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통영시의 한산도에서 사천, 남해 등을 거쳐 전남 여수에 이르는 50해리 남해의 물길로 5백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잔잔하고 푸른 바다위에 떠있는 물길 3백리의 청정해역을 일컬어 한려수도閑麗水道라고 부른다.
국내에는 경남 통영시, 경북 울릉도, 전북 익산시, 강원도 원주시에 같은 한자어를 쓰는 네 곳의 미륵산彌勒山이 있다. 이중 통영의 미륵산은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아름다운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등 경관이 아름다운 점 등을 고려하여 산림청이 100대 명산으로 지정한 바 있다.
통영시 남쪽 미륵도 중심부에 솟아 장차 미륵존불이 강림할 곳이라고 하여 미륵산으로 명명되었다고 하는데 용화사와 관음사, 미래사 등 이름에 걸맞은 여러 사찰이 있다.
사량도 지리산행을 마치고 다음날아침 사량도에서 통영으로 건너와 미륵산을 찾았다. 떡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서울에서 먼 거리의 통영에 마침 미륵산이 있어 거기 올라 한려수도를 내려다보기로 한 것이다.
국립공원 100경 중 최우수경관을 볼 수 있는 곳
용화사광장에서 미륵산 등산안내도를 살펴보고 출발한다. 용화사로 가는 넓은 도로를 비켜 왼편 숲으로 들어서면 편백나무 높게 뻗은 오솔길이 평탄하게 이어진다. 넓은 잔디밭인 띠밭등은 통영지역 학생들이 소풍을 오곤 하던 장소였다고 한다.
띠밭등에서 100여m를 지나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좀 더 오르면 미륵산 정상을 500m 남겨둔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부터는 거친 바윗길 오르막이 계속되는데 정상을 오르는 가장 짧은 코스인 만큼 가파름이 꽤나 심한 편이다. 정상 바로 아래의 70m 계단에 이르러 한려수도가 펼쳐진다.
2008년 3월 1일에 설치했다는 케이블카는 관광 상품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처럼 보인다.
“서울의 남산보다 바쁘게 운행하는 것 같네.”
“설악산 권금성보다도 많은 거 같아요.”
“그만큼 볼거리가 많다는 거겠지?”
한려수도를 제대로 내려다보고픈 생각에 내처 정상(해발 461m)까지 올라선다.
1968년 해상공원으로는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한려해상국립공원은 거제해금강지구, 통영·한산지구, 사천지구, 남해대교지구, 상주·금산지구, 여수·오동도지구 등으로 구분되는데 지금 통영·한산지구를 발아래 두고 있는 것이다.
통영시 일부지역과 한산도를 비롯한 미륵도, 추봉도, 죽도, 용초도, 선유도, 도곡도, 연대도, 비진도 등을 포함한 지역으로 자연경관이 수려한 건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임진왜란당시 이순신 장군의 전승기념물이 산재해 있는 역사유적지이기도 하다.
앞바다에 묵연히 시선을 담그자 그 위로 불길이 치솟는다. 왜선 60여척이 불에 타고 아비규환의 왜군들이 바다로 뛰어든다. 행주대첩, 진주성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으며, 명량대첩, 노량대첩과 함께 이순신 장군의 3대첩에 속하는 한산대첩의 장면들을 상상하면 형언키 어려운 감명에 사로잡히다가 불뚝 자존감이 세워지는 걸 의식하게 된다.
세계 해전사에 가장 위대한 승리로 평가하는 세계 4대 해전을 보면 기원전 492년, 그리스와 페르시아간의 살라미스Salamis해전, 1588년 스페인함대가 영국을 침공한 칼레Calais해전, 1805년 영국을 침략하여 영토를 넓히려던 프랑스 나폴레옹의 트라팔가르Trafalgar해전과 임진년인 1592년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을 꼽는다.
삼도수군三道水軍의 본영인 한산도는 충무공이 9000명의 왜병을 수장시킨 한산대첩의 교전장으로 이충무공 유적(사적 제113호)이 있고 이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와 한산대첩기념비, 대척문, 충무문, 행적비 등이 있다.
“가벼이 움직이지 말고 절대 산처럼 침착하고 무겁게 행동하라.”
이순신 장군이 부하들에게 했던 말이다. 왜군과의 교전에서 자칫 경솔하게 대응했다가 패배할 것을 우려했을 테지만 장군은 산처럼 이란 말을 써서 전투에 임하는 자세를 강조했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저 아래 한산도에서 틈틈이 여기 미륵산을 올랐을 거야.”
산에서 깨우침을 받아 바다를 다스려 승리를 취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미륵산에서 바라보는 한려수도는 국립공원 100경 중 최우수경관으로 선정된 바 있어 더더욱 늘어난 등산객과 케이블카승객들로 정상일대는 이만저만 분주한 게 아니다.
많은 섬들과 그 사이의 푸른 물길, 간간이 떠있는 범선 몇 척과 풍만하게 살진 뭉게구름들이 한려수도의 명성에 어긋남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본 대마도가 보일 만큼 청명하지는 않지만 시선이 닿는 곳마다 눈길이 멈춰진다.
“역시 바다는 산에서 볼 때 더욱 아름답지요?”
“이곳 바다는 특히 그렇지.”
봉수대와 그 아래로 한려수도가 보인다
정상 조금 아래로 봉수대 터가 있다. 경상남도기념물 210호로 지정된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한 일종의 통신수단이었다.
고려 말 최영 장군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사와 백성들을 동원하여 축성했다는 산성인 당포성터(경상남도지방기념물 제63호)도 인근에 있으니 이 지역도 그 옛날 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어 급박하게 대비했던 곳임을 실감케 한다.
통영이 배출한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의 묘소가 인근에 있다. 전망쉼터에서 선생의 묘소를 내려다보며 마음을 바르게 세워보려 한다. 그러면 세상이 다 보인다고 선생은 그녀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서 표현했었다.
마음 바르게 서면 세상이 다 보인다.
빨아서 풀 먹인 모시적삼 같이 사물이 싱그럽다.
마음이 욕망으로 일그러졌을 때 진실은 눈멀고
해와 달이 없는 벌판 세상은 캄캄해질 것이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욕망 무간지옥이 따로 있는가.
권세와 명리와 재물을 좇는 자
세상은 그래서 피비린내가 난다.
사람의 사사로운 욕심을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비견했는데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공감하게 된다. 통영상륙작전 전망대에서 한국전쟁당시 해병대의 상륙작전 전과와 귀신 잡는 해병의 유래를 읽고 한산대첩전망대인 케이블카승강장 지붕으로 내려선다. 한려수도가 더욱 가까이 내려다보인다.
한산도와 멀리 거제도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 땅 끝에서 돌아서기 싫어라
용화사광장으로 내려가다가 미래사와 갈라지면 미륵치라는 곳에 이르게 된다. 인근의 현금산, 야소골, 박경리 묘소와 용화사방면으로 길이 나뉘는 지점이다.
용화사 쪽으로 800여m 아래에 또 다른 사찰 관음사가 있고 조금 더 내려가다 보면 산자락이 깎인 터에 거북등대 모형이 세워져 있다.
한산도 가는 길목 제승당입구 바다암초 위에 세운 거북등대의 원석을 여기서 채취했다고 적혀있다. 거북등대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만든 거북선을 기리고 한산만으로 입항하는 배들이 항로를 찾게끔 1963년에 준공하였으며 한산대첩의 배경지에 있는 거북등대 실물의 3분의 1 크기로 조형물을 제작한 거라고 한다. 역시 통영은 이 충무공의 충절과 구국의 혼을 그 어느 곳보다 높이 기리는 도시라는 걸 거듭 인식하게 된다.
내려와 용화사에서 올려다보는 미륵산이 정겹다. 다시 또 온다고 장담할 수 없기에 한려수도의 보루인 미륵산을 재차 올려본다. 미륵산에서 내려와 서울로 향하기 전에 다도해와 낙조의 조망처로 유명하다는 달아공원에 잠시 들렀다. 주변에 10년생 동백 1000그루를 심어 자연과 인공이 조화되는 경승 1번지로 가꾸고 있다는데 한려해상국립공원을 조망하기에 뛰어난 곳이다.
관해정이라는 정자를 비껴 바다 쪽으로 조금 더 나가면 그야말로 땅 끝에 선 기분이다. 이름을 지니지 못한 작은 바위섬에서부터 장재도, 저도, 송도, 학림도와 멀리 욕지열도까지 수십 개의 섬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도해풍경을 한 폭 그림으로 감상하는 순간이다.
달아達牙라는 명칭은 지형이 코끼리의 아래위 어금니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는데 지금은 달구경하기 좋은 곳이라는 쉬운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동양의 나폴리라고도 일컫는 도시, 통영. 잠시 들렀다가 떠나면 훌쩍 등 돌리는 것만 같아 올 때마다 아쉬움 고이는 곳이 통영이다. 볼거리, 먹거리가 풍부하고 역사와 문화가 깊숙이 고여 있는 통영은 떠나와서는 다시 갈 구실을 만들게 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