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광해군 때 아헌 송원기(宋遠器)가 사간원으로 있으면서 광해군의 폭정을 간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자 자신의 호를 벙어리라는 뜻에서 아헌으로 고치고 지금의 매남동 지역으로 내려와 후진을 양성 하였다는 데서 매남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고, 매양서원이 매천초등학교 뒤쪽의 매천동에 창건된 것은 1692년(숙종 18) 이다. 아헌(啞軒) 송원기(宋遠器)를 기리고 선비가 모여 학문을 강론하기 위해 지어졌다. 1783년(정조 7)에는 사림들의 합의로 매헌(梅軒) 송명기(宋命基)와 남촌(南村) 송이석(宋履錫)을 배향하게 됐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1871년(고종 8) 매양서원은 허물어졌다. 두 차례 훼철된 후 1886년 재차 복원했지만 다시 소실됐고2004년 제 모습을 찾게 됐다. 매양서원의 복원과 아울러 아헌 선생을 모시던 사당 상현사(尙賢祠)도 복원됐다. 매양서원의 복원은 문중의 영광으로 그치기보다 지역 문화유산으로 등재돼 강학의 장으로 삼아야 한다는 유림과 지역민들의 권유에 따라 2009년 4월 26일 기적비(紀積碑) 제막식과 함께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 | | 1)송원기(宋遠器, 1548~1615) 자는 학무(學懋) 호는 아헌(啞軒)이며, 야성송씨(冶城宋氏)이다. 성품이 근엄하고 굳세었으며 효성과 우애를 온건히 갖추었다. 선조25년 1592년 임진왜란때 명나라 병사가 팔거 칠곡(漆谷)에 진(陣)을 칠 때, 백씨(伯氏) 원도(遠度) 경헌(敬軒)과 함께 사재(私財)와 모곡(募穀)으로 군량미 700석을 지원하였다. 체찰사(體察使)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공에게 군무십책(軍務十策)을 진정(陣情)하여 활용하도록 하였다. 선조 31년 1598년 명나라의 병부주사(兵部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아조(我朝)를 무함(誣陷)하자 변무사를 지어 명나라 사신 진어사(陣御使)에게 올렸으며 진어사는 이 변무사를 명나라 조정에 전달하여 이름이 중국에도 드러나게 알려졌다. 이로 인하여 선조 38년 1605년에 형제분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 광해(光海)2년(1610년)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봉훈랑(成均館學諭奉訓郞)에 제수되어 출사하였다. 임금에게 육강소(六綱疏) (1. 정심술(正心術) 2, 입지기(立志氣) 3. 진기강(振紀綱) 4. 용인재(用人才) 5. 득민심(得民心) 6. 수군정 (修軍政) )을 상소 하였으나 임금이 불윤(不允)하므로 칭병이나 하고 낙향하여 아헌(啞軒)이라 하고 두문불출하였다. 동강 김우옹 문하를 출입하여 득문(得聞)하였으며 도의지교(道義之交)하여 영남사람에 알려졌다. 광해 7년에 향년 68세로 고종(考終)하였다. 현재 문집 5권2책이 남아 있으며 유림의 천거에 의하여 매양서원(梅陽書院)에 향사(享祀)되었다. 대구시 북구 매천동에 매양서원이 있으며 2006년 병술년(丙戌年) 4月에 신축건립(新築建立) 복원(復元)되었다. 현재는 지천면 연화리 비올에 후손들이 살았으나 지금은 화물기지로 편입되어 아쉽게도 손실되었다. 西溪 김담수(金聃壽) 祭文 宋遠器 嗚乎惟靈崑玉其相秋蘭其質司馬淸臞益公廉潔早事詩禮義方自飭不喜外名專精內植時尋師友踐履彌篤名登雁塔遽辭科業老萊斑衣慈顔怡悅君平善誨諸子進學安貧守約自顧無怍蘭香自聞一命來加掉頭不就鞱晦烟霞淸福久享人榮繼至桂花耀室靑雲胤子德爲福基古語誠是婆娑丘園庶幾終老兵火飆回山林莫保就養專城江左一隅移住商山霜露幾墜松楸八望歸意雲翔風寒倻路 匹馬南鄕如何一疾奄至不淑春生江渚丹旐向北嗟余小子悼痛何及奉奠一哭心膽欲裂靈爽不昧鑑此心曲 東岡 김우옹(金宇顒) 輓詞[宋遠器] 崑玉何須費琢磨。芙蓉一朶暎澄波。淸氷內潔心神淨。瑞日前煦笑語和。陸子危疏勤啓沃。文公信筆屬編摩。春風永別春風座。殄瘁悲詩獨自哦。 괴헌 곽재겸 輓詞 宋遠器 達城今夏兩賢亡歲匪龍蛇痛恨長伊上訪徐歸路暗解村尋郭暮雲忙淸癯素鶴難承彩溫潤明璆未接光垂死老翁腸欲斷思君泉裏共悠揚 2)송명기(宋命基) 조선조 숙종 때의 학자이다. 자는 정부(定夫)이고 호는 매헌(梅軒)이며 본관은 야성(冶城)인데 아헌(啞軒) 원기(遠器)의 후손(後孫)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전념하여 경종(景宗)때 사마시(司馬試)에 학격한 후에도 사환(仕宦)에는 뜻이 없었고, 당시의 선배 학자들과 함께 성리(性理)의 이론을 추구하는데 몰두하였다. 특히 서헌(恕軒) 이세형(李世珩)과의 「인심도심(人心道心)」과 「사단칠론(四端七論)」의 논구(論究)로 화제를 모은바 있으며, 「퇴계서절요(退溪書節要)」를 저술하여 당시 선비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학행과 덕업으로 세인들의 추중(推重)을 받아 그 아들 남촌(南村) 이석(履錫)과 더불어 칠곡(漆谷)의 매양서원(梅陽書院)에 향사되었다 3)송이석(宋履錫, 1698~1782)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백유(伯綏), 호는 남촌(南村). 아버지는 생원 명기(命基)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달신(達新)의 딸이다. 1721년(경종 1)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성시(省試)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향리에서 성현의 학문을 익히는 것을 일생의 업으로 삼고 지냈다. 만년에는 수도산(修道山) 무흘정사(武屹精舍)의 장서각(藏書閣)에 머물면서 그곳에 수장된 정구(鄭逑)의 수택장서(手澤藏書)를 읽는 한편, 그 중에서 본받을만한 요언(要言<span style="background-color: rgb(255,255,255); letter-spacing: -0.5</body></html>
| | | 매양서원은 전체 영역이 축대 위에 형성되어 있다. 전면에 계단을 배치한 양정문(養正門)을 정문으로 하여 강당을 배치하고 강당의 우측에 단을 높여 사당인 상현사(尙賢祠)를 배치한 병렬형 배치를 보여준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편, | | | | | | 남촌선생문집 『남촌선생문집』은 송이석(宋履錫 ; 1698~1782)의 시문집이다. 송이석의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백유(伯綏), 호는 남촌(南村)이다. 이 책은 1922년 5대손 필린(必璘) 등에 의해 간행되었고, 서문과 발문이 없다. 목활자본이고, 7권 3책이다. 권1에 시 14수, 서(書) 37편, 권2에 서(書) 12편, 잡저 4편, 서(序) 2편, 기 3편, 발 8편, 권3·4에 축문 10편, 뇌 5편, 상량문 3편, 묘지 1편, 권5에 행장 7편, 권6에 묘갈명 9편, 권7은 부록으로 행장·묘갈명·묘지 각 1편, 서원봉안문 및 상향축문 등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잡저의 「면종신방(綿種新方)」은 효험이 기이한 민간요법을 소개한 것으로 목화씨 한 움큼을 볶아 술 한 주발에 타서 달인 다음 이를 복용하면 감기는 물론 웬만한 열병에도 직효가 있다는 것이다. 이 처방은 기축년에 안동 하회마을 유성룡(柳成龍) 구택에 불이 났을 때 숱한 문적들이 소실당한 중에 우연히 얻은 유성룡의 친필 고지(故紙)에 쓰여 있던 비방으로, 마침 이 무렵 안동 인근에 역병이 크게 번졌는데 이 방법을 써서 큰 덕을 보았다는 사실까지 자세하게 적어 놓은 것이다. 민간요법을 소개한 글로서 희귀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기(記) 중 「매남환택기(梅南還宅記)」는 자신이 한때 처분하였던 옛집과 전답을 일가들이 서로 주선하여 마침내 옛 종갓집을 되찾게 되었던 그간의 사정과 함께 일가들이 베푼 후의와 족친간의 화목하게 지내는 아름다운 사연을 적은 것이다. 그리고 「서무흘서각초록후(書武屹書閣抄錄後)」는 그가 80세의 고령이던 1777년에 수도산 아래 정구의 장서를 모아둔 무흘정사의 장서각에 머물면서 정구의 여러 수택서(手澤書) 중 아름답고 긴요한 대목들을 뽑아 『무흘서각초록』 2권을 만들었던 전후사실과 함께 정구의 알려지지 않았던 행적을 비롯하여 무흘정사의 연혁까지 살필 수 있게 한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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