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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 시대 (春秋 時代 기원전 770~403)
중국 역사의 기원전 770년 부터 기원전 403년 사이의 시기를 말한다.
춘 추 오 패 (春 秋 五 覇)
제환공(齊桓公), 진 문공(晉文公) , 초 장왕(楚 莊王) , 오왕 합려(吳王闔閭) , 월왕 구천(句踐)
춘추 시대 대표 5국의 연대
제 (齊) (춘추 전국) --- BC 1046 ~ BC 221
진 (晉) (춘추) ------- BC 1100 년대 ~ BC 349
초 (楚) (춘추 전국) --- BC 1030년 이전 ~ BC 202년)
오 (吳) (춘추) ------- BC ~ BC 473
월 (越) (춘추 전국) --- BC ~ BC 307
춘추 시대의 나라들 분류
춘추 오패 : 제환공, 진문공 , 초장왕 , 오왕합려 , 월왕구천
유력제후국들 : 노 송 연 오 월 위 정 제 진 진 진 채 초
지역별 제후국 분류
산동성 소재 : 제 · 노 · 등(滕) · 성 · 조 (曹) · 기(紀) · 우(鄅) · 거 · 주(邾)
허난성 소재 : 정 · 송 · 위 · 진(陳) · 채 · 허(許) · 신 · 동괵 · 소(蘇) · 기(杞) 담 여 · 당
산시성(산서성) 소재 : 진(晉) · 서괵 · 북괵 · 두 · 우(虞)
산시성(섬서성) 소재 : 진(秦) · 양 · 모
후베이성 소재 : 초 · 수(隨) · 나(那) · 등(鄧) · 권(權) · 운 · 교
허베이성, 라오닝성 소재 : 연 · 중산 · 형 · 고죽
쓰촨성 소재 : 파 · 촉
장쑤성, 저장성, 안후이성 소재 : 오 · 월
제 (齊) (춘추 전국) BC 1046 ~ BC 221
역 사
주(周)의 문왕(文王)이 나라를 건국할 때 재상 강태공(姜太公)에게
봉토로 내린 땅이다. ( BC 1046 년 )
이후 제 환공(齊桓公)시대에 관중(管仲)을 등용하여 패자(覇者)의 자리에 올랐다.(춘추 오패)
제 경공 때는 안영을 등용하였다.
전국시대로 접어들어서는
BC386년, 전화가 재 강공을 대신하여 제후가 되어, 강성 여씨에서 규성 전씨로 국성(國姓)이 갈렸다.
위왕(威王)이 행정개혁을 행하여 국력을 증대하고 기원전 4세기에는
진(秦)과 중국을 양분하는 세력을 이루었다.
그러나 결국 BC221년 진시황제의 침공으로 폐왕 전건이 스스로 항복하면서 멸망하였다.
제나라의 영역
제 (齊) 환공(桓公)
환공(桓公, ? ~BC 643년, 재위 : BC 685년 ~ BC 643년 , 42년간)은
춘추시대의 제나라의 제16대 군주다.
성은 강(姜), 휘는 소백(小白), 시호는 환공(桓公). 춘추 시대의 패자이다.
포숙아의 활약에 의해 공자 규와의 공위계승 분쟁에서 승리해 제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관중(管仲)을 재상으로 삼고 제나라를 강대한 나라로 만들었으며,
실권을 잃어버린 중국 동주 왕실을 대신해 회맹을 거행했다.
즉위전 상황
아버지는 희공(僖公), 형은 양공(襄公)이다.
양공은 비정상인 성격으로, 친누이동생 문강과 내연의 관계에 있어,
문강이 노나라의 환공(桓公)에게 시집갔지만, 장공을 낳은 후에도 관계가 계속 되고 있었다.
화난 노의 환공이 문강을 꾸짖으면, 문강은 양공에 밀고해,
양공은 일족 공자 팽생(公子彭生)이라고 하는 남자에게 명령하고 노나라의 환공을 죽이게 했다.
노나라에 소문이 돌자, 양공은 팽생을 죽여 변명을 하였다.
그 이외에서도, 양공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차례차례로 죽였기 때문에 제나라는 혼란했다.
소백(후의 제 환공)은 거(莒)에,
형 공자 규는 노나라에 망명했다.
양공은 그 후, 사촌형제인 공손 무지에게 암살되었다.
양공이 죽은 후에,
공손 무지가 제공에 즉위 했다고 칭하고 국정을 관리하지만,
공손 무지도 또 곧바로 암살되었다.
공손 무지가 죽은후,
소백과 같이 노나라에 망명한, 노의 후원자를 얻고 있던 형 공자 규와의 사이에
후계자 싸움이 생겼다.
이 때, 공자 규의 심복인 관중이 소백을 암살하려고 매복하고 있었다.
관중은 활을 쏘아 맞혔다.
화살은 소백 배에 맞아, 소백은 쓰어졌다.
관중은 기뻐하고, 공자 규에게 소백을 죽였다고 보고했다.
경쟁 상대가 사라진 공자 규는 노의 군사를 뒤로 천천히 제나라에 들어오려고 했다.
그러나, 소백이 벌써 제나라에 들어와 제나라 공이 되어 있었다.
공자 규는 기다리고 있던 소백에 공격을 받고 노나라 에 도망쳤다.
실은 관중의 화살은 배에 명중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허리띠의 쇠고리에 꽃쳤다.
관중의 활약
제나라 공의 자리에 오른 소백 환공은
관중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 사실에 화를 내어 관중도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환공의 심복이며,
관포지교라는 말의 뿌리가 될 만큼 관중의 좋은 친구이기도 한
포숙아의 설득으로 환공은 관중을 살려주었으며 재상으로 임명했다.
환공의 생각은 현명했다.
재상이 된 관중은 개혁을 추진해, 국력, 군사력, 문화 향상에 성공했다.
벌써 주왕실은 쇠퇴하고 있어, 제후 사이의 대립을 억제하는 일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관중의 개혁을 받아 들인 제의 환공은 주변 국가에 그 명성이 전해져,
주변 제후는 주나라 대신해 제후 사이의 문제를 환공에게 묻게 되었다.
장강 유역의 현재의 호북성을 중심으로 한 지대를 지반으로 해 남방에서 세력을 늘려,
주왕실이나 제후를 위협하기 시작하고 있던 초나라를 환공은 제후를 인솔하고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BC 651년 환공은 회맹을 거행해 패자가 되었다.
그리고 환공은 자만심이 생겨 봉선의 의식을 실시하려고 했다.
봉선은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의식이라서,
봉선을 하는 것은 주나라를 무시하고 자신이 천자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관중은 환공의 무리한 생각을 필사적으로 충고해 멈추게 했다.
관중의 사후
BC645년, 재상인 관중이 죽으면서, 국정을 돌아보지 않게 되어 방탕하게 되었다.
관중이 죽을 때에 등용을 하지마라고 한 간신들도 등용해, 국정은 흐트러졌다.
환공이 병이 들자, 공자들의 후계자 싸움에서 숨을 거두어,
67일간 그 사체는 방치된 채로 있어, 그의 관이 구더기가 솟기 시작했다고 한다.
제나라는 이후에도 가끔 후계자 싸움이 일어나, 패권은 진(晋)나라, 초나라로 옮겨졌다.
후계 미결
환공에겐 적자는 없고, 다만 사랑하는 여인이 많아,
서자로 장위희의 아들 무궤,
소위희의 아들 원(혜공),
정희의 아들 소(효공),
갈영의 아들 반(소공),
밀희의 아들 상인(의공),
송화자의 아들 옹이 있었다.
환공은 관중과 함께 소를 세자로 세웠으나,
두 위희와 한 편인 옹무와 수초의 힘으로 무궤를 세우는 것을 허락했으며,
관중 사후 다섯 공자들이 전부 자신들을 세울 것을 요구했다.
환공 사후, 역아 와 수초가 여러 관리들을 살해하고 무궤를 군위에 앉혔으며, 소는 송나라로 도망했다.
이후 다섯 공자 간의 군위 분쟁을 통해, 제나라는 패권국의 지위를 잃었으며,
군위 다툼을 한 여섯 공자 중 다섯 공자나 제후위에 올랐다.
제의 역대 왕조 : 강제(강성왕조 : 춘추) 와 전제(전씨왕조 : 전국) 로 나뉜다.
강제 (강성 왕조)
태공망 여상(太公望 呂尙, 대략 기원전1000년 이전)
정공 급(丁公 伋)
을공 득(乙公 得)
계공 자모(癸公 慈母)
애공 불신(哀公 不辰, ? ~ 기원전863년)
호공 정(胡公 靜, 기원전862년 ~ 기원전860년)
헌공 산(獻公 山, 기원전859년 ~ 기원전851년)
무공 수(武公 壽, 기원전850년 ~ 기원전825년)
여공 무기(厲公 無忌, 기원전824년 ~ 기원전816년)
문공 적(文公 赤, 기원전815년 ~ 기원전804년)
성공 탈(成公 脫, 기원전803년 ~ 기원전795년)
장공 속(莊公 贖, 기원전794년 ~ 기원전731년)
희공 녹(僖公 祿, 기원전730년 ~ 기원전698년)
양공 제아(襄公 諸兒, 기원전697년 ~ 기원전686년)
공손 무지(公孫無知, 기원전686년)
환공 소백(桓公 小白, 기원전685년 ~ 기원전643년)
제후 무궤(齊侯無詭 기원전643년)
효공 소(孝公 昭, 기원전642년 ~ 기원전633년)
소공 반(昭公 潘, 기원전632년 ~ 기원전613년)
제군 사(齊君舎, 기원전613년)
의공 상인(懿公 商人, 기원전612년 ~ 기원전609년)
혜공 원(惠公 元, 기원전608년 ~ 기원전599년)
경공 무야(頃公 無野, 기원전598년 ~ 기원전582년)
영공 환(靈公 環, 기원전581년 ~ 기원전554년)
장공 광(莊公 光, 기원전553년 ~ 기원전548년)
경공 저구(景公 杵臼, 기원전547년 ~ 기원전490년)
안유자 도(晏孺子 荼, 기원전489년)
도공 양생(悼公 陽生, 기원전488년 ~ 기원전485년)
간공 임(簡公 壬, 기원전484년 ~ 기원전481년)
평공 오(平公 驁, 기원전480년 ~ 기원전456년)
선공 적(宣公 積, 기원전455년 ~ 기원전405년)
강공 대(康公 貸, 기원전404년 ~ 기원전379년)
전제 (전씨 왕조)
태공 전화(太公 田和, 기원전 386년 ~ 기원전 384년)
전후 섬(田侯剡, 기원전 383년 ~ 기원전 375년)
환공 전오(桓公 田午, 기원전 374년 ~ 기원전 357년)
위왕 전인(威王 田因, 기원전 356년 ~ 기원전 320년)
선왕 전벽강(宣王 田辟彊, 기원전 319년 ~ 기원전 301년)
민왕 전지(湣王 田地, 기원전 300년 ~ 기원전 284년)
양왕 전법장(襄王 田法章, 기원전 283년 ~ 기원전 265년)
폐왕 전건(廢王 田建, 기원전 264년 ~ 기원전 221년)
진 (晉) ( 춘추 ) BC 1100 년대 ~ BC 349
진(晉, 기원전 1100년 대 ~ 기원전 349년)은
주나라 무왕의 둘째 아들 당숙 우(唐叔虞)가 세운 나라이다.
문공(文公)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기원전 5세기에 대부 지백(智伯)이 실권을 장악했으나, 한, 위, 조 3가문의 협공으로 암살된다.
이후 이 3가문이 독립국의 기초를 닦았다.
진나라의 영역
익 과 곡옥의 내분
진 문후(BC 780~746년) 사후, 태자 진 소후가 그 뒤를 이었으나,
강력한 숙부 환숙의 세력을 두려워해
곡옥에 환숙을 봉하여 진나라 내에 곡옥백이라는 '제후의 제후령'이 세워졌다.
이후 진나라 주국(= 익 , 서울에서 따다 익나라라고도 부른다)과
곡옥은 치열한 세력 경쟁을 벌였으나,
곡옥의 세력이 진 주국에 비해 강성하여 곡옥백이 여러 차례 주국을 쳐 진후들을 죽이거나 쫓아냈다.
익의 국인들은 곡옥백을 진후로 인정하지 않고
진후를 잃을 때마다 새 진후를 세우고 곡옥백을 쫓아냈기 때문에 싸움은 길어졌으나,
BC 678년 결국 곡옥 무공이 진 문후 계통 마지막 진후인 진후 민을 죽이고 익을 흡수하여 내분은 끝났다
삼진 분립
진 헌공(BC 676~651)이 아들 해제를 후사로 만들고자 하는 과정에서 공자들을 외국으로 내보냈으며,
진문공도(BC 636~628) 자기 사후 자기 형제들이 서로 임금 자리를 두고 분쟁한 것을 꺼려
태자 환(진 양공)를 제외한 아들들을 모두 외국에서 벼슬살이하게 했다.
이에 따라 공실 분가들의 힘이 약해지고 임금의 힘이 강해졌으나,
임금이 경들을 중용하여 나라를 다스리면서 점차 이러한 경들의 세력이 진나라에서 강해졌다.
진경공(BC 599~581)은 자기 시절에 가장 강력한 씨족인 조씨를 거세하였고,
진여공(BC )은 조씨를 대신하여 강성해진 극씨를 몰락시키는 등
경들의 세력을 약화하고자 했으나 순씨와 난씨의 반격으로 제거당했다.
진 도공()은 몇 집안을 일부러 제거하지 않고 어느 한 집안만 중용하지도 않으면서
경들의 세력 간 균형을 맞춰나갔으나,
진 평공 · 진 경공이 실정하면서 진나라 공실은 나라를 다스릴 능력을 잃었고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본격적인 경들 간의 세력 투쟁이 시작되었다.
여기까지 경 집안들 간의 권력 전환 과정에서
임금 주도로 제거된 집안이나 경들 간의 싸움에서 제거된 집안 중
조씨와 선씨만이 공실 지파가 아닌 반면(그나마 조씨는 부활),
호씨 · 난씨 · 극씨 등 공실 지파들은 일찍 강성했다가 다른 세력의 질시를 받아 먼저 제거되었다.
결국, 내내 약한 가문이면서도 경 한 자리는 유지한 한씨를 제외하면
공실과 혈연 관계가 없는 집안들이 진나라의 실권을 쥐었다.
이 과정에서 일단 지씨(智氏), 조씨(趙氏), 한씨(韓氏), 위씨(魏氏), 범씨(范氏), 중항씨(中行氏)가
살아남아 진나라를 다스려, 진나라는 이때 사실상 경들이 다스리는
여섯 나라와 미약한 공실 직할령으로 쪼개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BC 458년 여섯 명의 귀족 사이에도 갈등이 생기고 그 와중에 범씨와 중항씨가 반란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나머지 4명의 당주들이 그들을 공격하여 그들을 영토 밖으로 밀쳐냈다.
BC 497년이 되자 지씨의 당주인 지백요(智伯瑤)의 주도로
한(韓), 위(魏), 조(趙)의 당주들과 함께 범씨와 중항씨의 영토를 분할해 차지해 버린다.
그리고 지씨는 35대 군주 출공(晉出公)이 삼환과 전씨에게
지백요, 한호, 위구, 조앙을 죽여달라는 문서를 보냈다가
오히려 삼환과 전씨가 진출공이 그런 문서를 보내왔다는 문서를 보내는 바람에 진출공은 살해당한다.
이후에 지(智)의 당주 지백요(智伯瑤)가 한(韓), 위(魏), 조(趙)의 당주에게
영토를 나누어 달라는 제의를 하게 된다.
그 중 조의 당주 조 양자(趙襄子)만이 영토를 주기를 거부한다.
BC 455년 지(智)의 당주 지백요(智伯瑤)는
자신의 제의를 거절한 조(趙)의 당주 조양자(趙襄子)를 치기위해
한의 당주 한 강자(韓康子)와 위 환자(魏桓子)에게 연합을 요청한다.
조양자는 자신의 옛 성인 진양성(晋陽城)으로 들어가 백성들과 힘을 합쳐서
지백요와 그의 연합군에 대항했으나 사태가 매우 위급한 지경에 놓였다.
이때 조양자의 가신인 장맹담(張孟談)은 한강자와 위환자에게 찾아가 면담하면서
지백요를 배반하기를 설득한다.
결국 조양자는 두 당주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지백요의 진영을 치게 되었고
지백요는 사로잡혀 죽게 된다.
이리하여 진나라는 기원전 403년에 조 . 한 . 위 의 세 나라로 분할되었다. (춘추시대의 마감)
이 분할로 전국시대가 시작된다.
하지만 그때도 진나라는 살아 있었다. 그때의 군주는 37대 유공(晉幽公)이었고
몇 년 뒤 열공(晉烈公) 대에는 위, 한, 조가 정식 국가가 된다.
그렇게 두 마을만 다스리던 진나라 왕실은 정공(晉靜公) 대에 평민으로 강등당해 멸망한다.
(BC 349 년)
군주에 대해 진나라는
당숙우에게 봉한 나라로 섭을 거쳐 몇대 후 진정후대부터 조작이 아님을 믿을 수 있다.
활동, 재위 기간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진 정후 17년은 공화 원년으로 진 정후, 진 이후, 진 헌후를 거쳐 구, 성사에 도읍을 모두 내려준
진 목후가 즉위한다
그후 진후 상숙을 거쳐 진 문후, 진 소후, 진 효후, 진 악후, 진 애후, 소 자후, 진 민후대까지
성사의 후손과 내분이 일어나는데
성사의 손자 칭이 진 민후를 죽이고 군위를 탈취하니 그가 진 무공이다.
무공, 헌공, 혜공, 회공을 거쳐 진 문공이 패자로 오른 후
양공, 영공, 성공, 경공, 여공, 도공, 평공, 소공 후 경공대부터 약해진다.
그후 정공, 출공, 애공 후 유공부터 신강, 곡옥 두 마을 만 다스린다.
어느 날 진 유공이 부녀자를 간음하며 밤에 도성 밖을 돌아다니다가 강도를 만나 살해당하고 만다.
그후 위 문후가 아들 지를 군위에 올리니 그가 열공이다
진 열공 후, 효공을 거쳐 정공 대에 멸망한다.
진 문공
진 문공(晉文公, 기원전 697년 ~ 기원전 628년, 재위 : 기원전 636년 ~ 기원전 628년)은
진나라의 제24대 군주이다.
성은 희(姬), 휘는 중이(重耳), 시호는 문공(文公). 진 헌공의 아들이다.
헌공의 뒤를 잇지 못한 채 진나라를 떠나 19년간 전국을 유랑하였다.
유랑하는 동안 그의 인덕과 능력이 눈에 띄어 많은 명성을 얻었으며,
결국 타국의 도움을 받아 진나라에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기원전 636년 자리에 올라 죽을 때까지 집권하였으며,
각종 개혁정책과 군사활동으로 인해 춘추오패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진나라의 공자
중이의 가계는 원래는 진나라(晉) 방계 왕족이였지만,
무공(武公) 때 직계 왕족을 멸하고 스스로 진나라 공이 되었다.
중이는 무공의 아들 헌공(獻公)과 적족의 여인 호희(狐姬)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헌공의 아들 중에 중이 외에,
태자였던 형, 신생(申生, 중이와는 이복형), 남동생인 이오(夷吾, 후의 혜공, 중이의 친동생)등이 있었다.
젊은 무렵부터 인재를 좋아하여,
17때에 조쇠(趙衰), 호언(狐偃), 가타(賈佗), 선진(先軫), 위주(魏犨)를 부하로 삼았다.
이들은 후에 중이의 패업을 크게 돕게 된다.
또 몸집이 커, 아버지가 태자였을 무렵부터 이미 성인의 체격을 하고 있었다.
신생, 중이, 이오도 명성 높았지만,
헌공의 총희인 여희(驪姬)는 자신의 아들 해제를 후계자로 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중이는 변방으로 보내져 수도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더욱 여희는 함정을 파서 아버지 독살 미수가 오명을 씌워 신생을 자살시켰다.
중이에 대해서도 환관을 파견하고 자살을 강요했다.
중이는 이것을 옳지 못다고 하여 도망을 도모하였고, 어머니의 출신지인 적(狄)으로 망명에 성공하였다.
이오도 측근과 함께 국외에 망명했다.
적에 망명했을 때, 중이는 이미 43세였다.
망명 기간 때, 적의 자매 중 언니(누나)를 중이에게 시집보내고, 여동생을 조쇠에게 시집을 보냈다.
적으로의 망명 5년째 헌공이 사망하였다.
여희 등에 의해서 해제와 그 동생 도자가 진나라 공에 지어지지만,
그 직후에 이극(里克)등의 쿠데타에 의해 여희 일파들은 몰살 되었다.
이극은 중이를 진나라 공으로서 맞아들이려고 사자를 보냈지만,
중이는 살해당하는 것을 무서워하여 오지 않았다.
그 다음에 요청된 이오는 받아 들여 귀국하여, 진나라 공이 되어 혜공이 된다.
혜공은, 아직도 인기가 높고, 스스로의 정도를 위협할 수 있는 중이를 후에의 화근이라고 보았다.
이극등 중이파라고 해당하는 인물을 숙청하였으며, 또한 자객을 보내 중이를 제거하려했다.
그러나 자객이 보내진 것을 알리는 사람이 있고, 중이가 알게 된다.
이것을 들은 중이는
"진에 가까운 소국에 몸을 의지한 채로는 위험하기 때문에,
동방의 대국인 제나라로 가자.
명재상이라고 칭할 수 있었던 관중도 죽었다고 하는가들,
반드시 인재를 요구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동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방랑 시절
출발에 임하여 중이는 아내(적족)에게,
"나를 25년 기다려보고 그 후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재혼하시오."라고 하였고,
아내는 웃으며 "25년정도 기다리면 나의 무덤에 심은 측백 나무도 커지고 있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일행은 우선 위나라(衛)를 목표로 했다.
위나라 공은 일행을 환영하지 않았고,
일행은 오록(五鹿)이라고 하는 땅에서 먹을 것이 떨어져 현지의 농민에게 음식을 구걸하였다.
농민은 그릇에 흙을 담아 냈다.
중이는 격노했지만,
조쇠는 "흙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이 땅을 얻는 것입니다. 참으십시오."라고 하여 중이는 그대로 했다.
그러한 일이 있으면서도 여행을 계속하여 일행은 동쪽의 제나라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제나라의 환공은 초라한 망명 공자에 지나지 않는 중이에게
20승의 마차를 주고, 또 딸을 중이에게 시집 보내고 많은 환대를 했다.
제나라에 있은지 5년이 지나, 그 사이에 환공이 죽었고,
그 후계를 둘러싸고 격렬한 내란이 일어났다.
그 중에 중이는 이미 제나라 아내를 얻어서, 제나라를 떠나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호언, 조쇠등은 중이를 모시고 제나라를 떠나는 것을 계획한다.
이 계획을 중이의 아내(제나라)의 시녀가 몰래 엿들어 아내에게 고하지만,
아내는 누설을 무서워하여서 시녀를 죽이고, 중이에게 빨리 제나라를 떠나도록 재촉했다.
그러나 중이는 듣지 않았다.
거기서 아내는 호언 일행들과 도모하여, 중이가 취하자 수레에 실어 억지로 제나라를 도망쳐 나갔다.
술이 깬 중이는 격노해 호언을 죽이려고 했다.
호언은 "저를 죽여 공자의 대업이 완성된다면 바라던 바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중이가 "일이 완성되지 않으면 자네를 죽이고 그 고기를 먹을거야"라고 하면서,
호언은 "일이 완성되지 않으면 제 고기는 썩어서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제나라를 나온 일행은 조나라(曹)에 들어갔지만
또 다시 무례한 취급을 받아 곧바로 출국해 송나라에 들어갔다.
송나라는 당시 초나라와 전쟁에 졌던 바로 직후에서 만났지만,
양공(襄公)은 중이에 대해 국군 예를 가지고 맞이하여 환공과 같이 80 마리의 말을 주어 환대 했다.
그러나 현재의 송나라는 조력 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일행은 초나라를 의지하기로 했다.
그 도중 , 정나라에 들렀지만, 여기에서도 푸대접을 받았다.
초의 성왕(成王)은, 망명 공자 중이를 제후와 같은 격식에서 대접했지만,
희롱하는 마음에 "만약 당신이 나라에 돌아가, 진의 군주가 되면 나에게 무엇을 답례해 줄 수 있소?"라고 물었다.
중이는 "만약 왕과 싸우는 일이 일어나면, 군을 3사(군이 3일에 행군 하는 거리) 물리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을 들은 성왕의 부하 자옥(子玉)은
망명 공자에 지나지 않는 주제에 초나라 왕을 향해 건방지다라고 분노하여 중이를 죽이려고 했지만,
성왕은 "하늘이 일으키려고 하는 것을 어째서 제지당할까"라고 자옥를 멈추었다.
귀국
기원전 637년,
진 혜공이 죽어, 진의 인질이 되고 있던 태자 어(圉)가 도망가, 진 회공(懷公)이 되었다.
인질이 자기 마음대로 도망가자,
진 목공(秦穆公)은 전에 진 혜공에게 은혜를 원수로 받은 적도 있어 크게 화내었고,
중이를 진나라 공으로 세우기 위해 초나라로 부터 불렀다.
12월, 진의 중신들로 부터도 청을 받은 중이는,
진나라 군(秦軍) 뒤에 진나라에 들어온다.
진나라 군(晉軍)은 요격에 나오지만,
평판이 나쁜 혜공과 그 아들 회공을 따라가려고 하는 이는 적고,
싸운이는 측근의 군대만으로,
다른 대부분의 진나라군(晉軍)은 중이를 뒤따라 진나라군(秦軍)과 함께 진나라 군(晉軍)을 멸했다.
중이는 진나라 공에 오른다(이하, 문공이라고 한다).
실로 62세의 새로운 군주이다.
문공은 천하 경영에 나선다.
패자
기원전 635년
반란이 일어나 도망해 온 주나라 양왕(周襄王)을 보호하여 수도에 일어난 반란을 토벌을 하였다.
기원전 632년
초나라에 공격받은 송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킨다.
성왕과 대적했지만 성왕은 운이 나쁘다고 보고 군을 퇴각하였다.
그러나 초나라군 중에서도 자옥만은 물러나지 않고 진나라 군과 결전했다.
싸움이 개시되어 문공은 약속대로 우선 전군을 3사 비킬 수 있었다.
그 후 일단 철퇴하여, 성복의 땅에서 자옥와 대결하여 승리하였다.
이것을 성복 전투이라고 불렸고, 이것에 의해 문공이 패자의 지위를 얻었다.
기원전 628년에 사망하였다.
혼란이 계속 된 진나라를 안정시키고, 패업을 가져온 공적을 얻어,
시호 중 에서는 최상급인 문(文)을 시호를 얻어 문공이 되었다.
재위 기간은 9년이고 짧은 기간에 패자가 되고, 환공과 함께 춘추 오패의 필두가 되었다.
진(晉) 의 역대 군주
대 군주 휘 재위 기간 재위 년도 (기원전)
1 당 숙우(唐叔虞) 우(虞) 1042년
2 진후 섭(晉侯燮) 섭(燮)
3 진 무후 무후(武侯) 영족(寧族)
4 진 성후 성후(成侯) 복인(服人)
5 진 여후 여후(厲侯) 복(福) 859년
6 진 정후 정후(靖侯) 의구(宜臼) 18년 858년 ~ 841년
7 진 희후 희후(釐侯) 희후(僖侯) 사도(司徒) 18년 840년 ~ 823년
8 진 헌후 헌후(獻侯) 소(蘇) 적(籍) 11년 822년 ~ 812년
9 진 목후 목후(穆侯) 비왕(費王) 27년 811년 ~ 785년
10 진 상숙 상숙(殤叔) 4년 784년 ~ 781년
11 진 문후 문후(文侯) 구(仇) 35년 780년 ~ 746년
12 진 소후 소후(昭侯) 백(伯) 6년 745년 ~ 740년
13 진 효후 효후(孝侯) 평(平) 16년 739년 ~ 724년
14 진 악후 악후(鄂侯) 극(郤) 6년 723년 ~ 718년
15 진 애후 애후(哀侯) 광(光) 9년 717년 ~ 709년
16 진 소자후(晉小子侯) 4년 708년 ~ 705년
17 진후 민(晉侯緡) 민(緡) 27년 704년 ~ 678년
곡옥의 군주
대 군주 시호 휘 재위 기간 즉위한 해 퇴위한 해
1 곡옥 환숙 환숙(桓叔) 성사(成師) 14년 기원전 744년 기원전 731년
2 곡옥 장백 장백(荘伯) 선(鱓) 15년 기원전 730년 기원전 716년
3 곡옥 무공 무공(武公) 칭(稱) 39년 기원전 715년 기원전 677년
통일 이후의 군주
군주 시호 휘 재위 기간 즉위한 해 퇴위한 해
18 진 무공 무공(武公) 칭(稱) 39년 기원전 715년 기원전 677년
19 진 헌공 헌공(獻公) 궤제(詭諸) 26년 기원전 676년 기원전 651년
20 진 혜공 혜공(恵公) 이오(夷吾) 14년 기원전 650년 기원전 637년
21 진 회공 회공(懷公) 어(圉) 0년 기원전 637년 기원전 637년
22 진 문공 문공(文公) 중이(重耳) 9년 기원전 636년 기원전 628년
23 진 양공 양공(襄公) 환(歡) 7년 기원전 627년 기원전 621년
24 진 영공 영공(靈公) 이고(夷皋) 14년 기원전 620년 기원전 607년
25 진 성공 성공(成公) 흑둔(黑臀) 7년 기원전 606년 기원전 600년
26 진 경공 경공(景公) 거(據) 19년 기원전 599년 기원전 581년
27 진 여공 여공(厲公) 수만(壽曼) 8년 기원전 580년 기원전 573년
28 진 도공 도공(悼公) 주(周) 15년 기원전 572년 기원전 558년
29 진 평공 평공(平公) 표(彪) 26년 기원전 557년 기원전 532년
30 진 소공 소공(昭公) 이(夷) 6년 기원전 531년 기원전 526년
31 진 경공 경공(頃公) 기질(棄疾) 14년 기원전 525년 기원전 512년
32 진 정공 정공(定公) 오(午) 37년 기원전 511년 기원전 475년
33 진 출공 착(鑿) 23년 기원전 474년 기원전 452년
34 진 애공 애공(哀公)의공(懿公)경공(敬公) 교(驕) 18년 기원전 451년 기원전 434년
35 진 유공 유공(幽公) 유(柳) 18년 기원전 433년 기원전 416년
36 진 열공 열공(烈公) 지(止) 27년 기원전 415년 기원전 389년
37 진 효공 효공(孝公) 환공(桓公) 기(頎) 32년 기원전 388년 기원전 357년
38 진 정공 정공(靜公) 구주(俱酒) 8년 기원전 356년 기원전 349년
초 (楚) (춘추 전국) BC 1030년 이전 ~ BC 202년)
초(중국어: 楚, 병음: Chu, 기원전 1030년 이전 ~ 기원전 202년)는
현재의 후베이성(湖北省, Húběi Shěng)인 장강(長江, Cháng Jiāng) 중류 지역에서 일어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나라이며,
춘추오패, 전국칠웅의 하나이다.
갑병 수십만, 전차 천승(乘) 기병 1만기를 낼 수 있었다.
미(羋)성 웅(熊)씨의 제후국이다.
황하 문명을 대표하는 주나라에 대해 장강 문명을 대표하는 나라로 분류된다.
형(荆) 또는 형초(荆楚)로도 불린다.
중국 남방계 민족의 정체성을 가진 제후국이다.
중국과학원의 발육생물학연구소 위안이다(袁義達) 연구에 따르면
전국 시대 초, 오, 월이 있었던 저장성, 안휘성, 강소성의 중국 남부 사람들은
중국 북부 사람들과 유전자 구조상 차이가 존재한다고 한다.
주나라 초기의 작위(爵位)는 자작(子爵) 이었으나,
기원전 704년 무왕(武王)때에 이르러 스스로 왕을 칭하였고,
기원전 223년 전국시대 말에 진(秦)에 의해 멸망 했다.
기원전 208년 회왕의 후손인 의제에 의해 다시 부활하였으나
기원전 202년 초한전쟁에서 항우가 전한 고조 유방에게 패함으로서 완전히 멸망한다.
춘추시대 초나라의 영역
역 사
사마천의 사기 초세가(楚世家)에 따르면,
초나라는 삼황오제의 한 사람인 전욱 고양(顓頊 高陽)의 후손이 세운 나라다.
전욱(顓頊)은 창의(昌意)의 아들이다.
후손 육종(陸終)은 축융(祝融)의 동생으로 제곡 고신(帝喾 高辛)때
화정(火正, 고대 중국의 불을 맡은 벼슬)을 지낸 오회(吳回)의 아들이다.
주문왕(周文王) 때 계련(季連)의 후손 중에 육웅(鬻熊)이 있었는데 초나라 웅씨(熊氏)들의 시조이다.
죽웅(鬻熊)의 증손자 웅역(熊繹)에 이르러 주 성왕(周成王)은
주나라 건국시 문왕(文王)과 무왕(懋王)을 도운 공신들의 후손들을 찾아내어 논공행상을 할 때
웅역(熊繹)의 증조부(曾祖父)인 육웅(鬻熊)이 세운 공로로 웅역(熊繹)을 형만(荊蠻)의 땅에
자작(子爵)의 작위에 봉했으나 그 봉지는 남작(男爵)에 준해서 하사하고 미(羋)라는 성을 내렸다.
웅역은 봉지의 도읍을 단양(丹陽)에 두었다.
주 이왕(周 夷王)때에 이르러 주왕실의 세력이 쇠약해지자 웅거(熊渠)는 군사를 일으켜
용(庸)과 양오(楊奧)에서 악(鄂)에 이르기까지의 땅을 정벌하여 초나라의 영토로 삼았다.
웅거는 이후 잠시 왕이라 참칭(僭稱)하다가 포악한 여왕(厲王)이 즉위하자
정벌당하는 것이 두려워 왕이라 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기원전 741년
웅통(熊通)이 초 자작위에 올랐는데 그가 무왕(武王)이다.
기원전 704년
웅통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복(濮) 땅을 개간하여 초나라 땅으로 삼았다.
기원전 690년
무왕의 뒤를 이은 문왕(文王)은 도성을 단양(丹陽)에서 영도(郢都)로 옮겼고,
기원전 638년
등(鄧)나라를 정벌하여 멸하고 초나라 땅으로 만들었다.
기원전 637년
송양공(宋襄公)이 회맹을 하려고 제후들을 우(盂)에 소집을하자
성왕(成王)은 회맹장에 군사를 매복하여 송양공을 잡았다가 풀어 주었다.
기원전 631년
기나라(夔)가 조상인 축융(祝融)과 육웅(鬻熊)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멸망 시켰다. 그해 여름 성복(城濮)에서 당진(唐晉)과의 싸움에서 대패하였다.
기원전 626년
태자(太子) 상신(商臣)이 왕이 자신을 폐하려 하자 난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그가 목왕(穆王)이다.
기원전 614년
려(侶)가 목왕의 뒤를 이어 초왕이 되었는데 춘추오패 중의 한사람인 장왕(莊王)이다.
초나라는 이후 장강 이남의 지역을 호령하는 나라로서 맹위를 떨쳐 나갔으나
초왕 부추(負芻) 때에 이르러 기원전 224년 진나라(秦)에 장군 왕전(王翦)의 공격으로
대장군 항연(項燕)(항우의 큰아버지)과 왕 부추가 사로잡히고
남은 세력들도 모두 기원전 223년 진나라의 장군 왕전의 아들 왕분과 몽염에게 항복하면서 멸망 하였다.
초한 챙패기에 초 의제(楚義帝)를 군주로 세우고 서초(西楚)가 재건되었으나,
항우(項羽)가 한나라(漢) 유방(劉邦)에게 패망하고 잔존 세력은 한나라에게 항복하였다.
초 장왕
초 장왕(楚 莊王, ? ~ 기원전 591년, 재위 : 기원전 614년 ~ 기원전 591년)은
초나라의 제 23대 왕이며,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한 사람이다.
성(姓)은 미(羋). 씨(氏)는 웅(熊). 휘(諱)는 려(侶)이다.
초나라의 역대 군주중에서도 최고의 명군으로 여겨져 춘추 오패의 한 명으로 꼽힌다.
성왕(成王) 원(員)의 손자로,
폭군이었던 목왕(穆王) 상신(商臣)의 적자. 공왕(共王) 심(審)의 아버지이다.
생애
울지도 날지도 않는 새 [불비불명(不飛不鳴)]
아버지 목왕 사망하여 왕위에 오른 직후, 아직 젊은 왕이었기 때문에,
공자(公子)의 한명인 섭(燮)이 모반을 일으켰다.
일단은 수도와 왕실을 완전하게 지배하여 스스로 왕을 자칭했지만
반대 세력의 확대로 신변의 위험을 느껴 왕인 장왕을 가두고, 북방으로 도망쳤다.
진(晉)나라와 진(秦)나라, 초나라의 국경 가까이의
상밀(商密)이라는 곳에서 반격을 개시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도중의 노(盧)라고 하는 마을에서 섭은 살해당했다.
장왕은 풀려나 수도로 돌아왔다.
이후, 장왕은 전혀 정치를 돌보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고,
간언하는 자는 모두 주살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가신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간언도 하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었지만,
3년째에 오거(오자서의 조부)가
"제가 수수께끼를 한번 내보겠습니다.
3년 동안을 전혀 날지도 울지도 않는 어떤 새가 있습니다.
이 새의 이름은 무엇일까요?"라고 하였고,
장왕은
"그 새는 한번 날아 오르면 하늘까지 이를 것이고,
한번 울면 만인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 후로도 방탕한 생활을 하였지만, 태부 소종(蘇從)의 목숨을 건 간언에
장왕은 방탕한 생활을 정리하였다.
3년간 짐짓 어리석은 체 하면서 산하의 인물됨을 살피고 있었던 장왕은
오거와 소종에게 국정을 맡기고, 새롭게 수백 명을 등용하며 수백 명의 간신을 죽였다.
이 사건에서 불비불명(不飛不鳴)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였다.
문정경중
국정을 정비한 장왕은,
용(庸)을 공략한 것을 시작으로 주변 국가를 압박하고,
영토를 넓히며 패자로서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기원전 606년에는 중원을 제패할 야심을 품고 주나라 땅에 주둔하였다.
주나라로부터 사자가 오자, 장왕은 사자에게 구정(九鼎)의 무게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구정은 천자국(天子國)에 대대로 전해지는 9개의 솥을 가리키는데, 왕권에 대한 상징물이다.
그 무게를 묻는 것은, 주나라의 왕위를 빼앗을 수도 있음을 은연중 암시한 일종의 협박이었다.
주나라의 사자 왕손만(王孫滿)은 장왕의 속내를 간파하고,
솥의 크기와 무게보다는 덕이 중요하며 천명은 아직 주나라에 있다고 대답하였고,
이에 장왕은 철군하였다.
절영지연
장왕은 야심한 밤에 신하들을 연회에 불렀다.
많은 사람이 취한 가운데 갑자기 강풍이 불어 촛불이 꺼져 버렸다.
그 때, 장웅(蔣雄)이라는 사람이 장왕의 총희의 몸을 만졌다.
총희는 곧바로 장웅의 갓끈을 잡아 뜯었고, 장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촛불이 꺼진 틈에, 나에게 무례를 저지른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의 갓끈을 당겨 뜯었습니다.
촛불만 켜면, 누군지 금방 알수 있습니다."
장왕은 "여기 온 자들은 지금 당장 갓끈을 잡아 떼어라."고 명해 모두 그대로 했다.
덕분에 장웅은 죄를 추궁받지 않고 넘어갔고, 장웅은 진심으로 장왕에게 감사했다.
그 후 초나라가 진(秦)나라에게 공격당했을 때, 장웅은 선봉에 서서 큰 공로를 세웠다.
장왕이 장웅에게
"과인은 너를 그렇게 아낀 기억이 없는데, 무슨 이유로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이렇게까지 한 것이냐?"라고 묻자
장웅은
"아닙니다. 왕께서는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저는 절영의 모임 때, 총희의 몸을 만진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너그럽고 여자에게 휘돌리지 않는 훌륭한 군주로서의 장왕의 인격을 나타내는 고사이다.
춘추의 패자
장왕은 진(陳)나라의 내란을 틈타 그 나라를 일시에 병합하고,
정(鄭)나라를 공격하여 진나라와 함께 속국으로 삼았다.
기원전 597년 정나라의 원군으로 온 진(晉)나라군을 격파했다.
이 때 진나라군은 허겁지겁 배를 타고 후퇴했는데,
배가 뒤집힐 것을 두려워한 병사가 배에 매달려 있는 병사의 손을 잘라 떨어뜨렸고,
배 안에는 손가락이 수북히 모였다고 한다.
대승한 뒤, 신하들은 경관(京觀)을 만들 것을 상소했지만 장왕은 물리친다.
무(武)라는 글자는 과를 멈추어 쓰기, 난폭함을 막고 전을 세우고 대를 유지해,
공을 정하고 백성을 생각하고 사람들을 화합하고, 재물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자신이 한 것은 이 무덕에 들어맞지 않으며,
자신의 조국을 위해 충성을 다한 진나라 병사들의 사체로 경관을 만들 수는 없다, 는 이유에서였다.
마지막 싸움
진나라를 패퇴시키고 패업을 이룬 장왕은,
그 다음에 진나라를 따르는 송나라를 표적으로 정했다.
장왕이 제(齊)나라에 보낸 사신이 송(宋)나라를 지나가다가 피살당하자,
전광석화 같이 송나라에 쳐들어가 수도 상구(商丘)를 포위했다.
이전, 노나라도 초나라의 맹하에 들어가는 등, 착실하게 장왕의 패업은 완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화원(華元)을 비롯한 송나라군의 저항에 의해,
기원전 594년 5월이 되어도 상구를 공락하지 못하고 장왕은 결국 퇴각했다.
후에 송나라는 초나라에게 항복했다. 기원전 591년 그는 사망하였다.
가족
아버지 : 초 목왕
형제 : 초 장왕, 공자 영제(公子嬰齊) 자 자중(子重), 공자 측(公子側) 자 자반(子反)
아들 : 초 공왕, 공자 곡신(公子穀臣), 공자 정(公子貞) 자 자낭(子囊), 공자 오(公子午)
자 자경(子庚), 공자 추서(公子追舒) 자 자남(子南)
역대 군주
대수 왕호 휘 재위 기간 재위 연수 비고
죽웅(鬻熊)
웅려(熊麗)
웅광(熊狂)
1 웅역(熊繹)
2 웅애(熊艾)
3 웅담(熊黵)
4 웅승(熊勝)
5 웅양(熊楊)
6 웅거(熊渠)
7 웅무강(熊毋康)
8 웅지홍(熊摯紅)
9 웅연(熊延) ? ~ 기원전 848년
10 웅용(熊勇) 기원전 847년 ~ 기원전 838년 10년
11 웅엄(熊厳) 기원전 837년 ~ 기원전 828년 10년
12 웅상(熊霜) 기원전 827년 ~ 기원전 822년 6년
13 웅순(熊徇) 기원전 821년 ~ 기원전 800년 22년
14 웅악(熊咢) 기원전 799년 ~ 기원전 791년
15 약오(若敖) 웅의(熊儀) 기원전 790년 ~ 기원전 764년
16 소오(霄敖) 웅감(熊坎) 기원전 763년 ~ 기원전 758년
17 분모(蚡冒) 웅순(熊眴) 기원전 757년 ~ 기원전 741년
18 무왕(武王) 웅통(熊通) 기원전 740년 ~ 기원전 690년
19 문왕(文王) 웅자(熊貲) 기원전 689년 ~ 기원전 675년
20 장오(莊敖) 웅간(熊囏) 기원전 674년 ~ 기원전 672년
21 성왕(成王) 웅운(熊惲) 기원전 671년 ~ 기원전 626년
22 목왕(穆王) 웅상신(熊商臣) 기원전 625년 ~ 기원전 614년
23 장왕(莊王) 웅려(熊侶) 기원전 613년 ~ 기원전 591년
24 공왕(共王) 웅심(熊審) 기원전 590년 ~ 기원전 560년
25 강왕(康王) 웅초(熊招) 기원전 559년 ~ 기원전 545년
26 겹오(郟敖) 웅원(熊員) 기원전 544년 ~ 기원전 541년
27 영왕(靈王) 웅비위(熊比囲) 기원전 540년 ~ 기원전 529년
28 평왕(平王) 웅기질(熊弃疾) 기원전 528년 ~ 기원전 516년
29 소왕(昭王) 웅진(熊珍) 기원전 515년 ~ 기원전 489년
30 혜왕(惠王) 웅장(熊章) 기원전 488년 ~ 기원전 432년
31 간왕(簡王) 웅중(熊中) 기원전 431년 ~ 기원전 408년
32 성왕(声王) 웅당(熊當) 기원전 407년 ~ 기원전 402년
33 도왕(悼王) 웅의(熊疑) 기원전 401년 ~ 기원전 381년
34 숙왕(肅王) 웅장(熊臧) 기원전 380년 ~ 기원전 370년
35 선왕(宣王) 웅양부(熊良夫) 기원전 369년 ~ 기원전 340년
36 위왕(威王) 웅상(熊商) 기원전 339년 ~ 기원전 329년
37 회왕(懐王) 웅괴(熊槐) 기원전 328년 ~ 기원전 299년
38 경양왕(頃襄王) 웅횡(熊横)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63년
39 고렬왕(考烈王) 웅원(熊元) 기원전 262년 ~ 기원전 238년
40 유왕(幽王) 웅한(熊悍) 기원전 237년 ~ 기원전 228년
41 애왕(哀王) 웅요(熊猶) 기원전 228년 ~ 기원전 228년
42 웅부추(熊負芻) 기원전 227년 ~ 기원전 223년
서초 군주
대수 왕호 휘 재위 기간 재위 연수 비고
1 초 의제(楚義帝) 웅심(熊心) 기원전 208년 ~ 기원전 205년 3년
2 초 패왕(楚覇王) 항우(項羽) 기원전 205년 ~ 기원전 202년 3년
오(吳) (춘추) BC ~ BC 473
오(吳)나라는 주나라 왕실의 일족이 양쯔 강 하류, 지금의 쑤저우에 세운 나라이다.
천자와 동성이라 자부하였으나,
다른 제후국들은 오랑캐 나라라고 부를 정도로 낮추어 여겼다.
춘추오패 중 하나인 합려왕을 배출했으며,
그의 아들인 부차(夫蹉) 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이웃 월나라에게 멸망하였다.
번영
6대 왕 합려의 시대에 가장 강성하였다.
명신, 손무와 오자서를 데리고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초나라를 멸망직전까지 몰고 갔다.
신흥의 월나라를 침범하여 합려는 중상을 입고 아들인 부차에게 복수를 맹세하게 하고,
후치우에 묻혀 최후를 마친다.
다시 힘을 키운 부차는 오자서의 보좌를 받아, 월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는다.
월왕 구천은 패전의 멍에를 지고, 속국으로 예를 다하여,
당시 최고의 미인인 서시 등의 예물을 바치며 사죄를 한다.
멸망
오자서는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적극 주장하지만,
경계심이 풀어진 부차는 그를 외면하고 오히려 오자서를 자살하도록 만든다.
결국 범려의 계략에 말려든 오나라는 기원전 473년 월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오왕 부차는 자살을 하게 된다.
오왕 합려
합려(闔閭, ? - 기원전 496년, 재위 : 기원전 544년 ~ 496년)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제24대 임금이며, 제6대 왕으로, 휘는 광(光)이다.
춘추 5패의 한 사람으로 꼽기도 한다.
신하인 손무, 오자서 등의 도움을 받아 오나라를 강국으로 성장시키고 패자를 꿈꾸었으나,
월왕 구천에게 패배하여, 부차에 복수를 맹세하게 하고 죽는다.
그를 묻은 언덕에는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해서, 후치우(虎丘)라고 불렀다.
왕위 싸움
사기 오태백세가(史記 呉太伯世家)에 의하면, 공자 광의 아버지의 제번(諸樊)은
오의 초대 국왕 수몽(寿夢)의 장자였다.
수몽에는 이외에 3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도 막내 계찰은 현인으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아버지 수몽도 거기에 기대하여 계찰을 차기 왕으로 정하고 싶은 마음이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계찰(季札)은 형을 두고 자신이 왕위에 즉위하는 것에 원치 않고,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거기서 우선 제번이 왕위를 이어,
그 후를 동생인 여제(余祭)가 잇는 등 형제 계승의 순서에 이었고,
마지막에 계찰에 왕위가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계찰은 여매(余昧)로부터 왕위를 양보하지만, 거부하여 도망해 버려,
왕위는 결국 여매의 아들인 요(僚)가 계승되게 되었다.
이것에 광은 불만을 품었다.
지금까지 형제의 사이에 차례로 왕위를 돌려 왔으니까
계찰이 왕이 된다면 어쨌든, 계찰이 도망간 다음은 차례대로 장자의 아들인 자신이
왕위를 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줄곧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불만을 숨기면서 요를 시중들어 장군으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 때, 초나라의 오자서가 망명해 와 광의 야망을 헤아렸고, 암살자 전제(専諸)를 추천했다.
전제는 요에게 다가가 물고기 요리를 올렸다, 물고기 안에 감추고 있던 비수를 꺼내어
오왕 요를 찔러 죽었고,
스스로도 또한 호위에 살해당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즉위 이후
공자 광은 즉위하였다.
오자서, 손무 등을 데리고, 초강대국 초나라와 몇 번이나 싸웠다.
기원전 506년에는 당(唐)나라, 채(蔡)나라와 연합하여,
초나라의 수도 영(郢)을 함락시키는 전과를 거두고 초나라를 거의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이듬해(기원전 505년)에 본국이 월나라에 침략 당하고,
동생 부개가 왕을 칭하고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에 가까스로 도망친 초왕을 추격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본국에 돌아와 난을 평정했다.
기원전 496년, 10년 전의 원한을 풀기 위해 월나라로 쳐들어간다.
그러나 월나라의 장군 범려의 책략에 막혀 패배하고
다리에 활까지 맞아 상처가 덧나 죽게 된다.
아들 부차에게 구천이 부친을 죽였던 것을 잊지 말라고 유언하고, 복수를 맹세하게 했다.
손자(孫子)
《오자(吳子)》와 병칭(倂稱)되는 병법 칠서(七書) 중에서 가장 뛰어난 병서로 이 둘을 합쳐
흔히 '손오병법(孫吳兵法)'이라고 부른다.
저자는 춘추시대 오나라 합려(闔閭)를 섬기던 명장 손무(孫武:BC 6세기경)이며,
손자는 그를 높여 부르는 호칭이다.
예전에는 손무의 손자로 전국시대 진(晉)나라에서 활동한 손빈의 저서라고 추정하기도 하였으나,
1972년 산둥성[山東省] 린이현[臨沂縣] 인췌산[銀雀山]에 있는 전한시대의 묘에서
《손자》와 《손빈병법》 2가지가 동시에 출토됨으로써 손빈이 지은 병법서는 별개의 책임이 확인되었다.
《사기(史記)》에는 손자 13편이라 하였으나 그 편목은 알 수 없으며,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오손자병법 82편이라 하여 <병서략(兵書略)> 첫머리에 기재하고
주(注)에는 그림 9권이 있었다고 하였다.
현재 전해지는 것은 13편으로 이것은 당초의 것이 아니고, 삼국시대 위(魏)의 조조(曹操)가
82편 중에서 번잡한 것은 삭제하고 정수(精粹)만을 추려 13편 2책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13편의 편명은
계(計)·
작전(作戰)·
모공(謀攻)·
군형(軍形)·
병세(兵勢)·
허실(虛實)·
군쟁(軍爭)·
구변(九變)·
행군(行軍)·
지형(地形)·
구지(九地)·
화공(火攻)·
용간(用間)으로 되어 있으며,
“병(兵)은 국가의 대사(大事), 사생(死生)의 땅, 존망(存亡)의 길”이라는 입장에서
국책(國策)의 결정,
장군의 선임을 비롯하여
작전·전투 전반에 걸쳐
격조 높은 문장으로 간결하게 요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 뜻하는 바는 항상 주동적 위치를 점하여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것을 주로 하고,
또 사상적인 뒷받침도 설하고 있어 병서로서는 모순을 느낄 만큼 비호전적(非好戰的)인 것이 특징이다.
예로부터 작전의 성전(聖典)으로서 많은 무장들에게 존중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경영의 요지와 인사의 성패 등에도 비범한 견해를 보이고 있어
인생문제 전반에 적용되는 지혜의 글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예로부터 많은 무신들이 이를 지침으로 삼았고,
조선시대에는 역관초시(譯官初試)의 교재로 삼기도 하였다.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라고 하여,
“남을 알고 자신을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명구도 담고 있으며, 전쟁하여 이기는 것보다 전쟁하지 않고 이기는 것을 최선으로 여겼다.
《손자병법》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인용 번역되고 있다.
역대 군주
대수 휘 재위 기간 재위 연수 출신과 관계
1 태백(太伯)
2 중옹(仲雍) 태백의 동생
3 계간(季簡)
4 숙달(叔達)
5 주장(周章)
6 웅수(熊遂)
7 가상(柯相)
8 강구이(彊鳩夷)
9 여교의오(餘橋疑吾)
10 가로(柯盧)
11 주요(周繇)
12 전(轉)
13 굴우(屈羽)
14 파고(頗高)
15 구비(句卑)
16 거제(去齊)
17 수몽(壽夢) 기원전 585년 ~ 기원전 561년 25년 거제의 아들
18 제번(諸樊) 기원전 560년 ~ 기원전 548년 13년 수몽의 아들
19 여제(餘祭) 기원전 547년 ~ 기원전 544년 4년 제번의 동생
20 여매(餘昧) 기원전 543년 ~ 기원전 527년 17년 여제의 동생
21 요(僚) 기원전 526년 ~ 기원전 515년 12년 여매의 아들
22 합려(闔閭) 기원전 514년 ~ 기원전 496년 19년 제번의 아들
23 부차(夫差) 기원전 495년 ~ 기원전 473년 23년 합려의 아들
월 (越) (춘추 전국) BC ~ BC 307
월(越)은 춘추 전국 시대에 있던 나라이다.
무여(無余)가 주나라 왕실로부터 책봉 받았으며,
구천(句踐)왕 때 전성기를 누렸다.
춘추시대 월나라의 영역
국 성
월의 국성은 사(姒:시)씨로 하왕조에서 나왔다.
하나라 시조 우 (하나라)의 무덤은 월나라 영역 저장성 사오싱에 있다.
월과 인접한 오나라 오씨는 주왕조에서 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월과 오나라는 각각 사성, 희성이므로 하왕조, 주왕조 천자의 후예, 일족 이라고 자부하였다.
그러나 주나라 조정은 오, 월의 주장을 그다지 신빙성있다고 보지는 않았고 남방 오랑캐로 치부했다.
월나라 왕성은 고(顧)씨이다. 고(顧)는 중국에서 "구"로 발음됨으로 구씨이다.
중국의 발음 체계는 고대 중원, 미난어, 광동어, 만주어 차이가 있는데
고가 본래 중국인 발음에 가깝다.
고대 중국어의 영향이 남아 있는 베트남에서도 고(顧)다.
지 리
월나라의 위치는 오늘날 저장성 사오싱(소흥)을 중심으로하여
광둥성, 장시성, 푸젠성등의
중국 동남부와 베트남 북부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중심지인 저장성 사오싱에우 (하나라)의 무덤이 있다.
기원전 473년에 오나라를 멸망시켰고, 그후 초나라에 멸망당한다.
범려가 구천을 보좌할 때 가장 세력이 강력했으며, 후에 점점 쇠락의 길을 걸었다.
기원 전 306년 구천의 6대손인 무강 때 초나라에 멸망했다.
저장성은 유방의 출신지이며, 진나라 반군의 군사 기지였다.
초한쟁패기 서초가 재건된 지역이며, 전류 (오대)가 건국한 오월이 있었던 지역이다.
이 지역은 일본과 교역을 많이 했고, 한국과도 교류 했다.
흥망 성쇠
오자서가 지키고 있는 오나라를 반간계와 이간계 등의 책략으로 멸망시킨 월나라는
안정기에 접어들지만,
당시 월나라를 지탱한 두 공신인 범려와 문종의 실각으로
점차 몰락의 길을 걷는다.
구천의 시기심을 잘 알고 있는 범려는 그를 피해 제나라로 잠적했다.
그러나 문종은 구천의 질투심으로 숙청당하고 만다.
이후, 나라는 조금씩 쇠락하기 시작했고,
기원전 464년 구천이 사망하면서 월나라는 그저그런 나라로 전락한다.
멸 망
기원 전 306년, 구천의 6대손인 무강의 시대에 초나라 위왕의 원정으로 초나라에 패했다.
무강은 초나라의 추격을 받다가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
멸망 이후
월나라 세력은 멸망 이후 초나라에 흡수되었고,
진나라가 들어서자 다시 저장성으로 도피하였다.
한나라 건국 이후 한나라에게 귀속되어 민(閩), 동월(東越)등이 제후국이 되어 해양 세력으로 발전한다.
이들은 배을 타고 한반도와 일본 열도을 돌아다녔는데,
중국 기록에 의하면 이들의 일부가
일본에도 월국을 세웠다고 하며,
실제로도 일본 월국에 대한 기록이 존재한다.
백제는 저장성, 강소성과 교류가 빈번했다. 백제에도 고(顧:구)씨 같은 백제 멸망 이후 한국에서 사라졌다.
성 씨
하나라 우임금의 묘지가 사오싱에 있다.
황제의 후손이며 주나라 희성과 먼 인척 관계라고 주장된다.
사(姒) : 월나라 국성이다. 하나라에 뿌리을 둔 희성, 헌원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고(顧:구) : 월나라 왕족 성씨이다. 하나라에 뿌리을 둔 희성, 헌원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임(任) : 월나라 항저우 소흥(사오싱)에서 계출된 성씨다. 주나라 이후에는 초나라에 관적한다.
사(斯) : 항저우에서 계출된 성씨다.
월왕 구천
구천(句踐, ? ~ 기원전 464년)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후기의 월나라의 왕이다.
책사 범려의 뒷받침으로 당시 화남에서 강세를 자랑하고 있던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춘추오패의 한 사람이다.
생애
오나라와 월나라는 오랜 기간 숙적이었다.
오왕 합려는 월나라를 없애기 위해 대군을 거느리고, 침략을 강행하였다.
그러나 범려의 계책으로 오군은 대패하고, 합려는 이 때의 부상으로 사망하게 된다.
대신 장자인 부차가 오왕으로 즉위했다.
부차는 부친의 원한을 잊지않기 위해, 장작 위에서 잠을 자며,
오자서의 도움을 받아, 보좌에 올라서 다시 월나라를 쳐들어가고 이번에는 월나라를 멸망 직전 까지 몰아붙인다.
충신 범려의 진언에 따라 빼어난 미인 서시를 부차에게 바치면서 항복을 청하고,
부차는 오자서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이것을 수용한다.
구천은 오나라로 가서, 부차의 하인이 되어 열심히 부차를 섬겨 방심을 유도하여 다시 월나라로 돌아온다.
구천은 이 때의 억울함을 잊지 않고 방에 쓴 쓸개를 매달고 매일 그것을 맛보면서 복수를 맹세한다.
이것이 와신상담이라는 고사이다.
월나라로 돌아간 구천는 착착 국력을 기르고, 부차가 출타한 틈을 타서, 침략을 단행한다.
오의 황태자 우를 참하자, 부차는 허둥지둥 되돌아 오지만, 힘을 기른 월나라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나라를 멸망시킨 구천은 월나라의 수도를 현 장쑤 성 연운항으로 옮기고,
제후들을 모아 중원의 패자가 된다.
가족관계
정비: 아어왕후(雅語王后)
제1후비: 수비(綏妃)
제2후비: 주희(柱姬)
동생: 등각공주(登刻公主)
딸: 계완공주(桂婉公主)- 아어 生
딸: 영소공주(英昭公主)- 수비 生
역대 군주
대수 휘 재위 기간 재위 연수 출신과 관계
1 월후 무여(越侯無 餘) 하나라 소강(夏少康)의 서자(庶子)
2대 ~ 9대 군주 미상.
11 월후 무임(越侯無壬)
12 월후 무역(越侯無譯)
13대 ~ 32대 군주 미상.
33 월후 부담(越侯夫譚)
34 월왕 윤상(越王允常) ? ~ 기원전 497년 부담의 아들
35 월왕 구천(越王勾践) 기원전 496년 ~ 기원전 464년 33년 윤상의 아들
36 월왕 녹영(越王鹿郢) 기원전 463년 - 기원전 458년 6년 구천의 아들
37 월왕 불수(越王不壽) 기원전 457년 - 기원전 448년 10년 녹영의 아들
38 월왕 옹(越王翁) 월왕 주구(越王朱勾) 기원전 447년 - 기원전 411년 37년 불수의 아들.
39 월왕 예(越王翳) 기원전 410년 - 기원전 375년 36년 월왕 옹(주구)의 아들
40 월왕 착지(越王錯枝) 기원전 374년 - 기원전 373년 2년 월왕 옹의 손자
41 월왕 무여(越王無余) 월왕 지후(越王之侯) 기원전 372년 - 기원전 361년 12년 착치의 친척
42 월왕 무전(越王無顓) 기원전 360년 - 기원전 343년 18년
43 월왕 무강(越王無彊) 기원전 342년 - 기원전 306년 37년 무전의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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