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산 김주원 교무의 정전 강의 5--- 일원상의 진리 3
원광 원기93년(2008년) 5월호
일원(一圓)은 대소유무(大小有無)에 분별(分別)이 없는 자리며
대종사께서는 우주가 이뤄진 원리를 깨달으시고 난 후
대(大), 소(小), 유 무(有無)의 세 가지로 밝혀 주셨다.
큰 대(大)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의 본체, 즉 본래의 몸이다.
작을 소(小)는 모든 것이 형형색색으로 각각 자기 모습을 가지고 나눠 있는 것을 말한다.
우주의 원리는 한 개체로만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개체는 전체에 함께 연해 있고
,또 전체는 각양각색의 소소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사람 몸을 보자.
몸 전체는 대(大)이다. 몸은 하나로 움직이는데 이 하나라는 것이
두루뭉실 이뤄져 있는 것이 아니고, 그 하나 가운데는 눈도 있고 코도 있으며 손도 있어서
그 모든 것이 제각각 역할을 한다. 그 각각의 여함 하는 것육 보면 손과 발이 각각 다르다.
이 다른 것으로 보면 모든 것이 각각 개체로 떨어져 있어야하는데 또 그렇지는 않다.
유(有)는 모든 것이 나타나는 것,있는 것을 말하고, 무(無)는 없는 것이다.
즉 유무(有無) 라는 것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고정불변으로 가만히 있는게 아니라
있던 것은 결국 다 없어지고, 다시 없는데서 있어진다. 이렇게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의 머리카락이 자라고 키가 자라는 것은 있어지는 것, 즉 유다.
그렇다면 없는 면으로 보면 세포가 항상 영원(永遠)불변(不變)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있어지는 반면에 늘 없어진다. 사람도 그렇고, 형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모든 것이 대소유무(大小有無)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렇게만 보면 좋은데,
대종사께서는 대소유무(大小有無)에 분별(分別)이 없는 자리라고 했다.
대(大)와 소(小),유무(有無)의 원리로 모든 것이 이루어져 가고 있는데
그 이루어져 가고 있는 당체(當體)는 대(大)다 소(小)다 유무(有無)다 하는 나누는 생각이 없이
무위자연(無爲自然)한 가운데 운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생멸거래(生滅去來)에 변함이 없는자리며
날 생(生), 멸할 멸(滅) 갈 거(去) 올 래味)이다.
이 우주 안에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은 다 생멸거래를 한다.
바위도 천만년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가루로 변하고 또 언제든지 뭉쳐서 바위가 된다.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은 무엇이 들어서 하고 있는가.
그것은 한 기운이라고 하는 진리가 있어서 그렇다.
그 진리의 힘이 들어서 낳기도 하고 멸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작용을 시키고 있는 진리는 언제 생(生)한 것도 아니고 언제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또 생멸거래(生滅去來)는 분명히 있다.
생멸거래(生滅去來)를 하고 있는 본체를 보자.
물은 수증기도 되었다가 얼음도 되었다가 한다.
형태를 보면 다 다르지만 본체를 보면 변함이 없다.
우리 마음을 보자. 마음도 엄청난 생멸거래를 한다.
여러 가지 마음이 났다가 없어졌다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실제로 그런 마음이 나고,가고 하는데 그 마음을 작용하는 마음이 있다.
그 마음은 어렸을 때 낸 마음과 지금 내는 마음이 분명 다르다.
어렸을 때 나온 마음바탕과 지금 나온 마음 바탕은 같을까 틀릴까?
그것을 생각하면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까 싶다.
선악업보(善惡業報)가 끊어진 자리며
생멸거래(生滅去來)가 우주만상의 형태를 본 것이라면 선악업보는 우리의 생활에 비춘 것이다.
선악(善惡)은 심신(心身)동작에 따라서 착하고 나쁜 것을 말한다.
업보(業報)라는 것은 고통도 받고 즐거움도 받는 것을 말한다.
선악의 결과에 따라서 즐거운 생활도 하고 괴로운 생활도 하는 우리 일체생령의 생활이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선과 악 둘 중에 하나를 짓고
그에 따라서 괴로움도 받고 즐거움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도 알고 보면 주체가 마음이 지어서 하는 것이다.
짓는 것도 마음이고 받는 것도 마음이다.
그렇게 하고 있는 마음 당체의 근본자리는 선이라는 것도 악이라는 것도 즐거움도 괴로음도
일체 모든 것을 떠난 자리며 초월한 자리다.
밖에서 아무리 좋은 것이 들어와도 내 마음이 슬프면 좋은 것을 못 느낀다.
또 밖에서 아무리 괴롭게 해도 내 마음이 즐거우면 괴로움을 못 느낀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나의 마음이 느끼는 것이다.
선악업보(善惡業報)가 끊어졌디는 것은 그런 분별이 쉬면 사실은
그 자리는 선악업보가 없다는 것이다.
언어 명상(名相)이 돈공(頓空)한 자리로서
언어 명상(名相)은 말과 글, 이름과 형상을 말한다. 나타난 것은 전부 언어명상의 세계다.
이 언어명상의 세계가 밖에 있는 것 같지만 다 내 마음에 들어있다.
내 마음이 들어서 분별망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명상이 돈공하다는 것은 하나하나 다 분별하는 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별을 하고 있는 당체는 언어명상이 없는 자리다.
보통 우리는 언어명상을 하고 있는 마음만이 내 마음인줄 알지,
당체의 마음이 실제 내 마음인 줄을 모르고 그 마음은 없는 줄 안다.
자기의 참 마음 찾아서 닦는 사람은 경계를 대할 때 그 마음의 밑바탕까지 휩쓸려 가지는 않는다.
대종사께서 없는 자리를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결국 우리의 순수본연의 자리에 들어가면
그것은 다빈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이다.
그 자리가 우리의 마음고향 자리니까 그 마음을 사모하고 길러서
그런 마음으로 모든 경계에 응하면 된다는 것이다.
시람은 잘 살고 싶어하지만, 욕심이 치성해져서
정당한 도를 실천하지 않기때문에 오히려 돈을 뺏겨버린다.
참으로 돈을 버는 길은 돈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한다.
없는 자리를 수용해야 모든 있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 된다.
대종사께서는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셨다.
없는 자리로 돌아가려면 쉬어야 한다.
그래서 대종사님께서도 정신수양이라고 말씀하셨다.
일이 없을 때는 가급적 마음을 비워라.
마음이 잘 안 비워지면 염불을 해봐라. 딴 생각이 안 난다.
염불이 잘되면 선도 해봐라.
일을 할 때 그 일만 하지 딴 생각을 들여보내지 말라.
걸을 때는 걷기만 하고, 밥 먹을 때는 밥만 먹어라.
그러면 차츰 일심이 되어져서 미음이 안정이 된다.
없는 자리를 배운 우리는 어떻게 아음을 써야 할까
실제로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없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이 진리를 알면 이제까지 그것 아니면 내가 못살 것 같다고 하는 괴로운 마음에서
한 발 물러 설 수 있는 여유와 힘이 생긴다.
없는 자리를 길러야 여유의 힘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야 일을 처리할 때 바른 생각을 낼수 있고 바른 행동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