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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호수의 비극 (러시아 혁명과 반혁명의 비극) [내용] ◈ 레닌이 소련을 건국하기 까지의 러시아 혁명과정 ◈ 비운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장례식 ◈ 영화 제독의 여인 ◈ 바이칼호수의 비밀
◈ 레닌이 소련을 건국하기 까지의 러시아 혁명과정
러시아 혁명은 로마노프 왕조의 절대왕정에 반항하는 시민혁명으로 제국주의 시대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도중인 1917년에 일어났다. 제1대전의 최대의 부산물은 러시아 혁명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러시아의 근대화는 19세기 중기에 차르(러시아 황제 칭호)정부가 농노해방을 실행하므로 써 시작되었으나 철저하지 못했고, 귀족과 대토지소유제도의 특권적 폐해가 남아있었다.
◇ 라스푸틴
시베리아 농부출신 수도사 사제 라스푸틴은 여러 수도원과 성지를 돌아다니며 예언도 하고 환자를 치료하였다. 농민들 사이에서 성자(聖者)라는 평판도 얻었다. 1907년 경 부터 혈우병을 지닌 황태자의 치료를 위해서 궁정에 드나들면서 기도요법과 예언자적 언행 등으로 황후의 신뢰를 얻었고 실권을 장악했다. 고관의 인사권을 좌우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라스푸틴이 제정 러시아 말기의 이미지를 잔뜩 흐려놓았다. 그 생활은 한없이 방종으로 흘렀고, 그의 이름은 부패 암흑 막후실력자의 대명사였다. 황후의 지령을 받고 비밀리에 독일과 단독강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결국 제1차 대전을 수행하려는 부르주아지에 대항하여 대독 강화파를 형성함으로써 귀족들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마침내 라스푸틴은 1916년 12월 29일 밤 황족의 한 사람, 주전파인 유스포프공작 저택에 초대되어 암살당했다.
-청산가리가 든 독 만두를 먹었으나 천명에 한 명의 비율로 청산가리가 듣지 않는 체질이었다. 총을 쏘아 의사가 '죽었습니다' 고 확인하는 순간 벌떡 일어나 창문을 넘어 도망쳤다. 철봉을 휘둘러 때려죽인 뒤 밧줄로 묶어 운하에 버렸다. 며칠 후에 보니 밧줄은 반쯤 풀렸고 폐 속에는 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운하 속에서도 아직 살아있었던 것이다.
◇ 제1차 대전 참대전과 혁명적 기운
20세기에 들어와서 공산사회주의의 선동과 지도하에 노동자와 농민계급이 각성하고 조직화되어갔다. 프랑스 혁명이 부르죠아 계급에 의한 혁명이었으나, 러시아 혁명을 지도한 계급은 공산사회주의정당 프롤레타리아계급이었다. 1905년 러일전쟁 패배 후부터 혁명적 기운이 일어났으나 반동정치가 계속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 독일과 전면전이 일어나면서 1500만 명의 병력 동원으로 노동력부족, 생산저하, 물가고로 노동자 농민들의 생활이 비참해졌으며 전세의 불리가 겹쳐서 혁명의 기운이 고조되었다. 당시 수도는 페트로그라드(→ 레닌그라드 →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군인과 노동자가 러시아 사회주의민주당 소수파(볼셰비키, 처음소수파였으나, 스스로 다수파라고 칭했다. )와 결합하여 소비에트(군인 + 노동자)가 조직되었으며, 니콜라이2세는 소비에트와 손잡은 의회의 요구로 퇴위하였다.
◇ 1917년 3월 혁명 ; 로마노프 왕조(1613~1917)의 종말
1919년 2월 식량사정 악화로 시민들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국회의장 로장크는 전선에서 직접 전쟁을 지휘하는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이미 혁명의 기운이 엿보이던 3월 11일 전문을 보냈다. 황제는 황후가 보낸 전문에 의하여 사태를 낙관하고 이 사태를 무시하였고, 조서를 내려 국회를 해산해 버렸다. 내각도 총사퇴하여 국정중심이 공백상태가 되었다.
볼셰비키 지도하에 소비에트(노동자와 병사 합동평의회)가 조직되었다. 국회 임시위원회가 권력을 장악했다. 대표자들은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황태자가 제위를 물려받으며 황제의 아우인 미하일대공이 섭정토록 한다'는 안을 황제에게 제시했다. 압력을 받은 황제는 그제야 위기를 직감하고 하는 수없이 "황태자는 몸이 허약하므로 미하일대공이 직접 즉위하도록 하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대표자들은 제위를 유지하려는 인사들이 압도적이었고, 케렌스키는 제정을 반대했다. 미하일 대공은 로장코의 의견을 물었다. 로장코는 "정부가 장차 황제의 생명조차 보장할 수 없다" 고 비관적으로 말했다. 이 말에 겁을 먹은 미하일 대공은 제위를 사양했다. 이로서 어이없게도 300년 계속된 로마노프 왕조가 종말을 고했다. 이것이 1917년 3월 15일 러시아 3월 혁명(러시아력으로 2월 혁명이라고도 한다)이다. 3월 혁명은 지도가가 없는 자연발생적 성격의 혁명이었다. 레닌 같은 볼셰비키지도자는 해외 망명이나 시베리아 유형 중이었다.
혁명에 따라서 민주적 온화사회주의자의 정당인 사회혁명당 케렌스키를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민주공화정 임시정부가 7월에 수립되었으나, 그 실권은 부르주아 계급이 장악하였고, 노동자들의 의견과는 달리 전쟁을 계속해나갔다. 케렌스키를 제외하고 각료는 대개 자본가대표였다. 그래서 새 정부는 연합국의 지지를 얻을 수가 있었다. 새 정부는 사실상 소비에트와 함께 이중 정권적 성격을 띠었다 전쟁문제로 두 권력은 충돌했다. 3월 14일 소비에트는 명령 제1호로 군의 관할권을 소비에트에 두며, 대 독일 제국주의 전쟁(제1차 대전)에 도 반대한다고 선포했다.
◇ 레닌(1870~1924) 돌아오다.
케렌스키 이중정권의 혼란 상태에서 4월16일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이 스위스에서 돌아왔다. 임시정부는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러시아에는 비합법적으로 가야만했다. 겨우 스위스 사회주의자 프라텐의 주선으로 독일을 경유하여 러시아로 잠입할 수 있었다. 러시아에 억류된 독일 오스트리아 포로들을 석방한다는 조건으로 독일의 배려를 얻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독일은 혁명이 확대될 것을 기대하고 러시아 혁명가 레닌 일행을 봉인열차(여권과 화물에 대한 검사 없이 통과 시키는 열차)에 태워서 러시아에 보냈다.
귀국한 레닌은 트로츠키와 공모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강력혁명을 주장하는 소비에트 지도권을 장악해 나갔다. 레닌은 <현재의 혁명에서의 프롤레타리아타의 임무에 관하여>라는 4월 테제를 발표하였다. 혁명이 권력을 일단 부르주아지 계층에 넘겼으나, 이제부터는 '의회주의적 공화국' 이 아니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라는 의미에 압축되어 있듯이 노동자 농민을 대표하는 공화국을 만들자는 투쟁이었다. 처음 레닌의 볼셰비키는 평화적으로 이룩할 수 있다고 기대하여, 멘셰비키`사회혁명당의 입장과 대립하였다. 멘셰비키 파들은 '레닌은 반동에 봉사하고 전쟁에서 탈락시키기 위해 독일이 보낸 스파이'라고 공격했다.
7월 15.16일 50만 명의 노동자들이 거리로 뛰쳐나왔으나 진압되었고, 레닌은 기차의 화부로 가장하여 핀란드로 일시적으로 피난했다. 레닌은 비로소 혁명은 평화적으로 장악할 수 없다고 느꼈다. 7월 21일 케렌스키가 수상이 되었다. 코르닐로프가 임시정부에 반기를 들고 볼셰비키와 싸우다가 체포당했다.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를 두려워하여 그를 타도하였다. 그 과정에서 케렌스키가 *볼셰비키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볼셰비키의 세력이 신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 볼셰비키(다수파) ; 블라디미르 레닌이 인솔한, 정통마르크스주의자, 프롤레타리아 과격혁명을 추구하였다. 1918년 러시아 공산당으로 개칭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분파이다. 멘셰비키(소수파, 트로츠키 영도, 혁명부정 점진주의)나 사회혁명당에 비하여 소수파이었지만, 인사와 요직을 얻어서 다수파를 자칭했다. 폭력에 의한 혁명, 철저한 중앙집권에 의한 조직 통제를 주장하였다. 이 특징은, 그대로 소련 공산당으로 연결되었다.
◇ 1917년 러시아 11월 혁명
자본가들은 혁명의 진행보다 대독일 전쟁의 패배를 더 원했다. 독일군이 수도를 점령해주면 볼셰비키를 송두리째 뽑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의 비협조로 9월이 되자 러시아 경제는 파국적 양상을 띠었다. 볼셰비키 지지자들은 날로 증가했다. 핀란드에 망명한 레닌은 볼셰비키의 무장봉기를 배후에서 조종했다. 레닌은 10월 20일 은밀히 페트로그라드로 귀환했다. 1917년 11월 6일 임시정부는 볼셰비키세력의 무장봉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볼셰비키를 공격했으나 도리어 역공을 받아서 무너졌다. 레닌의 볼셰비키는 11월 7일(1917)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했다. 제국주의 전쟁을 거부하는 입장에서 독일과 단독 강화를 추진하고, 지주 토지소유 폐지를 선언했다. 대중은 거의 혁명에 무관심했다. 헌법제정의회가 선출되었으나 볼셰비키 세력이 많지 않았으며 혁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의회를 해산해 버렸다. 11월 22일 독일과 정전교섭을 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두호닌 총사령관을 파면하고 육해군 인민위원회 일개 중위인 크리렌코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러시아의 소비에트 새 정부는 연합국에게 '무병합 무배상 민족자결의 원칙'으로 강화를 제의 했으나 배척당했다. 1918년 3월 러시아는 단독으로 독일과 교섭하여 폴란드의 브레스트 리토프스크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제1차 대전 전선에서 이탈했다. 이것은 뒷날 레닌이 말한 바와 같이 '강화가 아니며 단순한 혁명의 휴식'에 불과했다. 레닌의 볼셰비키 정권은 1920년 1월 23일 러시아 소비에트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약칭 소련)이라는 정식 국호를 제정했다.
◈ 비운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장례식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1868-1918) 황제(차르)는 (왕비는 독일의 공주이며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인 알렉산드라였다.) 황제즉위 대관식에서 뒷날 비극적 종말을 예언이라도 하는 듯 한 사건이 일어났다.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었다. 사람들이 코딘카 광장 안의 진열대 위에 놓인 선물들을 받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을 때, 선물들이 많지 않아서 거기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선물을 받을 수 없을 거라는 헛소문이 돌았다. 그리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선물 진열대로 벌떼같이 몰려들었고, 그로 인해 수백 명의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이 사람들에게 깔려 죽는 참사가 일어났다.
또 왕세자의 혈우병을 계기로 G.E. 라스푸틴이 전횡을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서유럽식 입헌정치의 도입을 반대하고 보수적인 전제정치를 고집하였다. 3국간섭(1895, 독일 프랑스 러시아 3국이 일본에 간섭하여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얻은 요동반도를 되돌려 주도록 압력을 넣은 사건), 동청철도부설 등 적극적인 극동진출로 러․일전쟁(1904~05)을 초래하였으며, 전쟁에서 패배하고 자유주의 진영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1905년 혁명이 일어났다. 그 결과 1905년 10월 17일 ‘듀마’라는 국회의 창설과 민주적 자유의 보장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수도를 떠나 러시아군 최고사령관이 되어 전군을 지휘하였으나, 내정을 황후와 간신들에게 맡겨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2월 혁명(1917)으로 제정(帝政)의 붕괴를 맞았고, 유폐․감금되었다. 1917년 10월 혁명에 의해서 소비에트 정부가 성립되었는데, 그 이듬해가 되자 반혁명군이 들고일어나 내전이 날이 갈수록 격화되었다. 이런 가운데 우랄산맥 남쪽의 예카테린부르크(스베르들로프스크) 한 농가에 감금되어 있었던 전 러시아 황제와 그 가족은, 한밤중에 다른 곳으로 옮겨야하니 준비를 하라는 관리의 명령을 받았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옷을 주워 입고 1층에 모인 일가는 그 곳에서 무참하게 총살을 당하고 말았다. 1918년 7월 17일이었다. 이것이 재정러시아 로마노프 황가의 최후였다.
이것은 소비에트가 때마침 찾아온 반혁명군에 의해 황제일가의 탈환을 두려워한 나머지 내린 결정이었다고 한다. 학살의 순간을 기적적으로 모면했던 막내딸이라는 부인이 2차 대전 후 독일에서 나타났지만 니콜라이 2세의 딸임을 증명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 뒤 80년만인 1998. 7. 17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2세와 일가족 시종들 9구의 유해 안장식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러시아 최후의 차르가 명예를 회복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역사는 반전되어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키고 니콜라이 2세를 처형한 레닌은 가고(1991년 민주화 열풍으로 동상이 쓰러졌다.) 차르(러시아 황제)는 부활하였다. 볼셰비키 정권은 처형장소와 매장지를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1991년 황제 후손들과 학자, 언론인들이 기어이 매장지를 찾아내었다. 유전자 확인 작업을 거쳐서 당시의 러시아 대통령 옐친은 공산주의와 역사적 단절을 위해 황제 일가가 처형된 날인 7월 17일을 매장일로 최종 선택했다.
◈ 영화 제독의 여인
2008년에 개봉된 러시아 영화 "제독의 연인"은 바로 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이 배경으로 러시아의 마지막 제독 알렉산드르 코르챠크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최근 러시아 해군함대 기록보관소에서 그의 연인이 보낸 53통의 편지가 발견되면서 그의 숨겨진 사랑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졌다. 러시아 영화 탄생 100주년 기념작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러시아 영화 중 가장 많은 제작비(2천만 달러)를 들였다고 한다.
러시아 해군 함장 코르챠크(콘스탄틴 카벤스키)는 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독일과의 발트해 해전을 승리로 이끌며 영웅이 돼 돌아온다.
코르챠크는 환영 파티에서 만난 부하의 아내 안나(엘리자베타 보야르스카야)와 사랑에 빠졌으나, 짧은 만남과 편지로 사랑을 이어가지만 1917년 발발한 혁명이 그들을 갈라놓는다. 미국으로 망명했던 코르챠크가 돌아와 군대를 모집한다는 소식에 안나는 목숨을 걸고 그가 있는 시베리아로 가서 간호원으로 지원하여 다시 만났다. 두 사람은 1920년 코르챠크가 체포되어 총살될 때까지 사랑을 나누었다. 1915년 첫 만남을 가진 후 ‘알렉산드르 코르챠크’가 총살을 당한 1920년까지 이들이 사랑을 나눈 총 5년의 시간 중에 두 사람이 함께 했던 시간은 고작 2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짧지만 강렬했던 사랑은 1975년 ‘안나’가 죽을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두 사람은 왈츠를 추자고 약속했지만 전쟁의 비극 속에서 끝내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 바이칼호수의 비밀
이 이야기는 1917년의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후 1919년 11월 13일 시베리아의 옴스크시에서 있었던 일이다. 약 백만 명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꽃송이 같은 아이들이 추위로 죽었다. 그리고 5억 달러어치의 금이 얼음 광야에 버려졌다. 이 같은 비극은 추위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러시아의 장군 코르챠크은 제정러시아제국의 유물을 모아 시베리아에서 8,000㎞이상 떨어져 있는 태평양 연안으로의 후퇴를 결심했다. 퇴각군은 50만 명의 병사와 동행한 75만 명의 피난민으로 구성되었다. 피난민 중에는 25명의 주교, 12,000명의 성직자 4,000명의 수사 45,000명의 경찰관 20만 명 이상의 귀족가문 부녀자들 그리고 수많은 아이들이 포함되었다. 장군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 것은 5억 달러어치의 값이 나가는 500톤 가량의 금이 산적된 28대의 무장한 기차였다.
역사상 가장 거대한 행렬이 출발할 때 시베리아의 겨울은 평균 영하 40도 이하를 맴돌던 추위는 영하 60도 이하로 내려갔고 길은 곧 얼어 죽은 사람과 말의 시체와 버려진 썰매로 뒤덮였다. 피난민의 고난은 1920년 2월 어느 날 군대는 많은 양의 금덩어리를 버릴 것을 결정할 때까지 3개월간이나 계속되었다. 기차의 연료가 모두 바닥이 났을 때 보물을 말 또는 썰매에 옮겨 실었지만 시베리아의 조랑말은 하나 둘씩 죽어가서 마침내 마지막 남은 황제의 보물까지도 버려야 했다. 1백만 파운드의 금이 길에 버려진 것이다.
나보 니콜라예브스크시 가까이 왔을 때는 하룻밤에 20만 명의 사람이 얼어 죽었다. 행렬은 2월말쯤 바이칼호수에 도착했고 처음 떠날 때 125만 명이던 인원 중 살아남은 25만 명이 80㎞폭의 얼어붙은 바이칼호수를 건너기 시작했으나 상상할 수 없는 혹한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한 육군대장의 부인이 빙판 위에서는 출산을 하였다. 그녀를 가려주기 위해 인간병풍을 만들어주는 가운데 아기를 출산하였으나 산모도 아기도 인간병풍의 많은 사람도 그녀의 남편도 함께 얼어붙고 말았다. 바이칼 호수 위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죽고 25만 명의 시체는 눈이 덮인 채 여름이 올 때까지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 바이칼 호수 : 호수의 넓이가 우리나라의 1/3,지구상 담수의 20%차지, 360개의 하천에서 물이 모여들어 앙가라강 하나에로 흘러나감. 최고 수심이 1,620m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 호수 400m 아래는 수만년 동안 다른 물과 섞이지 않은 태고의 순수한 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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