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관사지 너른 공터에 하늬바람과 함께 가을이 머물고 있다.절터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이곳에 드문드문 남은 석재가 기단이거나 석등받침대였거나 추측만 하게 할뿐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은 여인이 스스로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고,그녀가 죽은 후에 그녀가 사랑했던 사내는 천관사라는 절을 지어 그녀의 영혼을 위로한다.신라통일대업을 이룬 김유신 장군이 사랑했던 여인 천관녀.하지만 나라를 위해 큰 뜻을 품은 젊은 김유신에게 그녀는 잊을 수밖에 없는 여인이었다.
“이놈아,누가 네 멋대로 이리 오라고 했더냐.”
잠든 자신을 태우고 천관녀에게 달려간 애마의 목을 베면서까지 냉엄한 결단력을 보인 장군을 보며 사랑하는 이한테 철저히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천관녀의 속은 얼마나 아리고 찢어졌을까.
매년 음력7월7일, 1년에 한번 오작교에서 견우직녀가 만나는 칠석날밤에 천관제가 열리는데 천관녀의 애달픈 사랑을 위로하고 김유신 장군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하루만이라도 풀어주고자 하는 행사이다.
천관사지를 품고 있는 천관산天冠山은 지리산,월출산,내장산,내변산과 함께 호남의5대 명산에 속하고 두륜산,조계산과 더불어 전라남도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순창의 여암 신경준,고창의 이재 황윤석과 함께 호남의3대 천재로 일컬어진 존재存齋위백규 선생은 조선후기 호남실학의 대표학자로서 천관산의 구석구석을 답사한 후 이 산에 관한 역사,문화,지리 등을 기술한 산서‘지제지’를 저술하였다. 천관산은 지제지에 다섯 개의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는데,천관산 외에도 천풍산天風山,지제산支提山,불두산佛頭山,우두산牛頭山이 바로 그 명칭들이다.
그 후 아기바위,사자바위,중봉,천주봉,관음봉,선재봉,독성암 등 하늘을 찌르는 수십의 기암괴석과 기봉들이 주옥으로 장식된 천자의 면류관 같다하여 천관산으로 굳어졌다.또 이 산 각봉우리의 명칭도 이 지제지의 기록을 토대로 하고 있다.여하튼 고려 때까지만 해도89암자가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울창하고 깊은 산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호남의 대표적인 억새명산인지라 억새 철에 맞춰 장흥에 왔다.서울 광화문을 기점으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정남진 장흥은 맑은 바람과 속속들이 투명한 물,초록의 명산이 둘러싸고 있는 문화와 예술의 고장이자 산酸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만든 친환경참살이 먹거리인 무산 김과 청정해수에서 생산되는 매생이,고품질의 정남진 장흥한우가 군침을 돌게 하는 곳이다.
억새의 춤사위와 기암묘봉의 화음
관산읍내에서 장흥의 특산물을 고루 곁들여 아침식사를 하고 천관산입구로 향한다.하늘은 드높고 청명하여 억새축제에 더없이 좋은 날이다.
주차장에서 천자의 면류관을 높이 올려다보고 산으로 들어서서 도화교라는 작은 석교를 건너면 장천재를 먼저 접하게 된다.위백규 선생이 학문을 가르쳤다는 장천재에는600년은 족히 넘었을 노송이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가지를 뻗고 있는데 마을주민들은 이 소나무가 바람에 이는 소리를 듣고 날씨를 예측했다고 한다.
장천재를 거쳐 조망이 가려진 숲길을 가파르게 오르다가 시야가 트이면서 정남진 해양낚시공원이 있는 장흥앞바다를 보게 되고 진행방향의 봉우리에서 멋진 바위가 반겨준다.첫 번째로 접하는 봉우리 선인봉이다.
왔던 길 돌아보면 들판너머로 부용산이 우뚝하고 그 우측으로 운봉산과 승주봉이 야트막하다.들머리 탑동주차장에 관광버스들이 줄지어 세워진 걸 보니 많은 산객들을 내려주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남도의 바다는 항상 옳다.”
누군가 그렇게 표현했다.장흥앞바다를 내려다보면 그 말의 느낌이 와 닿는다.아름다운 자연을 어디서든 접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한 지역에서 바다와 강과 호수를 모두 만날 수 있는 곳은 별로 없다.전라남도 장흥은 여름바다의 깊은 낭만이 배인 득량만과 탐진강,장흥댐 호수까지 물과 관련된 제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장흥이 매년 여름이면 물을 찾아 떠나온 순례객들의 새로운 성지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축제기간 내내 거대한 테마파크이자 물의 도시로 변하는 장흥 물 축제는 우리나라 물 축제의 효시이자 가장 성공적인 축제로 자리매김하면서 대표적인 여름축제로 성장했다.
아직 축제의 여운이 남아있는 장흥의 곳곳을 눈에 담다가 오르는 등로에는 조경 수석처럼 잘 다듬어졌거나 있는 그대로의 거친 바위들이 곳곳마다 즐비하다.
앞으로 가면서 뒤통수가 근질근질하여 돌아보았는데 지나온 바위능선 뒤로 멀리 제암산과 사자산이 눈에 들어온다.지난 봄 서로 대면했던 그들이 인사하려 잡아끈 것이다.
“붉게 핀 산철쭉이 아른거리는군요.”
“지금 단풍도 썩 괜찮은 편이라네.”
환희대로 오르면서 물드는 가을산자락 위로 파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수많은 바위군락의 풍광이 환한 미소를 짓게 한다.떠나기 전 검색했던 그대로의 멋진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가파르고 거친 등로가 속속 이어진다
고려 때는 등산로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천관산에 오르는 게 위험하였다.그 당시의 기록‘천관산기’에 의하면‘산에 오르며 위험한 길 때문에 곤란을 겪다가 여기에서 기쁘게 쉰다.’는 뜻의 환희대라고 한다.만권의 책을 쌓아놓은 모양이라는 대장봉 정상의 석대이다.
‘이 산에 오르는 자는 누구나 이곳에서 성취감과 큰 기쁨을 맛보게 되리라’
천관산기에서처럼,지금의 안내판에 적힌 글처럼 기쁘고 절정의 카타르시스까지 느낀다.빛을 따라 순광으로 바라보는 억새무리가 가을빛 그대로 연한 갈색물결을 이룬다.
한때 황금빛약수에 효험까지 뛰어났다는 금강굴을 배꼼 들여다보고 좁은 바위통로를 빠져나간다.금강굴을 지나 올려다보면 대세봉과 기암들이 도열해있다.아무렇게나 솟아있는 것처럼도 보이고 나름대로 질서를 유지하며 대열을 갖춘 것처럼도 보이는데 신라 때의 금관을 연상케 한다.
화엄경에 여기 천관산을 두고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남방에 지제산이라 부르는 산이 있다.옛적부터 여러 보살의 무리가 그 속에 머물고 있었으며,지금도 보살이 머물고 있는데 이름 하여 천관보살이라 한다.그의 권속인1천 보살의 무리와 함께 늘 그 가운데 있으면서 법法을 연설하고 있다.’
“천관보살?그렇다면 그녀가?”
갑자기 김유신에게 버림받았다는 천관녀가 떠오른다.김유신에게 버림받은 천관녀는 경북 월성군 내남면 일남리 뒷산에 암자를 짓고 숨어살면서 김유신의 성공을 기도했다.삼국을 통일하고 경주로 돌아가던 김유신이 이 소문을 듣고 천관이 있는 곳으로 찾아간다.
“나와 함께 경주로 갑시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군요.”
천관녀가 빙긋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저는 천관보살의 화신이며 당신이 큰일을 할 사람임을 알고 기생이 되어 그 마음을 시험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의 일도 끝나고 두 사람의 인연도 끝났다면서 이번엔 천관녀가 거절하고 등을 돌리는 것이었다.김유신은 말을 몰아 그녀의 뒤를 쫓았는데 장흥 천관산에 와서 천관녀를 놓치고 만다.천관산에 천관보살이 산다는전설은 김유신과 천관녀의 멜로 후속편과 그 맥락을 같이하는 것 같다.
김여중의‘유천관산기遊天冠山記’는 보다 실감난 찬사로 천관산을 표현하고 있다.
‘한 산이 남방을 진호鎭護하며,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아 있다.세인의 전설에,통령화상이 가지산에서 오며 멀리서 이 산을 바라보니 마치 기둥이 버티고 서있는 듯하여 지제산이라 불렀고,가까이 다가가 이 산을 바라보니 마치 산정에 천자의 면류관을 드리운 것 같아 천관산이라 불렀다고 한다.이 산은 참으로 영선靈仙이 살고 있는 곳이다.’
천관보살도 살고,영험한 신선까지 사는 천관산에 왔다고 의식하면서 갑자기 멀미를 느껴 중봉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편안한 자세로 쉰다.어지럼증을 가라앉히고 왔던 길을 내려다보니 채색되는 계절에 맞춰 각양각색의 옷차림이 줄을 잇고 있다.누렇게 익은 평야와 마을에서 바다로 흐르는 실개천이 마냥 평화롭기만 하다.
길을 재촉하려 일어서자 구정봉이 보이고 조금 후 환희대가 나타난다.다들 흰 구름이 푸근히 감싸고 있는 기암지대이다.봉우리에 구덩이처럼 아홉 개의 패인 홈이 있어 명명된 월출산 구정봉九井峰과 달리 이곳 구정봉九頂峰(해발685m)은 능선에 늘어선 아홉 개 바위를 총칭해서 명명되었다.아래부터 삼신봉,홀봉,신상봉,관음봉,선재봉,대세봉,문수보현봉,천주봉이며 그 끝으로 대장봉이라고도 하는 환희대까지를 일컫는다.
그러나 상세한 학습이 되지 않으면 그 구분이 쉽지 않다.천관산의 지도를 충분히 익히고 왔음에도 각 봉우리들은 지도상의 위치에서 더러 벗어난 것 같아 조금은 혼란스러운 게 사실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억새의 향연에 흡수된다.환희대에서 가늘고 여린 허리를 흔드는 억새들의 춤사위,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몸을 맡긴 유연한 몸놀림은 마치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참한 처세술을 보는 것 같다.약1km거리의 억새능선을 걸으며 거기서 다양한 무리의 정연한 어우러짐과 그들만의 돈독한 결속을 보게 된다.
가을 천관산은 바위와 억새,어떤 게 갑이고 을인지 알쏭달쏭하다.억새로 이름난 산에 멋진 바위들까지 수두룩하여 많은 산객들을 끌어 모으니 그 둘은 멋진 하모니에 듣기 좋은 화음을 생성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성성한 수염 흩날리는 백발노인들 같은 억새군락 틈새로 수직으로 뻗어 하늘을 찌르는 바위들도 그렇거니와 두툼한 뭉게구름을 퍼뜨린 파란하늘을 유영하며 아래로 걷는 이들에게 손을 흔드는 패러글라이더들까지 거리낌 없이 잘 어울리는 풍광이다.
정상 일대의 암릉군은 천자를 지키는 호위무사들을 연상시킨다
올곧은 천관산,처음으로 귀양을 가는 산이 되다
정상인 연대봉(해발723.1m)에는 억새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연대봉烟臺峰이라는 이름에서 풍기듯 연기를 피워 왜구의 침략을 알리는 봉화대가 있던 곳이다.면류관처럼 보였던 정상일대의 바위군락은 올라와 다가서서 보면 천자를 지키는 호위대처럼도 느껴지게 한다.말을 붙여도 완고하게 부동자세를 유지하며 흐트러짐이라곤 전혀 없을 듯하다.
천관산의 올곧음은 전설과 기록에도 언급된다.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사실상 역성혁명을일으킨 이성계는 전국 명산의 산신들에게 자신의 혁명을 지지해달라고 부탁하고 다녔다.
“나는 지지할 수 없다.”
다른 산의 신들은 이성계의 혁명을 전폭적으로지지했으나 천관산의 산신은 거부하였다.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천관산을 흥양(현재의 고흥)으로 귀양 보냈다.산으로서 흔치않게 귀양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지금도 간간이 천관산을 흥양의천관산으로 적은 기록들이 나온다고 한다.
“이성계가 승자로서의 아량은 지니지 못한 인물이었군.”
천관산이 귀양을 간 고흥과 완도일대의 다도해 섬들과 영암 월출산이 눈에 잡힌다.맑은 날엔 남서쪽 중천으로 한라산이 보인다는데 오늘은 그만큼 맑은 날은 아니다.대신 담양 추월산과 인사를 나눌 수 있어 좋다.먼 산들에서 시선을 당겨 천관산 사면을 타고 정상 쪽으로 고개 숙인 억새물결에 눈길 멈추자 계절마저 심하게 일렁이는 것만 같아 현기증이 인다.
연대봉 바로 아래에는‘벼락이 머물다 간 자리’라는 제목으로 석비가 세워져있다.이 자리는 전투경찰115부대가 세워져 본부와 해안초소 간 통신을 중계하던 곳이었는데1976년5월7일 새벽녘 경계근무 중 벼락을 맞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대원을 기린 석비이다.그 기적의 사나이들인 세 명의 전투경찰대원 이름이 석비하단에 적혀있다.
‘천둥벼락에도 꿋꿋이 살아남은 이들처럼 사나운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억새처럼 험난한 세파에 좌절하지 않고 오늘도 힘차게 전진하면 어떠리.’
이렇게 마무리한 석비의 글을 읽으면서 역시 올곧고 강인한 천관산을 거듭 되새기게 된다.
천관산의 슬픈 억새울음을 들으며 글공부를 했던 소설가 한승원은 억새울음에서 영감을 받아‘아제아제 바라아제’를 탈고한다.또 이청준의‘이어도’, ‘당신들의 천국’은 장흥을 문향의 고장으로 새겨지게 하였다.저 아래 해안마을이 이들 두 소설가가 태어난 곳이다.그들은 장흥포구에서,천관산에서 많은 문맥을 창조해냈으리라.
하산은 황금색 평야와 바다를 앞에 두고 걷게 된다.바위 부스러기부터 갖가지 모양의 바위들이 능선주변에 늘어서서 오가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한다.
넓적한 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듯한 정원암을 지나자 높이15척에 이르는 양근암이 나타난다.거대한 남근형태의 양근암이 음근암이라 할 수 있는 건너편 금강굴과 마주보고 서있으며 이런 자연의 조화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쓰인 팻말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마치 월출산 남근석과 베틀굴을 묘사한 내용인데 어디가 창작이고 어디가 패러디한 것인지 궁금해진다.아무튼 이 바위를 지나면서 경사가 급하게 꺾인다.야트막한 산을 담벼락처럼 끼고 황금들녘을 앞마당 삼은 장흥 읍내가 다소곳 평화롭다.
산에서 내려서면 우람한 효자송의 자태가 걸음을 멈춰 서게 한다.곰솔 혹은 해송이라고도 부르는 효자송은 커다란 파라솔을 펼쳐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높이가9m이고 줄기밑동의 둘레가3.8m,윗부분 너비는 동서20m,남북26m에 이른다.
높이에 비해 수평으로 넓어 반송盤松같은 느낌을 준다.이 마을에 살았던 위윤조(1836년생)라는 사람이 밭농사를 많이 짓는 부모님의 휴식처로 삼기 위해 심었다니 수령150여 년은 족히 되었을 걸로 추정하게 된다.
많은 것들을 보여준 천관산이다.정겨운 고장,여름 물 축제를 할 즈음 가족들과 다시 와보고 싶은 장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