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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가 앉아서 수도했다는 바위 좌선대를 지나며
일월봉을 바라본다. 가까이에서 보면 맨 위의 바위가
보이지 않아 일日자 형이고 높이 올라 전체를 멀리서 보면
월月자 형으로 보여 일월봉이라 한다.
경상남도 남서부에 있는 남해군은 남해읍을 중심으로 남해도와 창선도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주도, 거제도, 진도, 강화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으로 교각 없는 현수교인 남해대교를 통해 육지와 연결된다.
1598년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함대가 노량 앞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물리친 노량해전이 일어난 곳으로 백전노장의 성웅은 이 전투에서 파란만장하고도 거친 삶을 마감하게 된다.
거기 남해군에 있는 금산錦山은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유일한 산악공원으로 기암괴석들로 뒤덮인 금산38경이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경상남도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 원효대사의 기도처로서 보광산이라 하였는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에 이 산에서 수도하면서 기원하여 왕좌에 오르게 되자 보은을 위해 영구불멸의 비단을 두른다는 뜻의 비단 금錦자를 써서 금산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금산을 소금강산에 비견하며 남해금강이라 일컫는 것은 멀리 떨어진 남해의 섬 속에서 다시 아득한 섬과 바다를 눈앞에 두고 우뚝하게 솟은 돌산으로서의 신비감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신이든 사람이든 다시 오고 싶은 곳
부소암으로 오르는 코스를 택해 그 들머리인 두모마을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2013년도에 이르러 30년 만에 개방한 길이다. 호근이와 계원이가 다녀와서 강력하게 추천하자 병소와 남영이가 마음이 동했다.
“어때? 멸치랑 갈치회도 먹을 겸해서.”
“그럼 콜이지.”
바닷가라 부는 바람이 찰것도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입었던 바람막이점퍼까지 벗어 배낭에 꾸겨 넣는다. 봄이 자리잡아가는 등산로를 따라 잡목우거진 숲길을 세 사람이 호기롭게 오른다.
“섬 산은 내륙의 산들에 비해 마음을 들뜨게 하는 그 무언가가 있어.”
“바다를 끼어서겠지.”
“회를 좋아해서겠지.”
바다가 고향이고, 고향이 이곳 남쪽인데다 산행 후 좋아하는 횟감을 염두에 두고 있으니 병소야말로 들뜨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만물이 소생한다는 봄이 남쪽바다에 정착하고 있으므로 아무런 이유가 없어도 들뜨기에 충분하다. 무어든 다시 살아나고 거듭 웅비에 찬 생장을 도모할 것만 같다.
다도해에서 유일하게 체적이 큰 화강암뭉치의 산임에도 흙산의 기질도 강해 남해안에서 가장 큰 규모의 낙엽수군락을 이루고 있다는 금산이다. 그런 수림을 오르다가 비교적 널찍하고 평평한 자연암의 거북바위를 만난다. 이 바위윗면에는 문자인지 그림인지 도대체 분간이 가지 않는 암각이 새겨있다.
“영원히 죽지 않고 싶구나. 짐이 오래 살아야 진나라가 태평할 것이니 네가 불로초를 구해왔으면 한다.”
진시황의 신하인 서불은 불로초를 구하려 제주도, 거제도, 남해를 헤매었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다녀갔다는 표시로 이곳 양아리 거북바위에 상형문자를 새겨둔다. 이 암각이 새겨진 바위를 서불과차암이라 하며 일명 남해상주 석각이라고도 부르는데 혹자는 눈에 화상을 입은 어느 석공이 선덕여왕을 향한 그리움을 식히려고 더듬더듬 새겼다는 별자리라고도 해석한다.
“너희들 생각엔 어때?”
“서불이라면 한자로 새겼을 텐데.”
“내가 보기엔 딱따구리가 쪼아댄 거 같은데.”
“딱따구리가 네 눈은 왜 안 쪼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 바위를 1974년에 경상남도기념물 제6호로 지정하였고 금산은 중국 진시황의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서불이 다녀간 산으로 전해지며, 중국에서 서불의 행적이 밝혀지고 출생지가 발굴된 것으로 보아 실제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계단을 올라서자 시원스레 조망이 열린다. 바다위로 둥둥 솟은 나지막한 산들이 이어지는데 설흔산, 장등산과 오른쪽은 호구산이라고 하는 남산이다.
달팽이처럼 비틀어 세운 철 계단을 올라 지나야한다. 바위 뒤로 작은 구멍을 통과하기가 어려워 설치한 것이다. 올라서면 부소암 갈림길이다.
시원하게 트인 바다를 배경으로 우뚝 솟아 신령스럽기까지 한 큰 바위 부소암扶蘇岩이 당연하단 듯 걸음을 멈추게 한다. 금산 34경인 부소암은 중국 진시황의 장자 부소가 유배되어 살았다는 설과 단군의 셋째 아들 부소가 방황하다 이곳에서 천일기도를 했다는 설이 있는데 어떤 게 맞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바다를 내려다보노라니 남은 시름조각마저 바다에 뿌려지게 된다. 낭만 넘치는 남해에는 문학과 예술, 그리고 올곧은 해학이 넘실댄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으로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이성복 시인의 ‘남해금산’에서 물과 돌이 많은 이곳을 거듭 음미하게 된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대성일갈이 귓전을 울린다.
“조사석이 정승이 된 것은 희빈 장 씨 때문이 아닙니까?”
이조참판을 거쳐 예조판서에 오른 조사석이 후궁 장희빈과 결탁하여 출세하였다는 소문이 돌자 김만중이 나선 것이다. 조산후기의 문인이자 대제학, 대사헌까지 오른 서포 김만중은 숙종이 장희빈을 총애할 때 숙종의 면전에다 조사석의 베갯머리송사냐고 빗대 물었다가 숙종을 진노케 해 파직되고 유배당한다. 그 후 기사회생하였으나 남인의 정치보복으로 다시 남해에 유배된 후 병사하고 만다.
“성격이 불같은 양반이셨네.”
“불의에 눈감았으면 가늘고 길게 살 수도 있었겠지.”
소신이 뚜렷한 사람이 평소의 생각 혹은 신념과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입을 다물고 있는 것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었다.
“그래도 상대가 나라님인데.”
“아마도 김만중은 한비자를 읽었을 거야.”
한비자韓非子는 군주의 현명한 처세와 그렇지 못한 처세에 따라 나라의 흥망성쇠가 달렸음을 경고하고 있다. 현명한 군주는 여자에게서 미색美色만을 즐길 뿐 절대 사적인 정에 치우쳐 그 여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지도자가 참모의 조언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처신하느냐에 따라 국가운명이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하는 구절이라 하겠다.
이미 소설 구운몽을 저술한 바 있던 김만중이 유배생활 중 사씨남정기와 서포만필을 집필했다는 노도가 어디쯤일까 헤아리면서도 임금을 향한 그의 일갈이 들리는 것만 같아 속이 후련해진다.
빨간 양철지붕의 암자 부소암扶蘇庵은 거대한 암벽 부소암의 품에 안겨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세워져있다. 비바람 몰아치면 지탱할 수 있으려나 우려가 된다. 비록 허름하여 곧 쓰러질 것만 같은 작은 암자지만 보물 제1736호 대방광불화엄경진본 권 53이 나온 곳일 진데 회심곡 읊으며 수행에 전념하노라면 그 무엇인들 장애가 될까싶기도 하다.
협곡구간에 설치된 철제다리를 건너 상사암으로 가면서 돌아본 부소암은 쭈글쭈글한 주름이 사람의 뇌를 닮은 모양새다. 상사암 갈림길에서 금산최대의 암봉인 상사암에 닿았다.
조선 숙종 때 전라남도 돌산지역에 살던 사람이 남해로 이거하여 살았는데 이웃에 사는 아름다운 과부한테 반해 상사병에 걸리고 말았다. 남자가 시름시름 죽을 지경에 이르자 아름다운 과부가 이 바위에서 남자의 상사병을 풀어주었다는 전설이 얽혀 있다.
“아름다운 여인이 맘씨까지 후덕하군.”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풀어주었다는 거지?”
“더 깊이 들어가면 다칠라.”
상사암에서 둘러보니 특히 만장대 위의 보리암이 눈에 잡힌다
남영이가 제기한 의문이 맴돌기는 하지만 이내 멋진 풍광에 머리를 비워낸다. 금산27경인 상사암에서는 정상인 망대를 위시하여 대장봉, 화엄봉, 예수관음상, 향로봉 등의 기암묘봉들이 과시하듯 몸체를 드러내고 그 사이로 보리암이 자리하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발아래로는 움푹한 상주해수욕장과 그 뒤로 오밀조밀하게 가구들이 모인 부락이 또 다른 운치를 느끼게 한다.
상사암 아래의 삼사기단은 신라고승 원효대사, 의상대사, 윤필거사가 기단을 쌓고 기도를 올렸던 곳으로 그분들이 앉았던 자리흔적이 바위에 뚜렷이 남아있다는데 확인절차 없이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원효대사가 앉아서 수도했다는 바위 좌선대를 지나며 일월봉을 바라본다. 가까이에서 보면 맨 위의 바위가 보이지 않아 일日자 형이고 높이 올라 전체를 멀리서 보면 월月자 형으로 보여 일월봉이라 한다. 그리고 다시 제석봉으로 넘어간다. 부처를 좌우에 모시며 불법을 수호하는 신, 제석천이 내려와 놀다갔다는 곳인데 직접 와서 보니 신이든 사람이든 다시 오고 싶은 곳임에 분명하다.
화엄봉과 왼편의 일월봉도 눈길을 잡아끈다
손색없는 삼남지방의 경승지
금산의 정상인 망대(해발 681m)는 우리나라최남단의 봉수대로 고려 명종 때 설치되어 본래의 형태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26m둘레의 사각 형태이고 높이는 4.5m이다.
봉수대는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었는데 당시 전국의 봉수경로 다섯 개 중 동래에서 서울에 이르는 경로에 속한 최남단에 자리하고 있어 출발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난·온대림의 울창한 수림과 태조 이성계가 기도했다는 이 씨 기단을 보면서는 조선건국에 얽힌 수많은 설화 중 하나가 또다시 떠오른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요. 꿈을 꾸고 나서도 꿈속의 생생한 기운이 내 몸에 남아 있는 듯하오.”
이성계는 건국 대업을 위한 기도를 드리다가 꾼 꿈이 하 수상하여 해몽에 능한 이에게 물었다.
“하루는 내가 몽둥이 셋을 짊어지고 있었고, 그 다음날 꿈은 내 몸이 목이 날아간 병으로 되어 있었소. 그리고 셋째 날 꿈에는 내 몸이 커다란 가마솥에 들어간 꿈이었소. 모두 내 육신이 고통 받는 꿈이라 흉몽이 아닌가 하오.”
“큰 길몽입니다.”
해몽을 하는 노인장은 이성계를 찬찬이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몽둥이 세 개를 진 건 그 형상이 임금 왕王자와 같으니 필시 임금이 될 징조요, 목 없는 병은 사람들이 목 밑을 조심스럽게 다루라는 뜻이니 이제 곧 만인이 받들 징조입니다. 마지막 가마솥에 들어갔다 하는 건 금성철벽의 궁궐에 드실 징조이옵니다.”
노인장은 크게 절을 올리며 덧붙였다.
“과업을 성취하시어 역사의 큰 인물로 남을 것입니다.”
해몽대로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는 새 나라의 번영을 위해 기도를 올리리라 마음먹고 다시 한 번 금산을 찾았다. 정상에 다다르자 금빛기운이 눈부시도록 번쩍이더니 이성계의 눈앞에서 하늘로 올라갔다.
불현듯 이성계는 백일기도를 드리며 했던 약속을 기억해 냈다. 자신이 왕이 되면 이 산을 비단으로 덮겠다고 했던 것이다. 비단으로 산을 감싸는 대신 산 이름을 금산으로 바꾸며 얼렁뚱땅 헐값에 마무리하였다.
“그랬으니 곧바로 왕자의 난이 일어났지.”
“약속을 지켰으면 조선왕조 500년이 순탄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이씨 기단을 눈에 담으며 잠시 조선건국시기를 되돌아본다. 이성계는 왕이 되기 위해 최북단의 백두산에서 남쪽 지리산과 남해 금산까지 기도를 드리러 다녔다. 백두산과 지리산 등 몇 곳의 산에서 산신으로부터 거절당한 것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려는 역성혁명이 정당치 못했음을 시사한 설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해 금산의 산신이 이를 허락하였다는 건 남해사람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계가 고려 말 삼남지방의 왜구섬멸에 공이 있음을 인정한데다 어쩌면 생계의 어려움과 왜구침략에 진절머리가 난 낙도주민들은 새로운 위정자가 나타나 새로운 삶이 전개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산에 비단을 입히는 건 불가능하므로 금산으로 명명함으로써 남해주민들의 성원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향로봉과 대장봉 등 기암묘석과 그 아래 펼쳐진 푸른 바다와의 조화가 한량없이 아름답다. 망대로 오르는 계단과 마주하며 정상 길목을 지키는 문장암에는 한림학사 주세붕 선생이 ‘유홍문 상금산由虹門 上錦山’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홍문으로 말미암아 금산에 오른다는 의미로 무지개형태의 두 홍문인 쌍홍문에 이른다.
서기 683년 원효대사가 이곳 금산꼭대기에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초당이름을 보광사라고 했다가 훗날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조선왕조를 열면서 절 이름도 보리암菩提庵으로 바뀌었다.
강화도 보문사, 낙산사 홍련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도처의 하나인 보리암은 그 명성만큼 규모도 크고 바다를 향해 세워진 해수관음보살상도 그럴듯하지만 여기서 바라보는 기기묘묘한 풍광들이 보리암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보리암 해수관음보살상이 묵연히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금산의 온갖 기이한 암석과 푸른 남해의 경치를 한껏 감상하다가 또 하나의 금산명물인 금산산장을 들러본다. 4대 째 내려오고 있다는 금산산장은 본래 보리암을 찾는 이들을 위한 여관이었다가 식당을 겸한 산장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산장을 지나면서 한 사람이 밀어도 흔들린다는 흔들바위를 보게 된다.
“한번 밀어볼까.”
“그냥 가자.”
“금산38경이 37경으로 줄어드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
금산이 전국적인 명산으로 알려진 건 마지막 38경으로 꼽히는 금산일출의 황홀경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화가가 영혼을 부어넣어 붓질한 듯한 먼 바다 수평선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시선이 얼어붙는 환상에 젖어들게 할 것만 같다.
“상상이 가지?”
“내일 새벽까지 머물렀다가 일출을 보고 내려갈까?”
“내일새벽에 비 온다는 예보가 있어. 아쉽지만 오늘은 이만 내려가자.”
춘분과 추분이 되면 인간수명을 관장한다는 별인 노인성老人星이 남해에 잠길 듯 수면가까이 내려앉는 걸 바라보면 장수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실제로 인근에 장수촌으로 소문난 두 마을이 있다고 한다. 거기 더해 보리암의 상징적 의미까지 있어 삼남지방의 경승지로서 손색이 없다.
하산하면서 금산13경인 음성굴音聲堀에 들른다. 높이 2m, 길이 5m의 이 동굴은 돌로 바닥을 두드리면 장구소리가 난다고하여 명명한 굴이다. 여기도 그 신비로움을 고이 간직하고자 바닥을 두들기지는 않고 지나간다.
돌산에 걸맞게 내리막도 온통 자연석돌계단이다. 굴이 두 개인 쌍홍문을 통해 굴속에 들어가면 속이 비어있고 천장을 통해 푸른 하늘이 보이는데 석가세존이 돌배를 만들어 타고 쌍홍문의 오른쪽 굴로 나가면서 멀리 앞바다에 있는 세존도의 한복판을 뚫고 나갔다고 한다. 바위에 구멍을 뚫은 세월의 연륜, 그로 인한 자연의 위력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세존도는 금산 남쪽앞바다에 있는 33㎡의 무인도이다. 석가세존이 탄 배가 지나간 자리에 해상 동굴이 있고 섬 꼭대기에는 스님형상의 바위가 있으며 동굴천정에는 미륵이라는 글씨도 있다고 하여 거듭 불교와 인연을 맺는다. 오랫동안 가뭄이 들어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이 섬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틀림없이 비가 온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굴 사이로 보는 남해의 조망이 더욱 멋지고 사람얼굴의 형상을 한 거대한 장군암은 더욱 늠름해 보인다.
다시 쌍홍문에서 조금 내려가 사선대에 이르렀다. 동서남북 네 곳의 신선이 모여 놀았다는 바위이다.
“네 명이 머물기에는 좁아 보이는데.”
“신선들인데 장소가 좁다고 못 놀겠나.”
산을 내려와 날머리인 금산주차장에서 올려다보니 울창한 수림 위로 솟은 정상일대의 바위지대가 도드라지게 아름다워 카메라를 줌인하게 된다.
남해에 와서 금산을 오르지 않고서는 남해를 다녀갔다고 말할 수 없다고들 말한다. 네 번이나 남해에 왔다가 처음 금산을 올랐으니 처음 와본 거나 다름없었다.
자연의 조각품이라는 표현이 전혀 무색하지 않을 금산의 38경을 모두 둘러보지 못하지만 다섯 번째의 남해방문을 염두에 두고 아쉬움을 달랜다.
때 / 봄
곳 / 양아리 두모주차장 - 양아리석각 - 부소암 - 상사암 - 좌선대 - 제석봉 - 금산망대 - 보리암 - 금산산장 - 쌍홍문 - 금산탐방지원센터 - 금산주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