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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카페 게시글
영남문집해제 영남문집총목 7. 직양재`~희재집
낙민 추천 0 조회 321 16.09.14 13:59 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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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1.03.22 22:17

    첫댓글 선생님!
    8.1976 평암(平菴)이 경 (李 經)1852(철종3)~1978 의령 행정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상부(尙夫)

    졸년이 1978인데요 오타난것 같아요

  • 21.03.29 22:59

    선생님!
    1976 평암(平菴)이 경 (李 經) 1912~1978 의령 행정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상부(尙夫)
    생년과 졸년이 잘못된것 같아요

  • 작성자 21.03.30 08:50

    1852 - 1918이 맞는것 같습니다 1갑자를 잘못 아신듯 합니다.

  • 21.08.28 19:55


    29세 平菴公(평암공) 휘 經(경, 1912~1978)
    공의 휘는 경(經)이요, 다른 한편으로 남기(南基)라고도 했다. 자는 상부(尙夫)이고, 평암(平菴)은 號이다. 공의 부친은 행산공(杏山公) 휘 태원(泰元)으로 일찍이 자동 선생을 따라 배웠다. 임자(1912)년 10월 13일 누대로 살아온 집에서 태어나니, 용의(容儀)는 단아하고, 성품은 강직하였더라. 어려서 친구들과 노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고, 언동의 나고 듦에 조리가 있어 보는 이마다 중히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당숙인 수산공에게 배움에 스승은 하루에 천자문 수십 줄을 훈독하기 기다리지 않았으나 스스로 암송하여, 수산공께서 가문을 추락시키지 않을 것이라 기대하였다고 한다. 약관에 육경(六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 서적을 두루 익히니 뛰어난 명성이 이미 사림에 떨쳤다.
    또한 창계(滄溪) 김선생 수(銖)를 찬양하여 고문에 치력(致力)함에 당송은 물론이고 명나라와 청을 아우르고, 우리 나라의 제가(諸家)에 강구(講究)하여 논리의 정당함과 사장의 미려함이 스승 문하의 칭찬을 받았다. 중년에 스승인 창계공이 별세하니 다시 중제(重齋) 김선생 황에 학문을 의탁하였다. 만년에 수유당(收揄堂)을 지어

  • 21.08.28 19:59

    벽이 차도록 책을 벗 삼아 한가히 스스로를 즐기었다.
    특히 촉석루 삼장사에 관한 기록은 문헌마다 차이가 있어 영조실록의 기록 이래로 분쟁이 있어 왔다. 즉 삼절사(三絶士)와는 구분되는 개념이다. 이것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은 듯하다. 이에 공은 선현의 문집 중에 근거를 찾아 마침내 1963년 국사편찬위원회의 유권해석과 경상남도지사의 허가를 받아 촉석루 경내에 촉석루삼장사기실비(矗石樓中三壯士記實碑)를 건립하였다.
    또한 이의정(二宜亭)은 조선 인조 때 허목(許穆)이 지은 누정이다. 허목선생은 특히 병자호란 때에 9읍 의병장을 지낸 괴당선조와 깊은 우정을 나눈 분인데, 송암공의 행장을 지은 분으로 유명하다. 평암공은 이 이의정의 토지를 환원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함은 물론 허목선생의 영정을 모신 곳을 도강(道江)이라 하는데 시비를 바로 잡은 바도 있다.
    정의공 송암 이로의 용사일기는 의병들의 활동과 관군, 그리고 백성들과의 상관성을 유기적으로 요령 있게 기록해 놓았다. 특히, 임진년 4월 왜란이 일어난 뒤부터 약 15개월간의 전쟁 상황이 매우 자세하고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일기문학으로도 백미의 작품이라 할

  • 21.08.28 20:02

    할만하다. 임진왜란 첫해와 이듬해까지 경상도 일대의 전황을 적은 아주 귀중한 사료로서 1762년에 목판으로 간행된 바가 있다.
    왜란 이후 근 400년이 지나는 1977년에 이르러 용사일기의 내용이 자기 조상의 허물로 만대에 전해질 것을 우려하여 김인환이라는 자가 용사일기변와록(龍蛇日記辨訛錄)을 지어 역사를 왜곡하고 후생 사람들을 현혹시켜 국가적인 물의를 빚게 하므로 이에 평암공은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고 변백하여 변와록의 오류를 막고자 응변록(應辯錄)록을 저술하였다.
    하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78년 졸하니 집안의 인기(仁基)가 완성하였다. 또한 고성이씨 35세인 단하 이유립이 국역하여 세상에 원고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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