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탑외 4편
김건희
노을의 혀가 차오르는 강물에게 건네는 말
차곡차곡 씹어 올리다 보면
돌탑이 된다
닳아 가는 말 알아들어
포개어지는 말 알아들어
한 권의 시집을 엮을 수 있다면
내 입술은 너의 바닥을 제대로 읽었다 말할 수 있으리
너로부터 닫혀 있는 나, 나로부터 닫혀 있는 너
노을 서성이는 강가에서
서로의 등에 얽힌 사연을 들춰
어떤 돌은 너를 닮았다고
어떤 돌은 나를 닮았다고
흘러서 또 어디로 떠나는 물에게
중얼거림을 하나 더 보탠다
아래위 구분되지 않는 탑을
우리는 그렇게 무던히 쌓기도 하고
하염없이
허물기도 하는 거였다
물총새를 날리다
방금 눈을 뜬 어린 물총새가 갸웃갸웃
수초는 밀가루 뒤집어쓰고 소낙비에 젖어
철없이 첨벙거리던 발목으로 새알 수제비인 듯
비벼졌다
보글보글한 생각들을 강둑에 내려놓는다
이끼 젖은 바위는 아직도 잠결
머리 안쪽에서 물총새를 꺼낼 때 번개처럼 생각의 물살은
어슷썰기를 할까, 채썰기를 할까
칼등의 무거움도 아래로 흐른다
눈대중으로 크기를 재어보는 거긴
주방 저울 눈금이 이리저리 흔드는 강
금을 밟은 물안개 뒤에서 기웃거리는 햇살이
물총새를 내 모습으로 볼 때
꺼내온 묵상들로 아침상 차리는 그녀
흘러든 하구는 둥글게 끓는 밥솥이다
흔들자, 푸시시 푸시시 떠나는 군단
이팝나무 꽃자리도 불안한 침묵에
안개는 어떤 발소리도 들려주지 않았다
막사발에 뜸 들여 퍼 올린 쌀밥이
조리사의 하얀 가운을 자꾸 빌려 달라 조르자
냅다, 미끄덩한 껍질의 후미를 던진다
떠나는 물총새는 소실점을
저 혼자 지운다
꽃의 자리
나갔던 상여가 꽃으로 돌아오는 곳에
벌통을 놓아둔다
눈꺼풀조차 가벼운가요? 거긴
꽁꽁 언 입술 어머니
자식위해 꽃가루 나르던
그 들길 건너 야산에는 지금
눈조차 온통 시큰한 흰 섬
어머니 지금
항로를 놓치고 다시 회항하고 싶었던 걸까요
울음으로 놓던 다리를 지상으로 펼친 곳에서
무덕무덕 피어나는 아카시아 꽃
먼 길 휘어져가며 흘린 눈물이
배꼽에서 소실점을 꺼낼 때
어머니 놓던 벌통을 이제
내가 놓을 때
상여집 앞에 펄럭이는
흰 부적들
눈사람
올 나간 스타킹을 당기는데
눈송이들이 딸려 나왔다
눈은, 저녁에야 돌아온다고 했다
하루가 힘겨운 히말라야시다가 먼저 젖었다
참새들이 잠들기 위해 찾아드는 나무였는데
눈덮고 귀덮도 코덮고 입덮어
어깨 무거운 석불이 되어 있었다
깊어가는 상념의 앞가슴 합장한 두 손의 가지런함에
히말라야시다, 그녀의 저녁은
끊임없이 송이눈 뭉쳐 눈을 닦는다
나무의 무거워진 횡격막 아래에서
솜뭉치 헤집고 열리는 노란 가슴
들숨과 날숨으로 피운 복수초가
어미닭 뱃속 알처럼 웅크렸다
곱은 내 손에 놓이는 한 공기 쌀밥의 따스함을
난 오래 기억할 거야
올이 나간 밥주머니를 잘라 낸 당신
비틀비틀 귀가할 저녁의 빙판길에
나 반가운 눈사람이 되어 서 있을 거야
모래화가
울퉁불퉁한 생각들은
눌러 밟고 걷기보다는
떨어진 솔방울인 듯 툭툭 걷어차야 한다
그건 오랜 관습, 바람이 메마른 솔잎 걷어 내자
모래 위 걸어가는 낙타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맨발로 앞서 가던 낙타는 보이지 않고
서두르지 않았는데 저녁은
발자국을 움푹하게 찍었다
사막을 걷는 일상, 등에 진 외로움 때문에
십 리 밖 물 냄새에도 나는 예민해졌다
밖을 뒤집어 안으로 밀어 넣거나
안을 뒤집어 쌓는 화폭
나는 누군가 지나간 문양을 발끝으로 지우는 화가였다
슬며시 몸 돌려 바라본 모래 위
고통과 나란히 찍힌 내 발자국은
가벼운 바람조차 이기지 못하고 사그라진다
지난겨울 폭설로 고요했을 이곳에
낮게 누워 있는 낙타 한 마리
모이통 헐렁한 새를 만나
침침한 눈 부빈다
-당선소감
딱딱한 생각들을 들고 나는 진흙을 만지다 순수로 말랑해집니다
그렇게 으깬 흙에 물을 섞어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형태의 그릇은 구워졌고 나를 비워 만든 그릇은 무엇인가를 채우고 싶어 합니다
허공에 떠도는 시 말을 당겨 그릇에 어떻게 담을 가를 고민 했습니다
고민이 깊어 갈 무렵 반가운 전화 한 통 받았습니다 <미당문학>에서 걸려온 전화는
나의 그릇에 무엇이라도 채워보라는 권유와 격려입니다
시 본질인 서정의 맛을 훼손하지 않겠습니다
겨우내 담아 두었던 모과가 떠나도 모과의 통증까지도 기억하는 그릇이고 싶습니다
뽑아 주신 문효치 이경철 심사위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릇의 모양을 제대로 갖추라고 지도해 주신 시 창작원 형상시학 박윤배 선생님,
시와 길 찾기에 길잡이가 되어 주신 시인 강문숙 선생님, 늘 조언을 아끼지 않은 문우들
시노래 부르며 웃고 응원해 주는 박범철 가곡교실 선생님 회원들
그리고 남편 이종창 딸 나연이 사랑합니다
미당문학신인작품상 심사평
이번 미당문학신인작품상에는 전국에서 모두 70명, 297편이 응모했다. 예심을 거쳐 시 부문 3명 총 22편, 수필 부문 3명 총 9편이 본심에 올라왔다. 본심에서는 정독을 거친 뒤 부문별로 2명 씩 압축해 다시 작품을 보며 논의해 나갔다.
시 부문에서 박홍관 씨의 「문, 바람이 온다」 「볍씨 스케치」 「장미, 멘토를 찾다」 등의 작품에 주목했다. 시를 다루는 솜씨가 남다르게 세련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를 쓰고 있다는 시 의식, 작의(作意)를 표 나게 드러내 되레 시속살의 느낌과 메시지를 갉아 먹고 있는 게 아쉬웠다.
김건희 씨의 「물총새를 날리다」 「돌탑」 「꽃의 자리」 「눈사람」 등 응모작 편편이 수작이었다. 비유를 통한 이미지 창출보다는 적확한 묘사와 진술로 정서와 메시지를 전하고 끊을 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하늘보다 높고 바다 보다 깊은 우리네 삶의 속내, 그리움이며 한 같은 것들을 가없이 표출해낼 수 있는 시적 역량을 높이 샀다. 위에 언급한 네 편 중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내도 손색이 없을 것이나 노을 같이 번져오는, 강물처럼 흐르는 그리움을 돌탑처럼 쌓아올린 단정한 형태의 「돌탑」을 당선작으로 민다.
수필 부문에선 서정애 씨의 「동고비」 「속긋을 긋다」 등에 주목했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가려 쓰고 또 단정하면서도 짧은 문장의 속도감도 있었다. 자연을 관찰하고 우리네 삶과 결부시켜 명상하는 자세도 좋았다. 그러나 그 결합이 작위적이고 펄펄 끓어오르는 오늘 나의 삶이 없고 회고적이란 게 흠이었다.
김현지 씨의 「자궁반란」 「마더」 등의 응모작들은 우선 재미있게 읽혀 좋았다. 폐경기의 히스테리나 허탈감마저도 낙천적으로 바라보려는 자세가 좋았다. 무엇보다 오늘의 삶과 주위에 대한 성찰과 주장이 들어있어 믿음직스러웠다.
「마더」는 아버지 호적에도 못 올리고 첩으로 살아야했던 어머니의 삶을 그리고 있다. 단순한 회고를 넘어 오늘날 늘어나는 미혼모의 삶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하고 있다. 사회적 이슈를 넘어 자신이 겪어본 어머니의 삶을 통해 미혼모들의 사랑과 자신감을 낙천적으로 드러내며 재미있고 의미 있게 읽혀 당선작으로 밀기로 흔쾌히 합의했다.
시 부문 김건희 씨, 수필 부문 김현지 씨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우리 문단의 신예로 힘껏 밀어드린다. 위에 언급한 응모자들도 곧 문단에서 얼굴 뵐 날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심사위원: 문효치 · 이경철>
첫댓글 작품과 심사평까지 자세히 듣게 되어 많은 도움이 되네요
귀한 시 즐감합니다 김건희 시인님
늘 건강하시고 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