(The Apple of Discord)'로,
상처받기 쉬운 약점은 '아킬레스건(Achilles tendon)'으로 불리며
'트로이 목마(The Trojan Horse)'는 외부에서 들어온 요인에 의하여
내부가 무너지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죠.
또한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Odysseus)가 트로이 전쟁을 위해 출격하며
한 절친한 친구에게 자신의 아들 텔레마코스(Telemachos)를 부탁했는데
그 친구는 오디세우스가 돌아올 때까지 친구이자 선생, 조언자, 아버지 역할을 하며
텔레마코스를 잘 돌봐주었다. 그의 이름이 바로 멘토(Mentor)였습니다.
이후 멘토는 '조언자 역할을 하는 사람',
즉 '한 사람의 인생을 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온갖 난관을 물리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의 10년 동안의 항해는
인간이 자아를 발견해 가는 정신적 방황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20세기 아일랜드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James Aloysius Joyce:1882-1941)는
오디세우스의 로마 이름인 '율리시즈(Ulysses)'를 제목으로 하는 소설에서
하루 동안 일어나는 한 현대인의 의식의 흐름을 추적하였죠.
'오딧세이(Odyssey)'는 말 자체가 '방황', '탐험'이라는 뜻에서부터
진리 탐구을 위한 지적 탐험을 뜻하는 말까지 여러 가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Hans Rottenhammer
Feast of the Gods(The Marriage of Peleus and Thetis)
트로이(Troy)의 실체
대략 기원전 1250년 경에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 연합군의 10년 동안 지속된 트로이 전쟁은
양쪽의 연합군 뿐만 아니라 그리스 신들까지 두 편으로 갈라져
자기들이 편드는 연합군 쪽에 가담한 총력전이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트로이는 아주 철저하게 파멸되었습니다.
고대에는 이 전쟁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으나,
19세기의 비판적 역사 연구에서는 트로이 전쟁 뿐 아니라
트로이라는 도시 자체도 실재하지 않았던 도시로 여겨졌죠.
그러나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1822-1890)이
1870년부터 트로이 유적지를 발굴함으로써 트로이는 신화 속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닌 실재했던 도시라는 것이 밝혀졌고,
두 나라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는 역사적인 근거를 얻게 되었습니다.
터키 다르다넬스(Dardanelles) 해협 부근 차나칼레의 히살리크 언덕에 위치한
트로이는 과거 여러 문명이 거쳐갔던 중요한 도시였으며,
여러 층에 걸쳐 다양한 도시들의 폐허가 발굴되어 199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Peter Paul Rubens
The Judgement of Paris
파리스의 심판(The Judgement of Paris)
트로이 전쟁의 시작은 네레우스(Nereus:바다의 신)의 50명의 딸 중의 하나인
바다의 요정(Nymph) 테티스(Thetis)와 미르미돈족의 왕인 펠레우스(Peleus)의 결혼식에서 유래됩니다.
원래 테티스는 그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제우스(Zeus)와 포세이돈(Poseidon)이 서로 아내로 맞이하려
다투었으나 그녀의 아들이 그 아버지보다 위대해질 것이라는 정의의 여신 테미스(Themis) 예언에 의해
두 신은 그녀에 대한 구애를 포기하고 인간인 펠레우스(Peleus)와 결혼케 합니다.
이들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트로이 전쟁의 영웅인 아킬레우스(Achilleus)입니다.
Lucas Cranach
Judgement of Paris
1528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은 성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어 갈 즈음 잔치에 초대되지 않은 손님 하나가 불쑥 나타났습니다.
불화(不和)의 여신 에리스(Eris)였습니다.
초대받지 못한 분풀이로 에리스는 황금 사과(불화의 사과:The Apple of Discord) 하나를 던져놓고
사라지는데, 그 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To the Fairest)'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황금 사과를 놓고 도도한 헤라(Hera), 지적인 아테나(Athena), 관능적인 아프로디테(Aphrodite)는
자신들이 가장 아름답다라고 대결을 벌이죠.
제우스에게 심판을 부탁하나 거절 당하고 헤르메스(Hermes)에 의해
이다(Ida) 산의 젊고 잘생긴 양치기 파리스(Paris)에게 심판을 부탁합니다.
여신들은 저마다 파리스 앞에 나타나 자기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지게 하기 위하여
달콤한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헤라는 파리스에게 동방 전체에 대한 지배권과 부를, 아테나는 모든 전쟁에서의 승리와 명예를,
아프로디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삼게 해주겠다고 제의하죠.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제안을 받아들여 아프로디테가 황금 사과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Renoir
The Judgement of Paris
파리스(Paris)는 누구인가?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Priamos)의 아내 헤쿠바(Hecuba)는
파리스라는 아들을 가졌을 때 타오르는 횃불을 낳는 꿈을 꿉니다.
그 불이 온 도시를 태워버리는 꿈이었습니다.
예언자는 그것이 트로이의 멸망을 의미하는 불길한 전조이며 아기가 태어나면 죽여야 한다고 경고하죠.
왕은 아이가 태어나자 이데 산 숲속에 버리게 합니다.
목숨은 모진 것, 목동들 덕택에 목숨을 건진 파리스는 자라서 양치기가 되어 평화로운 생활을 하게 되었죠.
Jacques Louis David
Paris and Helen
1788
그러나 예언은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파리스의 심판'에서 아프로디테를 선택한 파리스는 아프로디테로부터
그가 트로이 왕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트로이로 돌아가게 됩니다.
파리스는 트로이의 사절로서 스파르타(Sparta)를 방문했는데,
메넬라오스(Menelaus) 왕의 아내인 헬레네(Hellene)를 보게되자 그만 사랑에 빠져버렸죠.
그녀가 바로 아프로디테가 약속한 아름다운 여인이였던 것입니다.
그는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헬레네를 유인해 트로이로 도주합니다.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는 급기야 트로이에 선전포고를 하고
신들까지 가세한 지상 최대의 전쟁을 벌이게 되는 극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메넬라오스 요청으로 소집된 그리스 연합군은 그의 형이자 미케네의 왕인
아가멤논(Agamemnon)의 지휘 아래 트로이 원정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10년 동안의 공방전 끝에 난공불락의 트로이 성이 그리스 연합군에게 함락됨으로써
예언자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결국 파리스도 필록테테스(Philoctetes)의 화살에 최후를 맞습니다.
선택의 기로는 이렇게 파리스의 운명을 바꿔놓았습니다.
Jacques Louis David
Paris and Helen, Detail
1788
파리스의 팜므 파탈(Femme Fatale), 헬레네(Hellene)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미녀는 헬레네(Hellene)입니다.
헬레네의 미모는 태양처럼 빛났죠.
헬레네가 이처럼 빼어난 용모를 지닌 것은 신들의 제왕인 아버지 제우스(Zeus)와
미녀로 소문난 어머니 레다(Leda)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헬레네의 화려한 미모는 어릴 적부터 그리스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는데,
불과 열두살 때부터 그리스 남자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죠.
헬레네를 원하는 남자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그녀는 과연 누구와 결혼을 해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 많은 구혼자 중에 단 한 사람만 선택해야 하는 것이 헬레네의 유일한 고민이자 비극이었죠.
헬레네의 계부인 스파르타의 왕 틴다레우스(Tynda-reus) 역시
선택되지 못한 구혼자들의 원성이 무엇보다 두려웠습니다.
거의 모든 그리스의 왕족이 헬레네에게 구혼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틴다레우스는 교묘한 꾀를 내어 헬레네가 직접 남편감을 고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남자들의 영웅심을 교묘히 부추겨 경쟁에서 탈락한 구혼자들로부터
앞으로 헬레네의 남편에게 난관이 닥치면 몸을 바쳐 돕겠다는 서약을 받아내죠.
틴다레우스의 계략에 넘어간 구혼자들은 이 충동적인 맹세의 댓가를 훗날 톡톡히 치르게 되는데,
무려 10년 동안 계속된 참혹한 트로이 전쟁이 바로 신랑 후보들의 섣부른 서약에서 비롯됐기 때문입니다.
Dante Gabriel Rossetti
Helen of Troy
1863
트로이(Troy) 전쟁의 시작
고심 끝에 돈 많은 왕족 메넬라오스(Menelaus)를 남편으로 선택한 헬레네는
딸 헤르미오네(Hermione)를 낳고 몇 년 동안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를 방문하자 결혼 생활에 권태감을 느끼던 헬레네는
잘 생긴 파리스에게 마음이 쏠리게 되었죠.
호감을 내색 조차 하지 못한 채 눈치만 살피던 두 사람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메넬라오스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크레타로 떠나자 파리스는 헬레네를 유혹해 자신과 함께
트로이로 건너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자고 합니다.
헬레네는 주저없이 파리스를 따라 나섰습니다.
스파르타로 돌아온 메넬라오스는 아내의 배신에 치를 떨며 복수를 결심합니다.
그가 지난 날 서약을 맹세한 구혼자들에게 소집 명령을 내리자 결혼 전 그를 돕겠다고 약속한 구혼자들은
꼼짝없이 트로이 원정대에 합류해야 했죠.
헬레네의 부정 행위로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PERRIER, François
The Sacrifice of Iphigenia
1632-33
이피게네이아(Iphigeneia)의 희생
모든 전쟁 준비를 마친 그리스 연합군의 함대는 보이오티아에 있는 아울리스 항구에 집합했습니다.
그러나 출정을 앞두고 있는 그리스 연합군에게 순풍이 불어오지 않았습니다.
순순히 따라주지 않는 자연현상 때문에 마냥 항구에 머물고 있을 수는 없자,
아가멤논은 바람이 불지 않는 이유를 알기 위해 예언자 칼카스(Calchas)를 불러 점을 치게 했죠.
이것은 아가멤논이 여신 아르테미스(Artemis)의 비위를 거슬렀기 때문에
아르테미스가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전에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 성역에 들어가 사슴을 사냥하고
승리감에 들떠 자신이 아르테미스보다 낫다고 자랑한 사건이었죠.
Jan Steen
The Sacrifice of Iphigeneia(이피게네이아의 희생)
<STRONG> 1671
아르테미스의 분노를 푸는 유일한 방법은 그 제단에 처녀를 산 제물로 바치는 길 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산 제물은 죄를 지은자의 딸이어야 했습니다.
그리스 연합군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에 아가멤논은 고민 끝에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그리스 연합군 중 가장 뛰어난 장군 아킬레우스와 혼인시키겠다는 거짓 전갈로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데려가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피게네이아가 산 제물로 바쳐지는 순간 아르테미스 여신은 문득 가여웠던지 그녀를 거두고
그 자리에 대신 암사슴 한마리를 놓았습니다.
아르테미스는 이피게네이아를 구름에 싸서 타우리스로 데려가 자기 신전의 여사제로 삼았죠.
아르테미스의 분노가 가라앉자 순풍이 불어 연합군의 함대는 출항할 수 있었습니다.
함대는 순조롭게 그리스 연합군을 트로이 해안에 내려 놓았습니다.
트로이군은 그리스군의 상륙을 저지하려고 공격을 감행했죠.
이 최초의 공격에서 그리스의 프로테실라오스(Protesilaos)는 트로이의 헥토르(Hector) 손에 전사하였습니다.
신탁은 그리스 침략군 가운데 첫 번째로 트로이에 상륙하는 사람은 죽는다고 예언했던 것이죠.
프로테실라오스는 첫 번째로 육지에 내렸고 신탁의 예언대로 죽었습니다.
Joseph Turner
Ulysses(Odysseus) Deriding Polyphemus-Homer's Odyssey
1829
'비전형적 영웅' 오디세우스(Odysseus)
오디세우스(Odysseus)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오딧세이Odyssey》의 주인공으로
이오니아 해의 작은 섬 이타카(Ithaca)의 왕입니다.
호메로스는 오디세우스를 뛰어난 지혜·언변·기략·용기·인내를 지닌 인물로 그리고 있습니다.
언변이 능하고 뛰어난 전략가로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장식한 인물이죠.
그 역시 헬레네에게 구혼했던 한 사람으로써 메넬라오스를 도와 트로이 전쟁에 참가하게 됩니다.
처음에 그는 아내 페넬로페(Penelope)와 아들 텔레마코스를 두고
원정에 참가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미친 척하며 피해보려고도 했지만 그리스군은 오디세우스의 지혜와 영리함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결국 원정에 참가하게 되었죠.
그는 일단 전쟁에 참가하자 그리스군의 패주(敗走)를 저지하는 등 뛰어난 무장으로서 활약하였습니다.
아킬레우스(Achilleus)가 헥토르(Hector)의 동생 파리스가 쏜 화살에 맞아 죽고,
아킬레우스가 쓰던 무구(武具)를 가장 용감한 사람에게 물려주게 되었을 때
아이아스(Aias)가 그것을 차지했죠.
아킬레우스 사후 그리스군이 대패 위기에 처하자
목마(木馬) 속에 병사를 숨기는 전술로 트로이를 함락시켰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트로이의 목마(The Trojan Horse)였던 것입니다.
Giovanni Battista Tiepolo
Procession of the Trojan Horse into Troy
c.1760
BANDINELLI, Baccio
Laocoön
1525
트로이(Troy)의 멸망
그리스군은 오디세우스를 포함한 소수의 장병들만을 거대한 목마 속에 넣어 둔 채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습니다.
연기에 능한 한 명의 병사만이 남아 이 목마가 패퇴한 그리스군의 선물임을 호소력 있게 설득하죠.
트로이인들 사이에는 선물을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에 관해 설전이 벌어졌습니다.
늙은 애국자 라오콘(Laocoon)이 나서서 목마에는 음흉한 계략이 숨어있다고 애타게 부르짖었건만,
느닷없이 바다로부터 포세이돈(Poseidon)이 보낸 뱀이 달려들어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을 물어 죽이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그날 밤,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은 트로이인들은
10년 만에 맛보는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승리의 축배를 들며 마음껏 즐기다 잠들었죠.
라오콘이 살아있었다면 그것이 다시는 깨어날 수 없는 잠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으련만.
몰래 목마를 빠져 나온 그리스 병사들이 10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트로이 성문을 열어 젖히자
되돌아온 그리스 대군이 쳐들어왔습니다.
그것으로 동방의 찬란한 왕국 트로이는 수백 년의 영화를 끝맺고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오디세우스는 귀향하는 항해에서 모진 고생을 겪으면서도
강인한 의지와 영민한 두뇌로 10년 동안의 파란만장한 유랑 끝에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Claude Lorrain
Ulysses(Odysseus) Returns Chryseis to her Father
1648
'전형적 영웅' 아킬레우스(Achilleus)
아킬레우스(Achileus)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일리아드Iliad》의 주인공으로 트로이 전쟁 최고의 영웅입니다.
미르미돈족의 왕인 펠레우스와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아들로,
테티스는 아킬레우스가 어렸을 때 그를 불사신으로 만들고자 저승을 에워싸고 흐르는 스틱스 강에
그의 몸을 담갔으나 그녀의 손에 잡힌 발뒤꿈치만은 강물에 닿지 않아 치명적인 급소가 되었습니다.
아킬레우스에게는 트로이 전쟁에 참가하면 살아서는 돌아오지 못할 운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아킬레우스 없이는 결코 트로이를 함락할 수 없다는 신탁도 있었죠.
아킬레우스에게 이런 운명과 신탁이 있었던 것은 아마도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아킬레우스의 부모인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들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테티스는 아킬레우스를 스키로스 섬에 있는
리코메데스(Lycomedes) 왕의 궁궐로 보내 처녀로 변장시켜 왕의 딸들과 함께 지내게 했습니다.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아킬레우스는 왕의 딸인 데이다미아(Deidamia)와 관계하여
네오프톨레모스(Neoptolemos)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Erasmus Quellinus
Achilles among the Daughters of Lycomedes
1663
아킬레우스 없이는 결코 트로이를 함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 그리스는
지략이 뛰어난 이타케의 왕 오디세우스를 시켜 아킬레우스를 설득하여 참전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아킬레우스를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한 결과
리코메데스 왕의 공주들 사이에 숨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으로 찾아갔죠.
오디세우스는 방물장수로 변장하여 궁궐로 들어가 공주들 앞에 갖가지 물건들을 늘어 놓았는데
물건들 중에는 무기도 있었습니다.
공주들은 온갖 패물을 몸에 걸쳐 보며 즐거워했으나 아킬레우스는 무심코 무기를 집어 들었습니다.
정체가 탄로 난 아킬레우스는 결국 오디세우스의 설득으로 참전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The Ambassadors of Agamemnon in the Tent of Achilles
1801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대립
트로이 전쟁이 시작된 9년 동안 아킬레우스는 트로이 주변 지역을 휩쓸면서
12개의 도시를 점령하는 그리스 제일의 용사로서 용맹을 떨쳤습니다.
그리고 점령한 도시에서 탈취한 전리품과 포로들은 나누어 가지곤 했죠.
전쟁이 10년 째 되던 해 어느날 잡혀 온 포로들 중에는 아름다운 여자 두 명이 있었습니다.
크리세이스(Chryseis)라는 여자 포로는 아가멤논이 차지하고,
브리세이스(Briseis)라는 여자 포로는 아킬레우스의 차지가 되었죠.
며칠 후 크리세이스 아버지 크리세스(Chryses)가 찾아와 자신은 아폴론의 사제이니
자신의 딸을 돌려달라고 간청하였지만 아가멤논이 이를 거절하자
크리세스는 아폴론에게 그리스군을 징벌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아폴론은 매우 사나운 사자와 질병의 화살을 그리스군 진영에 쏘아 역병을 퍼뜨렸죠.
사상자가 속출하자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에게
크리세이스를 그녀의 아버지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아가멤논은 크리세이스를 풀어주고,
대신 아킬레우스가 가장 아끼는 노예 브리세이스를 빼앗아 자신이 취하였죠.
자존심이 상한 아킬레우스는 자신을 무시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면서 전장에서 물러나 버렸습니다.
Benjamin West
Thetis Bringing Armor to Achilles
1806
자신의 아들이 모욕을 받은데 격분한 테티스는 제우스를 찾아가 그리스군이 패하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테티스의 부탁에 따라 제우스는 모든 신들을 올림포스로 소집하여 싸움에 끼어 들지 못하게 명령하고,
자신은 지상에 내려와 천둥과 번개를 일으켜 그리스군을 괴롭혔습니다.
적의 용장 아킬레우스가 물러나고 신들의 왕인 제우스가 함께한
트로이군은 사기백배하여 거침없이 공격하였죠.
전세는 순식간에 뒤바뀌어 그리스군은 해변으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였고,
트로이군은 도망가는 그리스군을 추격하여 전방의 방어벽까지 육박해 갔습니다.
그리스군이 괴몰(壞沒) 직전에 놓인 것을 본 헤라는 한가지 계책을 생각해 냈습니다.
여신은 자기의 몸을 한껏 매력적으로 치장하고,
아프로디테의 애정을 일으키게 하는 마법의 띠 케스토스를 빌려 제우스를 유혹하였습니다.
제우스는 아름다운 헤라의 모습에 반하여 지난 날의 사랑이 다시 불타올랐으므로
전쟁은 되는대로 방치해 두고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이틈에 포세이돈이 위기에 처한 그리스군을 돕자 오히려 트로이군이 밀리게 되었죠.
아내인 헤라와 사랑을 나누다가 지상을 내려다 본 제우스는 전세가 뒤바뀌어 있자
크게 노하여 헤라를 물리치고 다시 그리스군을 괴롭혔습니다.
한편, 아가멤논은 막대한 보상을 약속하고 아킬레우스에게 사과하며 화해를 제의하지만
아킬레우스가 이를 거절하자 일방적인 열세인 그리스 연합군을 보다 못한 아킬레우스와 절친했던
파트로크루스(Patroclus)는 아킬레우스의 투구와 갑옷을 빌려 입고 출전합니다.
그러나 파트로크루스는 아폴론의 격려를 받은 트로이의 헥토르(Hector)에게 죽임을 당하고
아킬레우스의 갑옷까지 빼앗겼죠.
친구의 죽음을 전해 들은 아킬레우스가 크게 슬퍼하며 괴로워하자 어머니인 테티스가 위로하며
'다음은 네가 죽게된다'며 아들의 출전을 만류하였으나 아킬레우스의 결심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테티스도 더 이상의 설득을 단념하고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Hephaestus)에게
아들의 새로운 갑옷을 부탁합니다.
DAVID, Jacques-Louis
Andromache Mourning Hector
1783
헥토르(Hector)의 전사(戰死)
이튿날 아킬레우스는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새로운 갑옷과 방패를 포함한 뛰어난 무구(武具)로 무장하고
총대장의 진영으로 찾아가 아가멤논과 화해한 뒤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싸움터에 나와 미친 듯이 날뛰는 아킬레우스를 보고 트로이 병사들은 도망가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아테나 여신의 가호를 받은 아킬레우스는 트로이 성벽 근처에서 친구의 원수인 헥토르를 찾아 죽였습니다.
헥토르는 숨을 거두면서 아킬레우스의 죽음도 멀지 않았다는 말을 유언처럼 남겼죠.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체에서 피 묻은 갑옷을 벗겨내고 양 발에 구멍을 뚫어 가죽끈을 꿴 다음
자기의 전차 뒤에 매달아 트로이 성 주위 여기 저기를 끌고 다니면서 모욕하였습니다.
죽어서까지 모욕을 당하고 있는 헥토르를 불쌍히 여긴
제우스는 테티스를 불러 헥토르의 시체를 트로이군에게 돌려보내도록 아들을 설득하라고 분부하죠.
열흘 뒤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은 헤르메스의 수호로 거액의 몸값을 마차에 싣고,
마부 한 명만 데리고 아킬레우스 막사를 찾아갔습니다.
프리아모스 왕은 몸값으로 얼마든지 줄테니 제발 죽은 아들의 시체를 돌려달라며 간곡히 부탁합니다.
아킬레우스는 너무도 간곡한 늙은 프리아모스 왕의말에 감동하였고,
어머니의 부탁도 있어 헥토르의 시체를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장례가 끝나기 전까지 트로이를 공격하지 않았죠.
Pompeo Batoni
Thetis Takes Achilleus from the Centaur Chiron
1770
아킬레우스(Achilleus)의 전사
헥토르는 죽었으나 트로이는 아직도 함락되지 않고 저항을 계속하였습니다.
동맹국인 에티오피아의 왕 멤논(Memnon)과 여자들만 사는
아마존족이 트로이의 구원을 위하여 속속 달려왔습니다.
먼저 아마존의 여왕 펜테실레이아(Penthe-sileia)가 지휘하는 여전사들이 트로이를 도왔는데
이들 역시 아킬레우스의 손에 전멸하죠.
아킬레우스는 죽어가는 펜테실레이아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녀를 죽인 것을 후회하고 장례를 치러 주었습니다.
에티오피아의 멤논 왕은 펜테실레이아가 전사한 지 얼마 후 트로이에 도착했습니다.
새벽의 여신 이오스(Eos)의 아들인 멤논의 엄청난 군대와 트로이군이 동시에 공격해오자
그리스군은 최후 방어선까지 붕괴될 뻔하였죠.
그러나 아킬레우스의 창에 멤논이 죽자 전세는 또 다시 뒤바뀌었습니다.
트로이에서는 더 이상 나서서 싸울 장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트로이의 함락은 시간 문제였죠.
그러나 이때 아폴론의 도움을 받은 파리스의 화살에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급소인 발뒤꿈치를 맞고 쓰러졌습니다.
호메로스에 따르면 아킬레우스는 저돌적이며 격하기 쉬운 성격이지만
어려서부터 현명하고 용감하며 정이 많은 트로이 전쟁에서 가장 고결한 영웅으로 칭송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킬레우스를 '전쟁의 천재'라 불렀습니다.
아킬레우스는 최고의 검술과 창술을 지녔으며 말을 타고 수레를 모는 것과
방패를 다루는 솜씨도 완벽했습니다.
더구나 그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뛰어다니며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다스리는 기술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고 민첩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사신으로 무장한 아킬레우스일지라도 운명과 신탁의 예언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참고문헌: 토마스 불핀치 <그리스 로마 신화>,
강삼경의 명화 속 신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