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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빌립보서 2장 19~30절
제목 :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지난 한 주간에는 많은 비가 왔습니다.
폭우로 인하여 많은 재해를 당하였습니다.
특히 서울 서초구 우면산은 저의 집이 서초구에 서초동에 있어 가끔 등산을 하였던 곳이라서 더욱 관심을 갔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 그런 재난이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 할 곳입니다.
도로 건너편 아파트 까지 덮쳐서 인명을 아사 갔습니다.
천재다. 인재다. 논란이 많지만.
우리는 참으로 불완전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언제 어느 때에 재난이 닥칠지 아무도 예측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하나님이 오라하면 가면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께 자랑거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은
첫 번째, 항상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워야 합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서 살아가게 됩니다.
네 번째, 원망과 시비가 없어야 합니다.
다섯 번째, 세상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야 합니다.
여섯 번째, 자랑할 것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본문을 통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 바울은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교인들은 바울을 돕기 위하여 열심히 힘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영적인 지도자가 없음으로 인한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오른팔 격인 디모데를 그들에게 파송할 계획과 함께 옆에서 수종 들어주던 에바브로디도 까지 빌립보 교회에 보내고자 하는 바울의 계획을 접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둘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9~24절까지는 디모데를 빌립보교회에 보내려는 계획 에대해서,
25~30절은 에바브로디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디모데를 보내려고 함.
바울은 디모데를 그들에게 보내고자하는 목적을 말합니다. 19절입니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를 보내려 하는 이유는
1) 빌립보교인들에게 바울의 소식을 알려 줌으로 그들의 근심을 덜어주고자 함이고.
2) 또한 디모데를 통하여 빌립보교인들의 소식을 듣게 됨으로 바울 자신이 안위를 받고자 함이 이었습니다.
디모데는 바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여러분도 그와 같이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바울 사도가 볼 때 빌립보교회의 사정을 아는 사람은 디모데 밖에 없었습니다.
20절입니다.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는 주안에서 바울과 뜻을 같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뜻을 같이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 하나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15:4절에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찬송가 370장입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짐을 풀었네
-그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내 주는 자비하셔서 늘 함께 계시고, 내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주시네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불변하시니, 그 나라가기 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그리고 디모데는 주님 앞에서 쓰임받기에 아주 적임자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일에 진실 했으며 순종과 겸손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강한 도전을 주는 말이다. 여러분도 그와 같은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직장 실화: 사람을 찾을 때 없다.
바울은 디모데의 믿음을 보고 선택하였다고 말씀합니다. 21~22절입니다.
“[21]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믿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디모데가 자기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디모데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바울과 함께 헌신했습니다.
즉, 디모데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을 위하여 도중에 복음사역을 던지고 가버렸을지라도 그는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고 여러 가지 환난과 고통을 견디면서 복음을 위해 앞장섰던 것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을 자식이 아비를 섬기듯이 섬겼고 주안에서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체험한 사람은 주의 종을 사랑하고 따라갑니다.
내가 혹시 세상의 일에 빠져 주님의 일을 등한시 여기고 있지 않나 항상 점검해 보고 살펴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재판이 임박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재판이 어떻게 판결이 났는지를 디모데를 통해 빌립보교인들에게 알려주기를 원했습니다. 23~24절입니다.
“[23]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24]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어두운 감옥에 앉아 있어도 그는 늘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주님 때문에 감옥에 앉아 있어도 주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을 더욱 신뢰하고 있는 바울의 믿음을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수족을 잘리우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러한 고통을 당하게 하신 그분을 원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은총을 찬양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고난 중에 비록 앉아 있을지라도 그곳에서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 하노라”
즉,"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겠노라 !"하는 고백입니다.
“어떤 염려와 근심의 감옥에 내가 앉아 있어도 나는 주안에서 자유를 누릴 것을 확신하노라” 할렐루야 !
우리 주님은 극심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불쌍한 죄인 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끝내 십자가를 내려놓지 않으셨습니다.
포기 할 수 없는 이유는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
우리가 고난 중에도 소망을 잃지 않고 주님을 오히려 찬송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2. 에바브러디도를 보내려 함
이제 바울은 디모데를 그들에게 보내기에 앞서 먼저 에바브로디도를 돌려 보내기로 작정합니다.
[빌립보교회]
빌립보 교회는 참으로 온전한 사랑의 교회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행동이 있고, 희생이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 아주 적극적이었습니다.
지금 바울이 어디에 있습니다. 감옥에 들어서 옥중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서 한없이 고생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떨어져 있으나 당하는 고난과 아픔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거리는 먼 거리에 있지만 하나님과 저희들과의 관계는 조금도 먼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주님과 바울과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하나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마음의 사랑, 기도의 사랑, 협력하는 사랑, 물질로 돕는 온전한 사랑의 사람들이였습니다.
마음대로 출입 할 수도 없고, 돕는 자가 없는 사정이기에 빌립보 교회성도들은 의논을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종과 같이 행동할 수 있겠는가?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돈이 필요하지!
저희들은 예물을 모았습니다.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돕는 사람의 손길 이었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행동의 자유가 없으니 필요한 물건을 구입 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돕는 자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기로 결정을 하고 누가 갈 수 있겠느냐? 했을 때,
에바브로 디도라는 사람이 바울에게 가기로 결단을 했습니다.
에바브로 디도는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위해 파송한 평신도 대표가 되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하나님을 사랑했고, 복음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일하는 바울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 간다는 것은 목숨을 건 것입니다.
내가 살아도 바울과 같이, 내가 죽어도 바울과 같이 라는 이런 사생결단을 하지 않으면 그때 당시 빌립보에서 로마로 갈수가 없고,
가서도 바울과 같이 지낼 수가 없는 사정입니다.
그런 가운데 사생결단을 한 사람이 에바브로디도 입니다.
에바브로 디도는 고난도 함께, 죽어도 함께, 눈물도 함께하며 자신도 옥중생활을 하리라 라는 결단을 하고 떠났습니다.
마침 로마는 고질적인 열병으로 인해서 그때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지경에 있었습니다.
지금 아프리카에 갈 때는 미리 예방 주사를 맞고 간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 말하자면 옛날의 허열자와 같은 것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로마에는 이 고질적인 열병들이 많아서 면역성이 없던 타 지역 사람들이 오면 죽기 마련이고, 또 병이 들어 한 없는 고생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지 못했던 에바브로 디도는 이 로마에가서 그만 고질적인 열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에바브로 디도는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27절)
이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회는 기도의 제목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바울 사도를 위하여 기도하던 그들은 에바브로 디도를 위해서도 또 기도하게 되는데, 차라리 옥중에 있는 바울보다 이 열병에 걸려 고통당하는 이 에바브로 디도가 더 걱정스럽습니다.
그래서 한없이 기도합니다.
바울 사도도 이를 위하여 기도를 합니다.
오히려 위로자로 갔던 자가 위로를 받게 됩니다.
짐을 풀어주려 갔던 자가 짐을 지우는 경향이 되고 말았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물론이요, 바울 사도도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한 결과
에바브로디도가 그 열병에서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인들은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그러나 또 걱정이 앞섭니다.
또 재발하면 어떡하나!
정말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얼마나 근심하겠는가! 얼마나 걱정하겠는가!
속히 에바브로 디도를 빌립보에 보내는 것이 더 유익하겠구나!
그래야 내가 “나를 위하여 근심하며 애타게 부르짖는 빌립보 성도들의 마음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것”이 나의 할 바라 결정을 하고, 에바브로 디도를 빌립보 교회로 다시 돌려보내는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25절입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에바브로디도는 1) 나의 형제요, 2) 함께 수고하는 자요, 3) 함께 군사 된 자요, 4) 너희 사자요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나의 형제요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에바브로디도를 나의 형제라고 소개합니다.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의 피로 다시 태어난 자들이기에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제라고 말합니다.
형제라는 말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높고 낮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 안에서, 사회에서 높은 자는 낮아지고, 사회에서 낮은 자는 높아져서 평행을 이루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도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도 하나님 아버지! 손자도 아들도 다 하나님 아버지!
교회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는 낮아지는 곳이고, 손자는 높아져서 평행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다 나의형제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교회의 모습이 오늘날 이 현실 속에서 나타나야 됩니다.
천한자라고 하는 사람은 귀한자로 높아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귀한자라고 뽑내는 사람은 낮아져서 그 사람과 평행을 이루고 나란히 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 예수의 형제입니다. 그래서 높은 자는 낮아져야 됩니다. 사회에서 낮은 자는 귀한자리로 올려 드려야 됩니다.
대접을 해드려야 됩니다.
섬김을 좀 받도록 해드려야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마태복음 23장 8절에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말씀 했습니다.
누가 형제입니까?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내 형제들이라고 예수님은 말씀 했습니다.
둘째는 함께 수고하는 자입니다.
이는 동역자이라는 말입니다.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동역자!
교회는 목회자와 동역자들이 많은 것이 특징입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는 목사에 그 동역자들이 많아서 하나님의 교회는 잘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교회보다 잘되는 사회단체가 없습니다.
그것은 목사가 잘해서가 아닙니다. 동역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교회의 무거운 짐들을 지고 가는 목회자의 동역 자가 많이 있는데, 이들이 많을수록 하나님의 교회는 잘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와 하나 된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역자들 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동역자입니다.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그대들은 나의 동역자라!
마10:42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내가 에바브로 디도를 너희에게 소개하노라 그는 빌립보에서나 로마에서나 나의 형제요 나와함께 수고한자라, 나의 동역자라고 하였습니다.
셋째는 함께 군사된 자입니다.
여러분! 나아가서 바울이 말하기를 그는 나의 군사라!
생사를 나와 같인 한자라!고 소개합니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그리스도와 함께 된 군사라!라고 소개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함께 군사된 자였습니다.
넷째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자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말하기를 에바브로 디도는 나의 협력자라! 라고 했습니다.
먹어도 같이 먹었고, 굶어도 같이 굶겠다고하는 협력자 입니다.
여러분들이 물질을 모은 것도 고맙지만, 그물질을 짊어지고 로마까지 와서 목숨을 걸고 찾아온 그는 정말 그리스도의 협력자라고 말씀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이 본문 말씀에 있는 말씀과 같이,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형제요, 바울을 위하여 수고한 동역자요,
바울의 군사요, 바울의 협력자였습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요,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요, 예수 그리스도의 동역자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도 함께하고 죽어도 함께하는 하나님과 하나 된 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되어 바울처럼, 에바브로 디도와 같이 되기를 축원 합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일컬어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라고 말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에게 항상 위로와 평안을 끼치는 즉 순종하는 성도였고 주안에서 같은 마음으로 열심을 내었고,
어려움이 있을 때 그것을 피해 도망가지 아니하고 함께 고난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에바브로디도도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26절입니다.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고 말씀합니다.
3. 에바브로 디도의 아름다운 신앙
에바브로 디도가 바울을 도우려 로마에 왔으나 죽을병에 걸리게 되어 너무 미안해 했습니다. 26절입니다.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고 하였습니다.
에바브로디도의 아름다운 신앙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항상 남을 생각하고 걱정해 주는 마음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성도간의 사랑과 우정이 듬뿍 담겨있는 정감어린 말씀이 아닙니가?
빌립보교인들이 바울을 인하여 근심하고 있는 그런 와중에 자기까지 병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져 빌립보교인들의 근심을 더 가중시켰다는 것 때문에 에바브로디도는 더 근심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결국 그분을 못 박고 말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런 고통의 와중에서도 불쌍한 우리들이 지옥에 가 고통 받을 것을 생각하시며 불쌍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와 같은 마음을 품고 살아야합니다.
바울은 그러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항상 남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고전8:13절에 보면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로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고기 먹는 것이 죄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누가 시험에 들면 자기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잘못도 없는데 왜 그러냐고 소리소리 지르는 우리와 얼마나 대조적입니가?
잘못은 없지만 어떤 일로 인하여 누가 실족했다면 그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진심으로 통감할 줄 아는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성도입니다.
27절입니다.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중한 병에 걸린 것 때문에 빌립보교인들은 물론이요 바울에게도 큰 근심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교인들과 바울은 빌립보에서,
그리고 감옥에서 에바브로디도가 속히 나을 것을 기도했을 것입니다. .
그들이 근심했다는 것은 사랑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가 병에 걸렸다면 어떻게 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그러한 기도는 하나님을 감동시켰다.
첫째는 에바브로디도의 죽음을 무릅쓴 헌신과
둘째는 그를 사랑하여 걱정하는 마음으로 기도했던 바울과 빌립보교인들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치료해 주심으로 그들의 근심을 덜어 주셨습니다.
성도간의 중보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가 걱정해 주고 내 일처럼 가슴아파하며 기도해 줄 수 있는 자가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겠는가?
28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고하였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병에 걸린 후 깊은 근심 중에 그를 위해 기도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그는 빌립보교인들에 대한 사려깊은 사랑을 나타냅니다.
멀리서 근심하고 있을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하고 그가 나았다는 소식을 다른 인편으로 전하는 것 보다는 건강한 에바브로디도가 직접 가서 보여줌으로 그들의 기쁨을 한층 더 높여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를 속히 보내고자 한 것입니다.
그가 떠나가면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불편하고 외로울 것인가를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빌립보교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기를 그는 더 원했던 것입니다.
하반절에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근심은 오직 성도를 인한 것이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어찌 남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가?
그러나 바울은 자나깨나 예수 그리스도 뿐이었고, 주안에서 맺어진 성도들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교인들을 사랑했던 그 애틋함에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주의 종으로써 나도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부족한 종을 위해 항상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만 생각하는 주의 종이 되도록 나는 힘을 쓸것이지만 그러나 여러분의 기도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29절입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 교인중에는 에바브로디도가 예정보다 빨리 돌아오는 것에 대해서 자기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고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울이 이러한 배려를 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을 돕기 위해 파송된 사람입니다.
그러한 그가 일찍 돌아온다면 그것도 병에 걸렸다가 돌아오게 되는 그를 보게 되면 평소에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들이나 사정을 잘 알지 못하고 오해함으로 빚어질 일에 대해서 바울은 걱정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임무에 대한 성실성을 앞에서 피력한 뒤 이제 30절에서 그 확고한 이유를 말합니다. 30절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일하는 사람을 격려하고 기도해 주고 도와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를 존귀히 여겨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기까지 충성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나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하지 못합니다.
오늘 에바브로 디도 처럼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음도 불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려워 하지 않고 주님을 믿고 나가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계시록 2:10~11절에서 “[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달려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품고 살므로, 그 사랑을 잊지 않고 그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길만이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사는 길입니다.
잠언4:8~9절을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8]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9]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과 같이, 디모데와 같이, 에바브로디도와 같이,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온 힘을 다하므로 아름다운 면류관, 영화로운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